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숙(노동사회학자, 사회적파업연대기금 대표)

“군인으로 살다 죽고 싶다”고 하던 변희수 하사는 떠나가고, 집행될 수 없는 재판 결과만 남았다. 대한민국 육군이 성전환후 남성 성기의 부존재를 이유로 그에 대해 내린 심신장애로 인한 ‘전역처분’은 부당하니 취소하라는 것이다. 2021년 10월 7일 법원이 판결했다. 그가 강제 전역된 지 624일만이다. 하지만 그는 이미 지난 3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사람은 죽고 없는데, 그가 삶과 죽음으로서 밝혀 달라고 이 사회에 요청했던 ‘정의’는 이렇게 뒤늦게 실현되었다고 해야 할까. 그런데 과연 이런 것이 정의인가?

“정의”라는 말과 “법”이라는 말을 하나의 단어로 통용하는 국가 언어가 꽤 있다. 대표적으로 법철학과 법이론을 거의 정초하다시피 한 독일어에서 recht는 법을 의미하지만, 정의, 그리고 나아가 권리까지 다 의미한다. 법, 정의, 권리가 모두 가족유사성 속에 어의 전화되고 있다. (반면 프랑스어에서 droit는 법이기도 하고 권리를 의미하기도 한다. 프랑스어에서 정의를 뜻하는 단어는 영어와 다름없이 justice 이다. 영어의 경우 법은 law, act등으로 표현되고, 권리는 right라고 부른다. 한자어에서 법은 法인데, 동시에 법칙, 가르침, 모범의 뜻과 중의적이다. 결국 한자어에서 법이란 단어가 훨씬 더 추상적이고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법칙부터 법률까지. 이런 이유를 유추해보자면, 근대에서야 국민 국가가 형성되고 ‘국민’ 법을 발견하고 국가적 법전을 정초한 유럽과 이미 기원전부터 법치국가였던 중국 등 한자권에서 당연히 법이 의미하는 바는 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애초에 정의는 법과 무관하다. 위의 법이란 단어의 기원에서 드러나듯이, 근대의 법이 정의를 독식하고 참칭하면서, 정의는 점차적으로 정의로움으로부터 분리되었다. 결국 정의와 법이 하나의 단어가 되었다. 정의가 법을 의미하게 되면서, 즉 법=정의가 되면서 한 단어에서 두 가지 뜻이 가능해졌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이 아니다. 근대 자본주의의 발전과 국민국가의 출현 속에서 실정법이 쓰여지고, 국민이라는 법 적용 대상이 만들어지고, 시민의 권리 개념이 조금씩 부르조아지로부터 남성 노동계급으로 확장되면서 일어난 역사적인 현상인 것이다. 그것을 법의 어원적 계보학이 드러내고 있다.

내가 다닌 대학 건물 앞에는 ‘정의의 종’이 있었다. 80년대 법대 교수들이 학내 시위 진압에 동원돼 나와 도열해 섰던, 바로 그 비루하고 수치스러운 학문의 시절. 그들 선생들이 가르쳤던 것은 정의가 아니었다. 분노한 학생들은 정의의 종에서 종의 추를 빼버렸다. 그렇게 항의한 것이다. 정의의 종은 더 이상 울릴 수 없었다. 마치 80년대 초 서울대 아크로폴리스에서 학생들의 집회를 막기 위해 가시가 많은 어여쁜 장미꽃들을 심었을 때, 분노한 학생들이 맨손으로 장미를 뽑았듯이. 그리스 아테네 민주주의에서 이름을 딴 아크로폴리스라는 광장에서 벌어진 얼마나 황당한 상황인가 (그러고 보니, 시위를 못하게 하기 위해 화단을 꾸미는 것은 80년대 초에 이 학교에서 맨 처음 시작했는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민주화 이행 이후 법대 앞에 세워진 ‘정의의 종’에 추를 달아서 복원했다고 한다. 하지만 무슨 의미일까. 이미 정의가 법에 굴복한 세상에서 정의의 종이란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어쩌면 차라리 그 때 80년대 전반기 권위주의 체제하에서는, 정의와 법의 차이를 명확히 나눌 수 있었다. 법적 정의가 현실의 정의로움과 하등 무관하다는 사실은, 아무 논쟁거리도 될 것도 없이 명명백백히 현실 그 자체로부터 지속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때였다. 사회정치적 현실은 이른바 법적 정의 따위의 현란한 법적 용어와 뿌연 법정의 모습을 거쳐서 보여 질 수조차 없었다. 이 때 소위 법조계, 법복 귀족들은 ‘권력의 주구’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명확히 보였다. 바로 그들 80년대의 검사들이 지금 이름이 다시 운위되는 곽상도나 김기춘 따위의 인물들이다.

해서 당시 법대생들은 사법고시를 보기 전에 자신의 정체성을 탈탈 털어봐야 했다. 과연 이런 체제하에서 법으로 밥을 벌어 먹어야할까 하는 문제. 과연 법이 ‘밥’에 우월할 수 있는가의 문제 등까지 고민하고 고민하면서 말이다. 물론 그런 고민을 했던 소위 ‘운동권’은 당시에도 학생들 중 일부, 소수에 불과했다. 그 대학을 나온 나경원 등은 아예 운동에 적대적이었고, 지금 정치인인 원희룡이나 조국은 그 때는 분명히 운동권이었으나 지금은 기득권 카르텔의 일부가 되었고, 아니면 여전히 지금도 민주화투쟁을 하는 양 자신을 현시하고 있다. 지금 민주당의 대선 후보인 이재명은 검정고시를 거쳐 1982년 중앙대 법학과에 들어가서 1986년에 사법고시 합격한 전력을 보니, 이 사람은 70년대 말 엄혹한 시절에 10대 노동자로 6년을 살았지만, 결국에는 그 노동자로서의 삶은 현실의 힘은 출세해야겠다는 전력 질주로 나타났구나 짐작할 뿐이다. 1982년과 1996년 그 시절이 어떤 시절이었는가를 생각하면 말이다.

하지만 시절은 바뀌었다. 이제 민주화이후의 민주주의 사회에서 법치주의와 법의 지배에 길들여진 인민들은 정의를 법을 통해서 매번 확인받고자 한다. 아니 인민들은 갈수록 법정이 법의 이름으로 정의를 정의하도록 만드는데 익숙해지고 있다. 하지만 법적 정의는 여전히, 그리고 전혀 정의롭지 않다. 특히 ‘법적 시간’은 사회적 시간이 아니다. 그러면서 법적 시간은 사회적 시간을 구속한다. 또 법을 활용하고 농단하는 자들, 소송을 지배하는 자들은 가진 자들이다. 권력을 가졌고, 거대한 사적 재산을 가진 자들이다. 그들이 최종적으로 법의 시간을 지배하고 있고 그 시간을 경유하여 소위 법적 정의가 실현된다.

근데 여기에는 뭐 대단하고 특별한 트릭이 있을 필요가 없다. 그냥 단지 재판을 위한 절차와 재판 일정만으로도 법의 시간은 이미 가진 자들의 것이 된다. 법원의 재판은 느리게 진행되고, 재판을 하는 긴 시간동안 약자들은 고통스럽게 견뎌야한다. 그런 가운데 법적 정의는 사회적 시간을 왜곡하고, 한 사람의 소중한 생의 시간을 감금하고, 급기야 때로는 그 시간으로 사람을 죽이는데 일조하기도 한다. 예컨대 부당노동행위에 대한 법적 판결은 한없이 늦게 나온다. 그조차도 판결은 판사에 따라 오락가락 춤을 춘다. 삼성전자 백혈병 환자들의 죽음에 대한 판결도 한없이 늘어졌다. 그 사이에 수없는 사람들이 죽었다. 하지만 돈과 시간이 많은 자본은 급할 것이 없다.

이 현상은 이 사회 안에 권력과 돈과 빽을 가지지 못한 모든 이들에게 동일하다. 법의 시간은 사회적 시간에 대해서 한없이 무관심하고, 잔인하며, 형식적이고 군림한다. 그런데 그것은 그 자체로서 가진 자들에 한없이 유리한 시간이다. 자본주의 국가에서 법은 가진 자들의 것이 되고 만다. 법은 멀고 주먹이 가까운 것이 아니라 법은 멀고 정의도 멀다.

흔한 법언은 ‘법은 사회의 최소한’이라고 가르치고 있지만, 아니다. 법은 단지 사회의 거울일 뿐이다. 우리가 정치적으로 정립하고 우리가 정치적으로 세워지면, 법은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며 결국에는 따라올 뿐이다. 수많은 법조문과 법을 둘러싼 해석은 과연 법을 세우는 사람들이 과연 누구인가를 질문하게 만든다. 국민인가, 인민인가, 혹은 판관과 대리인들인가. 또 흔한 법언은 “법은 정의를 세운다”라고 하지만, 아니다. 법은 정의를 뭉개고 정의를 희석시키고 정의를 왜곡시킨다.
그래서 우리는 정의를 넘어서야 한다. 사법적으로 포획된 정의담론을 넘어서서, 사회적 연대의 담론, 동맹의 담론을 구성해야한다. ‘우리’를 재구성해야한다. 배제와 포섭을 넘어선 ‘우리’의 정치학을 구성해야한다.

변희수는 죽었다. 변희수는 죽었다. 이 사회는 그를 살리지 못했다. 이 사회는 그가 살만한 사회가 못되었다. 그리고 법은 멀고, 정의도 멀다. 사회적 정의를 세우지 못하고, 법적 정의라는 이름 안에 갇힌 사회가 그가 죽음을 선택하는데 일조했다.
변희수 그가 법도 하지 못한 일을 하고 죽었다. 그는 정의는 법정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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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세상 기사게시판 :: 기사 :: 정의와 법, 혹은 법의 시간 – <font color=”red”>[사파시평]</font> (newscham.net)

권영숙 (사회학자, 사회적파업연대기금 대표) 

  ‘다 거기서 거기’라고? 아니다. 나라마다, 집단마다, 그리고 개인마다 사람의 몸을 보는 시선과 몸을 두는 방식은 의외로 다양하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바뀌기도 한다. 역사적이라고까지 말할 수도 있겠다.

어떤 사회에선 낯선 사람에게 시선을 둘 때 사람을 정면으로 뚫어지게 보는 것이 심한 실례이고, 특히 여자들을 위아래로 훑어보는 시선(gazing)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이다. 나는 이를 여러 나라 사람들이 모인 뉴욕에서 다양하게 경험하고 관찰할 기회가 있었다. 얼마나 다양한 몸에 대한 시선과 몸을 두는 방식들이 사회적으로 가능하고 실제로 수행되고 있는지, 이 글은 일종의 인류학적인 참여 관찰의 결과를 바탕으로 두고 있다.

말하자면 사회적 시선의 사회학이라고나 할까. 사람에 대한 시선 처리가 얼마나 사회적이고 문화적이며 국가-특정적(nation-specific)인가, 즉 장소성을 가지는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할 수 있는 것이다. 사회적 시선두기라는 행위는 시간이라는 변수 속에서 항시적이지 않으며, 지금의 관습이 언제까지나 지속할 것이라고 확언할 수 없다는 점에서 ‘시간성’을 가지기도 한다. 사실 지난 3-4년 사이에 한국에서도 젠더 문화와 젠더 정치와 관련해 얼마나 급격한 변화가 이뤄졌는가 말이다. 지금은 80년대와 다르고, 90년대와 다르고, 2010년대와도 다르다. 특히 지난 5년간 #미투(나도 고발한다) 캠페인 전후로 젠더관련 이슈와 태도는 큰 변화를 겪었다.

하지만 사회적 시선의 관행이 어느 사회나 쉽게 바뀌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문제화의 과정, 사회적 감수성,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3가지 축을 경유하면서 사회적 문화가 바뀐 결과다. 특히 젠더(혹은 트랜스젠더)에 관한 문화적인 감수성이나 사회적 태도, 무엇이 수용 가능한 언행인가는 매우 미시적인 사회적 관계에 기초한다. 때문에 그 변화의 범위와 속도는 점진적이기도 하고, 그러다가 걷잡을 수 없이 한꺼번에 변화의 물결이 몰려오기도 한다. 따라서 한국사회도 서서히 바뀔 것이다. 지금 아무 것도 아니라고 여겨지는, ‘다 거기서 거기’라고 치부되는, 문제로 취급되지도 않던 일들이 중요한 사회적인 쟁점이 되고, ‘문제화’되고 있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 되고 있다. 사적인 것이 사회적인 것이 되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러한 문제화는 그에 대한 기존의 사회적 감수성과 충돌하게 되고, 결국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논쟁을 거치면서 사회문화로 정착되거나 정착되지 않건 간에 바뀔 것이다.

윤석열 씨의 몸에 대해 홍혜은 씨가 8월 12일 경향신문에 쓴 기고글에서 “언론 카메라 앞에서도 쩍 벌어진 그의 다리에서는 무엇을 읽을 수 있을까? 혹자는 법조계 출신 중년 남성의 오만한 태도 문제로 보기도 하지만, 내 주변의 체육인, 의료인들은 허벅지 안쪽 내전근의 실종과 지나친 복부 비만이 근본적인 문제일 수 있다고 본다”라는 단락을 두고 나오는 예민한 반응들도 그렇다. 그 예민함이 애초에 타인을 의식하는 예민함, 그리고 그런 행동이 타인을 불쾌하고 불편하게 만들고 있는 상황에 대한 예민함으로 앞서 발현됐으면 얼마나 좋을까. 특히 여성의 몸에 대한 공공연한 평가에 놀랍도록 둔감했던 것과 대비돼 이런 예민한 반응들이 흥미로우면서 안타까웠다. 왜 이런 예민한 사회적 감수성은 유독 이런 식으로 발현될까? 만시지탄, 즉 너무 늦은 반응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이런 사회적 예민함을 진작부터 가졌어야한다. 이것이 내가 말하고 싶은 요지다.

예컨대 여성들, 특히 한국 사회에서 태어난 여자들은 얼마나 오랫동안 자신의 몸에 대한 시선들과 말들을 참고 살아야 했나. 불편하고 불쾌한 표정조차 짓지 못하고, 설령 그런 표정을 지어도 얼마나 사소하다고 무시당했는데. 나아가 표정을 짓다 못해 말 한마디 하는 걸 용기내야만 했는데…. 그렇게 사소한 것들에 목숨 거는 것처럼, 혹은 그런 비아냥을 뚫고서라도 불편함과 불쾌함을 말했어야하고, 사소함에 대한 예의를 두고 정치적인 논쟁을 해야 했는데. 바로 그 ‘몸’이라는 걸 두고 말이다. 몸에 대한 시선이나 품평을 두고 말이다.

몸이 왜 문제가 아닌가. 몸이 문제다. 사회적인 몸이 문제다.

그리고 여성의 몸은 이미 언제나 문제였다. 사회적 몸이었다. 개인적인 몸으로 보호되지 않았다. 그러니 무엇이 그리 새삼스러운지 모르겠다.

여자들의 몸이 남자들의 눈요깃거리로 마구 던져지는, 방송 카메라고 낯선 행인이고 민망할 정도로 쳐다보고 품평하는 것이 예사인 사회에서 말이다. 심지어 대통령조차 외모와 몸매를 두고 면전에서 품평을 당하는 사회가 바로 한국 사회다. 집권당 중진들이 청와대 당정 모임에서 박근혜 대통령 면전에 대고 외모를 품평하는 한국 사회다. 독신인 여자 대통령에게 ‘처녀’ 운운하는 말들이 버젓이 공적인 자리에서 회자하고, 그 평가 대상인 사람은 설령 그가 대통령이라도, 마치 사회적 규범이 잘 내면화된 인간이라면 웃으며 넘어가야만 그 인성에 특별한 문제가 없다고 간주되는 사회다. 대통령 박근혜도 그렇게 넘기고 말았다. 불쾌한 표정 하나 짓지 못하고 말이다.

바로 그런 사회문화에 대한 판박이 미러링도 아니고 말이다. 타인을 억압하는 위계적이고 군림하는 몸에 대한 비판 한마디가 뭐 그리 불편하다고 이 난리인가 싶기도 하다. 이럴 양이면 지금껏 언제나 호사가들의 품평거리가 되고 남자들의 사회적 시선에 발가벗겨지고, 면전에서 자신의 몸이 끊임없이 품평당하던 여자들의 경우 백번, 천번 난리가 났어야할 것이다.

그러니 몸이 왜 문제가 아닌가. 몸이 문제다. 사회적인 몸이 문제다. 다 같이 인정하자. 그리고 타인의 몸에 대한 품평과 평가가 얼마나 예민하고 문제적인가를 이 기회를 통해서 십분 깨달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한껏 예민해진 사회적 감수성과 정치적 올바름이 평등하게 골고루,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할 것 없이, 대상을 차별하지 말고 확산되길 바란다.

또한 이 해프닝을 통해서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이라는 개념을 다시 살려내길 바란다. 그 개념은 그렇게 목욕물과 함께 아기를 버리듯 내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정치적 올바름은 다수가 아닌 사회적 소수자를 위한 안전망이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겐 ‘공공연히 하지 말아야할 말’이 주는 안전막이 얼마나 든든한데 말이다. 속으로 할 말이 있고, 뒤에서 할 말이 있고, 페이스북 ‘따위’에서나 쓸 말이 있지 어찌 신문 칼럼에 버젓이 남자의 몸에 대해서 썼냐는 말에 대한 얘기다. 그렇게 신문지상이나 방송, 공적인 언로를 통해서 할 말들을 구분하는 것, 공적인 자리에서 할 말 안할 말 가려서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예민함, 그것을 남자 윤석열 씨에만 적용하지 말고 이 땅의 여자들, 소수자들, 남녀노소 모두에게 평등하게 적용하길 바란다. 몸이 그렇게 문제적이라면 말이다. 타인의 몸에 대해서 말할 때에는 부디 예민한 사회적 감수성과 정치적 올바름을 모두의 기준으로 삼길 바란다.

 

[사파논평]은 민중언론 참세상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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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숙(사회적파업연대기금 대표, 사회학자)

 

  8월 2일 현재 원주 건강보험공단 앞에서는 1,100명의 고객센터 비정규 노동자들- 주로 여성 기혼 노동자들-이 파업 중이다. 건강보험고객센터 노동자들의 3차  파업은 이날로 33일 차를 맞았으며, 이은영 수석부지부장의 단식은 11일째다. 이 폭염 속에서 여성노동자들이 노숙 농성 중이다. 화장실 사용이나 출입도 어렵고, 경찰의 언어폭력에 시달리면서도 이들은 꿋꿋이 온몸으로 외치고 있다. 건강보험공단에서 5,000여만 국민고객의 개인정보를 다루는 고객센터 노동의 직고용이야말로 보건정책과 건강보험의 사회공공성이기도 하다고. 건보공단 김용익 이사장은 정규직 노동자들이 반대한다면서 비정규 여성노동자들과의 직접교섭에 대해서 시종일관 비협조적이다. 문재인 정부는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를 대선 공약으로 선언해 놓고 그 수사학적인 효과는 다 누려놓고서, 임기 끝나기 전에 그 공약을 실행하도록 실천하고 나선 건강보험공단 고객센터 노동자들의 투쟁을 공권력으로 막아서고 있다. 노동공약은 마음대로 쓰고 버리는 카드였구나.

예를 들자면 이런 이슈 말이다. 도쿄 올림픽에 참가한 양궁선수 안산의 숏컷에 대한 시비가 심각하지 않다거나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온통 안산의 숏컷 헤어에 대한 이슈가 더 지배하고 다른 것들은 희미해져 가는 사회적 어젠다의 풍경이 참으로 문제적이라는 말이다. 사회적 어젠다 세팅이 ‘제로섬’으로 귀결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이야말로 지배체제가 가장 선호하는 여론정치의 풍경일 것이다.

2. 정체성의 정치와 사회적 가치의 정치도 분별이 필요하다.

윤석열 -우파정당 ‘국힘’으로 들어갈 가능성이 당연히 뻔하게 높았지만, 어디에도 당 소속을 두지 않은, 전직 정치인도 아닌, 일개 전직 검사(출신 검찰총장)가 한국의 내년 대선을 앞두고 갑자기 1, 2위 후보를 다툰다는- 그 희한한 후보에 대해서 말들이 많다.

근데 그의 부인을 두고 온갖 진상짓들(미안하지만 내 눈에는)이 창궐한다. 그의 부인이 한때 술집 마담이었다네, 어떤 검사와 살림을 차렸다네, 그의 논문이 엉터리라네. ‘**의 남자들’ 명단이 쓰여진 벽화가 서울 어느 책방 벽에 그려지고 지워지고 또 그려지고 지워지고 있다. 그러면서 윤석열 지지파-국힘과 윤석열 반대파-민주당 사이에 대선정국 이분법적 구도가 휩쓸고 있다. 예를 들자면 이런 이슈 말이다. 근데 이런 일들이 윤석열이라는, ‘정치인이 되려는 전직 검사’의 정치적 성향과 능력과 입장을 평가하는데 무슨 상관인가?

그러던 중에 내 보기엔, 월척 하나가 나왔다. 윤석열 그자가 87년 이한열이 최루탄 맞고 쓰러지는 그 유명한 사진조차 알아보지 못하고서, 이게 “부마(항쟁)이냐?”고 묻고, 자신이 그때 79년에 대학 1학년이었다는 둥 헛소리를 한 것. 그것이 YTN방송 ‘돌발영상’에 찍혔다고 한다(각자 찾아보시길 바란다).

여기서 우리는 많은 정치적 상상력을 발휘해서, 중요한 정치적 해석을 해낼 수 있다. ‘줄리’보다는 윤석열이다. 김건희보다 윤석열에 집중하자. 당신의 정체성을 정확히, 그리고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드러내는 것은 윤석열 검사와 결혼하기 전 김건희라는 자의 이전 전력이 아니라 윤석열의 과거 전력이다.

부디 헛발질 좀 그만하고 핵심에 집중하자. 윤석열을 진짜로 문제 삼고 싶다면 말이다. 그런데 과연 그렇게 될까? 윤석열 부인에 대한 관심은 다분히 ‘정치공작’적으로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건 정적을 무너뜨리려는 나름 정치투쟁이고, 내년 대선의 향배가 결정될 때까지 그 후보들과 그 지지자들에 의해서 사라지지 않을 공산이 크다.

3. 여론조사를 여론조사 해봐야 한다.

이재용이냐 이석기냐. 아니면 이재용이냐 이재용이냐. 이도 또 하나의 관심사다. 이석기 석방운동은 일단 옆으로 두겠다. 국가보안법을 철폐해야 한다. 이석기 석방은 그 안에서 판단되어야 한다.

근데 감옥에 있는 삼성그룹의 후계자 이재용은 어떻게 할 것인가. 드디어 ‘여론몰이’가 시작했다. 그런 가운데 여론 조사 ‘기관’ 네 군데가 합동 조사를 했다는 결과가 묘하다(왜 한국은 여론조사를 밥벌이로 삼는 민간기업을 굳이 ‘기관’이라고 표현할까). “이재용 8·15 가석방, 찬성 70%…전직 대통령 특사는 반대 56%” 아주 절묘하지 않은가 말이다. 한국의 여론조사기관은 정치적인 문제에 대한 ‘해법’까지 제시하는 역할을 한다.

첫째, 이재용에 대한 특사가 아닌 가석방을 질문하고 70%가 찬성했다는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둘째, 효용 가치가 떨어진 전직 대통령은 특사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다는 설문조사 결과를 내놨다. 뭐 이분은 병원을 자주 들락날락하면서 자신의 두 번째 감옥으로 삼고 있으니 당분간(즉 다음 정권 전까지) 이렇게 보내도 좋다. 아니, 다음 정권을 국힘이 가져가기 위해서라도 박근혜 씨는 당분간 감옥에 있는 것이 정치적인 힘을 강화하고 자신의 역할을 도모하는 방법일 것 같기도 하다.

반면에 삼성의 이재용은? 소위 국민적인 감정은 박근혜 특사만큼 이재용 특사에 대해서 부정적일 텐데, 그러니 순서대로 일단 ‘가석방’부터 하자는 설문을 내놨다. 아, 그렇게 가석방해두고, 다음 3.1절쯤에 특사 단행하면 아주 맞춤이 되겠구만. 재벌을 향한 문재인 정부의 그 지독하게 모호한 애정공세에 있어서 결정판으로 해도 좋겠고. 혹은 차기 정권이 특사를 단행해도 재벌과의 관계를 위해서 나쁘지 않다. 대선 때마다 등장하는 대한민국이라는 민주공화국과 자본주의의 관계는 수감된 재벌들의 석방, 사면 여부를 통해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에 합당한 절묘한 여론조사 결과가 나오는데, 흥미로운 것은 이런 식의 여론조사와 보도들이 터져 나오면서 이재용 씨가 만기 출소하는 것은 아예 선택지에서 사라지게 된다는 점이다. 진짜 여론조사라면 이재용의 만기 출소에 대해서 가부를 묻거나 적어도 선택지로 제시했어야지.

4. 맺음말

이것으로 관심이 온통 쏠리고 다른 것들이 지워지고 잊혀지는 것, 그것이 여론의 생태학적인 특징이다. 이른바 ‘사회문제론’적 시각에서는 그에 대한 많은 연구들이 있다. 다양한 문제들 중에 어떤 문제가 ‘사회문제’화 되는가에 대한 연구들이다. 하지만 이로 인한 문제점도 심각하다는 비판적인 인식도 뒤이어 제기된다. 즉, 이것에 관심을 쏠리게 하면서 다른 것들을 덮는 것. 그것이 이른바 사회문제와 사회어젠다 세팅이 가지는 생태학적인 한계, 즉 더하기와 빼기를 하면 결국 ‘제로섬’(zero sum)이라는 것이다. 사회여론과 공론이 관심을 가지는 범위와 동기는 제한적이고 따라서 어떤 어젠다와 가치가 득세하면 다른 가치와 어젠다에 대한 관심과 동기부여는 줄어든다는 것이다. 인간사회에 대한 이런 생태학적 접근은 과연 맞을까?

분명히 무엇을 ‘사회문제’로 선택하느냐는, 단지 구조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정치적이고 문화적이기도 하다. 음주가 사회문제로 된 것은 오래된 일이 아니다. ‘빈곤’이 사회문제로 취급된 것도 오래된 일이 아니다. 그리고 여전히 빈곤과 불평등을 사회문제로 보지 않는 인식들이 강하다. 즉 빈곤은 나라님도 어쩔 수 없다는 경구도 이를 사회문제로 보지 않는 시각이다. 또 불평등은 인류사회에서 사라질 수 없는 ‘자연적인’ 상태라는 식으로 말하는 맬더스 주의적 접근이 지금 불평등을 말하는 담론들에도 여지없이 스며들어 있다.

최근에는 이는 사회적 가치를 둘러싼 갈등과 대립에서 가장 극명하게 나타난다. 어떤 면에선 우익 포플리즘이 사회적 가치를 둘러싼 논란과 담론전투를 벌이면서, 많은 소수자 프레임들이 차용되고 악용되고 있기도 하다. 어떤 때는 의도적으로 소수자 차별과 혐오, 폭력을 조장하고 동원하면서 반소수 다수 동맹을 만들어낸다. 또 어떤 때는 의도적으로 소수자집단의 인물을 발탁하고 상징적인 인물로 내세우면서 자신들의 시각을 세탁하고 타자를 공격하는 수단으로 삼는다. 그리고 이는 소급하면 70년대 말 80년대 초 신보수주의로부터 연원하는 오래된 통치전략이기도 하다. 스튜어트 홀은 이에 대해서 영국 대처 정부의 통치체제에 대한 중요한 사회문화연구 저작을 내기도 했다.

결국 의도적으로 차별과 혐오, 증오행위를 부추기고 그것을 다시 여론정치 속에서 ‘증폭’시키고 그러면서 이분법적 구도를 만들고, 다른 중요한 사안들을 희석시키거나 새로운 배제의 틀을 만들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체성의 정치와 사회적 가치의 담론투쟁이 가지는 양면성에 대해서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특히 멀티미디어의 시대에, 대중은 끝없이 가짜뉴스에 현혹될 뿐 아니라, 뉴스를 만드는 과정에서 대중 그 자체가 중요한 ‘요소’로 동원되기도 한다.

고로 사회적 가치를 누가 만드는가. 그리고 누가 담론과 여론을 주도하는가. 이 광활한 사이버 세계에서, 이렇게 많은 ‘멀티미디어’ 속에서, 무엇에 대해서 내 관심을 두고, 내 시선을 보내고, 내 입을 열고, 내 손을 움직일 것인가. 욕하고 싸우면서, 관심을 기울이는 사이에 무엇이 사라지고 무엇이 남아 있는가. 프레임과 담론의 이중성에 대해서 신중히 진지하고 복합적으로 바라봐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사회적 어젠다 세팅이 ‘제로섬’으로 귀결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이야말로 지배체제가 가장 선호하는 여론정치의 풍경일 것이다.

 

[사파논평]은 민중언론 참세상에도 게재됩니다.

한미 동맹의 정치적 ‘부등가’ 교환과 K-국가주의의 허상
: 문대통령 방미 결산과 자유주의 정부의 대외정책

1, 문 대통령 방미(2021.0522-23)에 대한 손익 결산서를 요약하면
– 한미 동맹강화, 중국으로부터 이탈, 미국에 더 다가감. 대만 문제 거론, 쿼드 안보협의체에 의미부여, 반도체 전자산업 등 네트워크 동맹 참가. 한국 재벌들 44조 미국 현지 투자. 미국 대북특별대표 성김 임명, 주한 미사령관 한국군 해외 파병 가능 시사. 암참(주한 미국 상공회의소) 이재용 사면 촉구.
– 미사일 (개발) ‘주권’ 확보. 미국 정부 미군 주둔지 한국군 전원 55만 명분 백신 배급.위에 열거한 항목들 가운데 ‘주권’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왔다. ‘갑툭튀’일까? 여하튼 전체 상황을 들여다보면, 이 단어는 확실히 초현실적인 언어 구사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국제관계에서 현실주의적 시각에서 보면 한국과 미국 양국은 서로(국익과 집권정부의 정치적 이해 양자)의 필요에 의해서 일종의 ‘거래에 의한 교환’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이것이 한미 양국 관계에서 언제나 그랬듯이 심각한 ‘부등가 교환’이라는 점이다. 다음을 통해서 보자.2. 해석이번 문 대통령의 방미 성과는, 내년 3월 9일 한국의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현 민주당 정부에게 매우 절실해진 북한 카드를 위해서라고 하기에는 너무 많이 미국에 기울었다. 아니 중국으로부터 많이 떨어져 나왔다. 이렇게 하여 조선일보 말대로 “한미동맹을 복원했다”는 표현이 얼추 맞다고 볼 수 있을 정도다. 우선 중국과 외교를 고려하면 절대 언급하지 말아야할 대만 해협을 적시했고(이는 마치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하는 것과 비슷한 효과를 낸다), 쿼드 군사네트워크도 “지역 다자주의”라는 말로 에둘러 긍정적으로 언급했고(쿼드는 미국이 일본, 인도, 호주와 결성한 비공식 안보협의체이며 중국은 이를 인도·태평양판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로 보고 있다), 마지막으로 한국 재벌들은 미국 국내경제에 물경 44조를 투자하고 미국 주도 반도체 전자 인터넷 등 ‘네트워크 동맹’에 한국도 동참하겠다는 의사를(이는 결국 경제적으로 중국보다 미국 주도의 경제질서와 국제분업에 한 축이 되겠다는 말이다) 공개 선언을 통해 밝혔다. 근데 이 모든 것이 ‘중국’을 향하고 있다. 아니 미국의 대중 정치경제군사적 포위 전략에 함께 하는 것이다.그리고 문재인 대통령이 임기 내에 협상 테이블에 올려놓고 성공시키겠다던 전시작전권 이양은 아예 폐기됐다. 대신 ‘미사일 주권’을 가져왔다고 말한다. 1979년 미국이 일방적으로 만든 ‘미사일지침’에 따라 한국이 이른바 사경거리 8백 킬로 이상의 미사일을 만들지 못해온 현실이라면, 이는 한반도, 아니 남한 자신의 영토를 커버하는 미사일 개발도 그동안 하지 못했다는 것인데, 그 지침의 해제를 두고 ‘주권’의 회복이라고 말하는 건 참으로 민망한 일이다. 내년 대선의 유력한 여당 후보인 이재명 경기도 지사(더불어민주당) 역시 다를 바 없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제 미사일 기술과 관련된 모든 제약이 사라짐으로써 우리나라는 주권국가답게 자유로운 연구‧개발에 나설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게다가 이 미사일 개발 금지령을 풀어주는 것이 그냥 한국에게 군사주권 일부를 양도하기 위해서였을까? 이것 역시 중국을 향한 미사일 배치를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이 한국에 내린 미사일 지침을 지금까지 그를 거부 없이 수용해왔던 한국은 이번에 미국이 지침을 해제해줌으로써 이제 중국, 러시아에도 닿을 수 있는 1천 킬로, 3천 킬로 또는 그 이상의 사거리를 가진 미사일을 제작할 수 있게 되었다. 근데 묘하게도 이는 2019년 2월 트럼프 정부가 러시아와의 중거리 핵전력조약(Intermediate-Range Nuclear Forces Treaty, INF)이행을 일방적으로 파기한 사실과 맞물린다. 당시 에스퍼 전 미 국방장관은 그로부터 이틀 후 ‘지상배치형 중거리 미사일을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배치하길 원한다’고 말하였다. 말하자면 미국은 한미방위조약에 의거해 자신의 미사일들을 중국 러시아에 대항하여 남한 어디에고 배치할 수 있다. 하지만 성주 소성리에서 보듯이 민중의 만만치 않은 저항을 감수해야한다. 만약 한국 정부가 자신의 국방비를 들여 사거리 8백 킬로 이상의 미사일을 제작하고 미국의 전략적 목적에 따라 배치한다면 그는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제주도 강정마을 앞 구럼비 바위 파괴를 통한 미군기지 건설과 한국이 착수할 사경 800킬로 이상의 미사일 개발은 어떻든 연계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전시작전권을 포기하고 대신 ‘미사일 주권’을 가져왔다고 대한민국이 말하는 것은 참으로 형용모순적인 워딩(표현)을 아무렇지 않게도 하는 것이다. 미국의 미사일 금지지침도 일방적으로 내려왔고 일방적으로 폐기되었다. 한미방위조약도 이번 방미중 양국 공동성명에서 굳이 거명되고 재확인되었다. 즉 한미정상은 공동성명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바이든 대통령은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른 한국 방어와 한미 연합 방위태세에 대한 상호 공약을 재확인하고, 바이든 대통령은 미국이 가용한 모든 역량을 사용하여 확장억제를 제공한다는 공약을 확인하였다”라고 밝혔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무려 1953년 10월1일 체결된 조약이다.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가. 이야말로 코로나19 속에서 대한민국과 위정자들이 온갖 것들에 K-를 붙이는 K-국가주의가 가진 자가당착을 보여줄 뿐이다. 물론 생각해보면, 한국전쟁이후 대한민국의 대외관계가 언제는 이러지 않았는가.

3. 이 모든 것이 의미하는 것

한국이 중국과 미국 사이의 줄다리기를 일단 거의 포기했다는 것이다. 전임 박근혜 정부는 양국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했다. 중국 정부는 그런 한국 정부의 곤란한 처지를 십분 이해한다는 제스처를 보냈고, 때로는 을러댔지만 때로는 양해하고 위신을 세워주기까지 했다. 박대통령의 중국 방문 때 중국이 보여준 극상급 환대를 기억해보라. 그렇게 화끈한 환대는 없었다. 대국은 그런 것이라는 듯, 그런 방식을 통해 중국은 한국 정부를 어느 정도 묶어두었다. 내가 판단하기로는 박대통령은 사드 배치를 원하지 않았었다. 사드 배치를 수용하면서도 미뤘고, 정권의 비중 있는 인사들을 대중국 외교에 배치하는 등 중국과의 화해무드를 유지하려고 애썼다.

현 정부는? 비슷하게 미중 사이에 소위 ‘균형외교’를 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남북화해를 정권의 명운을 건 과제로 보는 현 정부(내부의 엔엘 운동권 출신 민족주의적 성향도 한몫했고)는 결과적으로 중국보다는 미국의 동아줄을 잡아야했다. 북한과의 해빙을 위해서는 6자회담은 이미 물 건너갔고, 미국이 북한과의 해빙을 향한 문을 여는 열쇠를 독점한 상태가 이미 돼버린 지경이다. 그 과정에서 중국을 견제하고 자신의 정치 치적을 쌓고자 한 트럼프 대통령의 의도와 맞물려 싱가포르 선언이 나왔다. 트럼프 역시 한반도 해빙이 자신의 정권에 필요했었다.

그런데 현재 미국 민주당 바이든 정부는 어떠할까? 지금 바이든 정부로선, 트럼프 통치기간에 흐트러진 체제의 질서를 복원하고, 바이든 취임식을 앞두고 벌어진 미 의사당 점거 시위 등으로 훼손된 체제의 정통성과 정당성을 다시 세우는 등 국내 문제 해결이 가장 중요하다. 제3세계의 원성을 사면서도 코로나19 백신의 절반이상을 미국이 독점하면서 현재 미국민 전체의 65%이상이 백신 접종을 마치는 놀라운 속도의 성과는 이 목적을 위해서 꼭 필요했던 일이다. 그리고 대외관계에 있어서도 트럼프가 분탕질을 치며 동맹관계를 흐트러 놓은 유럽, 그리고 코로나19이후 석유경제와 관련해 중동이 더 중요하다. 이는 최근 여러 차례 보도를 통해서 알려졌던 바고, 이번 방미 내용에서도 바이든은 소극적이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미국 언론 역시, 한국 언론이 조중동 우파 언론까지 나서서 의미를 부여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문 대통령 방미에 대해서 거의 보도하지 않고 외면했다.

상황이 이러한데 한국의 집권 민주당, 그리고 특히 문재인 대통령으로선 내년 3월 9일 치를 대선을 앞두고, 지지율이 폭락하는 가운데 북한카드가 더욱 절실했다. 뿐만 아니라 코로나19 방역의 최종적인 성패를 가를 백신의 차질 없는 도입과, 9월 이후 찬 계절이 오기 전 전 국민 백신 접종 완성이 꼭 필요하다. 백신 사이클 상 9월 이후 코로나19를 잡고, 겨울을 넘겨 3월이 오면, 민주당은 현재의 실책과 낮은 지지율을 만회하면서 대선을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백신 수급을 위해서도 미국의 협조는 꼭 필요하다. 즉 대선을 앞두고 북한과의 해빙과 가능하다면 남북 2차 정상회담, 그리고 코로나19 백신 완전수급으로 방역의 최종적인 성공을 자축하는 것, 양자가 대선의 성패를 가를 수 있다. 현 정부는 북한카드와 코로나19로 내년 대선을 치를 생각으로 보인다. 그 말은, 다른 중요한 대선 의제들이 부차화 된다는 말이다. 사회복지도, 포스트코로나 사회체제의 전환도 모두 뒤로 밀리고, 이번 대선에서 핵심은 코로나 방역과 코로나19이후 경제회복, 그리고 북한과의 관계 개선 등 3가지가 될 것이다. 결국 현 정부는 3년 전에 강제징용 노역에 대한 민사상 배상 문제를 두고 갑자기 한일경제전쟁을 선포하고 ‘왜구’와의 일대 ‘국민전’을 펼치더니, 또 갑자기 국민에게 해명도 해석도 제시하지 않은 채 일본과 전쟁피해 문제와 위안소등 과거사 문제에 대해 입장을 굽히고 미국의 말을 군말 없이 수용했다. 강제징용문제, 위안부 피해자 문제는 정부에 의해 다시 공중에 붕 떠버린 형국이다. 그리고 일본에 이어 두 번째로 바이든 신임 대통령을 만나기 위한 방미를 결행하여, 중국의 반발을 초래할 것이 뻔한 위의 “한미동맹”을 성사시켰다.

4. 한국전 참전영웅 훈장과 미군 주둔지 한국군에 대한 백신 보급

이와 관련 문재인 대통령이 이번 방미 일정 중 한국전쟁 때 중공군과 싸운 미국 전쟁영웅에게 미국 대통령이 훈장 주는 의식에 참여한 것은 참으로 시사적이다. 북한군과 전투가 아니라 중공군과 전투에서 세운 업적으로 ‘한국전쟁’ 영웅에게 훈장을 수여했고, 그 자리에 한국 대통령이 배석한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할까? 참으로 역사적인 그 무엇이 아닌가 말이다. 또한 중국은 이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봤을까. 참조하자면, 최근 중국에서 한국전쟁을 두고 중공군이 목숨 바쳐 싸운 ‘해방전쟁’으로 말했었고 이에 동조한 중국인 한국 아이돌 가수 등 연예인이 한국에서 수난을 당하고, 중국에선 영웅대접을 받았다.

또한 미국이 해외 국가에 백신 공급에 대해서 소극적이면서 주한미군뿐 아니라 한국군 50만 명에게 백신을 배포 접종하기로 결정한 것도 시사적이다. 미국에게 한국군은 ‘용병’이라는 것을 이것만큼 적절하게 표현한 액션이 있을까. 왜 한국 국민이 미국의 백신 수급대상이 되어야하는가. 한국이 55만 명 분량을 받아 한국 보건행정에 따른 순위에 따라 집행하는 것이 바로 ‘주권’이고 ‘통치’권이다.

5. 제기되는 질문, 피할 수 없는 현실

이쯤 되면 피할 수 없는 다음 질문도 마주해야 한다. 첫째, 과연 현 정부는 미국과 ‘동맹’관계를 굳건히 하면서 중국의 분노에 대한 대비는 되어있을까? 그리고 다가오는 중국 발 피해는 누가 다 입게 될까? 성주 소성리에서는 환경영향평가도 없이 배치된 미군 무기를 둘러싸고 문재인 대통령의 방미 직전부터 방미 이후까지 계속 물품 반입 시도와 경찰의 도발로 원주민의 마을이 전쟁터와 마찬가지가 되었다. 한국에게 성주 소성리는 과연 무엇인가? 성주 소성리 원주민에 대한 국가테러를 방미 성과를 이루기 위해 불가피한 ‘부대적 피해(collateral damage)’라고 해야할까? 부대적 피해라는 개념은 미국 대통령 조지 부시가 이라크를 침공 폭격하면서 발생한 민간인 사망자를 두고 일컫던 말이다. 성주 소성리가 대한민국의 ’부대적 피해‘이자 불가피한 희생인가.

둘째, 현 정부의 대선을 앞둔 정치적 이해와 이번 방미의 ‘국익적인’ 성격은 과연 이렇게 일치, 아니 교환해도 되는가? 만약 그렇게 정당화한다면 이야말로 현 정권의 성격을 그대로 증명하는 집권기 마지막 증거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문대통령은 이번 방미에서 전시작전권, 외교적 주권 등 한국의 미래를 위해 가능한 옵션들을 또 버리거나 봉쇄하는데 한발 더 다가갔기 때문이다. 또한 미해결의 문제는 여전히 의문을 남기면서 남을 것이다. 일제 위안부 피해자 문제와 강제징용 배상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한일경제전쟁의 실체는 과연 무엇이었더란 말이냐. 둘째 전시작전권은 노무현 정부 때 미국이 약속했다가 번복한 것인데, 이것은 또 이렇게 유실하고 마는 건가? 문재인 대통령은 ‘자신이 받들겠다’고 한 전임자의 ‘유지’를 버릴 작정인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SK, 삼성, 현대차등이 미국 경제와 산업에 투자하겠다는 44조, 그건 이들 한국의 재벌 자본들이 재벌체제 깊숙이 비정규직 노동을 전면적으로 도입하고, 노동자 산재 사고 방치 등 노동착취로 벌어들인 돈이다. 그 기업 순익을 미국에 투자하는 이 재벌들이 과연 더 이상 ‘국민기업’이긴 한가? 한국 재벌들은 토착 국내기업이 맞는가?

6. 방미 결산-자유주의 정부의 일관성

문 대통령은 지난 5월23일의 이틀간 방미를 “최고의 방문”이었다고 자평했다. 조중동 우익언론들은 별 불만이 없었고 오히려 이례적으로 후한 평가를 내놨다. 이는 마치 촛불과 박근혜 탄핵 때 조중동의 태도와 비슷하다. 그들은 이렇게 ‘한솥밥 식구’가 되어가는가 보다.

여하튼 민주당과 현 정부는 촛불을 구성했던 광범위한 ‘반 박근혜 촛불동맹’가운데서, 좌파 쪽은 이미 일찍이 배제했고 우파와는 미국을 매개로 이렇게 ‘동거체제’를 구성하는 것을 ‘협치’라고 여기는 듯하다. 사실 민주화 이행이후 정치 과정을 살펴보면, 자유주의 정치세력의 진지한 협치 대상은 언제나 우파 정치세력이었지, 좌파나 중도좌파였던 적이 없었다. 현재 진보정당들 중에 계급정당은 없으며 대체로 중도좌파 성향이거나 민족주의 좌파 정당 정당들이다. 이중 민주당이 유일하게 관계를 맺은 중도좌파 정당인 정의당은 ‘협치’의 파트너라기보다는 정치공작적으로 활용하는 용병으로 간주하는 것이 한국 자유주의정당의 태도였다. 그리고 녹색당과 진보당은 민주당이 지난 총선에서 주도한 ‘위성정당’ 만들기에 호응했다가 보기 좋게 미끄러진 정당들이다(이 역사적 사실은, 이 두 정당들에 대해서 정확히 ‘계산서’에 달아두어야 한다).

여하튼 이런 시각에서 바라보면 여기에는 어떤 역사적인 공통점, 아니 사뭇 명확한 일관성이 있다. 정권을 잡았던 역대 자유주의 정치세력이 보였던 일관성은 다음과 같다. 김대중은 군부 출신 우파 정치인 김종필과 동거하고 협치를 했고, 노무현은 자본가 출신 우파 정몽준과 동거하고 협치를 시도했고, 문재인은 자본가 이재용과 동거하고 우파 정당 국민의 힘과 새로운 판을 짤 생각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외교관계에서 보인 다음과 같은 점이다. 민주화이행이후 집권했던 자유주의 정권 세 번에 걸쳐 3자 모두 미국에게 결국 머리 조아렸다. 김대중은 미국에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의탁했고, 노무현은 미군 장갑차에 희생된 미선, 효순이 촛불에 기대어서 정권을 잡았지만 미국에게 결국 조아렸다. 문재인은 노무현보다 더 후퇴한 가운데 미국과의 관계로 급속히 선회하였다. 반면 흥미롭게도 우파 집권세력 중 김영삼이 일본에 대해서 단호하게 달랐고, 박근혜는 중국에 대해서 양거리 외교를 구사하는 면에서 달랐다.

결국 첫째, 자본에 대한 태도, 둘째 좌우파 이념에 대한 태도, 그리고 셋째 대외 지정학적 정치면에서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의 공통점은 이렇게 연속성을 가지고 있다. 이를 요약하면, 첫째, 그들은 국내적으로 좌파를 어떤 수를 써서라도 배제하고 우파와의 동거체제를 구축하고, 이를 민주주의(협치)라고 주장한다. 둘째 그들은 국외적으로 미국, 중국, 일본 사이에서 오락가락하지만 결국 친미정권으로 기록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들은 언제나 자본과 시장의 권력에 친화적이거나 상수로 인정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7. 마지막으로 남은 한 가지 질문

이는 좀 더 이론적인 질문이지만 여기서는 간단히 언급만 하고 다음 기회로 밀어두겠다. 즉 국가와 주권에 대한 질문이다. 혹은 근대 ‘국민국가’는 과연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다. 한국대통령의 방미, 그리고 나아가 지난 2년간 코로나19를 통해서 결국 다음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 국가란 무엇인가? 주권이란 무엇인가? 주권국가는 무엇인가. 또 국가주권은 무엇인가.

최근 코로나19 속에서 다시 국가의 역할과 성격을 강조하고, 이른바 ‘국가의 귀환’을 말한다. 그런데 이 국가는 과연 어떤 국가일까? 이는 코로나19속에서 미국, 그리고 미국에 방미 후 성과를 정리하는 대한민국을 보면, 더욱 드는 의문이다. 그리고 잠정적인 내 생각으로는, 21세기 국가는 이미 근대적 의미의 ‘국민국가’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미 신자유주의 세계화 이후 국가의 의미도, 주권의 의미도 달라졌다. 물론 이 말은 근대 국민 국가의 출현이 자본주의의 등장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졌었다는 역사적 전제하에 하는 말이다. 따라서 국민국가도 자본주의 정치경제 질서 속에서 계속 역할과 성격이 변해왔다. 그리고 코로나19로 국가가 다시 부활하고 국가가 강화되어도, 이는 앞서 말한 변화한 현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즉 코로나19 과정에서 아무리 국가가 강화된들, 지금의 국가는 유럽에서 근대국가 형성을 향한 최초의 국제조약이었던 베스트팔렌조약을 맺던 시절의 ‘근대 국민국가(modern national states)’가 더 이상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국가 주권의 의미도 성격도 필연적으로 달라지고 있다. 한국과 미국의 관계를 조공국가 관계라는 둥 식민지 대 제국주의의 관계로 보는 민족주의적 국가주의(ethnic nationalism)의 시각에서 규정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위의 분석은 이런 시각에서 이뤄진 것이다. 덧붙이면 한국 자본주의 역시 미중 패권전쟁 속에서 자본의 성격에 따라 이해를 달리 해왔고, 그에 따라 외교관계에서 ’국익‘을 실현하도록 대한민국 국가에 요구하고 압박을 가해왔다. 이번 방미에서 한국의 재벌들이 미국 내에 44조를 투자하는 것 역시 ’강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초국적 자본‘으로서 한국 재벌들의 이해가 일치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국가와 자본의 관계 역시 ’국가주의‘ 혹은 ’민족주의‘ 시각에서 바라볼 차원의 것이 아니다.

사실은 이 질문과 논지가 정작 핵심적일 것이다.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2년간에 걸친 코로나19 팬데믹을 경유하면서 이제 무엇보다 기존 국가론의 이론적 재고 혹은 이론적 재개념화가 필요하다. 이에 대해서는 언젠가 다시 재론하고자 한다.

* [사파시평]은 민중언론 참세상에도 동시 게재됩니다.
민중언론 참세상: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nid=106002

[사파논평] 제주 4.3 ‘각명비’에서 지워진 이름들

권영숙(사회학자. 사회적파업연대기금 대표)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에 설치한 거대한 원형 공간에는 1만4천명이 넘는 ‘희생자들’의 이름이 마을별로 새겨진 각명비가 있다. 그 속에는 지워진 이름들이 눈에 띈다. 바로 2000년 제주 4.3 특별법 제정이후 희생자 신청을 했다가 유형 무형의 철회 압박을 받아서 지워진 이름들이다…

지금 이들의 이름을 되살리는 일이 과연 관용과 포용의 문제인가. 그리고 과연 누가 누구를 관용하고 포용한다는 건가. 필자는 이 두 가지 논점을 제기하고 싶다.
4.3항쟁의 무장대원들, 즉 빨치산들 그들은 4.3항쟁의 일부다. 그들이 바로 4.3항쟁의 주체다. 과연 그들을 제외하고 제주 4.3항쟁을 말할 수 있는가. 제주 4.3항쟁에 정확한 이름을 붙일 수 있는가. 4.3항쟁을 기념하고 기억할 수 있는가.

이는 그들을 관용하고 포용하는 문제가 아니다. 4.3항쟁을 말하고 추념하면서, 이들 주모자들과 참가자들의 존재를 배제하고 지운 상태에서 4.3을 추모하겠다는 것 자체가 역사 왜곡이고 역사에 대한 폭력이다. 게다가 지금 말로는 ‘제주 4.3 항쟁’이라고 지칭하면서, 항쟁의 참가자가 아니라 ‘피해자’들만 있다. ‘항쟁’이라고 지정하였으면서도, 무엇에 대한 항쟁이라는 말은 여전히 채우지 못하고 ‘4.3 항쟁’이라고 밋밋하게 부를 뿐이다. 결국 문제는 있는 역사를 있는 그대로 포용하지 못하는 현재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및 사회의 시각과 이념이다.”

원문 링크:
참세상: http://m.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nid=105858

:최저임금 1.5% 인상에 대하여

권영숙(사회적파업연대기금 대표, 사회학자)

참세상 기사 보러가기

최저임금위원회 공익위원들, 그들은 ‘공익’을 무엇으로 정의하는가

7월 14일 새벽 최저임금심의위원회는 2021년 최저임금 인상률을 1.51%, 시급 130원 인상한 8720원으로 확정했다. 월급(주 40시간 기준)으로는 182만2천480원이 된다. 한국노총과 민주노총, 양대 노총 위원들이 전원 퇴장한 가운데 공익위원들과 사용자위원들이 모여 결정했다. 이렇게 결정한 이유에 대해서 공익위원회 간사는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 0.1%, 소비자 물가상승률 전망치 0.4%, 근로자 생계비 개선분 1.0%를 합산해 1.5% 인상안을 결정했다”고 밝혔다(<경향신문> 당일자).

최저임금 인상율을 ‘경제성장율’과 연동해서 만장일치로 결정했다는 최저임금심의위원회의 공익위원들에게 묻는다. 과연 공익위원들은 최저임금제도의 ‘공익’을 무엇으로 정의하는가? 최저임금 심의에서 ‘공익’은 무엇이 되어야할까? 경제가 좋지 않거나 바닥을 치면 최저임금도 같이 후퇴하고 바닥을 기도록 만들 수 있다면, 그것이 어찌 최저임금이겠나! 그런 제도를 왜 굳이 만들었나. 그냥 시장의 원리에 따라 최저임금도 정하면 된다. 경제가 추락하면 사람도 추락하게 만들면 된다. 참 비정하지만 그게 바로 자본주의다.

하지만 제도로서 만들어둔 최저임금제도는 경제성장과 시장의 원리에 따라 임금을 연동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력의 재생산이 가능한 최저생계비를 보장한다는 사회적 원칙에 기초하고 있다. 최저임금은 경제가 침체기를 겪거나 경제성장율이 하락해도 지지해야 할 ‘임금의 최저선’이며, 오히려 경제 위기상황에는 생존의 위기 앞에 노동자들을 위해 더욱 확실히 보장해 줘야할 ‘최저’ 임금이다. 그래서 최저임금제도는 자본주의적 시장법칙에 대한 제어 수단중 하나이며 사회보장제도이기도 한 것이다.

한국의 최저임금심의위원회에 참가한 ‘공익위원들’ 역시 지켜야할 ‘공익’은 경제성장이 아니라, 그리고 경제성장율에 따라 임금을 고무줄처럼 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평균임금도 아닌 최저임금 지대에 속한 ‘노동빈곤층’의 인간다운 삶을 여하히 유지하도록 최저임금제도를 활용할 것인가이다. 그것이 굳이 최저임금위원회에 노동과 자본의 대리인이 아닌 제 3자, 노동과 자본 사이에서 독립성을 가진 것으로 간주되는 공익위원들을 두는 이유다. 그리고 노동과 자본이 타협하지 못할 경우 그들에게 최종 결정권이라는 막강한 권한을 부여한 이유다. 단 공익위원들이 ‘공익’에 입각해 결정한다는 전제하에서. 공익위원은 전문가여서 공익위원이 된 것이 아니라 노동과 자본 사이에서 독립적으로 최저임금에 관한 공익을 판단할 위치에 선 사람이어야 하는 것이다. 만약 공익위원들이 경제성장율 전망치를 우선적으로 고려하여 최저임금을 정한다면 이는 국가나 자본의 대리인에 더 가까운 시각일 뿐, 공익적 시각이라고 보기 어렵다.

지금이야말로 국가가 최저임금제도를 진정 활용해야할 시간이 아닌가

2021년 최저임금 인상률인 1.51%, 시급 130원 인상한 8720원은 외환위기 때(1999년) 2.69%, 금융위기 때(2010년) 2.75%보다 더 낮은, 역대 최저 인상률이다. 위의 논리대로 한다면 지금이 IMF보다 더 나쁜 경제상황이라는 것인데, 그렇다면 지금이야말로 최저임금제가 제도로서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할 때이다.

더구나 OECD는 7월 9일 발표한 ‘2020 노동시장 전망(OECD Employment Outlook 2020)’에서 코로나19가 금융위기보다 더 노동시장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는 국가가 온 힘을 다해 노동을 보호해야 한다는 메시지로 해석해야할 지점이다. 그리고 그것은 국가와 집권당이 할 일이다. 코로나19는 ‘재난의 불평등성’을 드러내는 사회적 재난이고 특히 ‘노동재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어떤 국가들은 그렇게 한다. 지난 6월 독일은 앞으로 2년에 걸쳐 최저임금을 11.7% 인상하기로 결정했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올해 독일의 경제 성장 전망치는 -7.8%이고, 한국의 -1.2%보다 훨씬 암울하다. 그럼에도 독일은 소득 및 지출 확대를 위해 최저임금 인상을 결정했고 이는 한국의 8배에 이르는 것이다. 전국민재난지원금보다 최저임금 인상이 더 중요하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IMF는 이 전망보고서에서 코로나19로 인한 경제적인 악영향 정도를 비교하면서 한국이 다른 국가들보다 코로나19 영향의 정도가 월등히 덜하고 빨리 회복될 것이라는 평가를 내놨다. 근데 ‘나라 자랑’할 때는 이 수치를 사용하면서, 한편으로는 ‘국난’이라는 공포를 주입하고 엄포를 잔뜩 놓고 있다.

하지만 지금이 정부가 말하듯이 진정 ‘국난’이긴 한가, 이도 의심스럽다. 예컨대 7월 7일 삼성전자가 발표한 올 2분기 잠정실적은 전분기 대비 매출은 6.02% 감소했지만 영업이익은 25.58% 증가했다. 전년 동기 대비와 비교해도 매출은 7.36% 감소한 반면 영업이익은 22.73% 증가했다. 그러니까 코로나19에도 불구하고 삼성전자의 영업이익은 괄목상대하게 증가한 것이다.

이는 미국 등 해외 국가들에서도 마찬가지로 벌어지는 상황이다. 코로나19 속에서 공장가동을 둔화하고 생산을 중지한 가운데, 재고 과잉문제가 해결되고 임금비용을 아끼고 구조조정으로 노동력 감축을 단행하는 가운데, 자본의 영업이익 등 수지 개선과 이윤 증가가 증시 활황으로 이어지고 있다. 코로나19 이전 수준의 주가를 회복하고 있는 미국 월스트리트, 한국의 여의도 증권가는 전혀 ‘전지구 팬데믹’이 휩쓰는 모습이 아니다.

코로나19 재난은 가장 힘든 재난 난민들과 사회적 약자들, 노동 약자들을 덮치고 있는데, 자본은 오히려 재난 속에서 국가의 경기부양책의 혜택을 독점하고 전시경제와 같은 재난자본주의 속에서 더욱더 부를 축적하고 있다. 한국의 상류층 소득이 줄지 않고 오히려 늘었다는 보도도 최근 있었다.

해고와 일자리 창출은 그린 뉴딜에서 하나의 패키지다

그런데 최저임금위원회 위원장은 일자리를 위해서 최저임금 동결 내지 실질적 삭감을 용인했다는 듯이 말한다. 발표 기자간담회에서 “일자리”라는 단어가 무려 10차례 나왔다. 의문이다. 왜 최저임금 심의에서 일자리를 제일선으로 고려하는가. 최저임금위원회는 물가와 사회적 생계비, 노동력 재생산비용을 고려하여 임금의 최저선을 결정하는 것이 기구의 목표다. 왜 우선적으로 임금이 아니라 일자리를 고려하는가. 그렇게 고려할 양이면 차라리 최저임금심의위원회 간판을 내리고 국민고용증진위원회 혹은 국민고용유지위원회라는 이름으로 다시 구성하라.

최저임금위원회는 “일자리가 생계에 더 중요하다”고 봐서 임금 인상율을 거의 제자리 수 동결안을 확정했다고 한다. 하지만 과연 임금 동결하고 일자리 유지하는 교환에 대해서 자본이 동의하긴 한 것인가? 이번에 민주노총 위원장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거센 반발로 서명식에 참석하지 못하면서 불발된 ‘노사정 합의’안 역시 “모든 해고 금지” 조항을 어디에도 포함하지 않고 있다. 임금동결을 먼저 수용해주면 이후에 자본이 고용을 유지할 것이라는 보장은 그 어디에도 없다. 최저임금을 동결하면서 일자리를 더 소중하게 여겨도 자본이 일자리는 건드리지 않는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문재인 대통령은 같은 날인 7월 14일 ‘한국판 그린 뉴딜 종합계획’을 발표하면서 2022년까지 32.5조(국비 19.6조), 2025년까지 73.4조(국비42.7조) 원을 투자해 65만 9천 개의 일자리를 창출할 계획이라고 말했을 뿐, 기존의 일자리 보호조처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있는 일자리를 보호하지 않고 모든 해고를 금지하지 않은 채, ‘그린 뉴딜’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일자리 65만개를 창출하겠다는 주장은 그 사이에 조건이 있다. ‘해고’다. 해고되어야 새로운 일자리가 창출된다. 산업구조조정과 국가 재정지원을 특정 산업에 몰아주기 하면서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겠다고 하지만 그것이 65만 개일지 6만 개일지 알 수 없으며, 문제는 이것이 기존 일자리의 구조조정을 불가피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해고와 일자리 창출은 그린 뉴딜에서 하나의 패키지일 뿐이다.

이미 코로나19 위기를 이유로 기간산업 지원조처에 따라 수조원의 공적자금을 지원받은 아시아나항공에서 위탁회사 케이오 노동자들이 해고당했다. 해고는 앞으로 줄줄이 이어질 것이다. 실업급여가 사상 최대 기록을 경신중이다. 그리고 그 해고는 계약해지라는 이름으로 가장 손쉽게 자를 수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 최저임금선의 노동자들에게 가장 먼저 통고될 것이다. 즉 최저임금선에 있는 노동자 최소 93만 명에서 최대 408만 명이야말로 가장 먼저 해고당할 이들이기도 하다. 코로나19 속에서 일자리가 생계에 더 중요하다는 것은 사실 적시일 수 있다. 하지만 최저임금위원회가 최저임금 동결대신에 일자리를 보증할 수도 없다면, 최저임금을 생계비 기준에 부합하도록 인상하는 것이 최저임금위원회 공익위원들이 지금 실현해야할 공익이다.

근로자 생계비 개선분에 반영되지 못한 최저임금 산입분

더구나 2019년 최저임금법상 최저임금 산입범위 개정으로 인해 식대 등 복지후생비와 월 상여금이 최저임금에 포함됐다. 이것을 최저임금에 합산하게 되면, 최저임금 인상은 그만큼 무력화되는 것이다. 7월 14일 정한 내년 최저임금 인상액은 월 2만7천 원(총액182만2천480원)인데, 식대 등 복지후생비와 월 상여금이 최저임금에 포함되면 최저임금 자동감소분은 더 커질 것이다. 구체적으로 월할 정기상여금 중 최저임금 월 환산액 15%를 뺀 금액은 내년에 최저임금에 산입된다. 또 이전에 복지후생 차원에서 식대를 월 10만 원 받는 최저임금 노동자는 5만4천674원(182만2천480원의 3%)을 뺀 나머지 4만5천326원이 최저임금에 산입된다. 내년 최저임금이 월 2만7천170원 오르는데 산입범위 확대로 인해 삭감되는 금액이 이보다 크다. 한마디로 실질적인 최저임금 삭감이다. 그러므로 내년 최저임금 인상율을 심의한다면 산입범위 변경으로 실질적으로 삭감되는 최저임금 부분을 고려해야한다.

그런데 이번에 경제성장율 전망치를 고려한 다음으로, “근로자 생계비 개선분 1.0%를 합산”하여 인상율을 정했다고 한다. 이게 어디서 나온 계산법인가도 의문이지만, 최저임금 산입범위 변경으로 인한 근로자 생계비 감소를 고려했다는 결과가 이것인가. 최저임금 산입범위 조정으로 이전에 최저임금 아닌 것이 최저임금에 포함됐다면, 그 삭감분에 근사하게 최저임금 인상률에 반영하는 것이 “근로자 생계비 개선분”이라는 호칭에 걸맞는 것 아니겠는가. 더구나 최저임금은 인하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전에 받던 최저임금이 복지후생비, 휴게수당, 월별로 쪼개 지급하는 상여금 지급 방식 등으로 인해 월 10만 원 이상 최저임금이 실질 삭감되는데, 최저임금 월 2만 원 올리는 것을 과연 “생계비 개선분” 반영에 따른 인상율 책정이라고 할 수 있는가. 전혀 타당하지 않다. 최저임금 노동자의 실질적인 생계비 개선을 최저임금제도의 취지대로 반영하지 않은 결과다. 그리고 그 후폭풍은 민주노총 내 최저임금 사업장들, 비정규 노동자들, 그리고 노조 가입에서도 제외된, 근로기준법의 적용대상에서도 제외된 영세사업장 노동자들에게 가장 먼저 덮칠 것이다. 더불어 그들은 일자리와 고용 보장에서도 가장 취약한 노동자들이고 가장 먼저 해고될 사람들이다. 일용노동자, 특수고용 노동자들에게 당신들의 일자리 보장을 위해서 최저임금 인상율을 1%대로 거의 동결(그리고 산입분 고려하면 실질 삭감)하기로 했다면 과연 믿어줄까.

민주노총은 노동계급의 브로커인가 민중의 호민관인가 선택하라

이번 최저임금 인상률이 이렇게 결정되는데 가장 공을 세운 일등공신은 바로 민주노총 지도부다. 민주노총 집행부가 휴업급여 감액등도 수용하겠다고 하고 자본의 경제위기 경영에 협조한다는 노사협조주의적 내용을 포함한 노사정 타협에 몰두하는 가운데 이번 최저임금 협상의 결과는 예정된 것이었다. 이미 6월22일 <사파 주간 뉴스브리핑>에서 말했듯이 “민주노총이 임금동결과 다름없는 제안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최저임금 1만770원 요구안을 제출했는데, 과연 정규직 임금동결을 제안하면서 최저임금 투쟁이 가능할까?”라고 지적했다. 민주노총 김명환 위원장은 최저임금 심의가 이뤄지는 세종시 노동부 앞에서 농성장을 차렸지만 노사정 합의안 대의원대회 부의에 더 집중하였다. 어떤 진정성이 있었을까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최저임금은 민주노총의 조합원들을 넘어선 전체 노동자들, 특히 조직노동 밖의 영세 사업장 노동자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사안이다. 마찬가지로 노사정 합의안의 내용 역시 조직노동을 넘어선 노동계급 전체의 생존권을 결정짓는 내용이며 노동약자들에게 먼저 타격이 될 내용이다. 근데 과연 민주노총은 무슨 자격으로 지금 모든 노동자들의 위임 대리인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인가? 경제 위기와 코로나19 노동 재난 앞에서 민주노총은 정부와 자본과 비조직노동 사이에 ‘브로커(broker)’ 인가, 아니면 전노동계급의 대표자(representative), 더 나아가 민중의 호민관인가가 드러나는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

코로나 19 노동재난 앞에서 민주노총은 과연 누구의 이해를 위해 나설 것인가를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먼저 민주노총 집행부는 자신이 대표하지도 못하는 전 노동계급에 영향을 미치는 사안을 두고 부디 경거망동하지 말길 바란다. 그리고 민주노총 평조합원들이 제일 먼저 할 일은 민주노총 위원장이 중앙집행위의 의결을 끌어내지 못한 채 대의원대회에 올린 노사정 합의안을 제대로 부결시키거나 철회시킨 후 지도부의 책임을 확실히 문책하는 일이다. 지금은 민주노총 내에 평조합원운동이 가장 갈급한 순간이다.

[기고]6월1일 사파논평에 이어 미국 시위 두번째 분석글입니다. 미국 시위의 현재 상황에 대한 해석과 향후 방향에 대한 진단을 중심으로 ‘구조적 인종주의’에 대한 독자적인 시각을 볼 수 있습니다.

“근본적인 문제로 ‘구조적 인종주의’와 흑인 불평등을 지적하고 있지만 그것의 해법은 매우 요원한 문제다. 특히 인종주의란 단지 인종차별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계급적 위계질서를 유지하는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점을 놓치지 말아야한다. 미국에 인종차별이 있고 한국에 계급 차별, 노동차별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단순 비교의 문제가 아니다. 미국은 인종차별의 체계를 계급적 차별로 잘 녹여내고 재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질서는 흑인들 중에서 계급 상층으로 이동한 이들도 포함한다. 단순히 흑백 갈등이나 구조적인 인종주의가 아니라 계급문제와 중첩된 인종주의를 ‘구조화된’ 차별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

미국 시위의 정점과 제도 개혁의 딜레마 [기고] “흑인 생명이 중요하다(The Black Lives Matter)”에서 “경찰기구 폐지”까지(Defund the Police!)

미국 경찰 흑인살해 항의시위와 코로나19 계급투쟁
– ‘제국’(The Empire)은 무너졌다. 그리고 미국(The State)의 재발견

[사파논평] 권영숙 (사회적파업연대기금 대표, 사회학자)

미국에서 퍼져가는 저항시위를 ‘폭동’이라고 보거나 ‘인종’갈등의 폭발로 바라보는 것은 일면적이다. 이것은 코비드 저항시위라고 봐야한다. 그리고 코로나19 팬데믹의 국면에서 인종의 문제와 계급의 문제가 교차하고 중첩해서 벌어지는 시위라고 봐야한다.

1. “다시 백인이 위대해질 나라”라는 문구가 적힌 모자를 쓰고 다닌 미국 미네아폴리스 백인경찰이 5월25일 대낮에 비무장 흑인 시민을 죽였다. 흑인들 중심으로 5월26일 시작된 시위는 사흘만에 미국 전역으로 불꽃처럼 번져 5월 31일 현재 11개 주와 25개 시에서 야간통행금지령이 내려졌고 8개 주와 워싱턴에서 주방위군이 동원됐다. 이 일이 벌어진 미네소타주는 흑인 비율이 높다. 미네아폴리스의 ‘쌍둥이 시’이자 미네소타 주도인 세인트 폴의 시장은 흑인이다. 그리고 검찰총장도 흑인이다. 5월 30일 내가 시청하던 CNN TV에는 이들이 라이브 기자회견을 번갈아 하면서 메시지를 던졌다. 정작 미네아폴리스의 민주당 소속 백인 시장은 보이지 않았다. 흑인인 세인트폴 시장, 흑인인 검찰총장이 나와서 흑인을 타겟으로 한 경찰의 폭력에 ‘유감’을 표하면서 ‘법질서 회복’을 강조하였다. 그들은 “일부가 정당한 문제제기를 ‘폭력’과 무질서’로 몰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것은 어떻게 봐도 적절하지 않았다. 경찰이 무참하게 민간인을 살해한 행위가 도화선인 상황에서, 이런 발언은 하지 말았어야했다. 하지만 언제나 미국의 ‘흑인 폭동’이 그렇듯이 권력의 근처에 있는 흑인들이 나와서 ‘진화’에 나섰다. 참으로 흔한 모습이다.미국의 ‘인종’시위의 양상은 대부분 이렇다. 백인 경찰이 흑인을 ‘프로파일링'(표적삼기)하여 길거리나 가게등에서 체포하려 하고, 그 과정에서 죽여버린다. 그 옆에는 대부분 흑인 경찰이 있다. 그리고 흑인들을 중심으로 분위기가 들끓고 자생적인 시위가 벌어지다가 밤이 되면 약탈 방화가 일어난다. 하루 이틀후에 ‘지역의 명망가‘ 흑인들(대체로 목사들과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나와서 옳은 말을 하면서 분위기를 진정시키고, 폭력시위와 선량한 ’흑인 코뮤니티‘를 갈라치기 한다. 시위대는 더욱 폭도화하고 이것들은 결국 사회운동론적으로 말하면 비이성적인 ‘군중(mob)’의 ‘폭동'(riot)으로 분류된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렇게 끝나는 것이 ’흔하디 흔한‘ 미국의 흑인시위의 결말이다.

2.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하고 또한 흑인들의 인종폭동의 경과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미국의 인종갈등은 단지 인종갈등이 아니라 계급갈등이라는 점이다. 즉 소외된 하층민의 분노의 폭발이고, 그 소외된 하층민들중에는 대체로 흑인들이 많다. 하지만 흑인들 일부는 지배질서안에 엘리트로도 편입돼있고, 지역의 ‘유지’ 명망가들이기도 하다. 특히 미국 전역의 경찰중에 흑인들은 어디나 있다. 그리고 경찰의 흑인 살해 시점에도 그 현장에도 흑인 경찰은 있다.흑인 경찰이 옆에서 방조하거나 거들 때도 있다. 우리는 그런 장면들을 수도 없이 미국 언론 영상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흑인이 죽고, 흑인들이 백인 경찰폭력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며 분위기가 험악해지면 또 흑인들이 나와서 말한다. 흑인시장, 흑인 경찰서장, 흑인 교수, 흑인 언론인등등. 백인경찰에 의한 흑인 살해사건만큼, 전국적으로 흑인들이 언론에 주목받는 자리에 나오는 일도 없을 것이다. 온통 어디선가 흑인들이 나와서 발언대에 선다.
그렇다면 이건 과연 ‘인종 갈등’인건가? 흑백 갈등인건가? 백인에 의한 흑인의 살해인건가? 저 흑인들은 무엇이고, 또 이 흑인들은 무엇인가? 미국에서 흑인은 더 이상 하나가 아니다. 그리고 지배질서 안에 기득권층으로 편입된 흑인들은 ‘백인우월주의체제’를 지탱하는 중요한 인적 자원이기도 하다(또한 흑인 자체가 한 ’인종(race)‘이 아니다. 복합적인 다인종군이 미국에선 ’흑인(the black)’이라는 통칭으로 불린다. 미국에서 흑인의 정의는 백인 피가 100%가 아닌, 그리고 흑인 1%의 피라도 섞인 사람들을 의미한다. 그러다보니 미국 인구조사(General Social Survey)의 인종 분류에서 라틴계는 줄곧 흑인으로 분류됐었다. 라틴계가 흑인으로부터 ‘인종/에스니스티 분류’에서 떨어져나온지 얼마 되지 않았으며, 그 결과 미국 인종 분포에서 흑인 인구는 10% 중후반대로 추락하였다. 이것 역시 정치사회적인 배경과 이해 정치의 결과물이다).

3. 그리고 다른 한 가지는, 이것이 인종폭동이라면 과연 이것은 지금까지 벌어진 폭동과 아무 차별성이 없는 것일까? 크게 보면 차별성이 없다. 미국의 지배질서와 사회적 불평등이 인종을 경유하면서 구조화된 단면이 이렇게 폭발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아무리 ‘잘난’ 흑인들이 아이비 리그를 나오고, 언론인이 되고 전문직이 되고 대통령이 되어도, 그들은 미국의 지배적인 질서를 해체하거나 그 일각이라도 허물어뜨리는데 도움이 된 적이 없다. 오히려 그들은 이 지배체제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버락 오바마다. 오바마가 대통령 재임 시절에 퍼거슨 시에서 흑인 ‘폭동’ 이 일어났다. 똑같이 백인경찰에 의한 흑인 살해였다. 하지만 오바마는 결국 “우리 모두 오버컴”(극복하리)”를 부르고, “amazing grace”를 흑인 교회 추도식에서 나타나 멋드러지게 한 곡 부르는 것으로, 그의 죽음을 추도하며 보내버렸다. 무엇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는 여성이나 계급문제도 마찬가지다. 여성 일부가 아무리 잘나서 엘리트가 되어도 그것이 과연 젠더적 질서를 붕괴시킬까 아니면 그 질서의 정당화를 구축해줄까. 노동계급의 일부 인사가 국회의원이 되고, 원내 정당이 되고 심지어 ‘노동자출신’ 대통령이, 예컨대 노동자 출신이라는 이재명 경기도 지사가 대통령이 된다면 그것이 과연 계급정치일까. 미국의 인종주의 정치 역시 마찬가지다.

4. 그럼에도 이번 미니아폴리스 발 시위 사태가 단지 흔하디흔한 ‘흑인/인종 폭동’일 것이라고 단정하기 어려운 이유는, 이것이 코로나29 사태에 대한 항의 시위의 성격을 점차 가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미국의 코로나19 사망자중에 80%가 흑인등 유색인종이다. 흑인등은 보편의료보험 없는 미국 공공의료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다. 흑인들은 보험을 들지 못한 인구중 절대다수를 차지하며 미국의 메디케이드등 서민용 의료시스템의 혜택은 코로나19에 대응하기엔 턱없이 빈약하다. 코로나19 팬데믹속에서 흑인들이 죽어나가고 있고, 그들의 주검은 웅덩이에서 화장이나 매장을 기다리고 있다. 흑인들은 가장 낮은 서비스업종 바닥의 노동시장을 점하고 있으며, 코로나19로 인한 근 5천만명의 해고 사태 가운데 정중앙의 직격탄을 맞고 있다. 코로나19 과정에서 미국의 불평등이 흑인등을 중심으로 타격을 가하고 있다. <가디안>지 5월31일자 기사에 따르면 미국 인구중 5400만명이 식량보조가 없다면 당장 ‘기아’ 선상에 놓이게 된다고 한다. 전국의 도시마다 푸드뱅크 앞에 길게 줄 지어선 행렬은 전대미문의 양상을 보이고있다. 또 미국 아동 네 명중 한 명, 즉 1800만명의 아동이 당장 식량보조가 필요하다는 집계도 있다. 미국은 다른 3세계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코로나19 팬데믹 앞에서 한마디로 ‘식량 안전’의 위기에 처해있는 것이다.코로나19는 단지 전염병이 아니다. 그 전염병의 확산 속에서 불평등이 더욱 극심하게 나타나고 불평등에 대한 불만이 응축되고 쌓인다. 이번 미니아폴리스 시위는 인종폭동이면서 계급투쟁일 가능성이 있다. 그러므로 이번 시위는 한번으로 끝나지 않을 시위다. 앞으로 닥칠 ‘사회적인 위기’와 ‘대격변’의 전조일 가능성도 있다.

5. 미국 11월 대선을 앞두고 보수양당인 붉은 색 공화당과 푸른 색 민주당은 모두 ‘집권능력’과 ‘정당성’면에서 한계를 노출하고 있다. 공화당의 트럼프 현 대통령은 코로나19 대응에 있어서 심각한 한계를 노출하였다. 그는 전염병을 통제할 능력도 문제이지만, 전염병을 대하는 오도된 자세와 메시지로 미국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 이대로라면 연임이 힘들다. 하지만 그 경쟁자인 민주당의 유일 후보 조 바이든은 코로나19가 겁이 나서 자신의 자택 지하 벙크에서 두달째 박혀서 자취조차 보기 어려웠다. 미국인들은 조 바이든을 조롱하는 SNS 메시지들을 올리고 있다. 다음 정권 대통령 자리에 앉을 두명의 후보가 다 이 모양이다. 그리고 버니 샌더스나 엘리자베스 워렌 같은 후보들을 제치고 이런 후보들을 추대한 것이 바로 미국의 선거민주주의다. 이만하면 미국의 위기는 확연하다. 체제의 위기와 민주주의 정치의 위기, 그리고 그것이 이제 미국의 헤게모니를 놓치지 않으려는 미국 지배 엘리트의 막가파식의 행동 가능성때문에 전지구 리더쉽의 위기와 불안정성을 증폭시키고 있다. 이것이 미국이라는 국가의 모습이다. 제국(the Empire)은 간데 없고, 미국이라는 나라(the State)의 재발견 혹은 재탄생이다.

사파논평은 민중언론 <참세상>에도 동시 게재됩니다.
미국 경찰 흑인살해 항의시위와 코로나19 계급투쟁

4.15총선 전 열흘 동안 한국사회는 다량의 ‘국뽕’주사를 과다 투여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언론들, 짜깁기 해외 소식들, 담론들, 입장들. 그리고 좌우 가릴 것 없이. 우파로는 조선일보, 중앙일보까지 대한민국의 코로나19 대처능력을 인정했다고 하고, 좌파쪽(?)에서도 그에 대해선 특별히 이견이 없다 했다. 그게 지금 총선의 결과로 나타났다. 박근혜 퇴진시위 때 자유주의세력이 중심으로 서고 좌우를 거느리는 지형이 만들어졌다. 이는 이후 조국 사태로 찢어졌지만, 다시 코로나19 앞에서 봉합됐다.

한국 사회 전체는 국뽕에 젖어있었다. 한국 사회 전체가 코로나19 대처를 두고, ‘국뽕’(흔히 국수주의를 세속적으로 이르는 말)에 젖어 있는 가운데, 과연 무엇이 결핍되고 지워져 있는가? 우리는 생각하고 정치화했어야 했다. 진보의 독자적인 입장이 있어야했다. 총선에도 다른 입장을 제출했어야 했다.

여기서 ‘국뽕’의 정의는 단지 국수주의적 애국주의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국가뽕’이라고나 할까? 강한 국가주의까지 포함한 의미로 나는 썼다. 한국에서는 코로나19 국면에서 우익세력이 오히려 국가적인 노력과 국가의 강한 역할에 대해서 찬물을 끼얹고 비아냥거리고, 폄훼하였다. 자유주의 세력은 개인의 자유에 대한 통제에 대해 어떤 불편함조차 언급하지 않았다. 사민주의자들도 국가의 역할을 적극 지지하고 주장하는 국가주의자들이 되었다. 즉 국가의 더 많은 역할과 적극적인 개입에 대해 먼저 요청하기. 코로나19 확진자중 자가 격리 규칙을 어기는 자들, 신천지에 대해서 더 강하게 통제하라고 얘기하기. 왜 빨리 돈을 찍어서 어디라도 뿌려야하지 않냐고 말하기 등.

또한 전체적으로 코로나19에 대한 대처 전략을 두고 이 모두가 한국의 ‘국가’가 한 일로 치부하는 일, 나아가서 현 집권정부가 다 한 일로 치부하는 일. 이런 강한 국가의 배경이 되었던 역사를 다 미화하는 일, 사회적인 격리와 감금에 대해서 있을 수밖에 없는 ‘부대적인 사상자’로 보는 듯한 태도까지. 이 모두가 ‘국뽕’과 관련되는 사회현상들이다.

참으로 놀라운 반전이 아닌가 말이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후에 이 사회에서는 “국가가 없었다”라는 말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또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터져 나왔다. 이 두 가지의 단발마적인 의문이 바로 촛불시위로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한국사회 화두다. 그리고 현직 대통령 박근혜를 퇴진시키면서 그를 국가가 국가답지 못하게 만든 적폐의 원흉이라고 지목했다. 과연 국가 실패의 원흉은 박근혜일까?

그리고 촛불 2년이 남짓 지난 지금, 한국은 갑자기 국가가 없는 것이 아니라 너무도 강한 국가, 잘난 국가, 전 세계에 모범이 되는 국가를 가진(?) 나라가 되었다. 다시 의문이다. 과연 국가란 무엇인가? 어떻게 “국가는 없었다”던 상황에서 이렇게 한순간에 강한 국가의 면모로 세계 모든 국가들에게 모범이 되는 코로나19 대응을 보이는 국가가 되었을까?

나는 세월호 참극이 일어난 후에 ‘국가가 없었다!’라는 한탄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혹은 이 사회의 전체성을 덮고 있는 “이 국가는 어떤 국가인가”를 문제삼아야한다고 말했었다. 왜냐하면 한국에 국가는 없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미 한국에 국가는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한국만큼 ‘강한 국가’ 유형도 없기 때문에. 해서 “국가가 없었다”가 아니라, 우리가 문제화해야하는 것은 “과연 이 국가는 어떤 국가인가?”이다. 세월호 참사 앞에 국가 역시 무능한 국가가 아니라 잘못된 국가였기 때문이다. 이는 단지 ‘실패한 국가(the failed state)’, 국가가 국민에게 실패했다의 의미가 아닌, 국가의 성격에 관한 문제다.

지금 코로나19 앞에서 한국의 국가는 이 ‘실패한 국가’라는 테제에도 답한 것으로 보인다. 다수의 견해가 그렇다. 실패한 국가는 ‘정상국가(normal state)’가 되었고, 나아가 전 세계가 부러워하는 국가가 되었다. 비정상의 정상 속에서 유일하게 정상국가인 한국의 국가. 그런데 과연 이런 반전에 근거는 무엇인지 차분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일방적으로 국가주의, 국뽕이 넘쳐난다. 심지어 진보세력까지 국가의 부활, 그리고 국가의 강한 개입에 대해서 유보도 비판도 없이 찬사를 보낸다. 국가가 개입하여 신천지 등 교회들에 대해서 금지령을 내려야하고 엄중하게 법집행을 해야 하고. 국가가 먼저 나서서 돈을 찍어내야 하고, 국민이라면 모두에게 재벌을 포함하여 재난지원금을 살포해야하고.

근데 말이다. 과연 재난 앞에서 국가는 그렇게 중립적인가? 그리고 과연 지금 이 국가는 국민을 구별 없이, 사회집단을 구별 없이 대하고 있는가? 지금 돈이 어디에서 나와서, 어디로 가장 많이 흘러가는가. 지금 공권력의 위세가 어디로 향할지 가늠은 하는가.

총선 앞에서 국가주의, 국뽕. 아니 코로나19 앞에서 한국이 너무 잘하고 있고, 전 세계 국가들이 찬사를 보내고 있다는 말들이 극에 달했다. 이 담론의 홍수가 총선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

선거전야였다. 선거는 연기할 수 없다면서 코로나19에도 불구하고 치러졌다. 하지만 코로나19 앞에서 공포는 국가에 대한 의존을 강화하고, 강한 국가를 요구하게 만든다. 그리고 모든 사회적인 노력은 집권세력의 공이 된다. 코로나19에 대한 대한민국의 대응 과정은 국가, 그리고 나아가 현 정부가 잘한 ‘치적’으로 된다.

그 과정에서 진짜 누가 코로나19 전선에서 일했는지, 이 사회가 코로나19에도 불구하고 작동하게 만든 것이 누구인지, 과연 그들에게 이 모든 영웅적인 투쟁의 공이나 성과가 돌아갈지는 미지수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 정부는 그 과실을 챙길 것이다. 대통령의 지지율은 50%를 넘었다. 1년 반만이다.

이번 총선은 코로나19 총선이 되었다. 과연 누가 전 지구적인 팬데믹이 만들어낸, 이 생명과 안전의 공포 앞에서 ‘다른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역설이다. 6년 전 세월호 참극으로 이 사회는 안전사회 담론으로 이행했다. 사회운동과 시민사회 담론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것이 지금 코로나19앞에서 ‘강한 국가’의 지지 배경이 되었다. 대통령도 코로나19와 세월호를 연결해서 발언한다. 우리는 그 교훈을 배웠습니다, 라고. 이것이 이번 선거에서 현 정부와 자유주의 정치가 이긴 배경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진보세력의 차별성은 보이지 않는다. 좌파는 더욱 없다.

지금 코로나19 국면에서 고민의 한 지점은 이것이기도 하다. 계급적인 관점이 탈각된 국가주의와 안전사회담론이 결국 다시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국민총화’론으로 모든 것들의 구별선, 균열선, 분리와 배제의 선이 비가시화하고 있다. 지워지고 있다. 또다시 ‘눈먼 자들의 사회’다. 국가에 눈먼 사회. 세월호 참극의 정반대편에서.

권영숙(사회적파업연대기금 대표) 2020.04.17 15:40

참세상 기사
사파논평은 인터넷언론 <참세상>에도 공동 게재됩니다. 매달 2회 정도 나갈 예정입니다. 계급적인 관점에서 세상읽기를 통해서, 세상을 바라보는 근육을 함께 기르고 연대의식으로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함께 읽어 주시고 알려주세요.

미국 민주당 대통령경선에 나선 무소속후보 버니 샌더스가 4월9일 결국 경선 중단을 선언했다. 코로나19의 최대의 방역책으로 ‘사회적 거리두기(social distancing)’를 말하는데 이에 빗대 말하자면, “사회주의에 거리두기”라고 할 만하다.

이 말은 미국 민주당 전국위원회에서 내놓은 공식 논평에 있는 말이다. 미국 유권자들은 “사회주의에 거리두기”라는 전국적인 행동을 보였다고 톰 페레즈 민주당 전국위원회 대변인은 말했다. 그리고 (사회주의라는) “거친 생각(a wild idea)을 더이상 퍼뜨리지 않는 것이 미국에게 가장 좋은 길이라고 미국인들은 결정했다”고 말했다.눈을 의심케 하는 표현이었고 몇 번을 읽었다.

이 얼마나 역설적인 발언인가. 미국은 지금이야말로 시장의 혼돈과 무책임,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와 빈부 격차가 빚어낸 참극 속에서 사회주의가 필요한 상황인데 말이다. 공공의료의 부재, 사적 의료보험체계, 국민 수명이 70년대 이후로 계속 낮아지고 유아 사망률이 갈수록 높아가는, 그래서 기이하게도 제3세계 빈곤국가들과 사회 지표가 유사해져가는 나라. 그 정점에서 지금 코로나19 전염병이 퍼지고 있다.

코로나19가 미국의 불행이 아니라, 미국의 자본주의 체제가 코로나19앞에서 인민의 불행이다. 그리고 지금이야말로 미국은 사회주의가 필요한 국면이다. 체제로서의 사회주의는 아니더라도 사회주의적 조치가 필요한 상황이다.그래서 자본주의의 선진국들, 유럽국가들뿐 아니라 미국 역시 지금 자본주의 경제를 살리기 위해 다급하게 사회주의적 조처를 졸속 모방하고, 시장의 원칙을 말하면서도 국가의 힘과 권력을 마구 휘두르고 있다.

대표적으로 다음의 예들이다.
미국은 지금 1950년 한국전쟁때 제정했지만 사문화됐다시피했던 ‘군수물자생산법(Defense Production Act)’ 을 발동해서, 민간기업에게 코로나19 관련 인공호흡기와 마스크등 의료물품을 제조하게 하고, 국가가 강제로 징발하는 조처를 취했다. 심지어 이 법에 따라서 해외 다른 국가애서 수출하는 마스크까지 자국으로 빼돌리고 있다. 명백히 국제법 위반이다.

또 미국은 유동성 통화에 대해서 시장원칙과 상관없이 무제한의 양적 완화를 선언했다. 헬리콥터 머니를 뿌린다고 하고 국민들에게 긴급한 재난기본수당을 준다고 말하지만, 대부분의 돈은 자본주의와 기업 살리기에 사용하고 있다.

그 와중에 코로나19로 인한 재난은 이 사회의 가장 밑바닥부터 거세게 덮치고 있다. 미국의 경우 4월10일 현재 16000명이 사망했는데 시카고, 뉴욕등에서 흑인 빈민지역의 코로나19 사망율이 치솟고 있다. 가난한 이들은 코로나19에 걸렸는지도 모르고 사망하고, 코로나19 사망자로 분류되지도 않은채 스러질 것이다. 이는 남미, 아프리카, 아시아의 빈국등 전세계가 마찬가지일 것이다. 선진국이나 후진국이나, 제1세계나 3세계나 공통적으로 벌어지는 일이다. 가난한 무산자계급, 소수자, 무국적자들이야말로 코로나19앞에서 가장 위험한 상황에 놓여있다.

코로나19의 전지구적 판데믹 속에서 선진자본주의국가들은 사회주의체제로부터 모방한 중앙집권적 자원 동원과 배분체계를 통해서 자본주의 경제의 부양에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사회주의는 중앙집권적 자원배분이 다가 아니다. 그냥 헬리콥터 머니 찍어내서 뿌리면 여하튼 경기가 좋아지니 전국민이 다 좋은 것 아닌가 하는 것, 혹은 그중 얼마나 떡고물이라도 가난한 자들에게까지 미치겠지 하는게 아니라, 지금이 정말 전시경제에 준하는 재난경제 상황이라면 사회적 자원과 재원과 물자를 ‘사회주의적으로’, 사회전체의 평등의 방향에서 약자 우선으로 배당하고 배분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미국등 자본주의국가들은 자본주의를 위기에서 구출하기 위해서 사회주의로부터 배운 조처는 재빨리 실행에 옮기면서, 사회주의자들의 뜻은 “거친 생각(wild idea)”라면서 기각한다.

결국 사회주의자는 아니지만, 사회주의적 이상을 온건하게라도 주장하고 실현하자고 했던 ‘민주사회주의자(Democratic Socialist)’라는 버니 샌더스는 미국의 ‘사회주의에 거리두기’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경선포기 선언을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더많은 미국의 청년들이 이 급진적인 정치적 사고에 “감염”되어서 다음 선거는 공화당과 민주당 체제를 일소하길 바란다.”

미국과 자본주의에게 더 무서운 바이러스는 코로나19가 아니라 사회주의, 맞다.

2020. 4. 10

권영숙 (사회적파업연대기금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