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파업연대기금은 12월9일 금속노조 대회의실에서 “고 김주익 20주기 추모상영회와 강연”을 “김주익 고공농성이 남긴 것: “2003년 노동, 2023년을 묻다”라는 제하에 열었습니다.

추모영상회는 부산 영도 한진중공업 노조가 2002년부터 시작한 정리해고 인원조정 반대투쟁, 2003년 7월22일 전면파업 돌입과 함께 김주익 지회장의 85호 크레인 고공투쟁, 128일의 투쟁끝에 129일째인 10월17일 크레인위에서의 죽음, 그리고 이후 이어진 투쟁과 결말까지를 다룬 동영상 1시간을 함께 봤습니다. 그리고 이어 권영숙 사회적파업연대기금 대표의 “2003년 노동, 2023년을 묻다” 강연을 듣고 토론했습니다.

모인 청중은 참 적었습니다. 울적할 정도로 적었습니다. 당일 많은 큰 집회가 있었지만, 하필 고 김주익 추모상영회는 그런 집회들이 열리기 훨씬 전에 잡은 일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집회 탓일까 싶습니다. 권 대표는 억지로라도 즐겁고 유쾌하고 싶은 심성들, 집회 시위까지 깃든 그 심성들을 이해하지 못할바 아니지만, 현실이 비통하면 비통한대로 함께 하고, 그 의미를 잘근잘근 되새김하는 이런 자리가 더욱 필요한 것이 아닌가라고 질문을 던졌습니다.

2003년 10월17일 35미터 크레인 상공에서 김주익이 죽고, 10월30일 곽재규가 회사가 강제로 배를 진수하여 텅빈 도크 11미터 아래로 몸을 던져 죽고, 29일이나 그 찬바닥에서 누워있는 동안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은 아마 더욱 혀를 깨물고 싸웠을 것입니다. 동지를 지키지 못한 죄, 지도부를 엄호하지 못한 죄, 그리고 그를 외로이 홀로 결단하고 죽게 만든 죄. 그 죄책감들이 휘감고 있는 현장이 다큐멘터리 후반부 곳곳을 채우고 있었습니다. 보는 것도 힘들죠. 현장에선 더 힘들었겠죠. 하지만 그게 노동의 현실입니다.

하지만 이 자리는 “작지만 강한 행사”였습니다. 상영동안 사이사이 훌쩍임도 있었습니다. 사파기금이 7월17일 시작하고 8월11일 사회적으로 조성한 첫 파업기금 2천만원을 한진중공업 정리해고투쟁위에 전달했고 10월24일 고김주익 8주기 추모상영회를 열었더랬습니다. 그 날은 희망버스 기운인지 100명이 넘는 이들이 모여 울음바다가 되었죠.

권영숙 대표는 하나하나 짚었습니다. 2023년 현재로부터 2011년 한진중공업 김진숙 고공농성으로, 2011년 김진숙 농성에서 2003년 김주익이 같은 크레인위에서 죽음으로, 그리고 1991년 박창수 한진중공업 위원장의 안기부 연행후 의문사로. 권대표는 단지 한진중으로 좁히지 않고 김주익이 죽은 다음해인 2004년 현대중공업 비정규노동자 박일수가 회사안에서 분신자살하고, 또 2012년 박근혜가 대통령 당선된 다음날엔 현대중노조 집행부였던 최강서가 목매 죽은 과정을 짚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더 앞으로 나아가 1987년 8월22일 거제도 대우조선에선 이석규가 가두시위중 최루탄에 심장을 맞아 사망한 일까지 연결하여 질문했습니다. 과거로의 시간여행이 ‘현재의 역사’가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들이 우연일까요? 권대표는 우연이 아니라 구조적임을, 필연적임을, 그리고 체제의 살인임을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87년 이후 노동배제적 민주주의가 만든 죽음입니다. 김주익이 죽은 2003년 10월에 대통령은 노무현이었고, 그는 ‘노동귀족’론을 말하면서 “분신으로 투쟁하는 시기가 지났다”고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조롱했습니다. 그런 그를 문재인 정권 들어 김진숙 지도위원은 “옛동지”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문재인도 노무현도 한번도 노동계급의 동지였던 적은 없습니다. 노동운동이 자유주의 정치로부터 자신들 스스로 선긋기를 하지 못하는 한, 이런 죽음들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그점에서 이들 죽음은 또한 1987년 등장한 ‘민주노조운동’의 투쟁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기도 하지만, 민주노조운동의 후퇴와 고립 속에서 벌어진 일이기도 합니다. 그 점이 가장 아리는 지점입니다. 김주익이 9월 9일 첫 유서를 쓰고.10월4일 두번째 유서를 쓰고, 13일이 지난 17일 자결했습니다. 그는 기다렸습니다. 무엇을 기다렸을까요? “그가 기다린 것은, 그와 함께 할 동지였고, 그와 함께 싸워줄 노동계급 대오였고, 그들과 함께 나아갈 연대자들이었다. 하지만 그의 옆에는 소수의 동료들뿐이었고, 그는 절망했고, 그 절망은 그의 죽음을 불렀다. ” 권대표는 이렇게 말합니다.

2011년 희망버스가 한진중공업을 향했습니다. 4차 희망버스는 최대인원 18000명이 향했습니다. 그들은 지금 어디 있나요? 그들중 절반 이상은 당시 이명박정권에 대한 반감, 반정부투쟁의 일환으로 희망버스를 탄 자유주의적 시민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노동계급의 손을 계속 잡고 있었더라면, 한국 민주주의는 좀더 왼쪽으로 그리고 노동을 포함하는 민주주의로 나갔을까요? 이후의 최강서, 이운남, 그리고 김용균, 양해동등의 죽음은 일어났을까요? 질문입니다.

금속노조 참가자가 말했듯이, 노조법 2,3조 개정안 투쟁을 2년째 벌이면서, 올해는 김주익의 이름이 참 많이도 나왔습니다. 하지만 진지하게 짚어보는 토론회와 영상 상영회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금속노조 회의실에서 금속노조 주관이 아닌 이 행사 앞에 부끄럽다고 했습니다.

민주노총은 다시 자신에게 물어야합니다. 고 김주익은 지금 누구의 가슴 속에서 사무치게 살아있는지.

2023.12.12

사회적파업연대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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