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경찰 흑인살해 항의시위와 코로나19 계급투쟁
– ‘제국’(The Empire)은 무너졌다. 그리고 미국(The State)의 재발견

[사파논평] 권영숙 (사회적파업연대기금 대표, 사회학자)

미국에서 퍼져가는 저항시위를 ‘폭동’이라고 보거나 ‘인종’갈등의 폭발로 바라보는 것은 일면적이다. 이것은 코비드 저항시위라고 봐야한다. 그리고 코로나19 팬데믹의 국면에서 인종의 문제와 계급의 문제가 교차하고 중첩해서 벌어지는 시위라고 봐야한다.

1. “다시 백인이 위대해질 나라”라는 문구가 적힌 모자를 쓰고 다닌 미국 미네아폴리스 백인경찰이 5월25일 대낮에 비무장 흑인 시민을 죽였다. 흑인들 중심으로 5월26일 시작된 시위는 사흘만에 미국 전역으로 불꽃처럼 번져 5월 31일 현재 11개 주와 25개 시에서 야간통행금지령이 내려졌고 8개 주와 워싱턴에서 주방위군이 동원됐다. 이 일이 벌어진 미네소타주는 흑인 비율이 높다. 미네아폴리스의 ‘쌍둥이 시’이자 미네소타 주도인 세인트 폴의 시장은 흑인이다. 그리고 검찰총장도 흑인이다. 5월 30일 내가 시청하던 CNN TV에는 이들이 라이브 기자회견을 번갈아 하면서 메시지를 던졌다. 정작 미네아폴리스의 민주당 소속 백인 시장은 보이지 않았다. 흑인인 세인트폴 시장, 흑인인 검찰총장이 나와서 흑인을 타겟으로 한 경찰의 폭력에 ‘유감’을 표하면서 ‘법질서 회복’을 강조하였다. 그들은 “일부가 정당한 문제제기를 ‘폭력’과 무질서’로 몰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것은 어떻게 봐도 적절하지 않았다. 경찰이 무참하게 민간인을 살해한 행위가 도화선인 상황에서, 이런 발언은 하지 말았어야했다. 하지만 언제나 미국의 ‘흑인 폭동’이 그렇듯이 권력의 근처에 있는 흑인들이 나와서 ‘진화’에 나섰다. 참으로 흔한 모습이다.미국의 ‘인종’시위의 양상은 대부분 이렇다. 백인 경찰이 흑인을 ‘프로파일링'(표적삼기)하여 길거리나 가게등에서 체포하려 하고, 그 과정에서 죽여버린다. 그 옆에는 대부분 흑인 경찰이 있다. 그리고 흑인들을 중심으로 분위기가 들끓고 자생적인 시위가 벌어지다가 밤이 되면 약탈 방화가 일어난다. 하루 이틀후에 ‘지역의 명망가‘ 흑인들(대체로 목사들과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나와서 옳은 말을 하면서 분위기를 진정시키고, 폭력시위와 선량한 ’흑인 코뮤니티‘를 갈라치기 한다. 시위대는 더욱 폭도화하고 이것들은 결국 사회운동론적으로 말하면 비이성적인 ‘군중(mob)’의 ‘폭동'(riot)으로 분류된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렇게 끝나는 것이 ’흔하디 흔한‘ 미국의 흑인시위의 결말이다.

2.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하고 또한 흑인들의 인종폭동의 경과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미국의 인종갈등은 단지 인종갈등이 아니라 계급갈등이라는 점이다. 즉 소외된 하층민의 분노의 폭발이고, 그 소외된 하층민들중에는 대체로 흑인들이 많다. 하지만 흑인들 일부는 지배질서안에 엘리트로도 편입돼있고, 지역의 ‘유지’ 명망가들이기도 하다. 특히 미국 전역의 경찰중에 흑인들은 어디나 있다. 그리고 경찰의 흑인 살해 시점에도 그 현장에도 흑인 경찰은 있다.흑인 경찰이 옆에서 방조하거나 거들 때도 있다. 우리는 그런 장면들을 수도 없이 미국 언론 영상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흑인이 죽고, 흑인들이 백인 경찰폭력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며 분위기가 험악해지면 또 흑인들이 나와서 말한다. 흑인시장, 흑인 경찰서장, 흑인 교수, 흑인 언론인등등. 백인경찰에 의한 흑인 살해사건만큼, 전국적으로 흑인들이 언론에 주목받는 자리에 나오는 일도 없을 것이다. 온통 어디선가 흑인들이 나와서 발언대에 선다.
그렇다면 이건 과연 ‘인종 갈등’인건가? 흑백 갈등인건가? 백인에 의한 흑인의 살해인건가? 저 흑인들은 무엇이고, 또 이 흑인들은 무엇인가? 미국에서 흑인은 더 이상 하나가 아니다. 그리고 지배질서 안에 기득권층으로 편입된 흑인들은 ‘백인우월주의체제’를 지탱하는 중요한 인적 자원이기도 하다(또한 흑인 자체가 한 ’인종(race)‘이 아니다. 복합적인 다인종군이 미국에선 ’흑인(the black)’이라는 통칭으로 불린다. 미국에서 흑인의 정의는 백인 피가 100%가 아닌, 그리고 흑인 1%의 피라도 섞인 사람들을 의미한다. 그러다보니 미국 인구조사(General Social Survey)의 인종 분류에서 라틴계는 줄곧 흑인으로 분류됐었다. 라틴계가 흑인으로부터 ‘인종/에스니스티 분류’에서 떨어져나온지 얼마 되지 않았으며, 그 결과 미국 인종 분포에서 흑인 인구는 10% 중후반대로 추락하였다. 이것 역시 정치사회적인 배경과 이해 정치의 결과물이다).

3. 그리고 다른 한 가지는, 이것이 인종폭동이라면 과연 이것은 지금까지 벌어진 폭동과 아무 차별성이 없는 것일까? 크게 보면 차별성이 없다. 미국의 지배질서와 사회적 불평등이 인종을 경유하면서 구조화된 단면이 이렇게 폭발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아무리 ‘잘난’ 흑인들이 아이비 리그를 나오고, 언론인이 되고 전문직이 되고 대통령이 되어도, 그들은 미국의 지배적인 질서를 해체하거나 그 일각이라도 허물어뜨리는데 도움이 된 적이 없다. 오히려 그들은 이 지배체제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버락 오바마다. 오바마가 대통령 재임 시절에 퍼거슨 시에서 흑인 ‘폭동’ 이 일어났다. 똑같이 백인경찰에 의한 흑인 살해였다. 하지만 오바마는 결국 “우리 모두 오버컴”(극복하리)”를 부르고, “amazing grace”를 흑인 교회 추도식에서 나타나 멋드러지게 한 곡 부르는 것으로, 그의 죽음을 추도하며 보내버렸다. 무엇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는 여성이나 계급문제도 마찬가지다. 여성 일부가 아무리 잘나서 엘리트가 되어도 그것이 과연 젠더적 질서를 붕괴시킬까 아니면 그 질서의 정당화를 구축해줄까. 노동계급의 일부 인사가 국회의원이 되고, 원내 정당이 되고 심지어 ‘노동자출신’ 대통령이, 예컨대 노동자 출신이라는 이재명 경기도 지사가 대통령이 된다면 그것이 과연 계급정치일까. 미국의 인종주의 정치 역시 마찬가지다.

4. 그럼에도 이번 미니아폴리스 발 시위 사태가 단지 흔하디흔한 ‘흑인/인종 폭동’일 것이라고 단정하기 어려운 이유는, 이것이 코로나29 사태에 대한 항의 시위의 성격을 점차 가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미국의 코로나19 사망자중에 80%가 흑인등 유색인종이다. 흑인등은 보편의료보험 없는 미국 공공의료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다. 흑인들은 보험을 들지 못한 인구중 절대다수를 차지하며 미국의 메디케이드등 서민용 의료시스템의 혜택은 코로나19에 대응하기엔 턱없이 빈약하다. 코로나19 팬데믹속에서 흑인들이 죽어나가고 있고, 그들의 주검은 웅덩이에서 화장이나 매장을 기다리고 있다. 흑인들은 가장 낮은 서비스업종 바닥의 노동시장을 점하고 있으며, 코로나19로 인한 근 5천만명의 해고 사태 가운데 정중앙의 직격탄을 맞고 있다. 코로나19 과정에서 미국의 불평등이 흑인등을 중심으로 타격을 가하고 있다. <가디안>지 5월31일자 기사에 따르면 미국 인구중 5400만명이 식량보조가 없다면 당장 ‘기아’ 선상에 놓이게 된다고 한다. 전국의 도시마다 푸드뱅크 앞에 길게 줄 지어선 행렬은 전대미문의 양상을 보이고있다. 또 미국 아동 네 명중 한 명, 즉 1800만명의 아동이 당장 식량보조가 필요하다는 집계도 있다. 미국은 다른 3세계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코로나19 팬데믹 앞에서 한마디로 ‘식량 안전’의 위기에 처해있는 것이다.코로나19는 단지 전염병이 아니다. 그 전염병의 확산 속에서 불평등이 더욱 극심하게 나타나고 불평등에 대한 불만이 응축되고 쌓인다. 이번 미니아폴리스 시위는 인종폭동이면서 계급투쟁일 가능성이 있다. 그러므로 이번 시위는 한번으로 끝나지 않을 시위다. 앞으로 닥칠 ‘사회적인 위기’와 ‘대격변’의 전조일 가능성도 있다.

5. 미국 11월 대선을 앞두고 보수양당인 붉은 색 공화당과 푸른 색 민주당은 모두 ‘집권능력’과 ‘정당성’면에서 한계를 노출하고 있다. 공화당의 트럼프 현 대통령은 코로나19 대응에 있어서 심각한 한계를 노출하였다. 그는 전염병을 통제할 능력도 문제이지만, 전염병을 대하는 오도된 자세와 메시지로 미국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 이대로라면 연임이 힘들다. 하지만 그 경쟁자인 민주당의 유일 후보 조 바이든은 코로나19가 겁이 나서 자신의 자택 지하 벙크에서 두달째 박혀서 자취조차 보기 어려웠다. 미국인들은 조 바이든을 조롱하는 SNS 메시지들을 올리고 있다. 다음 정권 대통령 자리에 앉을 두명의 후보가 다 이 모양이다. 그리고 버니 샌더스나 엘리자베스 워렌 같은 후보들을 제치고 이런 후보들을 추대한 것이 바로 미국의 선거민주주의다. 이만하면 미국의 위기는 확연하다. 체제의 위기와 민주주의 정치의 위기, 그리고 그것이 이제 미국의 헤게모니를 놓치지 않으려는 미국 지배 엘리트의 막가파식의 행동 가능성때문에 전지구 리더쉽의 위기와 불안정성을 증폭시키고 있다. 이것이 미국이라는 국가의 모습이다. 제국(the Empire)은 간데 없고, 미국이라는 나라(the State)의 재발견 혹은 재탄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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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경찰 흑인살해 항의시위와 코로나19 계급투쟁

4.15총선 전 열흘 동안 한국사회는 다량의 ‘국뽕’주사를 과다 투여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언론들, 짜깁기 해외 소식들, 담론들, 입장들. 그리고 좌우 가릴 것 없이. 우파로는 조선일보, 중앙일보까지 대한민국의 코로나19 대처능력을 인정했다고 하고, 좌파쪽(?)에서도 그에 대해선 특별히 이견이 없다 했다. 그게 지금 총선의 결과로 나타났다. 박근혜 퇴진시위 때 자유주의세력이 중심으로 서고 좌우를 거느리는 지형이 만들어졌다. 이는 이후 조국 사태로 찢어졌지만, 다시 코로나19 앞에서 봉합됐다.

한국 사회 전체는 국뽕에 젖어있었다. 한국 사회 전체가 코로나19 대처를 두고, ‘국뽕’(흔히 국수주의를 세속적으로 이르는 말)에 젖어 있는 가운데, 과연 무엇이 결핍되고 지워져 있는가? 우리는 생각하고 정치화했어야 했다. 진보의 독자적인 입장이 있어야했다. 총선에도 다른 입장을 제출했어야 했다.

여기서 ‘국뽕’의 정의는 단지 국수주의적 애국주의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국가뽕’이라고나 할까? 강한 국가주의까지 포함한 의미로 나는 썼다. 한국에서는 코로나19 국면에서 우익세력이 오히려 국가적인 노력과 국가의 강한 역할에 대해서 찬물을 끼얹고 비아냥거리고, 폄훼하였다. 자유주의 세력은 개인의 자유에 대한 통제에 대해 어떤 불편함조차 언급하지 않았다. 사민주의자들도 국가의 역할을 적극 지지하고 주장하는 국가주의자들이 되었다. 즉 국가의 더 많은 역할과 적극적인 개입에 대해 먼저 요청하기. 코로나19 확진자중 자가 격리 규칙을 어기는 자들, 신천지에 대해서 더 강하게 통제하라고 얘기하기. 왜 빨리 돈을 찍어서 어디라도 뿌려야하지 않냐고 말하기 등.

또한 전체적으로 코로나19에 대한 대처 전략을 두고 이 모두가 한국의 ‘국가’가 한 일로 치부하는 일, 나아가서 현 집권정부가 다 한 일로 치부하는 일. 이런 강한 국가의 배경이 되었던 역사를 다 미화하는 일, 사회적인 격리와 감금에 대해서 있을 수밖에 없는 ‘부대적인 사상자’로 보는 듯한 태도까지. 이 모두가 ‘국뽕’과 관련되는 사회현상들이다.

참으로 놀라운 반전이 아닌가 말이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후에 이 사회에서는 “국가가 없었다”라는 말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또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터져 나왔다. 이 두 가지의 단발마적인 의문이 바로 촛불시위로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한국사회 화두다. 그리고 현직 대통령 박근혜를 퇴진시키면서 그를 국가가 국가답지 못하게 만든 적폐의 원흉이라고 지목했다. 과연 국가 실패의 원흉은 박근혜일까?

그리고 촛불 2년이 남짓 지난 지금, 한국은 갑자기 국가가 없는 것이 아니라 너무도 강한 국가, 잘난 국가, 전 세계에 모범이 되는 국가를 가진(?) 나라가 되었다. 다시 의문이다. 과연 국가란 무엇인가? 어떻게 “국가는 없었다”던 상황에서 이렇게 한순간에 강한 국가의 면모로 세계 모든 국가들에게 모범이 되는 코로나19 대응을 보이는 국가가 되었을까?

나는 세월호 참극이 일어난 후에 ‘국가가 없었다!’라는 한탄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혹은 이 사회의 전체성을 덮고 있는 “이 국가는 어떤 국가인가”를 문제삼아야한다고 말했었다. 왜냐하면 한국에 국가는 없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미 한국에 국가는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한국만큼 ‘강한 국가’ 유형도 없기 때문에. 해서 “국가가 없었다”가 아니라, 우리가 문제화해야하는 것은 “과연 이 국가는 어떤 국가인가?”이다. 세월호 참사 앞에 국가 역시 무능한 국가가 아니라 잘못된 국가였기 때문이다. 이는 단지 ‘실패한 국가(the failed state)’, 국가가 국민에게 실패했다의 의미가 아닌, 국가의 성격에 관한 문제다.

지금 코로나19 앞에서 한국의 국가는 이 ‘실패한 국가’라는 테제에도 답한 것으로 보인다. 다수의 견해가 그렇다. 실패한 국가는 ‘정상국가(normal state)’가 되었고, 나아가 전 세계가 부러워하는 국가가 되었다. 비정상의 정상 속에서 유일하게 정상국가인 한국의 국가. 그런데 과연 이런 반전에 근거는 무엇인지 차분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일방적으로 국가주의, 국뽕이 넘쳐난다. 심지어 진보세력까지 국가의 부활, 그리고 국가의 강한 개입에 대해서 유보도 비판도 없이 찬사를 보낸다. 국가가 개입하여 신천지 등 교회들에 대해서 금지령을 내려야하고 엄중하게 법집행을 해야 하고. 국가가 먼저 나서서 돈을 찍어내야 하고, 국민이라면 모두에게 재벌을 포함하여 재난지원금을 살포해야하고.

근데 말이다. 과연 재난 앞에서 국가는 그렇게 중립적인가? 그리고 과연 지금 이 국가는 국민을 구별 없이, 사회집단을 구별 없이 대하고 있는가? 지금 돈이 어디에서 나와서, 어디로 가장 많이 흘러가는가. 지금 공권력의 위세가 어디로 향할지 가늠은 하는가.

총선 앞에서 국가주의, 국뽕. 아니 코로나19 앞에서 한국이 너무 잘하고 있고, 전 세계 국가들이 찬사를 보내고 있다는 말들이 극에 달했다. 이 담론의 홍수가 총선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

선거전야였다. 선거는 연기할 수 없다면서 코로나19에도 불구하고 치러졌다. 하지만 코로나19 앞에서 공포는 국가에 대한 의존을 강화하고, 강한 국가를 요구하게 만든다. 그리고 모든 사회적인 노력은 집권세력의 공이 된다. 코로나19에 대한 대한민국의 대응 과정은 국가, 그리고 나아가 현 정부가 잘한 ‘치적’으로 된다.

그 과정에서 진짜 누가 코로나19 전선에서 일했는지, 이 사회가 코로나19에도 불구하고 작동하게 만든 것이 누구인지, 과연 그들에게 이 모든 영웅적인 투쟁의 공이나 성과가 돌아갈지는 미지수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 정부는 그 과실을 챙길 것이다. 대통령의 지지율은 50%를 넘었다. 1년 반만이다.

이번 총선은 코로나19 총선이 되었다. 과연 누가 전 지구적인 팬데믹이 만들어낸, 이 생명과 안전의 공포 앞에서 ‘다른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역설이다. 6년 전 세월호 참극으로 이 사회는 안전사회 담론으로 이행했다. 사회운동과 시민사회 담론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것이 지금 코로나19앞에서 ‘강한 국가’의 지지 배경이 되었다. 대통령도 코로나19와 세월호를 연결해서 발언한다. 우리는 그 교훈을 배웠습니다, 라고. 이것이 이번 선거에서 현 정부와 자유주의 정치가 이긴 배경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진보세력의 차별성은 보이지 않는다. 좌파는 더욱 없다.

지금 코로나19 국면에서 고민의 한 지점은 이것이기도 하다. 계급적인 관점이 탈각된 국가주의와 안전사회담론이 결국 다시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국민총화’론으로 모든 것들의 구별선, 균열선, 분리와 배제의 선이 비가시화하고 있다. 지워지고 있다. 또다시 ‘눈먼 자들의 사회’다. 국가에 눈먼 사회. 세월호 참극의 정반대편에서.

권영숙(사회적파업연대기금 대표) 2020.04.17 15:40

참세상 기사
사파논평은 인터넷언론 <참세상>에도 공동 게재됩니다. 매달 2회 정도 나갈 예정입니다. 계급적인 관점에서 세상읽기를 통해서, 세상을 바라보는 근육을 함께 기르고 연대의식으로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함께 읽어 주시고 알려주세요.

미국 민주당 대통령경선에 나선 무소속후보 버니 샌더스가 4월9일 결국 경선 중단을 선언했다. 코로나19의 최대의 방역책으로 ‘사회적 거리두기(social distancing)’를 말하는데 이에 빗대 말하자면, “사회주의에 거리두기”라고 할 만하다.

이 말은 미국 민주당 전국위원회에서 내놓은 공식 논평에 있는 말이다. 미국 유권자들은 “사회주의에 거리두기”라는 전국적인 행동을 보였다고 톰 페레즈 민주당 전국위원회 대변인은 말했다. 그리고 (사회주의라는) “거친 생각(a wild idea)을 더이상 퍼뜨리지 않는 것이 미국에게 가장 좋은 길이라고 미국인들은 결정했다”고 말했다.눈을 의심케 하는 표현이었고 몇 번을 읽었다.

이 얼마나 역설적인 발언인가. 미국은 지금이야말로 시장의 혼돈과 무책임,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와 빈부 격차가 빚어낸 참극 속에서 사회주의가 필요한 상황인데 말이다. 공공의료의 부재, 사적 의료보험체계, 국민 수명이 70년대 이후로 계속 낮아지고 유아 사망률이 갈수록 높아가는, 그래서 기이하게도 제3세계 빈곤국가들과 사회 지표가 유사해져가는 나라. 그 정점에서 지금 코로나19 전염병이 퍼지고 있다.

코로나19가 미국의 불행이 아니라, 미국의 자본주의 체제가 코로나19앞에서 인민의 불행이다. 그리고 지금이야말로 미국은 사회주의가 필요한 국면이다. 체제로서의 사회주의는 아니더라도 사회주의적 조치가 필요한 상황이다.그래서 자본주의의 선진국들, 유럽국가들뿐 아니라 미국 역시 지금 자본주의 경제를 살리기 위해 다급하게 사회주의적 조처를 졸속 모방하고, 시장의 원칙을 말하면서도 국가의 힘과 권력을 마구 휘두르고 있다.

대표적으로 다음의 예들이다.
미국은 지금 1950년 한국전쟁때 제정했지만 사문화됐다시피했던 ‘군수물자생산법(Defense Production Act)’ 을 발동해서, 민간기업에게 코로나19 관련 인공호흡기와 마스크등 의료물품을 제조하게 하고, 국가가 강제로 징발하는 조처를 취했다. 심지어 이 법에 따라서 해외 다른 국가애서 수출하는 마스크까지 자국으로 빼돌리고 있다. 명백히 국제법 위반이다.

또 미국은 유동성 통화에 대해서 시장원칙과 상관없이 무제한의 양적 완화를 선언했다. 헬리콥터 머니를 뿌린다고 하고 국민들에게 긴급한 재난기본수당을 준다고 말하지만, 대부분의 돈은 자본주의와 기업 살리기에 사용하고 있다.

그 와중에 코로나19로 인한 재난은 이 사회의 가장 밑바닥부터 거세게 덮치고 있다. 미국의 경우 4월10일 현재 16000명이 사망했는데 시카고, 뉴욕등에서 흑인 빈민지역의 코로나19 사망율이 치솟고 있다. 가난한 이들은 코로나19에 걸렸는지도 모르고 사망하고, 코로나19 사망자로 분류되지도 않은채 스러질 것이다. 이는 남미, 아프리카, 아시아의 빈국등 전세계가 마찬가지일 것이다. 선진국이나 후진국이나, 제1세계나 3세계나 공통적으로 벌어지는 일이다. 가난한 무산자계급, 소수자, 무국적자들이야말로 코로나19앞에서 가장 위험한 상황에 놓여있다.

코로나19의 전지구적 판데믹 속에서 선진자본주의국가들은 사회주의체제로부터 모방한 중앙집권적 자원 동원과 배분체계를 통해서 자본주의 경제의 부양에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사회주의는 중앙집권적 자원배분이 다가 아니다. 그냥 헬리콥터 머니 찍어내서 뿌리면 여하튼 경기가 좋아지니 전국민이 다 좋은 것 아닌가 하는 것, 혹은 그중 얼마나 떡고물이라도 가난한 자들에게까지 미치겠지 하는게 아니라, 지금이 정말 전시경제에 준하는 재난경제 상황이라면 사회적 자원과 재원과 물자를 ‘사회주의적으로’, 사회전체의 평등의 방향에서 약자 우선으로 배당하고 배분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미국등 자본주의국가들은 자본주의를 위기에서 구출하기 위해서 사회주의로부터 배운 조처는 재빨리 실행에 옮기면서, 사회주의자들의 뜻은 “거친 생각(wild idea)”라면서 기각한다.

결국 사회주의자는 아니지만, 사회주의적 이상을 온건하게라도 주장하고 실현하자고 했던 ‘민주사회주의자(Democratic Socialist)’라는 버니 샌더스는 미국의 ‘사회주의에 거리두기’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경선포기 선언을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더많은 미국의 청년들이 이 급진적인 정치적 사고에 “감염”되어서 다음 선거는 공화당과 민주당 체제를 일소하길 바란다.”

미국과 자본주의에게 더 무서운 바이러스는 코로나19가 아니라 사회주의, 맞다.

2020. 4. 10

권영숙 (사회적파업연대기금 대표)

코로나19가 한국을 덮친지 3달째다. 긴급재난으로 인해 실물경제가 얼어붙고, 일터는 가동율이 곤두박질치고, 노동자들은 해고당하고 무급 휴가를 강요당하고 임금이 자연삭감되고 있다. 소득이 줄고 있는 가운데 저축한 돈도 얼마 없는 사람들은 코로나19보다 생계난이 더 두렵다. 이들을 위한 ‘긴급 생활비’ 지원이 필요하다. 역병이 재난이라면 말이다.
근데 대통령이 취한다는 조치가 자기 임금 30% 줄이기다. 4개월동안 대통령과 장관들이 임금을 30% 삭감하고서 받겠다는 것이다.

일단 참으로 구태스럽다.
누구는 깎을 임금이라도 있어 좋겠다만 누구는 최저임금선 아래 받는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에게 당신들의 임금 삭감분이 무슨 의미가 있나.

그리고 누가 적선해달랬나? 가난한 이들의 시민적 권리로서 주장하는 것이다. 이를 흔히 ‘사회권’이라고도 한다. 아직도 국민을 나랏님이 궁휼히 여기사 시혜받는 백성처럼 대하련가.

그리고 행여 이 조처가 이후 노동자들에게 고통 분담 운운하며 임금 동결하고 삭감하고 장시간 노동시간을 유지하기위해 미리 하는 이른바 사전 정지 작업이 아니길 바란다. (하지만)… 경총이 오늘 3일 ‘경제활력 제고와 고용․노동시장 선진화를 위한 경영계 건의’를 발표했다. 그 내용은 △기업 활력 제고를 위한 법·제도 개선 △기업 경영 안정성 확보를 위한 법·제도 개선 △노동시장 유연성 제고를 위한 법·제도 개선 △고비용·저생산성 구조 개선 △합리적인 노사관계 구축 △지속가능 사회보장체계 확립 △선진 안전시스템 구축 △경영책임의 적정성 확보와 형벌 개선 등이다.

여하튼 그러니 당장 대통령과 행정부는 제대로 행정권력을 동원하여 행정적인 일을 하라. 행정적으로 실효성 있는 사회경제적 조처를 취하라. 그게 정치권력이 해야할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착한 사마리아인 흉내내는 쇼같은 일은 그만두고 말이다.

하지만 나는 ‘재난기본소득’이라는 이름의 모든 국민에게 정액 얼마를 지급하는 식의 ‘보편적 기본소득(universal basic income)’에 대해선 반대한다. 지금 재난기본소득을 청원하는 교수연구자들 연서명이 돌고 있다. 난 그 청원에 서명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문장 첫머리가 “모든 국민에게 재난기본소득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왜 모든 국민이 기본소득으로 동일 액수의 긴급소득을 받아야할까? 지금 필요한 것은 재난 앞에서 가장 확연하게 드러난 재난 불평등이 인간 참극으로 일어나지 않도록 국가가 비상 개입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정확히 재난의 계급성을 이해하는데서 출발해야한다. 모든 국민이 아니라, 최저임금선 이하의 노동자들, 자영업자중 하위 20% 소득을 대상으로 하여야한다.

그리고 이 지점 역시 중요한데 모든 “국민”이 아니라, 이 땅에 사는 모든 “인간”에게 생존기금을 지급하여야한다. 기본소득은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매우 배제적이고 선별적인 복지이다. 사람들은 보편적 기본소득이야말로 보편적이고 탈배제적이라고 하지만, 전지구적 전염병 앞에서 “국민”됨이라는 자격조건은 역설적으로 얼마나 배제적인가.

그러므로 지금 지급되어야하는 것은 재난기본소득이 아니라,

첫째, 생존유지가 버거운 하층 소득민에게 긴급한 구호기금으로서,

둘째, 헌법상 행복추구권과 건강할 권리를 가진 이들의 당연한 사회권으로서,

그리고 셋째 “국민”이라는 배제적인 보편기본소득이 아니라 이 땅에 코로나19로 인해 생존권이 위협에 처한 사회 구성원 모두를 대상으로 한

긴급재난생활비로서 주어져야한다.

그리고 이는 정확히 기본소득과는 구분되는 지점이다.

2020. 3.23

권영숙(사회적파업연대기금 대표)

온통 맘이 돌처럼 딱딱해진다. 죽음이 너무 아프고, 죽어야하는 현실이 너무 자명해서, 죽음의 반복이 너무 필연적이어서, 부고를 듣는 마음들은 더 딱딱해지고 더 불편해진다. 사실 ‘사회’란 그 성원들이 매일 매일 만들어 내고 있는, 매일 매일 재구성하는 형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매일 만들어지는 사회를 거대한 벽처럼 암담하게 느꼈을 사람들을 아프게 떠올린다. 그래서 이 사회를 구성하는데 매일 가담하는 ‘우리’는 마음이 또 불편해진다.

걸그룹 가수 설리에 이어 구하라의 죽음. 남자친구의 데이트 폭력과 악질 댓글로 힘들었던 구하라의 죽음. 그리고 구하라의 전 남자친구가 저지른 죄들 중에서 다 인정하는데 성범죄만 무죄로 판결했다는 법원 기사. 구하라의 죽음으로 새삼 세간의 입질에 오른 이 판결은. 근데 지난 8월의 판결이다. 아 그랬구나. 이게 어떤 의미인지 확 다가온다. 8월의 이 판결이후 그는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을까. 구하라의 진짜 피해는 법으로 그리고 실체적으로 인정되지 않았던 것이다. 피해자가 있는데 피해는 없었던 것이다. 법원은 가해자에게 면죄부를 준 것이다. 건설업자 윤중천의 별장에서 소위 ‘성접대’를 받았다는 혐의를 받았던 법무차관 지명자인 검사 김학의처럼 말이다.

매일 매일 구성되어 우리 앞에 버티고 있는 이 난공불락의 사회에 대해서, 그리고 이 사회에 절망하여 일어났을 수다한 비슷한 죽음들 앞에서, 이 사회를 구성하는 ‘우리’라는 공허한 주체는 할 말을 잃게 된다. 아니 누군가를 향해 주먹질을 해야할텐데, 과연 누구를 무엇을 향해야할까? 이 죽음의 경우는 또 어떤가. 애초의 가해자 때문에 구하라가 죽었을까? 판사의 판결 때문에 구하라가 죽었을까? 과연 누가 그를 죽였을까? 이 죽음들은 왜 반복되고, 그 죽음의 원인은 왜 방치되고 있을까?

또 작년부터 올해까지 ‘1672명’의 노동자들이 일터에서 사라진 죽음이 있다. 그 죽음들은 한날 한시의 죽음이 아니라, 일상적으로 방치된 죽음들이고, 구조적으로 발생한 죽음들이다. 가해자의 인정도 가해사실의 인정도 없이, 무참한 목숨들이 일터에서 사라지고 있다(최근 <경향신문> 지상에 올려진 산업재해 사망자 명단은 1200명이다. 하지만 실제 한국의 산업재해 사고와 죽음은 이보다 훨씬 더 많다. 산업재해의 20%만이 산업재해 보험 처리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산업재해 사망사고도 그만큼 은폐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노동부 통계에 따르더라도 직업병을 포함한 산업재해로 일터에서 해마다 2천명, 하루 3명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대체로 매일 5-6명 사망이라고 본다).

이들 노동자들은 또 누가 죽였을까? 무엇이 죽였을까? 살기 위해서 노동력을 팔고 일터에서 일하던 사람들을 다시는 집에 돌아올 수 없게 만든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리고 이 질문 역시 마찬가지로 우리는 과연 하나의 답에 이를 수 있을까? 이 죽음들의 가해자들이 과연 누구인가에 대해서 과연 우리 사회 성원들은 같은 답을 내릴 수 있을까? 죽음에 대해 애통해하고 마음의 가책을 느낀다고 해서 반드시 같은 답을 염두에 두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구하라의 죽음도 그렇고 김용균의 죽음도 그렇고, 수많은 구하라들, 그리고 김용균들의 죽음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답을 찾지 못한 채 죽음들은 늘어만 가고, 제어되지 않은 채 사회적 타살은 반복된다.

그러므로 죽음들 앞에서 슬프고 애통하다는 것은 때로 악어의 눈물같이 느껴진다. 슬프고 애통하고 가책을 느끼는 것은, 가장 손쉽고 어쩌면 가장 값싼 연대의 표현방법이다. 이렇게 일상화된 죽음들을 막기 위해서는 연민과 가책에 연유하는 연대의 감정과 의식으로는 한참 부족하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애도와 가책은 나를 편하게 하는 나 중심의 연대일 뿐이다. 왜냐하면 문제는 바로 그 ‘일상’이라는 괴물, 내가 영위하는 현실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매일 매일 우리 구성원들이 만들고 있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저 죽음들을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죽음의 소식을 들을 때 그 순간뿐인 미안함과 눈물이 아니라, 세상의 구조에 대항할 때에만 이 죽음들의 반복을 막을 수 있다. 이 죽음들은 일상적이고 구조적인 죽음이기 때문이다. 구하라와 설리의 죽음은 걸그룹 아이돌의 사생활 보호는 관심없이 자본의 이익을 추구하거나, 대중의 찰나적인 호기심과 여성에 대한 ‘마녀사냥’에 영합하는 사회가 공모하여 일어난 죽음들이다. 그것은 단지 여성혐오만도 자본주의의 이윤추구만도 아닌, 병합된 문제들이 얽혀서, 반대쪽에 손가락질만 하면서 계속 반복된다.

일터에서 사라지는 노동자들을 죽이는 것도 바로 그 돈, 자본이다. 돈 때문에 안전수칙을 어기고, 돈 아끼려고 안전장비를 갖추지 않고, 그리고 자본으로 맺어진 원하청 사슬, 비정규직화와 죽음의 외주화가 노동자들을 죽이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그 악마의 자본주의 앞에서 침묵하고,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사회, 그 자본 앞에 굴복하고 법도 행정집행도 팽개치는 국가가 공범이다.

그러니 어떻게 이것을 한 순간의 눈물과 한숨으로 닦아주고 원상회복하고, 혹은 다시 이런 일을 일어나지 않게 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이제 우리에겐 연민과 속죄, 그것으로 빚어내는 순간적이고 휘발적이고 철저히 나로부터 시작하는 연대가 아니라, 그 죽음들 자체에 대한 인식에 기반한 사회적 의지와 사회적 힘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자본의 구조에 맞서는 힘이 필요하다. 노동을 짓밟고 일어서는 국가와 노동을 배제하는 정치적 민주주의에 대해 일어서는 힘이 필요하다. 속죄와 가책에 의한 동정과 연민의 의식이 아니라 종국에는 함께 그 길로 합쳐지는, 그래서 세상을 바꾸는 길을 만들어가는 사회적 동맹이 필요하다. 그런 굳건한 사회적 동맹, 정치적 동맹의 구축이야말로, 그래서 그 동맹세력이 더이상 물러나지 않는 힘으로 자본주의 세상을 제압하고, 자본과 교묘히 결합된 비인간적인 일상의 구조를 바꾸고, 자본과 결탁한 정치를 뿌리로부터 전복시키는 것, 그것이 바로 일상적이고 구조적인 죽음들과 사회적 타살을 막는 길이다.

구하라 설리의 죽음이든. 노동자 1672명의 죽음이든,
어쩌면 그 죽음들의 원인이 하나의 뿌리라는 각성이 연대의 시작이다.

2019. 12. 06
권영숙 (사회적파업연대기금 대표)

톨게이트 투쟁에 있어서 대법원은 노동자 투쟁의 정당성을 확정해주는 판결을 한 것도, 그 판결을 해주는 주체도 아닙니다.

오히려 법원은 4년이란 긴 시간동안 노동자들을 고통스러운 시간 싸움에 들게 하면서 자본의 편에 섰습니다. 그리고 이제서야 대법원의 직접고용 판결이 나왔지만, 그 판결조차 언제나 판례가 되지 못하고 ‘케이스’, 즉 개별 소송 사건으로 취급되는 한국 법현실에서, 법원의 판결은 노동자에 대한 사법적 통제기법이 되기도 합니다.

즉 노동의제는 희석시키고, 노동자들의 요구는 소송 사례로 제한하면서, 노동자들을 갈수록 법원의 판결에 묶어 두려는, 노동자에 대한 ‘사법적 통제’의 수단이 됩니다. 노동자 투쟁은 이런 사법적 통제 자체를 분쇄해야합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 톨게이트 노동자들이 감행하는 투쟁이 그런 투쟁입니다. 그래서 이 투쟁은 옳다, 우리가 옳다라고 크게 외치고 외쳐야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 지점을 번번이 놓친 것이 지난 몇년간 비정규투쟁의 한계였습니다. 지금까지 비정규투쟁은 투쟁마다 종국에는 법률투쟁이 됐습니다. 똑같은 처지의 노동이고 같은 요구로 투쟁하는 노동자임에도 불구하고, 불법파견 소송을 하고 근로자지위 소송을 하는 노동자 개개인들의 판결 사례로 한정됐습니다. 같은 사업장내에서도 노동자들은 이 판결로 일희일비하고, 판결에 따라 서로 다른 처지가 되었습니다. 결국엔 종이쪽 판결문을 투쟁보다 더 의지하고, 금과옥조처럼 읖조리다, 그 판결이 지명하는 순서대로 정규직으로 전환되기도 했습니다.

정리해고 투쟁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게 하여 판결이 지정하는 순서대로 원직 복직도 하고 정규직 전환을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투쟁의 과정은 정리해고 자체의 철폐, 비정규직 자체의 완전 철폐와는 갈수록 멀어졌습니다. 왜냐하면 노동자들이 법률 소송에 기대는 순간 그것은 실정법, 즉 현존하는 법에 호소하는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노동자들은 파견근로를 늘리기 위해 만든, 허울만 좋은 ‘파견근로자보호에 관한 법률’에 근거해서 불법파견임을 입증하는 소송을 해야 했습닌다. 비정규직 철폐투쟁은 실제상 정규직 공정임을 이유로 한, ‘진짜 사장’ 찾아내기 투쟁이 되고 정규직 전환투쟁이 됐습니다.

한마디로 노동자들이 정리해고 분쇄를 외칠수록, 법과 판결이 끼어들면, 그 순간 그것은 ‘원직복직’ 투쟁이 되어버렸습니다.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철폐를 외칠수록, 법과 소송에 의존하면, 어느 순간 그것은 ‘정규직 전환’ 혹은 ‘불법파견’ 유무죄의 문제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런 가운데 비정규직은 다양한 변종으로 더욱 공고화됐습니다. 정리해고조항은 철폐되지 않았습니다.

지금 톨게이트 수납소 노동자들 1500명이 자회사 고용을 거부하면서 투쟁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305명이 이번 대법원 판결에서 승소한 해당자라고 합니다. 그러자 고용주인 한국도로공사는 소송 당사자 만을 직접고용하겠다는 뻔한 술책을 내놨고, 노동자들은 지금 그를 거부하는 투쟁을 계속 하고 있습니다.

같은 처지의 노동자들이고 대법원 판결이 판례로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왜 모든 노동자들에게 적용하지 않는지를 문제삼으며, 법과 판결의 한계를 계급적 단결투쟁으로 넘어서고 돌파하려고 합니다. 소송당사자만이 아닌 모든 ‘같은 처지’의 노동자들이 함께 쟁취하는 결과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톨게이트 노동자들의 투쟁이 의미있는 이유, 그 투쟁이 옳은 이유입니다.

그렇습니다. 투쟁하는 노동자들은 결코 법과 판결이 손을 들어주었기 때문에 우리가 옳았다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옳았고, 우리가 투쟁했기 때문에 법원이 판결할 수 밖에 없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톨게이트 노동자들의 요구는 대법원 판결때문에 옳은 것이 아니라, 이미 옳았습니다.

그리고 노동자들은 “법대로! 해라”라고 외쳐서는 안됩니다. ‘법대로’는 합법주의의 덫에 걸려들기 십상입니다. 종국에는 언젠가 노동자의 투쟁에 무서운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것입니다. 너희가 법대로 하라고 요구하지 않았는가라며 자본과 국가, 법원은 함께 법으로 노동자들을 억압하고 통제할 것입니다.

이제 다르게 외쳐야 합니다. 노동자들은 자본과 권력에게, “너희들이 만든 법 너희들이 지켜라”라고 말해야합니다. 노동자가 “법대로”를 말할때, 그것은 바로 너희 자본과 국가에게 하는 말임을 분명히 해야합니다. “너희가 만든 법 너희가 지켜라. 그리고 우리의 법은 우리가 만들겠다”, 이렇게 말입니다.

노동자투쟁이 법에 의지한 투쟁이 아니라, 법을 향한 투쟁으로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정리해고 철폐, 비정규직 완전 철폐를 향하여!

– 권영숙 (사회적파업연대기금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