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파업연대기금은 3월17일 세종호텔 노조 노동자들과 함께 “정리해고 철회! 오십리 걷기’ 도보 행진에 함께 했습니다.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은 3월17일 세종호텔 노조 노동자들과 함께 “정리해고 철회! 오십리 걷기’ 도보 행진에 함께 했습니다.
권영숙(노동사회학자, 사회적파업연대기금 대표)
1. 승패의 분기점
처음에는 이재명 후보의 승산이 훨씬 크다고 봤다. 큰 복병이 없는 한 이재명이 당선될 것이라고 봤는데, 선거의 기세 장악이라는 면에서 대장동보다는 김혜경이 더 큰 복병이었다. 윤석열 후보의 아내 김건희보다 이재명 후보의 아내 김혜경을 둘러싼 스캔달이 표심에 더 큰 영향을 줬다. 시점 상 이재명이 치고 올라오는 일만 남았을 때 그건 꽤 찬물이었다.
반면 대장동의 경우, 혹은 부동산 정책 실패라고 얘기되는 진단은 사실은 모호하다. 그러면 부동산 정책이 국힘과 비슷했어야한다는 건가? 서울에서 30만 표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이 말은 모호하기 그지없다. 대장동, 부동산 정책의 실패를 이재명 패배의 큰 원인으로 진단하는 것에 대해선 민주당 쪽, 위성정당 쪽, 민주당 지지자와 언론들까지 대체로 동의한다. 그런데 그들이 말하는 ‘부동산정책의 실패’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참으로 모호하다.
부동산 규제를 더 했어야한다는 말인지, 다주택 소유자 과세나 갭투자 등 부동산용 금융 규제를 하지 말았어야 한다는 말인지. 주택공급을 늘렸어야 한다는 건지 아니면 공공주택 임대주택 등을 더 늘려야했다는 말인지, 그린벨트 풀고 용적률 제한조치를 풀었어야한다는 말인지, 아니면 그린벨트나 공원부지 전용을 막고 용적률 제한도 계속 유지하면서 도시 개발을 신중히 해야 한다는 건지.
이들이 말하는, 그리고 언론이 말하는 현 정부의 ‘부동산정책 실패’는 진단과 해법이라는 면에서 모호하다. 서울에서 30만 표 이상의 차이, 이재명을 지지한 지역구들이 부동산 정책 실패에 어떻게 다르게 반응하는지, 계급적 구성이 어떻게 되는지 구체적으로 얘기하지 않는 이 모호함이라니. 다르게 말하면 민주당은 대선에서 부동산이익동맹을 해체하여 승부를 내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부동산이익동맹에 붙어서 혹은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승부를 내겠다는 것인지 결정하지 못하고 기회주의적으로 양다리를 걸쳤을 뿐이다.
결론적으로 부동산 정책의 실패가 아니라 부동산 정책의 모호함이 민주당의 패착이라고 생각한다(이재명은 결국 국힘의 부동산 정책 따라 하기로 나섰지만 뒤늦었고, 그건 승부수가 될 수 없었다).
2. 후보 단일화 문제
윤석열의 우위가 거의 굳혀진 것처럼 혹은 가끔 비등한 것처럼 나올 때, 3위 후보 안철수를 잡는 것이 둘 사이의 레이스였다.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본 윤석열과 단일화 논의에서 안철수가 끝까지 딴청을 부리는 것을 보고, 이재명이 꽤 큰 정치적 교환과 약속을 한 게 아닌가 했는데, 왜 그건 성사되지 못했을까?
일부는 안철수가 윤에게 넘어간 것이 ‘약점’을 잡혀서가 아니냐고 하는데, 그건 편의적인 생각이다. 현 정부가 민주당 정권이다. 안철수가 약점이 있다면 양쪽 다 잡을 수 있었다는 말이다. 어쩌면 민주당 쪽은 ‘감투’와 ‘자리’다툼이 워낙 심한 당이라서 안철수에게 무엇도 약속하지 못한 것은 아닐까? 그리고 김동연 후보가 이재명 후보와 나란히 TV 후보 토론회에 나올 때부터 그가 이재명 캠프로 갈 것이라고 봤다.
고로 이재명 후보는 김혜경과 안철수 변수가 없었다면 이래저래 흔들리는 표를 긁어모았을 것이다.
3. 두 개의 상수- 민주당 쪽에서
그리고 두 개의 상수가 있지 않은가 말이다. 하나는 호남의 몰표. 80~90%의 몰표를 줄만큼 ‘당적인 충성도’가 높은 지역. 영남은 차라리 몰표 주기 측면에서 많이 무너졌고, 이미 그런 선거의 예가 많다. 하지만 호남은 여전히 민주당의 아성으로 굳건하다. 문제는 호남의 몰표는 결국 호남 보수 ‘토호’들의 이해집단이 민주당의 기득권 세력으로 계속 인정받는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과연 이게 꼭 긍정적일까? 그래도 좋다는 건가? (호남에서 진보정당은 거의 0표에 가깝다).
그리고 두 번째는 비판적 지지다. 이는 대선 캠페인 마지막에 ‘샤이(shy) 이재명’이 아닌 ‘적극적지지’로 쏟아졌다. 이번 대선에서는 비판적 지지론자들 사이에 ‘샤이 이재명’은 없었다(샤이 shy : 부끄러운, 수줍은, 내성적인). 대놓고 적극적 지지 선언이 속출했으니 말이다, 문재인 정권의 실정 앞에 침묵하던 소위 비판적 지지자들이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노골적으로 이재명 후보에 대한 정치적 지지를 공개적으로 표명하고 나섰다. 이번에도 ‘미워도 다시 한 번’을 외쳤다. 또 이번엔 무엇이 그리 다르다는 건지, 자신이 이번엔 다르다고 여기는 긴급성과 정당성을 강변했다. 선거 직전에 교수연구자, 민주화운동 인사, 명망가, 페미니스트 등부터 다양한 직업, 이력과 다양한 과거 이념에서 지금에 이른 이들이 마치 커밍아웃하듯 이구동성으로 나섰다. 대체로 혼자 조용히 표 던졌을 이들이 이런 지지선언 퍼레이드를 하는 이유는, 자신이 이재명 후보를 찍겠다는 정치적 커밍아웃을 위해서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당신도 찍으라는 설득과 압박을 위해서다. 적극적인 선거운동에 나선 것이다. 그건 다분히 중도층이나 주변 지인들, 자신이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으로부터 더 많은 표를 끌어모으기 위해 나선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것을 ‘비판적 지지’라고 부르긴 더 이상 어렵다.
그러니 이 두 개의 상수-즉 첫째 호남의 지역주의, 둘째 민주화이행 이후 참 오래도 지속되는 ‘비판적 지지’가 아닌 ‘민주대연합’의 논리가 이재명을 살릴 수도 있다고 봤는데. 간발의 20만 표 차이로 졌다. 민주대연합, 다 긁어모아도 졌다. 여하튼 그러면 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다 긁어모았는데도 졌다는 것.
*수족을 자르는 심정으로, 다른 후보를 찍고 싶었으나 이재명을 찍었다는 2030 여성들이 있다고 하는데, 그것까지 몰아줬어도 이재명은 졌다. 이들에게 ‘다음에도’를 기대하지 말라. 2030 여성들의 ‘비판적 지지’는 87년 민주화이행 이후 지속돼온 소위 비판적 지지와는 좀 다르길 바란다. 과연 그럴 수 있을지. 그들의 투표가 자유주의 정당을 향한, ’민주 대 반민주 구도‘의 정치를 벗어난 투표행위일지 아닐지. 이들의 투표가 선거 막판에 “여성에 대해서 덜 혐오하는 후보를 뽑자’고 했던 페미니스트 칼럼니스트의 선동적인 글의 의미와 얼마나 다를지. 이들의 투표에 대해선 여기까지만 얘기하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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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민주당이 대선 패배를 보는 방식
하지만 민주당과 충성스런 지지자들은 ”졌다“는 말의 의미에 대해 무게를 제대로 두지 않는다. 선방했다고 하고, 역대 최소 득표 차이라고 말하면서, 민주당이나 그 지지자들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계속 물타기 하고 있다, 남의 당을 탓하고 있다. 언론 탓을 하다가 대중을 탓한다. 정작 자기 눈에 들보에 대해선 티끌인양 한다. 그게 바로 민주당 자유주의 정권의 한계다. 제도정당으로서의 한계다.
즉 87년 6월항쟁과 민주화이행이 부활시킨 보수양당 체제 안에서, 보수 우파의 맹공 앞에 자기 입지조차 잘 유지하지 못하면서 줄곧 무능을 보이다가, 어부지리로 혹은 구조적인 맹점 속에서 계속 생존을 도모하는 앙상한 민주대연합의 이분법 정치, 유권자(시민)들을 인질로 잡아서 하는 인질 정치, 극우를 피하려면 최악을 피하려면 우리를 찍으라는 공포정치. 좌파의 진입을 막는데 우파보다 더 의도적인 봉쇄정치.
이런 정치가 앞으로도 과연 얼마나 유지될까. 이미 균열은 가고 있다.
5. ‘또 다른 패배’의 의미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하는 것은 민주당의 패배가 아니다. 민주당의 패배 말고 ‘또 다른 패배’에 주목해야한다. 민주당을 넘어서려면 이 패배를 더 눈여겨 봐야한다. 말하자면 이번 투표에서 윤석열을 찍은 것이 단지 ‘강남’의 계급투표만일까. 대중의 수준을 탓하려고 하면 탓하고 말면 그만이다. 하지만 좀 더 지형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본다.
윤석열과 이재명 사이에 있는 ‘부동층’. 그들은 중도층일 수도 있고, 대안부재 속에서 부동층들도 있다. 윤석열을 찍은 많은 이들 역시 마찬가지다. 어쩔 수 없어서 민주당을 찍은 ‘비판적지지’도 마찬가지다(비판적 지지 운운하며 적극적 지지를 조직하려 든 이들은 자신의 투표와 선거 캠페인 결과를 고스란히 받길 바란다. 다른 이들에게 윤석열 정권하에서 벌어질 참상을 겪어보라며 저주문을 쓰고 악담을 늘어놓는 것은 참 꼴불견이다. 이미 마음이 떠나는 이들을 향해서 할 말은 아니다. 근데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 다음 5년 뒤를 언제나 기약할 수 있는 계층과 집단은 다르다. 그런 이들이 지금 한번의 선거에 세상이 다 무너진 듯이 말한다. 단지 이 한마디는 하고자 한다. 이제야 선거결과를 보며 희망 없음에 절망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노동자 투쟁하는 이들, 그들과 연대 운동하는 이들은 문재인 정부 내내 그 마음이었다. 앞으로 그 쓰린 마음으로 기억해보길. 누군가는 계속 고통 받고 쓰린 마음 부여잡고 살았다는 것을).
이들에겐 이제야말로 다른 선택지가 필요하다. 더 미룰 수 없는 선택지. 그러나 이번에 동시에 고스란히 그 위기의 징후적인 모습을 드러낸 선택지.
내가 지난 2월 9일 ‘2022년 대선・지선 권력재편기에 대응한 민교협 대토론회’에서 발표한 논문에서 ‘부재’의 위기, ‘불가능성’의 위기로 규정했던 선택지.
그 선택지에 대해서 ‘왜’에 이어서, 이제야말로 ‘어떻게’를 고민해야할 때다.
이후 ‘위기’라는 주제에 대해서 쓸 기회가 있길 바라며, 다음 덧말을 추가하는 것으로 맺으려한다.
6. 덧말: ‘9176명’에 대하여
사회주의 후보 7번을 찍은 이가 9176명. 1만 명을 넘지 못해서, 너무 희소해서, 사람들은 궁금해 하기 시작했다. 이 사회에서, 이 정치지형에서 누가 나 같은 사람일까. 궁금하다는 것이다. 3억 이상 들여서 후보 전술하면서 ‘사회주의’를 표방했는데, 나는 합당과정도 선거과정도 공약도 모두 비판적이었다. 좀 더 잘해야 하고, 미리 준비했어야하고, 그리고 공약은 수정되어야한다고 본다. 솔직히 말해서 결과에 대해서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물론 6월 지선을 앞두고 정신 차린 민주당이 정치공학적으로 지방선거 선거구 개혁에 나서고 소수 정당들을 끌어들이고, 그리하여 그 결과가 조금 나아지면 결과론적으로 대선결과를 다르게 해석할 여지는 열려 있다. 하지만 이는 민주연합의 구도 안에서 어부지리를 얻는 방식이다. 즉 민주연합의 구도도 해체되기는커녕 그만큼 강화된다. 이것이 바로 정의당의 문제였다)
하지만 ‘사회주의후보’라는 그 벽보만으로, 그리고 다른 것들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의구심에도 불구하고, ‘사지선다형’에서 4지로서 사회주의 후보를 과감히 떠올리고, 그를 찍은 9176명은 중요하다. 4지후에 3지선다형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대선 직후 그들이 스스로 나서서, 우리 구역에서 사회주의 후보 찍은 우리 한번 만나요! 라는 이 자연스러운 정동이 이번 7번 후보가 얻은 최대의 소박한 수확일 것이다. 사회주의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이 모임을 조직하는 것.
어디서든 만나길 바란다. 만나서 서로 인사하고 다음이 가능한지 머리 맞대고 소근 소근 속삭여주길 바란다.
* <사파시평>은 홈페이지와 민중언론 참세상에 동시 게재됩니다.
[기쁜소식 2호]
사회적 연대로 희망을 모으는<사파동행> 2호가 2022년 03월 08일 오늘 발간되어 연대자들에게 이메일로 발송되었습니다.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의 소식지 <사파동행>은 격월 둘째주 화요일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소식지를 이메일로 받지 못한 연대자들은 본인의 이메일 계정을 sapafund@gmail.com으로 알려주세요.
소식지를 이메일로 받고 싶은 이들은 위 소식지 클릭하여 “구독신청”을 하거나, 사파기금 정기이체를 신청하면 됩니다.
이메일로 사파기금의 다양한 기금 활동과 행사, 연대소식과 투쟁소식, 다양한 읽을거리로 꾸민 <사파동행>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번 <사파동행> 2호에는 어떤 내용이 수록돼있을지 궁금하시죠.
= 다시 한번 내 동무를 소개하듯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을 다시 소개합니다”가 톱기사입니다.
기금 참여방법과 단체 후원방법에 대한 정보도 눈여겨 보세요.
= 기금지원연대 82번째 공지글도 수록하였습니다. 이번에 어디에 기금 연대했을지 찾아보세요.
또한 농장 ‘지심’과 사파기금이 9년째 함께 하는 ‘여여한 땅의 마음’, 이번에는 6군데 노동자 민중투쟁 농성장에 연대했답니다.
= 그리고 아! 2021년 10주년을 맞이한 사파기금의 10주년 행사 동영상도 나왔습니다. 기금지원하는 곳에 ‘한마디’를 받고서 기금지원해왔는데, 이번에 이 이들이 ‘다시 한마디’를 축하 동영상들로 보내주셨습니다. 연대자 여러분에게 보내는 축하인사이니 꼭 봐 주세요.
= 투쟁 소식이 빠질 수 없지요. 세종호텔 정리해고 투쟁소식과 연대 발언, 그리고 한국 지엠 비정규직 17년의 싸움을 멈출 수 없는 이유에 대해 해고 노동자 진환과 인터뷰 기사를 올렸습니다.
사파기금 활동을 항상 응원하고, 사파기금과 함께 하는 노동연대에 꾸준히 참여해주신 연대자 여러분!
다음 사파기금의 활동 소식도 기다려주세요.
<사파동행> 1호 목차 및 전문 (클릭)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의 기금 지원을 알립니다.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은 사회적 파업에 사회적 연대의 기치로 파업기금을 조성하고, 돈이 모이는대로 노동연대운동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비정규 노동자들과 함께 하는 투쟁에 연대하고 지원한 고 백기완선생 기념관 건립기금 마련 서각구매에 함께합니다. 서각구매 대금으로 지원한 금액은 2백50만원입니다.
고 백기완 선생은 민족주의운동으로 시작하여 민중운동의 대열에서 복무하며 민주화이행이후 보수 양당 구조 속에서 ‘민중후보’로 2번 대선후보로 출마하였습니다. 또 한국의 민주노조운동이 대중조직으로 정립한 2000년이후 신자유주의 속에서 비정규직 대 정규직 이중구조가 고착된이후에 백기완 선생은 비정규직 철폐를 향한 비정규 노동자들의 투쟁에 언제나 가장 많은 힘과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서울 혜화동 통일문제연구소는 점차 노동자들, 특히 비정규 노동자들에게 문턱이 가장 낮은 집이 되었습니다. 그 집을 ‘백기완 기념관’으로 재건하기 위해 비정규 노동자들, 문화 노동자들이 함께 힘 모아 서각 판매를 통한 기금마련에 나섰습니다.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은 ‘비정규직 철폐’라는 목표를 사회적인 투쟁으로 만드는 시도를 한시도 굽히지 않는다는 입장에서, 고 백기완 기념관 건립기금 마련에 서각 구매로 동참합니다. 앞으로 사파기금 사무실에 걸릴 서각 현판입니다. 백기완선생이 쓰고 문정현신부가 조각한 서각은 다음 문구입니다:
“마냥 쓰러질 것만 같애도 눈깔을 똑바로 뜨고 곧장 앞으로 앞으로”.
더불어 꾸준히 사회적파업연대기금에 함께 참여해주시는 연대자들께 연대의 인사를 전합니다.
연대! 투쟁!
2022년 3월 7일
사회적파업연대기금
[기금지원공지 82번째 받는말]
백기완기념관 건축 기금 마련을 위한 서각판매에 사회적파업연대기금 82번째 기금을 지원했습니다. 백기완기념관이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비정규 노동자들과 함께 하는 투쟁에 연대하고 지원한 고인의 마지막 유지를 유지하고 이어나가는, 기념관 이상의 노동자연대의 활동 공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다음은 기금 마련 전시 <기죽지마라> 기획자인 신유아 활동가의 [받는말] 전문입니다.
[받는말]
“백기완추모1주기 기획전시 <기죽지마라>를 기획한 신유아입니다.
2022년 2월 15일 선생님 추모1주기를 맞아 통일문제연구소를 백기완기념관으로 검토하던 중 시설이 낡고 빗물이 새는 실내를 수리 해야한다는 의견들이 모아져 기획전시를 하게되었습니다.
우리는 노동자들의 투쟁의 현장에 지팡이를 짚고 오셔서는 호통치셨던 선생님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호통은 응원의 호통이었습니다.
따뜻한 밥이라도 사먹으라며 봉투를 건네주고 가셨던 선생님을 기억합니다. 힘들다고 꼭 현장에 와주시라고 연락드리면 비가와도, 눈이와도, 한여름 겨울 없이 몸이 허락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셨던 선생님을 기억합니다.
경제적인 이유로 선생님의 공간을 고쳐쓰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이제 빈공간에 선생님은 안계시지만 투쟁하는 노동자가, 연대하는 동지들이 함께 힘을 모아 선생님의 공간을 만들고 그 뜻을 기억하고자함이 이번 전시를 기획한 취지입니다.
서각 36점의 판매 수입은 ‘백기완 선생 기념관’ 건립 기금으로 사용됩니다.
우리는 부자도 아니고 부자친구도 별로 없습니다. 다만 의지와 뜻이 모아지길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해고 노동자였으나 복직했고 여전히 위태로운 노동자도, 자본과 지속적인 대치현장에 노동조합이라는 이름으로 모인 이들도, 대학시절 백선생님과 투쟁현장을 누비던 백발의 어르신도, 선생님의 가족들 모두 이번 전시를 위해 서각을 구매하셨습니다.
특히나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의 후원구입은 여러가지 의미에서 기억에 남습니다.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은 사회적 파업에 사회적 연대의 기치로 파업기금을 조성하고, 돈이 모이는대로 노동연대운동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또한 노동자투쟁에 연대하는 활동가들을 지원하기도합니다. 투쟁당사자의 어려움도 이를 연대하는 사람들의 어려움도 헤아리는 마음이 너무 고마운 기금입니다.
십시일반 사람들의 후원으로 만들어지는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이 백기완기념관 건립기금에 후원한다는 것은 후원한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전달되는 것이기에 더 큰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고맙습니다.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이 앞으로 더 많은 투쟁현장과 연대하고 이를 위해 더 많은 사람들이 후원과 지지를 이어가길 바라며 백기완 노나메기 재단도 함께할 것입니다.
“한발씩, 웃으며, 끝까지, 함께!”
직접이체: 국민은행 012501-04-230250 사회적파업연대기금
CMS : https://www.ihappynanum.com/Nanum/B/6M2FZQRY5J
*단체 후원
직접이체: 국민은행 822401-04-122822
https://bit.ly/3D04xK2
한국지엠 비정규직 17년의 싸움, 어찌 멈추랴
한국지엠창원비정규직지회 해고노동자 진환 인터뷰
글: 김한주 편집위원
17년째 이어지는 비정규직 해고자의 불법파견 투쟁. 회사의 탄압과 무시가 계속돼도, 동료들이 생계 문제로 현장에서 떠나도, 상급단체 노조에서 잊혀져도 ‘잘못된 것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신념 하나로 노동자 투쟁 현장을 벗어나지 않은 노동자들이 있다. 이번 투쟁소식은 한국지엠 창원비정규직지회 진환 해고노동자의 이야기를 담았다.
한국지엠 사측은 지난해 11월 금속노조에 ‘한국지엠 생산하도급 근로자 관련 특별협의 제안’ 공문을 보냈다. 금속노조는 교섭단을 꾸리고 불법파견 문제 해결과 비정규직 해고자 복직을 위한 교섭을 준비했다. 그렇게 2022년 3월 3일. 해고된 지 16년 만에 원청과의 첫 ‘상견례’가 열렸다.
– 투쟁 17년 만에 열린 첫 교섭이다. 어떻게 진행됐나?
오늘(3일) 상견례를 진행했다. 우리는 요구안을 전달했다. 상견례였기 때문에 양쪽 메시지 정도만 오갔다. 사측은 “생산 사내하도급과 만나는 게 역사적”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비정규직을 원청과 아무 관계없는 사내하도급이라고 표현했다. 비정규직과의 고용관계에서 선을 긋는 자본의 관점은 달라진 게 없다. 달라진 건 사측이 처음으로 먼저 만나자고 한 것뿐이다. 이 런 태도 변화에는 배경이 있다. 우리가 2015년에 제기한 근로자지위확인소송(불법파견)이 대법원에 계류 중이고, 곧 결과가 나올 것으로 보인다. 카허카젬 사장을 상대로 진행되는 불법파견 형사재판도 현재 1심 진행 중인데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 앞으로 교섭 과정은 어떻게 바라보나?
일단 회사가 갑작스레 제기한 교섭에 우려스러운 측면이 있다. 불법파견 문제를 희석시키거나 재판을 앞둔 상황에서 문제를 덮기 위한 ‘시간 끌기’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우리는 교섭 제기에 따라 빠르게 노조 요구안을 제출했고, 회사도 자기 제시안을 건넬 텐데, 그 내용에 진정성이 담길 것인지는 두고 봐야 한다. 만약 불법파견 문제를 흐리는 방향으로 유도한다면 회사는 응당의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다음 교섭은 3월 10일에 열린다.
– 해고 17년 만에 교섭 자리에서 만난 사측이다. 그간의 기억이 되짚어보자면?
나는 2005년 조합에 가입했다. 회사는 그 해 일방적으로 나를 해고했다. 당시 지회는 회사에 불법파견 문제를 제기했다. 우리는 비정규직이 아니라 정규직이라고. 같은 공장에서 같은 일을 하는 노동자라고. 그런데 회사는 우리를 해고했다. 우리가 피해당사자인데 왜 해고하느냐고 문제를 제기했다. 이런 것들이 부당하다고 판단했다. 회사는 지금껏 오리발 내밀면서 비정규직 사용은 정당했다고 주장했다. 그래도 우리는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그 결과 대법원, 검찰할 것 없이 모든 국가기관이 불법을 인정했다. 그러면서 사측도 이 교섭까지 나오지 않았을까. 하지만 잘못된 것을 바로잡자고 한 게 이렇게 길어질 줄은 몰랐다.
– 당국이 불법을 인정했다지만 문제를 해결했다고 보기엔 어려울 것 같은데?
그동안 각 기관은 불법파견 판정을 내려놓고 제대로 책임지지 않았다. 아주 미온적으로 대처한 게 지난 세월이다. 당국은 2005년, 2018년 불법파견 시정지시를 내렸는데 그걸로 끝이었다. 오히려 노동부는 ‘회사를 압박할 순 없다’, ‘제재할 권한이 없다’는 등 회피하는 과정을 반복했다. 그 사이 해결을 요구하던 비정규직 당사자들은 또 해고를 당했다. 정부가 회사에게 ‘비정규직들이 지쳐서 떨어져 나가게 하라’는 신호를 준 것과 마찬가지였다.
– 금속노조 차원의 불법파견 투쟁은 어떻게 봤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끈질기게 싸우는데, 이를 제대로 이기기 위해서는 원하청의 힘을 모으는 과정이 필요하다. 하지만 지금껏 금속노조에서 잘 모아지지 않았다. 2017년 말 창원공장 정규직 집행부에서 인소싱을 추진하면서 비정규직은 해고당하고 비정규직지회 파업이 파괴된 바 있다. 금속노조가 대의원대회에서 비정규직을 쫓아내는 인소싱을 하지 말 것을 방침으로 정했는데도 말이다. 방침을 어겼는데 이에 대한 제대로 된 책임 추궁은 없었다. 인소싱으로 비정규직 조합원 50명가량이 쫓겨났다.
– 법률 투쟁에서 느낀 한계는 없었나?
현대기아차 비정규직도 마찬가지 문제일텐데, 일부 조합원은 소송만 쳐다보면서 실제 투쟁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본인이 정규직이 되면 모든 게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이것이 한계이지 않을까. 이를 해결하기 위해 노조 활동과 비정규직, 불법파견 문제를 균형 있게 가져가야 하는데 소송에만 의지한 경향이 있다. 그렇게 해서는 노조의 강화, 발전은 없다. 이 요소들의 균형을 맞추면서 조합원으로서의 자기 투쟁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 제대로 투쟁해서 자기 힘으로 정규직이 됐다면, 그 뒤에도 활동하고 금속노조를 강화하는데 더 큰 역량을 보여주지 않겠나.
– 앞으로의 투쟁 계획은?
먼저 2020년 1월 공정에 빈 자리가 생기면 해고자를 복직한다는 노사 합의가 있었다. 그해 부평비정규직지회에서 20여 명이 복직했고, 그 뒤로 순차적으로 복직했다. 그러다 지난해 11월 창원 조합원이 복직할 자리가 났는데 회사가 막았다. 지난해 12월 부평 조합원 2명도 막혔다. 약속도 안 지키는데 쉽게 믿음이 가지 않는다. 그리고 원하청이 함께 교섭해서 힘을 모으는 게 중요하다. 지금 교섭단은 금속노조, 지역지부, 지엠지부, 비정규직지회로 구성돼 있다. 공동으로 힘을 합쳐서 한국지엠이 제대로 된 해답을 내놓을 때까지 맞서야 한다. 그러면서 노동자의 권리를 지켜나가야 하지 않겠나.
– 사회적파업연대기금 연대자들에게 한마디
비정규직 노동자는 노조를 만들면 폐업을 수시로 겪는다. 1순위 해고자다. 그래서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가 실제로 현장을 바꾸고자 싸우려 하는데 생계 문제로 떠나는 게 부지기수다. 이 때문에 조합원들이 더 힘있게 싸워서 복직하도록 지원하는 게 필요하다. 그런 차원에서 사파기금은 노동자들에게 큰 힘이 되고 있다.
세종호텔노조의 정리해고 철회투쟁이 지난해 12월10일부터 지금까지 진행되고 있습니다. 세종대학교를 거느린 사학자본이 다양한 문어발식 경영속에서 몸피를 키우면서, 수익사업으로 경영하던 세종호텔 노동자들을 코로나19를 핑계로 대량 정리해고를 단행하였습니다. 사회적파업연대기금 권영숙 대표는 지난 3월3일 세종호텔노조가 3월9일 대선을 전후한 집중적인 투쟁을 선포하면서 연 ‘시민사회단체 기자회견’에 참여하고 연대발언하였습니다. 그 전문 요약 간단히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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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정리해고를 철폐시키지 못하여, 한국사회에서 정리해고는 지금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지난 20년간 정리해고 철폐 투쟁이, 결국 일부 노동자들의 원직 복직, 혹은 복직후 퇴직등으로 귀결되면서, 정리해고 철폐투쟁은 다시 원점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 2020년 코로나19가 터졌고, 호텔산업등 서비스업종등 다양한 업종들이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코로나19앞에서 모든 사회와 국가들이, 정부들이 노동자들에 대한 ‘손쉬운 해고’를 쉽게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코로나19가 전지구를 덮친 팬데믹이지만, 노동자 해고를 대하는 각국의 대응은 다양합니다. 노동자 해고를 아예 금지시키고, 나아가 불황으로 가동이 중단된 경우 노동자들에게 월급을 국가가 지불하는등 해고를 막는 다양한 방법들이 동원됐습니다. 팬데믹이 끝나면 노동자들은 다시 일터로 돌아와야하기 때문이고, 산업을 가동해야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한국 사회는 자본이 정리해고라는 칼을 망나니처럼 휘두르는데 국가와 촛불정부라는 현정부는 방조하고 어떤 역할도 하지 않았습니다. 법원도 코로나19 시국에 세종호텔에서 벌어진 정리해고를 당연한듯 인정하는 판결을 내려 우리를 경악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제 앞두고 있는 3월18일 진행될 지노위 정리해고 심문 결과도 우려스럽습니다.
2022년 대선을 앞두고 ‘노동없는 대선’이라고 합니다. 그에 대해서 비판적인 일부는 ‘노동운동없는 대선’이라고 합니다. 아니오. 노동이 없는 대선 아닙니다. 노동에 대한 입장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국힘 후보는 반노동, 노동적대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공약들을 줄줄이 발표하고 있습니다. 민주당 후보는 노동을 안는 듯한 공약들은 실천가능성이 모호하고, 반노동적인 자본을 안는 공약들은 적극적입니다.
그렇게 뻔하게 반노동적이고, 노동존중이 없는 공약들을 남발하는 양대 정당 대선 후보들에게 ‘노동’ 있는 대선을 읍소하고 구걸하고 요청하는 것이 가당할까요? 지금은 노동없는 대선이 문제가 아닙니다. 노동적대적인 대선이 문제이고, 노동자 투쟁없는 대선이 문제입니다.
먼저 당사자인 세종호텔 노동자들은 앞으로 나서십시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들을 도운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싸움을 스스로 책임지고 연대를 구하고 후회없이 싸우십시오. 민주노총은 대선 앞두고 두 세번의 온오프 집회 개최한 것으로 대선 투쟁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이게 최선입니까?
노동자 투쟁없는 대선, 노동자 스스로 쟁취하기 위한 투쟁이 없는 대선을 멈추고, 투쟁으로 스스로 결과를 만들어갑시다. ”
“사회적파업연대기금, 일명 사파기금은 어떻게 출발했고, 무엇을 하나요?”
권영숙 대표 인터뷰 요약
-사회적 파업기금이 뭔가.
“노동자라면 자본주의의 한 축이기도 하지만 파업을 통해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고 집단행동을 해나가는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고 이를 제도적으로 만들어나가는 것을 말한다”
-기금 조성의 계기는.
“부산영도로 달린 희망버스가 보여준 연대를 일회적인 ‘사건’으로 남기지 않기 위해 고민했다. 정리해고는 한진중공업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 이상까지 연대를 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그런 기회를 제공하고 싶었다. 희망버스를 타지 않더라도 할 수 있는 연대 행위를 여러 가지로 만들고 싶었다.”
-파업기금이 필요한 구체적인 이유는.
“조합비 일부를 파업기금으로 모으는 경우도 있지만 한국에는 없다. 이 사실이 여러 가지 문제를 만들고 있다. 쌍용차 투쟁을 보면 된다. 자본에 편드는 친자본주의 국가와 제도정치, 비타협적인 자본의 문제, 이들이 결합한 ‘폭력’의 문제가 있는 한편 ‘돈’의 문제 또한 있다. 돈의 압박 속에서 파업이 형해화되는 경우다. 이뿐이 아니라 파업이 끝난 뒤에 업무방해를 이유로 손해배상 문제도 있다.”
-불법파업으로 규정하는 것도 문제가 아닌가.
“한국의 정부와 자본, 법체계는 파업의 공적 성격을 인정하지 않고 업무방해, 폭력 등을 명분으로 파업을 범죄로 낙인찍고 있다. 그리고 파업이 끝나면 손해배상 소송을 건다. 자유자재로 노동자를 압박한다.”
-파업을 바라보는 한국에서의 특수성 때문인가.
“외국에는 노동법원을 따로 둔 곳이 많다. 노동쟁의는 사적 영역이 아니고 공적 영역 안에서도 특수성이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헌법에도 노동권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비대칭적인 위치에 있는 노동자에게 특별히 부여받은 시민권이다. 그러나 하위 법률인 노동법은 그렇지 않다. 파업을 불법화하고 돈을 이용해 쉽게 무력화한다.”
-돈을 이용해 파업을 무력화한다는 건 어떤 얘긴가.
“쟁의과정에서 노동자들의 생계가 개인의 문제가 돼버린다. 국가와 자본이 그렇게 밀어붙이지만 노동조합에서조차 책임지지 못하고 있다. 이유는 87년 민주화 이후 민주노조운동의 한계에 있다. 70년대 민주노조들이 간헐적으로 파업을 했던 것과 달리 87년 이후에는 상시적으로 파업이 발생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한국의 노동시장은 보호적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파업을 해도 임금을 줬다. 자본은 ‘무노동무임금’을 들고 나왔지만 노동은 92년까지 여기에만 치열하게 저항하느라 제도적 장치로 파업기금을 생각하지 못했다.”
-과거에 파업기금을 생각지 못해 지금 이 상황이 됐단 얘긴가.
“이후 파업은 더욱 장기화됐다. 원래 파업은 대기업 노조가 먼저 나서 평균 2.5일 정도에 끝났다. 이른바 노동의 낙수효과가 있었다. 대기업 노동자의 임금이 6~7% 오르면 중소기업은 20% 가까이 오른 경우도 있었다. 90년대에 실질임금 상승률이 11%가 넘는 해도 있었다. 그런데 갈수록 이런 효과가 없어졌고 임금 인상도 선별적으로 이뤄지게 됐다.”
-DJ, 노무현 때부터 장기투쟁사업장이 늘고 있다.
“이제 파업을 하려면 자기 목숨을 걸어야 하고 인생을 송두리째 파업의 재단 앞에 바쳐야 하는 시대다. 자기 가족의 생계 또한 팽게쳐야 한다. 그런데 민주노총이나 금속노조는 장기투쟁사업장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고 있지 않다. 코오롱 같은 경우 2500일이 넘었고 콜트콜택, 흥국생명, 재능교육 등 많다. 우리나라에서 파업을 하면 버틸 수 있는 최대치는 2개월에서 3.5개월로 나온다. 그런데 길게는 8년까지 투쟁하는데 돈의 압박이 얼마나 심각하겠나. 이 모든 과정이 말해주는 건 한국사회에 노동자의 파업권이 없다는 거다.”
-노동자의 파업권을 보충하자는 뜻에서 기금을 제안했나.
“사회적 파업연대기금은 ‘돈’의 압박에 노동자들이 쓰러지지 않게 하기 위한 연대다. 파업이 필요할 때 파업을 마음껏 할 수 있도록 돕는 연대다. 사실 돈을 준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돈은 대부분 시민에게 피 같은 노동의 대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파기금은 노동자들의 사회적 연대의 의미를 담고 있다.”
-노동자, 시민들에게 있어 사파기금의 필요성은 뭔가.
“‘나는 노동을 하고 있지만 누군가는 노동으로부터 축출돼 파업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중요하다. 신자유주의적 고용시장은 누구나 정리해고할 수 있고 누구든지 희망퇴직자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잠재적인 노동 파괴의 위협에 처해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나대신 싸우는 사람들을 위해 쟁의기금을 만드는 게 중요한 시기이다.”
2012.02.22 <미디어 오늘> 인터뷰 기사
https://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0499
“돈 걱정 없이 파업할 수 있도록 연대 기금 만들자”
제가 이 자리에 선 것은 백기완 선생에 대한 우정과 동지애 때문입니다.
사실 저는 백기완, 이 이를 1980년대 알았을 때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이유는 간략히 3가지였지요. 하나는 백 선생은 백범 김구를 존경하여 1972년 백범사상연구소를 만들었고 그것을 모태로 하여 현 ‘통일문제연구소’를 혜화동에 차렸지만, 저는 백범 김구에 대해서 비판적이었습니다. 둘째는 그가 50대의 나이에 두루마기 자락 휘날리며 냅다 호통치며 활동하는 모습이 영 문화적으로 적응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게 사실 가장 중요한데, 저는 백기완 후보가 1987년 6월항쟁 이후 정초선거에서 ‘독자 후보’로 나서 완주하지 않고 투표일 이틀 전 완주 포기선언을 한 것에 대해서 매우 비판적이었습니다. 백기완 후보가 민주 후보 단일화를 촉구하며 독자(민중) 후보를 마지막에 포기한 것은 사실상 민주화 이행 이후 진보정치가 민주연합정치에 발목 잡히는 첫 사례였기도 합니다. 그 첫 선거에서 독자 후보로 완주했다면 노동좌파 정치의 또 다른 길을 열었을 것이라고 가끔 생각합니다.
그런 백 선생과 제 인연이 제가 미국 유학 이후 한국에 돌아와서 공부만 하는 서생으로 만족치 못하고, 사회적파업연대기금(사파기금)을 제안하고 만들어 노동연대에 뛰어들면서 다시 이어졌습니다. 그전에 ‘진보 지식인 모임’에 가끔 불려가면 뵙고 인사했지만 건성이었지요(사실은 비판적이었지요). 그리고 사파기금 활동을 하면서 제가 가는 많은 노동자 투쟁 현장에 백기완 선생이 계셨습니다. 우리는 아무도 오지 않는 소수 소규모 투쟁 현장에도 함께 있었습니다. 백샘과 저만 참석하는 기자회견도 부지기수였습니다.
추운 날 맨 앞에 앉아있으면 뒤통수에 수많은, 때로는 얼마 안 되는 눈들 앞에 있기에 태도 흐트러지면 안 됩니다. 고역은 생리현상입니다. 춥고 몸은 뻣뻣해지고 엉덩이는 아픈데, 화장실에 가기 위해 그 자리를 비울 수 없습니다. 저보다 백기완 선생은 그런 일들이 얼마나 많았을까요? 그래도 백 선생은 그 자리를 끝까지 지키는 이였습니다. 행진 시작하면서 집회가 정리됐을 때 화장실 가려고 서두르시다가 함께 길거리에 풀썩 앉아버렸던 기억도 있네요. 그 얘기를 백 선생과 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현장에서 만나면서 저는 백기완 선생에 대한 동지애가 싹텄습니다. 그리고 백 선생을 방문하면서 이런저런 과거 얘기를 하면서 우정이 생겼습니다. 1987년 독자 후보 출마를 마지막에 포기한 이유도 따져 물었고 답을 들었습니다. 많은 얘기를 하면서 풀 것은 풀었습니다. 그는 드물게도 우파 민족주의자에서 왼쪽으로 계속, 노동과 함께 하는 길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온 이입니다. 한국 사회가 그를 급진적인 인물로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나이 들어서 그렇게 자가 발전하는 이는 매우 드뭅니다. 대부분은 자신의 성과를 출세와 자리로 보상받으려고 하거나, 좀 더 안온한 삶, 뒤로 물러서는 삶으로 돌아앉습니다.
이제 2022년 대선을 앞두고 변혁과 운동은 더욱 길을 잃었거나 길을 잡지 못했고, 그래서 힘을 모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제가 민교협 노동위원장을 맡기도 했던 2012~2015년 그때도 마찬가지로 중요했습니다. 노동자들이 죽어 나가고 ‘더이상 죽이지말라 비상시국회의’를 만들어 활동하던 때였지요. 그 때 그 시기의 엄중함을 더욱 절감하고, 미래에 다가올 것들에 대한 예비적인 행동을 했더라면 2022년 대선을 앞두고 운동의 지형이 이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백 선생과 함께 그 시절에 여하튼 전선에서 버티자는 생각으로 임했지만, 너무도 불충분했습니다. 버티는 것을 넘어서 도모를 했어야합니다. 하지만 그건 백기완 선생의 몫이 아니었습니다. 그 다음 사람들 몫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백 선생을 추모하는 방법은 묘역을 단장하고, 주기마다 기념행사들을 하는 것으로 멈추는 것이 아닙니다. 백 선생이 현장에 버텼던 것처럼 자신의 온 힘을 다하여 현장에서 버티고 끝까지 항상 함께 하는 것, 그리고 나아가 시대의 엄중함을 긴급함으로 담아서, 길을 찾고 길을 만들어나가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백기완 1주기 행사 제목이기도 하고, “주어진 판을 깨고 새로운 판을 일구는 이”라는 뜻을 담은 ‘새뚝이’라는 말처럼 말입니다.
백 선생을 2019년 2월 14일, 바로 3년 전 어제죠, 뵈러 갔었습니다. 세뱃돈 만 원 받으려고요. 그게 그와 대화를 나눈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백 선생이 제가 방문한다고 해서 무슨 말을 해줄까 미리 고민했다면서 이 말을 해주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살얼음판을 걷는 사람은 아래만 보지 하늘을 보지 않는다”.
우리 아래만 보지 말고, 하늘을 봅시다.
고맙습니다.
2022년 2월 15일 고백기완 1주기에 마석 모란공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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