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연대로 파업기금을 조성하자”
자본엔 미친 말처럼 들리겠지만, 노동자들에겐 희망 같은 말이다. 그런데 앞에 ‘사회적’이란 말이 붙어 ‘사회적 파업 연대기금’이 되면 이게 뭔 말인가 싶다. 곰곰이 단어 하나하나 곱씹어보면 파업을 사회적으로 만들어 가자는 뜻인 것 같다. 파업은 원래 사회적일 수밖에 없는데도 굳이 사회적이란 단어를 강조한 것은 우리 사회에선 파업이 그만큼 사회적이지 않은 것으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회적파업연대기금’(사파기금)은 희망버스로부터 시작돼 벌써 2년째 유지되고 있다. 절망의 끝에 매달린 노동자들의 애타는 투쟁을 찾아가 격려하고 돈을 모아주는 것을 넘어 이 단순한 연대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 매 순간 확인하고 있다. 한마디로 돈으로 하는 연대가 단지 돈 내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강조한다.
권영숙 사회적파업연대기금 대표는 “노동자의 파업기금을 사회적 연대로 모아가는 캠페인 운동에서 ‘사회적’이라는 단어는 사실 이중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많은 사람이 파업기금이란 단어를 중심으로 이 기금을 이해하지만 그는 가장 중요한 단어는 사회적이라고 했다.
“노동자 파업은 사회적 파업이 되어야 하고, 파업의 사회적 의미를 이해할 때 사람들은 사회적 연대를 통해 파업에 연대하려는 생각을 가지게 돼요”
사회적파업연대기금 대표 권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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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진중공업, 현대차 비정규직 희망버스든, 쌍용차 투쟁에 대한 시민의 연대든 사회적 파업에 대한 사회적 연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파업의 사회적 의미를 이해할 때 파업이나 투쟁하는 당사자가 아닌 사람들이 함께 연대하는 이유와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파업의 사회적 의미를 확장하는 것은 대한문에서 싸우고 있는 쌍용차 노동자들의 요구인 ‘원직복직, 정리해고 철폐’에서 ‘원직복직은 실현성이 있겠지만 정리해고 철폐가 이 싸움으로 진짜 가능할까?’라는 불확실한 고민에 대한 답을 얻는데 실마리가 된다.
권영숙 대표는 “한 사업장의 문제가 전체노동자 문제의 일부라는 것. 한 사업장 싸움이 사회적 의미가 있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며 “그런 이해 속에 사회적 연대가 구축될 수 있다. 그래서 사회적이라는 의미는 사회적 파업과 사회적 연대라는 이중적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파업기금 조성은 내가 언제든지 파업을 할 수 있다는 인식 전제”
그런데 왜 사회적 연대에 돈(기금)이 중요할까. 권 대표는 파업기금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우리나라처럼 파업을 하면 노동자 자신과 가족이 손배가압류와 생계비 등으로 인생을 결단해야 하고, 때론 죽음을 택해야 하는 사회에선 일상적 파업기금이 절실한데도 아직 파업기금에 대한 인식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은 노동조합이 투쟁기금은 모아도 파업기금은 모으지 않는다.
“파업기금을 일상적으로 조성한다는 것은 내가 언제든지 파업을 할 수 있다는 인식이 깔려 있어야 가능해요. 파업 기금을 미리 조성하지 않는다는 것은 노동자 스스로 자신의 파업권에 대한 인식이 낮은 수준인 것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해요”
권영숙 대표는 이제는 한국사회도 노동조합이 주체적으로 파업기금을 조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 방식도 조합비에서 떼는 게 아니라 조합비와 같은 액수를 별도로 조성해 파업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특히 파업이 장기화하는 것이 한국적 특성인 상황에서 노조가 하지 않는다면 사회적 연대로라도 파업기금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파업이란 단어가 담긴 이름으로 살아남았다”
사파기금을 준비하면서 파업이란 단어가 들어가는 데 대한 거부감을 얘기하는 사람도 많았다. 파업하면 다 빨갱이가 되는 한국사회에서 누가 파업에 돈을 내겠느냐는 것이다. 희망기금이나 연대기금 등의 제안이 나왔지만 권영숙 대표는 파업과 사회적이라는 두 가지 단어를 굽히지 않았다.
권 대표는 “노동자 파업권을 긍정하는 연대의 의미로 기금을 조성하자는 것이고, 그것이 사회적 연대를 확장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며 “파업이라는 단어가 담긴 이름을 유지하면서 살아남았고, 더 실효성 있는 기금으로 진화했고, 그리고 그 자체가 하나의 매개체가 돼 사회적 연대를 움직여 나가고 발전시키는 성과를 냈다”고 평가했다.
그런 의미에서 사파기금과 희망버스는 뗄 수 없는 관계다. 희망버스는 사파기금 탄생의 계기였다.
그가 보기에 희망버스는 노동자들의 사회적 고립 속에 찾아드는 절망의 죽음을 희망으로 바꾸기 위해 한국사회에서 시작된 반작용이었고, 80년대의 노학연대와 같은 운동 조직적 시도와도 다른 새로운 연대였다. 권영숙 대표는 “사회적 원자들, 비조직 노동대중이 노동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노동 문제에 접근하고 스스로 동참하겠다고 나선 것이 희망버스”라며 “희망버스는 한국 사회에서 가장 유의미한 노동의 사회적 연대운동의 출발”이라고 했다.
한진중공업 김주익, 최강서의 죽음 모두 노동자가 사회적 고립 속에서 스스로 위축됐고, 그 속에서 자기 생존만 도모하는 과정이 뒤따르고, 노조활동이나 노동운동이 왜소해 지면서 만든 죽음이었다.
그는 이런 사회적 고립은 사회적 연대로만 끊을 수 있는데도, 희망버스는 일회적이고 사건적인 성격이 강한 한계가 있었다고 말했다. 희망버스는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이 크레인에 올라가 309일을 끌어가자 사람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는 데 대한 인권의식이 추동시켰다. 그렇다면 어떻게 희망버스로부터 시작된 노동의 사회적 연대를 지속적 문제의식으로 확장하고, 장기적 전망으로 추구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봐야 했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런 노동의 연대의식을 담아낼 매개체를 어떻게 확보하고 사회적 연대를 제도화하는 틀을 만들어 낼 것인가 였다.
“제 생각엔 노동에 대한 사회적 연대를 장기적 전망과 연결하게 하면서 진행하느냐가 매우 필요했고, 희망버스 탑승객들의 문제의식을 더 깊이 있게 만들어 갈 필요가 있다고 봤어요. 인권적 수준의 접근이나 불쌍한 사람 하나 살리자는 문제의식으로는 사실 파업에 긍정하고 노동의 시민권을 긍정하는 문제의식으로 가기는 모자란다고 봤어요. 그런 것들의 촉매제를 위한 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2차 희망버스 타고 서울로 올라오는 버스에서 사회적파업연대기금에 대한 구상을 하고, 2011년 7월 17일에 처음 페이스북에 글을 올렸다. 바로 열렬한 반응이 왔다.
“글로 하는 문제 제기였어요. 반향이 없더라도 한번 생각해달라는 거였지요. 파업기금이 없는 한국사회에서 노동자들은 돈의 압박 속에 시달리다 파업의 재단에 목숨도 버리고 가족의 생계와 인생을 망치는 걸로 간주하는 상황인데, 이 정도면 한국의 파업권은 유명무실한 거예요”
7월 17일에 제안하고 22일에 계좌를 만들자 바로 돈이 들어왔다. 준비 모임을 만들고 관심 있는 사람들을 초청했다. 그리고 그해 9월 초 한진중공업에 처음 기금을 지원하기 시작해 재능, 쌍용차 등 지금까지 열여덟 번의 기금을 노동자 쟁의와 생계기금으로 지원했다. 또 희망뚜벅이 방한복 지원이나, 지난겨울 전국의 100여 개 투쟁사업장에 대한 방한물품 지원, 해고자의 날 행사 등 다양한 사업을 진행했다.
사파기금의 제1의 지원원칙은 돈이 모이는 대로 쌓아두지 않고 곧바로 지원하는 것이다. 그리고 돈의 압박에 가장 시달리는 투쟁사업장에 대한 우선 지원을 원칙으로 한다. 또한 가능한 주목받지 않는 곳 위주로 지원한다. 어떤 이는 굳이 기금이 아니라 노동자들이 싸울 때마다 돈을 모아주면 되지 않느냐고도 하지만 그는 개별화되고 원자화된 연대는 문제가 있다고 봤다.
“더 큰 문제는 본인이 마음먹을 때만 지원한다는 거예요. 실제 파업 현장은 계속 유지되고 싸움은 계속되는데 그런 불안정한 후원체계는 문제가 있다고 보는 거죠. 사파기금은 연대를 체계화하고 조직적으로 가야한다는 의미가 있어요. 그리고 기금을 왜 미리 쌓아두느냐는 질문도 많은데 저는 그게 바로 다른 후원 운동과 사파기금의 차이라고 봐요. 저희는 돈을 쌓아두지 않고 돈이 모이는 대로 바로 지원하는 체제이지만, 미리 준비된 기금이라는 의미에서 노동자의 최소한 사회적 안전망이라고 봐요”
돈을 통한 연대도 급진성 필요
사파기금은 2년이 됐지만 권영숙 대표는 여전히 연대가 화두다. 한 번의 연대에 기대면서 뭔가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고양된 연대가 필요하고 그러기 위해선 연대에 대해 더 급진적 생각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돈을 통한 연대에도 이런 급진성이 필요하다.
“내가 가지고 있는 걸 조금 더 준다는 생각을 해선 안 돼요. 내걸 나눠서 줘야 하고 나 대신 싸우는 사람들에게 연대한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저들은 해고를 당했지만, 노동자인 내 문제를 위해 싸우고 있고, 한 사업장 노동자 투쟁의 사회적 의미를 생각할 때 사회적 연대를 생각하는 겁니다. 그건 자신이 가진 돈을 나눠주는 게 아니라 노동하는 내가 노동의 대가인 돈을 나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그렇게 돈으로 하는 연대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돈을 통한 연대니 만큼 사파기금은 기금의 규모 등에서 여전히 한계를 느끼고 있다. 사파기금의 올해 목표는 명실상부하게 실효성 있는 기금이 되는 것이다. 노동자 파업뿐만 아니라 손배가압류나 생계기금도 충당할 정도로 성장해 노동자가 돈 때문에 죽지 않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작년 2월부터는 1만인 1만원 계좌운동을 진행해 월 1억 원씩 기금을 만드는 것이 목표다. 그래야 하나의 실효성 있는 기금으로 자리 잡고 노동자의 최소한의 사회적 안전망으로 기능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2회 민주주의와 노동 학교, “인문학 범람, 역사와 사회과학 잇기 필요”
사파기금은 단지 돈을 모아 지원하는 기금만이 아니다. 돈은 모이는 대로 보낼 뿐이고, 이 과정에서 더 중요한 것은 노동의 문제의식 공유와 노동문제를 사회적 의제로 만들어가고, 노동자 연대를 더 깊고 넓게 확장해나가는 것이다. 이런 토론의 장을 위해 ‘사파포럼’이라는 노동포럼을 만들어 매달 마지막 주 화요일에 개최하고 있다. 사파포럼은 노조파괴문제, 비정규직의 삶, 노동정치 등 때마다 중요한 노동현안이나 노동문제를 중심으로 토론해왔다.
또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2회 민주주의와 노동 학교를 진행할 예정이다. 올 민주주의와 노동 학교는 “87년 민주화 이후 한국 노동운동의 형성에서 전환까지”라는 주제로 87년 이후 한국노동운동사 기획 강좌다. 하지만 단순히 역사적 사실의 나열이 아니라 현재의 역사라는 과정에서 87년 이후 노동의 역사를 재구성할 계획이다.
이번 노동학교는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 사회에서 노동운동은 무엇을 요구했고, 한국의 정치적 민주주의하에서 노동의 희망을 찾을 수 있는지에 대한 답을 구하는 시간이 될 예정이다.
권영숙 대표는 “이제 인문학은 충분하고도 범람하고 있다”며 “역사와 사회과학 잇기가 필요한 시대”라고 이번 강좌를 소개했다.
인문학을 하자고 외치는 게 아니라 그냥 인간이 되고 인간적이면 되고 인간들에게 공감하면 되는데 그건 철학하고 고문 읽고 교양 쌓는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은 사회과학이 부족하단다. 그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더 캐묻고, 알아내고, 빈 구석을 찾고, 자명한 것을 자명하지 않은 것으로 만들고, 허위의식을 넘어 진리의지라고 할 게 있다면 맘껏 발휘하기 위해 제2회 민주주의와 노동학교를 강력하게 추천했다.
올 민주주의와 노동 학교는 남한 노동의 역사를 종단적으로 살펴볼 생각이다. 통사를 통해 탐색하고, 노동만 고립적으로 보는 게 아니라 노동을 전체적 지형과 민주주의 정치사 속에서 조감한다. 그는 “월러스타인이 말하는 ‘역사적 사회과학’으로 노동문제를 살펴보는 이번 강좌는 나름 독특하고 흥미로운 앵글”이라고 설명했다.
강좌는 4차례 진행되며 오는 8월 20일부터 매주 화요일 오후 7시 한국여성노동자회 교육장에서 진행된다. 강좌 문의는 sapafund@gmail.com, 신청은 http://goo.gl/AINfx 에서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