2021년 12월16일 서울 명동 세종호텔 정리해고 6일차, 로비 농성장을 찾았습니다.

조합원 교육을 요청받은 권영숙 대표가 “코로나19노동재난, 호텔업종 산업 재편, 노동자투쟁의 방향과 전망”  이라는 주제로 1시간여 동안 강의를 했습니다. 한 명을 제외한 조합원 전원이 모인 가운데, 먼저 2012년 1월 희망뚜벅이와 세종호텔 파업에 대한 ‘투쟁의 기억’을 공유하면서, 투쟁의 기억을 공유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로부터 얘기를 시작했습니다.

이어 1. 노동자와 파업, 2. 호텔업종 ‘산업재편’과 세종호텔 노사관계에 대해서 얘기하고, 코로나19 국면이 문제의 시작이 아니라, 이미 10년간 진행해온 노조 말살과 구조조정의 최종판을 만드는 것일뿐이라는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2012년이후 온갖 노동 유연화의 백화점, 혹은 구조조정의 실험실같은 세종호텔 노사관계 속에서 노조는 계속 후퇴했고,지금 여기까지 이른 점에 대해서 뼈아픈 통찰이 필요하다는 것도 덧붙였습니다.  마지막으로 ‘투쟁의 전략’에 대한 다양한 얘기를 했습니다. 이 시간이 막 정리해고 철회투쟁에 들어선 세종호텔 조합원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권대표는 말했습니다.

세종호텔노조 농성장에 대한 물품연대도 준비했습니다. 가스난로, 핫팩 2박스, 크리스마스 기분을 낸듯 포장한 빨간색 무릎담요를 준비해 갔습니다. 바로 오늘 영하로 곤두박질친 날씨 전에 가져가서 다행입니다. 10주년에 연대자가 후원요리로 가져왔으나 뒤풀이 취소로 사용하지 않은 전남 특산 홍어무침에 보쌈을 준비해서 저녁을 함께 했고요.

이어 세종호텔앞 피켓팅을 함께 했습니다. 우렁찬 구호로 가끔 전철역에서 쏟아지는 이들과 세종호텔 관리자들을 놀래키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세종호텔 투쟁에서 가장 중요하게 자리잡을 ‘목요집회’에 함께 했습니다. 낮에 날씨는 포근했으나 다음날의 한파를 예고하듯 은근 냉한 날씨였습니다.

이제 겨울, 본격적인 ‘동투’의 계절입니다.
핫팩으로 중무장하고, 겨울에도 쌩쌩한 투쟁을 할 수 있길 바랍니다.
나날이 더 많은 연대자들이 집결하기를 바랍니다.

추위보다 더 서늘하게,
자본의 심장에 더 서늘한 바람이 불게 하길 바랍니다.
모두 연대로! 건투!

2021.12.17.
사회적파업연대기금

연대자 여러분께:

사회적파업연대기금 10주년 행사 “연대와 후원의 날”을 2021년 12월11일 잘 마쳤습니다.

2011년 7월17일 권영숙 제안자가 페이스북에 첫 제안을 올렸고, 단체 발족일은 첫 입금이 들어온 7월22일로 삼습니다.
올해 7월에 해야할 기념행사를 두 차례 연기하여, ’10주년’안에 기어코, 사파의 모토대로 “말이 씨가 되고 행동이 되어” 끝낼 수 있어 다행입니다.

얼마나 많은 우리들의 의미있는 시간이 코로나19 전염병과 방역통제로 ‘격리’되고 ‘저당’잡혀야할까요? 전염병을 사회적 재난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전염병이 도는 사회입니다. 코로나19 속에서 우리 사회의 민낯은 재난에 맞서는 합의와 제도의 부재, 그리고 위로부터의 통제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여하튼 끝까지 잘 마쳤다는 사실을 위안으로 삼겠습니다.
행사도 짜임새 있었고, 현장 분위기도 좋았다고들 하시니 더욱 좋습니다.
연대자와 민중가수들이 함께 펼친 공연은 감동적이었습니다.
“사파 10년의 행로”에서 제안문을 다시 낭독했고, 10년동안의 기금활동을 총결산하며 기금조성과 기금지원내역을 알렸습니다.
기금 지원으로 연대했던 노조와 단체 50여곳중 대략 15곳이 축하동영상과 편지, 그리고 현장 발언을 통해서 “다시 한마디” 메시지를 보내왔습니다.

10주년 이후 앞으로 어떻게 ‘연대’에서 ‘동맹’으로 라는 이 어려운 숙제를 풀어갈 것인가?
이도 연대자 여러분과 함께 머리 맞대고, 힘이 많든 작든 손발 맞춰가면서 더불어 할 수 있길 기대합니다.

고마웠습니다.
연대자 여러분이 없었다면 쉽지 않았을 일이에요.
앞으로도 계속 애정으로 함께 해주시고, 어디선가 사파에 무슨 일이 생기면, 달려와주세요.

그리고 단체재정 후원 캠페인은 쭉 계속 합니다.
사파기금이 필요한 시간동안 여러분의 힘을 모아주시길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2021.12.14.
사회적파업연대기금 대표 권영숙 드림

“모든 파업은 사회적…사회적 파업기금이 필요한 이유”

발족 10주년 맞은 사회적파업기금 권영숙 대표 인터뷰

“쉽지 않은 시간이었어요. 이루고자 했던 목표와 지키고자 했던 약속은 변함없었지만 10년의 결과물은 충분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이 부족함을 반성하고 어떻게 채울 것인가가 과제죠. 우리의 목표는 한 달 1만 명이 1만 원으로 1억 원의 사회적 파업기금을 모으는 것이었습니다. 사회적 파업과 연대에 동의가 되는 사람이 1만 명이 있다는 것은 노동자에게 불리한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 잡을 수 있다는 것이고, 그래서 노동을 배제하는 민주주의를 바꿀 수 있다는 것, 체제를 바꿀 수 있다는 것으로 나아가는 기초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모이는 기금의 상황을 생각하면 아직 멀었네요.(웃음)”

-2011년 2차 희망버스를 다녀온 후 사파기금 제안서를 페이스북에 올렸습니다. 당시 어떤 울림이 연구자에게 직접 행동까지 나서게 했나요?

“당시 제가 갖고 있던 문제의식과 한국의 여러 상황이 맞아 떨어졌어요. 노동자들의 고립된 투쟁은 ‘사회적 파업’ ‘사회적 연대’의 절실함을 불러일으켰고요, 또 ‘파업기금’을 선제적으로 조성하지 않는 한국의 상황에 쭉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었고요. 그래도 하나의 방아쇠가 있다면 그건 김주익일 겁니다. 그 사람이 유서를 세 번 쓰고 2003년 10월 죽었죠. 김주익이 유서에서 손배가압류 같은 돈의 문제와 노동자들이 고립됐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때 김주익이 올라간 상황에서 한진중공업은 150억 손배 소송을 걸겠다고 했었어요. 김주익은 계속 민주노동운동에 사회적 연대를 요청했는데 그게 사파기금을 만드는 힌트가 됐죠.

저 개인적으로는 김주익을 만나지 못한 게 참 안타까워요. 그때 유학하다 논문을 쓰려고 한국에 잠깐 들어와 있었거든요. 권영길 대표를 인터뷰하고 다음 날 현장 조사 차 부산 영도 크레인 위에 올라가 있다는 김주익을 보러 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그날 오전 권영길 대표한테 전화가 왔어요. 김주익을 보러 가는 길이었는데 그 사람이 목매 죽었다고요. 노동자들의 투쟁과 죽음이 연결돼 있다고 생각했죠.”

-파업기금을 따로 조성하지 않는 것을 한국의 상황이라 말했는데요, 특수한 상황입니까?

“노동운동사를 보면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든 건 결국 파업을 위해서거든요. 서유럽에서 노동조합이 근대적 발명품의 하나로 만들어졌을 때, 노동자들의 초점은 노조 결성보다 파업에 더 가 있었어요. 파업 기금을 조성해, 일정하게 돈이 모이면 파업을 시작하고 버티는 거예요. 지금도 조합비를 걷으면서 파업기금을 따로 걷고 있고요. 그런데 한국은 초기자본주의에서 노조를 만들 때와는 상황이 달라서 파업하지 않는 자본주의에 익숙해졌어요. 87년 노동자 대투쟁이 시작되고 대중적 노동조합 운동이 시작됐을 때도 파업하면서 임금을 받았거든요. 노자가 모두 파업에 대해 잘 몰랐어요. 87년 투쟁에서 노동자는 근로조건 향상에 집중했고, 자본가는 이에 대한 대응으로 사문화됐던 업무방해라든가 손배가압류를 들고나왔어요. 무노동·무임금은 그전까진 법으로 있지도 않았는데 법원이 먼저 나서 판례를 만들어줘요. 그리고 97년 노동법 개악할 때 국회에서 받아쓰죠. 노동의 사법적 통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노동법 개정이 이뤄지며 ‘무노동·무임금’이 법에 명시된 이후, 파업 중 개인의 생계는 노동자의 몫이 돼 버렸어요. ‘무노동·무임금’ 문제를 공동의 문제로 생각해야 하는데 자생적 파업 물결이 일어났고, 집단적이기보다는 개별적인 대응을 했죠. 그 과정에서 중소기업 노동자들은 개인적으로 손배가압류 당하고 이를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서 파업권이 무력화된 거죠.”

-김주익 열사의 죽음부터 사회적 연대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다고 하셨는데, 제안은 희망버스부터였어요. 희망버스는 사파기금에 어떤 영향을 끼쳤나요?

“희망버스는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현대적 흐름 중 하나입니다. 전태일의 ‘나에게도 대학생 친구가 있었더라면’이라는 소망은 연대에 대한 갈구였잖아요. 대학생 친구는 변호사 조영래로 나타났지만, 고립의 문제를 제기하고 연대를 요청한 거예요. 전태일의 요청에 한국 사회가 반응한 게 노학연대로 나타났어요. 많은 학생들이 평화시장으로 가서 싸웠고, 저 역시 그중 한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이후 노동자에 대한 사회적 연대는 없어졌고, 노동자들은 조합을 통해 스스로 자구책을 찾습니다. 스스로 조합주의를 강화한 면도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희망버스를 띄운 건 노학연대 이후 처음 이뤄진 사회적 연대 운동이에요. 희망버스의 발진을 이례적으로 둘 수 없어서 파업기금에 대한 문제의식과 연결해 사파기금을 생각했죠. 그때까지만 해도 10년 동안 운동이 이어질 거라고 생각 못 했어요. 계획적이거나 조직적이거나 목적의식적으로 시작한 건 아니었으니까요. 다만 손배가압류 때문에 파업을 접거나, 파업 기금 없이 파업하는 노동자들에 대한 연대와 사회적 안전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죠. 파업기금을 우리 손으로 조성하면 파업을 모두의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을까, 그렇다면 단지 연대가 아니라 동맹 세력이 구축될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그동안 어떤 사업장이 사파기금을 지원받았나요?

“전체적으로 세어보니 지원 횟수는 220회 정도 되더라고요. 500만 원 이상의 기금 지원을 산정하면 80여 회고요. 가장 힘든 비정규 정리해고 노동자투쟁 위주로 지원했어요. 그러나 노동자 투쟁만 지원하진 않았어요. 장애 운동 단체, 소성리 사드배치 반대투쟁, 이주노동자들에게도 지원했고요. 사회적 파업은 조직화된 노동자들을 넘어서 미조직 노동자, 권리 없는 노동자들까지 미쳐야 합니다. 가사노동을 하는 여성 노동자, 플랫폼 노동자, 교육의 대상이 되는 학생, 청년들 모두를 포괄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회적 파업기금을 설명할 때 ‘사회적’이라는 말에 더 방점을 찍기도 했어요. 하나를 위한 모두, 모두를 위한 하나라는 생각이 확산돼야 해요. 내 문제가 닥쳤을 때 연대하는 게 아니라 싸워야 하는 상황이 되기 전 사회적 연대로 다른 파업에 동참하고 연대하는 것이 필요해요. 노동자들에 대한 연대가 나를 위한 연대이기도 하는 생각들이 중요하죠.”

-연대자들은 어떤 사람들인가요?

“다양해요. 제가 노동자대회날 여의도에서 좌판 열어 정기후원 신청서를 혼자서 50장 받은 적이 있어요. 지나가는 사람 붙잡아서 파업기금 내라고 당당하게 말했고, 설득도 잘 됐죠. 비정규직 노동자들, 돈 없이 싸우는 것의 어려움을 아는 사람들은 길게 얘기를 안 해도 사파기금의 필요성에 대해 너무나 빨리 이해를 해요. 그런데 대기업 노조에 있는 사람들, 중산층들은 보다 긴 설명과 논리를 요구하죠. 그 사람들은 파업 기금이 없어서 파업 못 하는 게 아니거든요. 저는 투쟁하는 노동자들한테도 당신부터 사파기금 정기후원하라고 권하기도 했어요. 아주 짓궂은 거죠. 실제로 사정이 어려워서 못하는 사람도 많아요. 정기 후원이라는 게 부정기적으로 한 번씩 돈을 내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거더라고요. 그래서 더 사파기금이 쉬운 돈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죠.

투쟁하는 노동자들이 투쟁 속에서 연대의 중요성을 발견하잖아요. 그런데 투쟁이 끝나면 연대에 안 나서는 사람들도 많아요. 투쟁하는 노동자들이 연대에 대해 투쟁 승리로 갚겠다고 많이들 말하는데 이 말에 동의하지 않아요. 다른 문제의식을 필요로 하는 각각의 일들이거든요. 승리가 연대가 될 순 없죠. 연대는 연대예요. 지난 10년을 생각하면 뼈아픈 부분이기도 해요. 그 수많은 노동자 투쟁 이후 사람들이 남았다면, 그들이 또 다른 사회적 파업과 연대를 만들어 갔다면 하는 아쉬움이 들죠.”

-지난 활동 기간 어려운 점은 어떤 게 있었나요?

“6년 동안 사무실이 없어 힘들었어요. 연대 물품을 보관할 곳이 없어 흩어져 보관했고요. 또 상근 활동가도 없어 운영위원들이 시간을 쪼개고, 자기 돈 출현하면서 활동했죠. ‘기금은 건드리지 않는다’ 등의 우리가 세운 원칙들을 지켜가면서 활동하기 어려운 조건이었죠. 처음엔 매일 페북에 기금조성 내역과 CMS 모금 상황을 올렸어요. 많지 않은 수여서 가능했지만, 상근 활동가도 없이 매일 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죠. 그러다가 격일로, 주마다, 달마다 했죠. 지난 8년 동안 매달 정리를 하다가 요즘엔 반기별로 정산해요.

저는 사파기금 해소하고 싶어요(웃음). 민주노총이 명실상부한 내셔널센터가 돼서 모든 노동자의 노조로 서고, 파업기금을 선제적으로 조성한다면요. 단, 조건은 민주노총 안 대기업 노조가 쌓아놓은 파업기금도 환원해, 업종과 사업장 규모를 뛰어넘는 연대를 이뤄야 한다는 거예요. 이상론이지만 노조가 가는 최대치의 길 아닐까 싶습니다. 계급의 단결로 이어지는 파업기금을 조성하는 것이요. 민주노총이 그런 방식으로 전국적인 파업기금을 조성할 수 있다면 새로운 민주노총이 되는 거지요.”

-10년 만에 처음으로 단체 후원을 요청했습니다. 후원을 바탕으로 앞으로 사파기금의 활동 방향과 펼쳐나갈 사업들이 궁금합니다.

“더 이상 운영위원들에게 일방적인 희생만 강요할 수가 없었어요. 그동안은 운영위원들의 생계도 있기 때문에 사업 역시 불안정했고요. 많이 고민했지만 상근 활동가 체계가 필요하더라고요. 그래서 단체 재정을 확보해야 해요. 예쁘장한 사무실도 구했고요. 가능한 안정적으로 향후 10년의 사업을 하고 싶어요. 노동자 투쟁을 기금으로 지원하는 방식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껴요. 기금 지원이, 한 단체만의 연대로 끝나는 게 아니라 계속 반복해 얘기하듯 모두의 문제로 서야 해요. 결국 모든 투쟁은 연결돼 있어, 하나의 투쟁이 곧 내 투쟁으로, 내 투쟁이 사회의 투쟁으로 이어진다고요. 모두가 돕고 모두가 움직여야 해요.

대선 기간 양당이 벌이는 목불인견의 정치공학적 상황 속에서 대안 이야기가 많이 나와요. 그런데 노동 이야기가 쏙 빠져 있어요. 노동 쪽에선 급하게 뭔가를 시도하는 데 이게 불만이에요. 언제나 한 철인데 좀 더 일상적이고 대중적이고 조직적으로 움직일 순 없을까요? 노동 문제를 의제화하고 사회적 파업, 사회적 연대를 구체화하는 활동들이 필요하다고 느껴요. 교육과 선진, 기획 사업이 더 많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기금 조성뿐 아니라 문제의식을 확산시킬 수 있는 활동들이요. 활동가를 뽑고 있는데, 많은 관심 부탁합니다.”

 

“노동이 돈 앞에 스러지지 않게…10년을 버틴 건 연대의 힘”

2021.12.09 21:32

‘사회적파업연대기금’ 권영숙 대표가 돌아본 10년의 발자취

권영숙 사회적파업연대기금(사파기금) 대표가 지난 8일 서울 용산구 사무실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며 출범 10년을 맞은 사파기금의 활동 내용과 의미 등을 소개하고 있다. 고희진 기자

권영숙 사회적파업연대기금(사파기금) 대표가 지난 8일 서울 용산구 사무실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며 출범 10년을 맞은 사파기금의 활동 내용과 의미 등을 소개하고 있다. 고희진 기자

김진숙 2차 희망버스 때 첫발
노조조차 만들지 못하는 사업장
생계자금 바닥났을 때 생명줄

이젠 민주노총이 기금 만들고
이 땅의 모든 노동자와 나눌 때
사파기금 필요 없는 날 와야죠

사회적파업연대기금(사파기금)이 올해 출범 10년을 맞았다. 사파기금이 출범한 2011년 7월은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이 한진중공업의 정리해고 철회를 외치며 부산 영도조선소 85호 크레인에서 고공농성을 한창 진행 중이던 때다.

권영숙 사파기금 대표(56)는 당시 사회과학 공부를 하던 연구원이었다. 김 지도위원과 연대하기 위한 2차 희망버스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며 동료들에게 ‘파업과 투쟁에 힘쓰는 노동자들에게 연대할 기금을 만드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었다. 긍정적인 답변이 돌아왔다. 이후 페이스북에 “노동은 파업권이란 헌법적 권리를 가졌으나 돈 앞에서 속수무책이었고, 스러져갔다”는 글을 올리고 사파기금의 구체적 계획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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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 대표는 “매일 후원금이 들어왔다. 반향이 아주 뜨거웠다”며 “한진중 정리해고반대투쟁위원회에 2000만원을 기부한 것이 첫 시작이었다”고 말했다.

지난 8일 서울 용산구 사파기금 사무실에서 만난 권 대표가 떠올린 사파기금의 출범 당시 상황이다. ‘김진숙’으로 대표됐던 해고노동자와 열악한 투쟁 사업장에 대한 사람들의 뜨거운 관심은 10년 사이 조금씩 식었다. 사파기금에 대한 시선도 그때만큼 뜨겁지는 않다.

10년을 버틴 것은 지속적으로 관심을 보여준 후원자, 봉사활동 형식으로 함께한 연대자들 덕이다. 그간 500만원 이상 고액의 연대를 한 사업장은 81곳이다. 연대물품 등 소액 연대 사업장까지 포함하면 217개 투쟁 사업장에서 노동자들과 함께했다. 올해는 건강보험공단 고객센터 노동자들의 파업에 기금 연대를 하기도 했다. 권 대표는 “누군가는 ‘돈이 많아서 후원한다’고 하는데 아니다. 내부 운영비를 사용하지 않고 후원금은 연대기금으로만 썼기에 가능했다”고 말했다.

권 대표는 기억에 남는 연대 사례로 2014년 ‘청주 노인병원’과 ‘부산 생탁 노조’ 투쟁 사건을 꼽았다. 두 곳 모두 지역의 작은 사업장, 사람들의 관심을 얻기 힘든 사업장이었다. 그는 “노인병원엔 요양사, 영양사 등 주로 나이 든 여성 노동자들이 일했다. 노조를 만드니 회사가 직장을 폐쇄했고 노동자들은 오랜 시간 투쟁했다. 파업이 장기화되면서 노동자들의 생계자금이 거의 바닥났을 때, 사파기금이 그곳에 닿았다. 너무 고마워하고 진심으로 연대의 소중함을 깨달았다고 말해줬을 때가 기억에 많이 남는다”고 했다.

연대 활동을 통해 노동자들에게 감동받기도 한다. 권 대표는 “많은 파업 사업장이 사측과 합의할 때 완전한 승리를 하지는 못한다. 파업 주동자는 복직을 제외하는 형식의 합의를 할 때가 많다”며 “부산 생탁 노동자들은 그렇지 않았다. 사측이 주도자를 제외한 합의를 요구하자 10여명의 동지들이 모두 복직을 거부했다. 그렇게 멋있는 사람들이 아직 많다”고 말했다. 이어 “단일 사업장의 파업 ‘승리’는 사파기금의 목표가 아니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파업을 어떻게 사회적 의제로 확장시키고, 연대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함께하는 이들 역시 각양각색이다. 1991년 명지대생 강경대씨의 사망에 항의하면서 분신한 김기설씨 유서대필 조작 사건의 피해자인 강기훈씨는 오랜 연대자다. 노동자로 자랄 아이의 미래를 위해서라며 아이 돌반지를 팔아 기금을 후원한 이도 있다. 한 배우의 팬클럽이 활동비 중 일부를 기부한 사례도 있었다.

비정규직, 소규모 사업장과 주로 연대하는 이유에 대해 권 대표는 “이제 대공장 노조는 파업을 거의 하지 않는다. 비정규·소규모·신규 노조들이 주로 파업을 하는데, 돈 없이 파업을 시작하다 보니 용역깡패 등의 물리적 폭력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고통을 겪게 된다”고 했다. 이어 “노동권에서 배제된 노동자들에 대한 운동을 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했다. 한국의 노동운동이 조합주의에 머무를 게 아니라 플랫폼, 소규모, 비정규직 노동자와 함께해야 한다는 뜻이다.

권 대표는 “민주노총이 나서서 전국적으로 파업기금을 조성하고 이를 배타적인 멤버십 안에 있는 노동자뿐 아니라 이 땅의 모든 노동자와 나눠야 한다”며 “그때는 사파기금이 사라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10년맞이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을 소개합니다

1
투쟁하는 자들과 함께
사회적파업연대기금10주년 (2011- 2021)

2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은
노동자의 파업권을 시민권으로 긍정하며, 투쟁하는 노동자들이 돈의 압박에 스러지지 않도록 파업기금을 풀뿌리연대로 모아, 사회적 파업에 사회적 연대를 실천하는 연대운동입니다.

3
노동이 돈 앞에 스러지지 않도록
사회적 파업에 사회적 연대를!

사파기금은 2011년 7월22일 한진중공업 정리해고에 반대하는 2차 희망버스 직후 페이스북에 올린 제안서(제안자 권영숙) 에서 출발하였습니다.

4
기금 지원

2011년 한진중공업 정리해고반대 투쟁위원회에 첫 기금 전달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가장 힘든 비정규 정리해고 노동자투쟁 위주로  80여차례, 50여 단체에 지원했습니다.

5
현장 속으로, 노동 속으로!

사파기금은 기금지원 외에 현장으로 향하는 직접연대 (사파동행, 사파작은희망버스), 노동관련 이슈를 살펴보고 토론하는 사파포럼, 한국 사회 핵심적인 노동문제를 심화학습하는 ‘민주주의와 노동’학교등을 진행했습니다.

6
사파작은희망버스

연대자들과 함께 전국의 현장으로 달려갑니다.
사파작은희망버스는 2011년 한진중공업 김진숙 고공농성장을 시작으로, 평택 쌍용차, 구미 스타케미컬, 부산 생탁 및 택시노조, 구미 아사히글라스, 청주 노인병원, 전주택시 고공농성장, 춘천환경사업소를 거쳐 톨게이트노조 김천 농성장, 대구 영남대의료원 고공농성장등 영남권 순회등 전국의 투쟁현장에 발진하였습니다.

7
사파동행

수도권의 투쟁 현장으로 찾아가는 사파동행은 2014년 씨엔앰 고공농성장으로 시작해 세종호텔, 콜트콜텍, 동양시멘트, 하이텍알씨디, 투쟁사업장 공동투쟁위원회 광화문농성장, 파인텍, 톨게이트노조 세종로 농성장, 아시아나케이오 농성장을 차례로 방문하고 연대집회를 개최했습니다.

8
사파포럼과 토론회

사파기금은 월례 사파포럼과 정세토론회, 그리고 ‘민주주의와 노동’학교 강의를 통해 노동 관련 이슈를 노동계급 입장에서 다루고 연대전략을 함께 고민해왔습니다. 노동계급정치, 노조파괴, 비정규직, 사회적연대, 선거와 노동자투쟁, #미투와 노동 등 다양한 쟁점을 점검했습니다.

9
코로나19노동재난연대기금

2020년부터 전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코로나19는 불평등한 사회적 재난이자 노동재난입니다. 사파기금은 영세사업장 노동자, 비정규노동자, 이주노동자, 코로나19 국제연대, 활동가지원을 위해 코로나19노동재난기금을 따로 조성해 운영합니다. 고립보다 연대를, 이윤보다 생명을!

10
왜 나는 함께 하는가

나에게 사파기금은

‘숨통’이다.
‘희망’이다.
‘내 자식의 생존’이다
– 연대자들의 말 중에서

11
드디어 “사파 10주년, 연대와 후원의 날”

– 일시 : 2021년 12월 11일(토) 오후 4시 – 7시
-장소 : 전국공무원노조 대회의실 (서울 영등포구 국회대로 664, 한흥빌딩 7층)

그리고 발족 10년만에 처음으로 단체재정 후원을 부탁드립니다.
-단체 후원 계좌: 국민은행 822401-04-122822 사회적파업연대기금
-단체 후원 자동이체(CMS): bit.ly/3D04xK2 (클릭)


 

 

 

“노동이 돈앞에 스러지지 않는 사회적 연대를 위하여”
사파기금이 앞으로도 꾸준히 지속가능한 연대활동을 할 수 있도록 재정 확보에 힘을 모아주세요.

 

–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은 2011년 발족이래 노동에 대한 관심과 사회적 연대를 결집하여 사회적 파업기금을 조성하고, 노동자들을 위한 다양한 연대활동을 10년간 펼쳐왔습니다.

– 사파기금의 기금 조성원칙은, 돈이 모이는대로 쌓아두지 않고 노동현장에 지원한다입니다. 그리고 이를 지금껏 실천해왔습니다.

– 그동안 최소한의 경비와 무보수 활동가들과 연대자들의 사회적 연대를 향한 헌신성으로 꾸려왔습니다. 이제 사무실 운영경비와 상근 활동가 활동 보장을 위한 안정적인 재원이 필요합니다.

– 지금껏 사파기금은 사회적파업연대기금 조성만을 요청했습니다. 이제 사파기금 단체를 후원해주십시오! 그만큼 든든한 재정으로 더 튼실하고 희망을 모으는 연대운동을 지속하고 확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 단체 후원방법:
직접 은행이체 혹은 CMS 이체/ 정기, 부정기이체 모두 가능합니다.
1. 직접 은행이체 : 단체후원계좌 국민은행 822401-04-122822 사회적파업연대기금
2. 바로 하는 방법: https://bit.ly/3D04xK2 (여기 클릭)

* 12월 11일(토) 오후 4시 사파기금 10주년 “연대와 후원의 날” 행사에도 많이 와주세요 (홈페이지 sapafund.org 참조).

연대자 여러분께 약소하지만 정성껏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그날 많은 반가운 얼굴들을 보길 바랍니다.

 

[연대소식]  노량진수산시장투쟁 고 나세균 분향소 방문 211111

서울시의 시장현대화사업으로 밀려난 노량진수산시장 상인들의 투쟁에 함께 했던 나세균 님 분향소가 차려진 서울시청 정문앞에 지난 11월11일 연대방문했습니다.

그 날도 서울시는 경찰력을 동원해 분향소 주변을 격리하고 침탈 준비를하고 있는 어수선한 가운데,  사회적파업연대기금 권영숙 대표는 분향하고 20여명의 상인 상주들에 발언으로 연대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이틀뒤인 11월13일 경찰의 침탈로 분향소는 짓밟히고 노령의 상인들은 경찰의 폭력으로 차가운 길바닥에 쓰려졌습니다. 그 과정까지 포함해서 연대자 여러분과 공유하고, 고 나세균 분향소에 연대방문과 관심을 촉구하려고 합니다.

고 나세균님은 투쟁하는 노량진수산시장 상인들께 “자식 같은 동지, 우리의 막내”라고 불린 이였습니다. 서울시의 ‘현대화’라는 명목의 시장 재개발사업으로 강제로 가게를 철거당한후 신시장 건물 입주를 거부하고 노량진시장앞 ‘육교 농성장투쟁’에 나선 이들중에서 50대 후반의 최연소 막내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신시장의 좋은 목에 자리를 배정을 받아 장사를 하며 안락하게 살아갈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수협이 고용한 용역깡패의 무자비한 폭력을 보면서, 함께 싸우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렇게 의인이었고, 묵묵히 투쟁에 함께 하는 이였고, 부끄러움이 많은 이였다고 합니다.
그런 이가 수년의 투쟁속에서 병을 얻고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11월7일 급하게 이 세상을 떴습니다. 얼마나 원통할까요.

서울시장이 바뀌었습니다. 박원순 시장때 개발사업이 완료되고 서울시의 비호아래 용역깡패의 폭력이 난무했습니다. 그리고 오세훈 시장이 시장이 됐습니다. 상인들이 새 시장을 면담하겠다고 서울시청앞으로 농성장을 옮기자, 오시장은, 문제 해결에 적극 나서겠다면서 시청앞 농성을 풀고 돌아가 있으면 연락하마 했습니다. 그런데 연락하지 않았습니다. 그 배신과 좌절이 상인들을 또한번의 절망으로 떨어뜨리고, 나세균을 죽게 만들었습니다.

11월9일 고 나세균 장례식을 치른후, 상인들은 곧바로 지금 서울시청앞 정문앞에 분향소를 차려두고 있습니다.
사회적파업연대기금 권영숙 대표는 이 분향소만은 방문해야겠다고 분향소를 방문했습니다. 상황은 처참합니다. 그러나 상인들은 그 추운 곳에 등받이 없는 플래스틱 푸른색 의자에 앉아 죽은 “우리 막내”의 원통한 넋이 평안하게 영면할 수 있길 바라며 투쟁하고 있습니다.

권대표는 “박원순도 오세훈도 결국 노량진 수산시장 현대화 사업이라는 명목으로 일하는 사람들의 일터를 함부로 짓밟고 있다”고,  “이재명의 대장동 스캔달로 국가와 민간업자들이 야합 공모, 이익 나누기하는 ‘개발사업’이 원주민과 세입자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강제개발이라는 점에서 노량진 수산시장 개발사업과 다를 바 없다”고, 이 모든 것들이 다 한통속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하며, 그를 온몸으로 실천으로 투쟁하면서 깨우쳐주고 있는 이들이 바로 여러분이고, 돌아가신 고 나세균이라고, 그래서 감사하다고 발언했습니다.

고 나세균 분향소가 좀 더 버틸 수 있도록 지켜주시길 바랍니다.
연대로 이들에게 힘을 보태주시길 바랍니다.

2021. 11. 16
사회적파업연대기금

[공지] 드디어 “사파 10주년,  연대와 후원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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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파업연대기금 10주년 행사 일자가 12월 11일로 정해졌습니다.

노동자들의 파업권을 긍정하고, 사회적 파업에 사회적 연대를 실천하는 연대운동!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이 올해 발족 10주년이 되었습니다.

10주년을 맞아 투쟁 노동자와 연대자들이 서로 연대를 확인하고, 사파의 10주년을 축하하는 자리를 ‘드디어’ 마련했습니다.
앞으로 새로운 10년을 향한 격려와 약속을 모으고자 합니다. 부디 많은 분들이 이 날 함께 해주시기 바랍니다.

-일시 : 2021년 12월 11일(토) 오후 4시 – 7시
-장소 ; 전국공무원노조 대회의실 (서울 영등포구 국회대로 664, 한흥빌딩 7층)

*그리고 단체 발족 10년만에 처음으로 단체재정 후원을 부탁드립니다.
-단체 후원 계좌: 국민은행 822401-04-122822 사회적파업연대기금
-단체 후원 자동이체(CMS): bit.ly/3D04xK2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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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최: 사회적파업연대기금
(문의: sapafund@gmail.com)

권영숙(사회학자, 사회적파업연대기금 대표)

 

이번 대선을 앞두고 진보 논쟁은 윤석열이냐 이재명이냐, 혹은 ‘그들 아니라면 그 누구라도 좋아’라는 3가지 선택지의 문제로 귀결되고 있다. 한마디로 87년 12월 대선 지형의 참담한 재연이다. 아니 이데올로기적 지형은 오히려 87년보다 더 악화되었다. 1987년에는 변혁운동, 사회주의운동이 국가의 공안탄압에도 불구하고 독자적으로 정립돼있었으나, 지금 2021년에는 보수정당에 대한 비판적 지지가 긴급한 좌파의 입장이라고 공공연히 공표하는 현실이 도래했으니 말이다. 필자가 최근 지금이야말로 ‘좌파의 위기’라고 규정했던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2022년 대선후보를 두고 ‘포퓰리스트’ 이재명보다 ‘자유민주주의자’ 윤석열이 낫고, 지금 좌파의 과제는 정권교체여야 한다는, 자칭 좌파단체의 논리 전개와 결론은 현재 좌파를 둘러싼 지형의 한계 속에서 길 잃은 모습 그 자체다. 그러니 이 단체의 입장문에 대해서 “이건 아니지” 라고 다들 비판과 비난을 퍼붓지만 어쩌면 사태는 오십 보 백 보인 것을.왜냐하면 그나마 진보적인 주장, 즉 윤석열도 이재명도 찍지 말고, 민주당도 국힘도 찍지 말고, 그들이 아닌 그 누구든 제 3의 후보를 찍자는 제안도 좌파의 입장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민주당과 연정을 도모하다가 이제 안철수, 김동연과 연정을 도모하겠다는 후보를 내세운 당도 좋다는 입장이 적어도 ‘좌파’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문제의 좌파 단체(전국학생행진)의 입장을 좌파의 입장이 아니라고 비판하는 이들은, 마찬가지로 윤석열과 이재명만 아니면 된다는 입장도 좌파의 입장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야할 것이다.

하지만 그 단체의 입장문으로 ‘좌파’란 단어마저 조롱거리가 된 느낌이다. 그건 ‘좌파가 아니야’라는 말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현재의 상태. 사실은 자신의 입장을 두고 좌파적인가 혹은 좌파의 주장에 동조하는가의 질문에 대해선 답하지 않으면서 다른 주장들에는 그 잣대를 들이대고 있는 현실에서, 오십 보 백 보는 더욱 일반적인 모습이 되어 가고 있다. 좌파라는 단어마저 조롱거리로 삼고 있는 현재에, 필자가 할 수 있는 말의 시작은 이것이다. 한마디로 아래 논지를 요약하면, 보수 양당 독점구도와 선거민주주의에 대해 적극적인 비판보다는 선택적인 적응을 선택한 좌파는 이미 좌파일 수가 없다. 이에 대해서 다음에서, 미국의 대선에 대한 글을 기초로 밝혀보겠다.

“덜 악마스럽다고 해도, 악마는 모두 악마일 뿐이다.”(Lesser Evilism Is Still Evil)
2020년 11월 3일 치러진 미국 대선 즈음 나온 얘기다. 결론은 미리 말하면 이렇다.
트럼프로도 바이든으로도 대변되지 않는 인민들의 베이스가 있다. 그 곳이 바로 우리의 노동계급정당을 건설해야만 하는 장소이다. (This all means that there is a base of people who are not represented by either Trump or Biden. This is where we need to build our working class party.)

2020년 미국 민주당 대선 경선 레이스 중 ‘민주사회주의자(Democratic Socialist)’ 버니 샌더스가 경선을 중도 포기했다. 그는 포기했을 뿐 아니라, 민주당 대선후보가 된 조 바이든을 “decent man(좋은 사람)”이라고 칭찬까지 얹어 확실하게 정치적인 ‘승인’을 해주었다.
아 이런, “‘좋은 사람’이라니, 적어도 그 말만은 굳이 하지 말았어야지!” 라는, 샌더스 발언에 대한 비판이 일었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decent라는 말은 아무에게나 할 말이 아니다. 샌더스에 대한 내 의심이 한 푼어치 더 늘어난 순간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바이든은 그의 정치적 성향과 지금껏 언행과 활동과 성추행 사건의 가해자로 알려진 사생활을 봐서도 도저히 “좋은 사람”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래된 경구대로, “덜 악마스럽다고 해서 악마가 아닌 것이 아니다!”

하지만 바로 이런 대통령을 가질 수 있는 것이 미국이다. 이 나라에 이런 대통령이 가능한 이유는 역시 미국이 유지하고 있는 보수 독점 양당정치 덕분이다. 즉 도토리 키 재기식의 보수 양 정당이 대통령과 의회 다수당을 적당히 번갈아 나눠 가지면서, 중간선거라는 완충장치를 두고, 제 3세력이 불가능한 선거제도를 통해서, 철저히 인위적으로 제 3의 정치세력과 목소리를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제도적으로 진입 불가능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정치적 정립 속에서 트럼프 같은 대통령도 가능한 것이다. 한국에서 자한당, 미통당, 박근혜, 황교안, 차명진 등도 가능하듯이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럼프 대통령의 ‘실정’속에서 대통령이 될 가능성에 조금 다가간 민주당 대선 후보인 조 바이든이 정작 민주당 등록 유권자 표를 얼마나 얻어서 민주당 1위 후보가 됐는지 알아보자. 아래와 같다.
미국 선거명부상 ‘등록유권자’ 중 30%가 민주당원이고, 그중에서 30%가 2020년 민주당 후보 경선에 투표를 했다. 이중 무당파 독립 유권자를 제외하면 조 바이든은 등록된 유권자중 고작 9% (등록 유권자이면서 이번 민주당 경선에 투표한 자들의 교집합)의 지지로 민주당 대선후보가 됐다. 나아가 등록되지 않은 유권자들을 포함하면, 바이든은 미국 전체 유권자중 고작 4%가 지지해 민주당 대선 후보가 되었다. 단지 4%가 지지! 결국 바이든은 민주당내에서조차 소수의 지지로 대선 후보가 된 것이다.

그런데 미국과 같은 양당 독점 구도 하에서는, 민주당이든 공화당이든 당내 경선에서 대통령 후보를 뽑는다는 것은, 일종의 ‘예비 대통령선거’를 치르는 것과 같다. 선거(election)는 이미 선택된 사람(the elected)을 뽑는 것이다. 그래서 엘리트(elite)라고 하는 것이다.
미국 유권자들은 모든 피선거권자 즉, 모든 평범한 사람들(the common people)을 대상으로 투표하지 않는다. 선거민주주의의 매개 장치인 정당정치가 있는 한, 미국 선거권자들은 항상 대부분의 선거에서 민주당과 공화당이 내놓는 후보 두 명중 하나를 뽑을 수밖에 없다. 그것이 이 나라의 선거다. 이미 선택된 사람들을 뽑는 선거. 그런데 선택받을 후보를 뽑는 과정이 고작 유권자 3~4%의 지지로 이뤄지고, 그들이 모여서 전국 ‘선거인단’을 구성하고, 그 표들을 마지막에 산출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미국식 선거민주주의의 실체다. 절대 소수가 다수결의 원칙을 제도적으로 활용하여 지배하는 민주주의 말이다. 하지만 이는 단지 ‘미국식’이 아니라 현존하는 민주주의의 성격이라고 할 수 있다. 근대 정치에서 민주주의가 자본주의의 상부구조이자 정치체제로 제도화되는 과정은 자본주의적 계급적 이해관계를 유지하는 제한 속에서만 가능했다. 그리고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에 가장 부합하는 것이 바로 선거제도와 정당정치를 양대 축으로 하는 대의제 민주주의였다. 그러나 민주주의 정치체제에는 다양성이 있다. 자본주의의 국가적 다양성만이나 외양과 운용면에서 민주주의 하위 체제의 다양성이 있다. 이 점에서 양당 독점구도와 독특한 ‘간접 선거’제도를 유지하는 이 민주주의를 ‘미국식 민주주의’라고 한 것이다.

여기서 뭔가 비슷하지 않은가? 한국의 대선 후보 경선은 다른가? 2020년 한국에서 집권 민주당이 비례대표제의 취지를 완전히 뭉개면서 위성정당 꼼수로 의석을 싹쓸이해 압승한 결과, 여대야소 거대 제1당이 되는 것은 뭐가 다른가? 한국이 1987년 6월항쟁을 거쳐 87년 개헌으로 더 이상 간접 선거가 아니라 직선제 대통령제를 실행한다고 해도, 보수 양당 독점구도, 그리고 다른 대안적 이념정당을 허용하지 않는 폐쇄적인 정당정치를 유지하는 소위 ‘48년 체제’ 하에서는 한국은 여전히 미국식 민주주의에 가깝다.

여기서 48년 체제란 국가 보안법 제정으로 사회주의를 정치시장에서 제도적으로 봉쇄하고, 한독당과 한민당의 보수 양당 체제를 유지했던 대한민국 국가 초기 정당체제를 의미한다. 이 체제는 박정희의 군사쿠데타로 18년의 권위주의 체제로 잠정 중단됐고, 80년 전두환 등 신군부세력의 군사쿠데타로 계속 중단상태였다가 1987년 6월항쟁과 12월 헌법 개정으로 직선제 개헌과 김영삼 김대중 등 양 김씨에 대한 정치적 ‘해금’조처로 다시 복원된 체제를 의미한다. 87년 체제는 직선제 개헌과 자유주의 정당의 정치적인 활동 복원으로 보수 양당 체제로 복귀했고, 민주화 이행 이후 한국 정치는 계속 48년 체제의 연속으로서 87년 체제하에서 진보정치와 사회주의 정당 활동을 봉쇄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므로 보수 양당 독점구도와 선거민주주의에 대해 적극적인 비판보다 선택적인 적응을 선택한 좌파는 이미 좌파일 수가 없다. 설사 제한적으로나마 선거제도와 제도정당정치를 활용하더라도, 만약 이 제도정치, 그리고 87년 체제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지 못한다면, 그리고 선거제도를 통한 제도정치로의 진입과 의회정당으로서의 활로를 모색하는 것이 존립의 목표로 전락한다면, 그 역시 좌파일 수가 없다. 이를 민주화 이행 이후 흔히 좌파와 구분해 ‘진보’정치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일각에서는 진보와 좌파를 구분하기도 한다. 하지만 좌파 스스로 진보와 좌파를 분리하고 구분하는 순간, 좌파는, 존재의 위기를 넘어서 부재의 시간으로 돌입하게 될 것이다. 사회주의 좌파의 정치 전략은, 첫째 자본주의 사회에서 유일한 진보는 좌파라는 자기 정체성을 가지는데서 출발하고, 그를 기초로 하여 계급 간 사회정치적 동맹을 구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보수 자유주의 정치로부터 독자적인, 좌파계급정치의 시작이 될 것이다.

 

* <사파시평>은 민중언론 참세상과 홈페이지에 전문 게재됩니다.

참세상 기사게시판 :: 기사 :: ‘87년 체제’와 ‘48년 체제’를 넘어서 – 덜 악마스러워도 악마는 악마일 뿐 (newscha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