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첫 발을 내딛었습니다. 격월(둘째 주 화요일)로 발행되니 많은 성원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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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파동행> 1호 목차 및 전문 (클릭)
사회적 연대로 희망을 모으는<사파동행> 1호(2022.01.18.)
모든 힘을 연대활동에 쏟느라고 정작 단체 소식지 하나 10년동안 발간하지 않았습니다. 10년 활동 결산결과, 2011년이후 총 218회 연대활동을 했고, 월평균 18회 기금 지원 연대활동을 했습니다. 단체 활동 홍보는 항상 후순위로 밀렸습니다. 하지만 사파기금의 연대자들에게 사파기금의 활동을 체계적으로 알리기 위한 소식지 발간을 계속 미룰 수 없습니다.
10주년을 마무리한 올해부터 사파기금의 소식지를 내기로 했습니다.
2022년 1월부터 사회적파업연대기금 소식지 <사파동행>을 발간합니다.
읽어주시고, 많이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노동이 돈앞에 스러지지 않는 사회적 연대를 위하여’
1. 사파기금 소식지 겸 뉴스레터 제목은 <사파동행>입니다.
<사파동행> 많이 사랑해주시고, 구독해주세요. 하단에 ‘구독하기’ 버튼을 눌러주세요.
2. <사파동행>은 사파기금의 연대활동과 노동을 사회적 의제화하는 다양한 담론활동을 담을 예정입니다. 기금의 활동을 일목요연하게 확인하고, 이 땅의 노동 의제에 대해 관심있는 연대자들께서는 꼭 구독해주세요.
3. <사파동행>은 이 땅의 ‘노동이 있는 모든 곳’에 시선을 두고 손을 잡으려고 합니다. 노동이 돈앞에 스러지지 않는 세상을 위하여, <사파동행>에 투쟁과 연대 소식을 실을 예정입니다. 관심 가져주세요.
4. 사파기금은 연대자들이 동력입니다. 소중한 연대자의 목소리를 “연대자의 발언”으로 실을 예정입니다. 오랜, 그리고 새로 동참한 연대자들의 발언을 경청해주세요. 첫 호 “연대자의 발언”은 아시아나케이오노조 김계월 지부장의 글입니다. https://sapafund.org/?p=4566
5. <사파동행>은 격월 둘째주 화요일 발간을 시작으로 차차 발간횟수를 늘려갈 예정입니다.
연대자 여러분,
사파기금과 화요일에 만나요!
2022.01.18
사회적파업연대기금
김계월 (아시아나케이오 노조 지부장)
2년전 어느 봄날 나는 코로나19 로 정리해고가 되었다.
부당한 해고에 맞서 금호아시아나 본사 앞에서 첫 번째 천막을 치고 농성을 시작했고 그 투쟁의 시작은 지금 600일이 되어도 끝나지 않았다. 지난해 지노위 ,중노위 그리고 행정소송 1심까지 사법부는 해고노동자의 손을 들어줬다. 그럼에도 아시아나 케이오 해고노동자들은 여전히 거리에서 천막을 치고 한뎃잠을 자며 원직복직을 위해 투쟁을 하고 있다.
고통의 시간은 인간의 마음을 수차례 갈기갈기 찢어놓았고, 노동자의 자존심도 짓밟아 버린 금호문화재단 박삼구는 경영비리로 유죄 판결로 감옥에 들어갔으나 지금 보석으로 나와 따뜻한 방에서 재판을 기다리고 있다.
노동자들은 차가운 거리로 내몰고, 박삼구에게는 따뜻한 안방을 내어준 이 정부는 한 자리의 일자리라도 지키겠다는 약속을 언제 지킬 것인지. 답을 기다리는 케이오 해고 노동자들 중 두 명은 지난해 거리에서 정년을 맞았고 또 3월이면 정년이 다가온다.
아시아나케이오 해고노동자들은 매일 아침 점심 저녁 세 차례, 종각 금호아시아나본사 앞에서 부당해고 판결 났으니 복직 이행을 하라고, 그 책임을 금호문화재단 박삼구가 지라고 소수의 작은 소리이지만 크게 외치고 있다. 오늘도 우리는 오늘도 이 추위에 투쟁을 멈출 수 없음을 알리는 선전전을 하고 있다.
아시아나 케이오 부당해고 철회를 위해 싸우는 종각 센트로폴리스빌딩은 금호아시아나 본사가 있는 건물이다.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춥다. 처음 해고를 당하고 종각에 천막을 치고 지방 노동위원회에서 부당해고 판결을 받기까지 천막 농성장은 해고자의 집이 되었다. 2020년 여름은 54차례의 장마비와 습도때문에 고역이였다.
잠이오면 건물 안 그늘을 찾아다니며 졸기도 하고 여기저기 지나가는 시민들 눈치를 보며 천막을 지켜야 했던 어느날, 나는 한겨레신문에 실린 사회적파업연대기금 권영숙 대표의 긴 인터뷰를 읽었다.
“과연 긴급재난지원금을 받을 정도로 당신은 긴급재난 상태였나요? 라고 사람들에게 묻고 싶어요”
전국민 재난기금을 국가가 지급했을 때의 이 인터뷰를 보며 나는 깊은 공감을 느꼈다. 나도 비록 해고자였지만 코로나19로 상황이 더 좋지 않은 사람들을 돕고 싶었다. 그리고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이라는 단체와 함께 하고 싶었다.
사파기금에 조금이나마 연대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끝에, ‘코로나19 첫 해고 사업장’인 케이오노조의 투쟁을 알리기 위해 방송국에 출연해서 받은 출연료중 절반의 금액을 사파기금에 연대했다. 그렇게 시작된 사파기금과의 인연은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코로나19의 재난은 해고문제뿐 아니라 영세 자영업자까지 재난과 위기로 다가왔다. 그 때 사파기금은 고통에 빠져있는 해고 노동자들을 위해 노동재난연대기금을 조성하고 물품이나 투쟁기금 등 해고사업장 재정사업에 통큰 마음으로 연대를 했다.
사파기금은 요즘 코로나19로 고통받고 있는 이 땅의 해고노동자들과 파업투쟁을 하고있는 노동자들에게 꼭 필요한 연대기금으로 쓰여지고 있다. 낮은 곳으로의 연대를 알리고, 노동자들이 돈앞에 쓰러지지 않도록 기금을 모아 연대하는 사파기금은 해고자가 된 나에겐 선물이었다.
해고자로 살아가면서 지금까지 많은, 선물 같은 도움을 받았다. 그리고 선물을 받고 기쁜 마음을 누군가에게 선물을 나누는 연대로 이어져야 한다는 걸 도움을 받으며 깨닫게 되었다.
앞으로도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이 코로나19 재난시대의 선물처럼 노동자들에게 꼭 필요한 곳이 되었으면 한다. 그리고 연대와 사랑을 실천하는 사회적파업연대기금에 응원과 지지를 보내고 싶다. 모든 노동자들이 돈 앞에 쓰러지지 않는 그 날까지.
이 사건은 1992년 김종배 <미디어오늘> 국장이 당시 사건의 유일한 현장 목격자인 장남 승권 씨(승복 형) 증언을 토대로 “(사건 발생 직후) 조선일보 기자를 만난 적이 없다”는 내용의 인터뷰 기사를 <저널리즘> 가을호에 기고하면서 세상에 공개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승권 씨는 동생 승복이 살해된 뒤 자신이 원주에 있는 병원으로 후송되기까지 이 사건에 대해 아무에게도 말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후 1998년 언론개혁시민연대(언개연)에서 전 기자협회장 출신인 김주언 사무총장 등이 ‘언론계 50대 허위·왜곡보도’를 선정하면서 이승복 발언 조작을 포함했다. 1992년 <저널리즘>에서 발간된 글에 대해서 몇 년간 가만히 있던 <조선일보>가 이 때 적극적인 대응에 나서 김주언, 김종배 두 사람을 고소고발하면서 오보논쟁은 법정으로 비화됐다. 2006년 대법원은 원심을 확정해 김주언 전 총장에게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 그리고 <조선일보>에 500만 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반면 김 전 편집국장에게는 별다른 책임을 묻지 않았다. “의혹 제기”는 가능하다면서 1992년 기사에 대해선 무죄를 내리고, 그 기사를 토대로 언론계 50대 허위 왜곡보도를 선정한 것은 유죄로 판결하는 기묘한 판단이었다. 결국 대법원 판결로 오보 여부는 밝혀지지 않은 채 오히려 묻혔다.
그런데 현실에서 이 발언의 진위 여부는 아랑곳없었다. 반공교육 앞에서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나까지 포함하여 수많은 ‘유신체제’의 아이들이 ‘국민교육헌장’을 외우고,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를 외친 선배 어린이의 한을 이어받기를 강요받았고, 해마다 붉디붉은 ‘멸공’ 포스터를 그려내야만 했다.
2. 유신 이후 아이들
–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를 외치는 남한의 재벌 2세
그렇다면 유신체제 이후의 아이들은 어떨까? 유신체제 때 국민교육헌장 세대도 아닌 신세계 부회장이자 재벌 2세 정용진이, 민주화된 서구에 가서 살면서 ‘신식 서양학문’을 배웠다는 이 자가 갑자기 SNS에서 자못 진지하게 ‘멸공’을 외치고 나섰다. 이는 반공주의에서 아주 ‘새로운 젊은 피’임이 분명하다, 이른바 일베라고 불리는 이들.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가 양극화와 불평등을 통해 만든 괴물들. 그들과도 매우 유사해 보인다. 해서 정용진의 SNS 소통에 대해서 ‘일베 놀이’라는 지적도 있다.
일베로 표상되는 신세대 멸공 청년들. 그들은 자본주의자이자 국가주의자일뿐 아니라, 적자생존의 원칙을 자랑스레 ‘공정’이라고 외치는 사회적 다윈주의자들, 사회적 우생학의 신봉자들이기도 하다. 이미 출발선이 다른 것을 ‘불평등’이라 사고하지 못하고, 출발선 이후의 경쟁에 대해 ‘공정’을 읊조린다. 그러면서 사회적으로 지속되는 구조적 불평등을 줄이고 해소하려는 노력에 대해서는 또 하나의 ‘공정 침해’라고 말한다. 그들이 시장경제를 지지하고 ‘멸공’을 외치는 것은 해방공간에서, 한국전쟁 이후의 반공체제에서 외치던 멸공보다 어떤 면에서는 더 섬뜩하다. 그건 ‘사상적인 확신’으로까지 보이기 때문이다. 잘 나가는 자본주의에, 잘 나가든 못 나가든 시장자본주의에 찌든 의식이 만들어내는 의식 말이다.
근데 정용진 씨는 단지 이 땅의 평범한 일베 청년이 아니라 재벌자본주의 공화국의 최대의 수혜자이기도 하다. 이렇듯이 요즘 ‘재벌’ 2세들은 재벌을 인간화, 나아가 사회화하고 있다. 정용진의 인간적이고 소탈한 SNS 활동은 그중 대표적인 사례다. 재벌 2세뿐이 아니다. 지난 10년간 노동자 투쟁이 벌어진 곳들의 공통점은, 바로 기업체 사주의 아들이 2세 경영을 시작한 곳들이라는 점이다. 그들은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가 어떻게 나타나는지 보여주고 있다. 기업을 일군 아버지 세대가 노동에 대해 보인 감성 따위 (물론 그 신성함은 노동자가 아니라 ‘자수성가’한 자신들의 노동에 대한 신성함을 주축으로 한)는 눈곱만큼도 없어 보인다. 신자유주의를 완전히 체화한 그들에게 노동은 철저히 자본의 일부이다. 팔고 사고, 넘기고, 대체가능하고, 귀찮으면 밟아버린다. 그렇다면 더욱 부를 집적한 재벌 2세의 경우는 또 어떨까. 그들은 더하면 더할 것이다. 그래야 재벌을 경영할만하지 않을까.
SK그룹의 최태원, 삼성그룹의 이재용 등은 재벌 승계과정의 불법 등의 문제로, 그의 아버지들보다 훨씬 젊은 나이에 감옥을 드나들었다. 이미 전과자들이다. 최태원, 이재용의 얼굴 역시 자본이 드러내는 인간의 얼굴이다. 반면 최근 신세계 부회장 정용진의 요사스런 키보드 워리어 짓은, 이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드는데 흥미를 붙인 ‘관종’ 놀이인가 의아하기도 하다. 하지만 나름 참 솔직담백하게도 이데올로기적 전투의 장에서 반공투사연하는 모습이다. 재벌과 자본이라면 당연한 생각이고, 자신들끼리 ‘무대 뒤’에서 이미 공공연히 말하고 있었을 발언들을 대놓고 대중을 향해서 떠들어대고 있다. 이 점에서 정용진의 발언은 사뭇 흥미롭지 않은가 말이다.
3. ‘멸공’을 비난하고 조롱하는 이들
정용진은 공개적으로 온라인상에서 ‘멸공’을 외친다. ‘가짜 뉴스’라는 말도 없던 시절에 오보 논쟁을 불러일으켰음에도 21세기 ‘탈진실의 시대’에도 여전히 진실인양 받아들여지고 있는 이승복 어린이의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발언을 실제로 말하는 이가 21세기 대한민국에 나타났다. 그것도 멀쩡한 장년의 남자, 재벌 2세가 한 발언이다. 그래서 지금은 이 문제적 발언에 대해 한국전쟁을 갓 지난 60년대식으로 바라보면 안 될 듯하다. 정용진은 이 사회에 ‘체제’(regime) 논쟁을 하고 싶어 한다. 그런데 공부가 안 돼 있으니 좀 우스꽝스럽게 얘기를 전개했을 뿐이다. 하지만 체제 논쟁 좋다. 이 사회에서 정말 필요하다. 대선을 앞두고 논쟁이 사라졌다고 하는데, 진짜 논쟁이 나타났다.
더구나 최근 비자유주의 세력, 혹은 진보 좌파세력이 ‘체제 전환’이라는 화두를 내기도 했으므로 이참에 한번 붙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대선을 앞두고선 민주당도 ‘체제 전환’ 이라는 말을 은근 슬쩍 사용하고 있다. 언제나 아이디어는 궁하고 좌파나 외부에서 말하면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하는데 이 당은 참으로 능하다. 민주노동당이 있었을 때 민주당이 이것저것 정책 의제들에 침 발라놓던 것처럼 말이다. 제대로 하지는 못하지만 진보 흉내는 내고 싶은 것이 민주당이다.
하지만 고작 이게 뭐람…. 멸치와 콩이라니. 이것을 ‘멸공’이라고 하다니. 이건 도대체 무엇이, 혹은 누가 조롱당하는 것이란 말인가. 공산주의가 멸치와 콩자반으로 비유되고 조롱당해도 좋단 말인가. 하지만 정말 조롱당하여야 마땅한 것은, 공산주의를 멸치와 콩에 빗대서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수준의, 이념적으로 천박하고 철학적으로 빈곤한 보수 세력이다. 아니나 다를까 정용진의 발언에 분노하고 혹은 희화화하고 조롱하는 이들이 참으로 많다.
정용진의 발언에 맞서서 비판이라고 하기는 좀 무색하지만, 거센 비난의 목소리를 내는 이들은 그럼 누군가. 대표적으로는 이미 실없기가 한없음을 여러 차례 드러냈던 민주당 국회의원 정청래가 파를 들고서 “그럼 나는 좌파다”라고 미러링했다. 주로 정당으로는 민주당, 이데올로기적으로는 자유주의 세력이 정용진의 발언에 대해서 가장 거세게 반발하고 비토하고 나섰다. 정작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들은 오히려 점잖게 가만히 있는데, 어찌 된 일인지, 자유주의 세력이 모욕을 당한 듯이 일제히 성토장을 만들고 있다.
이미 체제 논쟁은 저리 가라다. 정용진은 우스꽝스럽게나마 체제에 대한 도발을 했는데, 자유주의 세력은 멸공도 반공도, 친공도 관심이 없다. 결국 이 정도면, 정말 양쪽 모두, 체제 따위에는 아무 관심이 없는 종임을, 아니 사실은 동일한 체제 안에서 끼리끼리 놀고 있다고 말할 정도로, 유유상종임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가 아닌가 싶다. 서로 상대를 까대기 할 것만 있으면 정신없이 까대기에 나선다. 정작 멸공 따위의 메시지는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한국 현대사에서 멸공이란 단어는 무겁다. 그리고 비극적인 단어다. 멸공은 결국 다른 말로 하면, 국가가 저지른 범죄였고, 민간인 학살이었다. 여수‧순천 반란 및 학살이었고 제주 4.3항쟁 및 학살이었다. 멸공이라는 말이 우리에게 편하게 다가올 수 없는, 심상치 않은 이유다.
4. 국가보안법은 ‘멸공’ 아닌가?
그렇다면 정작 이들이 정용진에 대해 비판하는 논점은 도대체 무엇일까? 과연 이들은 진정으로, 진심으로 정용진의 ‘멸공’ 발언을 비판하는 것일까? 혹은 정용진의 발언을 기회로 색깔 논쟁을 만들며 ‘집토끼’ 굳히기에 나선 윤석열과 국힘의 선거 전략에 맞서서 이렇게 열심히 정용진 까대기에 나선 걸까?
이미 우리는 맥락을, 그리고 정답을 알고 있다. 이들은 ‘멸공’이라는 메시지보다는 그 메시지의 전달자들에 더 관심이 있다. 정용진을 받아서 윤석열, 윤석열을 받아서 나경원 등등.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정청래, 그리고 이재명 선거본부 대변인 현택근 등등. 그렇다면 과연 정용진의 멸공 발언에 일제히 비난에 나선 이들은, 정작 ‘멸공’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 걸까? 멸공에서 ‘공’에 대해 어떤 생각이라는 것이 있긴 한 걸까? 멸공 발언에 대해서 비난을 퍼붓는다면 이들은 공산주의를 멸하는데 반대하기라도 하는 걸까?
그런데 아무리 봐도 공산주의에 대한 이들의 입장은 없거나 모호하다. 비난과 조롱은 넘치는데 논리는 박약하다. 전체적으로는 한국은 이미 공산주의가 위협적이지 않으므로, 이렇게 극악스럽게 ‘멸공’, 즉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따위를 외칠 것이 없다고 보는 것 같다. 과연! 아니 과연 그럴까? 하지만 이것은 답을 회피하는 것일 뿐 답이 될 수 없다.
결국 민주당, 자유주의세력은 정용진이 던진 메시지 자체를 두고 비판하지 않는다. 그렇게 비판하기도 어색하고 부자연스럽다. 왜냐하면 그들 역시 ‘멸공’세력이기 때문이다. 그들 역시 이 체제 안에서 멸공을 제도적으로 보장하고 있는 국가보안법을 지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보안법은 다른 말로 하면, 사회주의자 박멸법이다. 북한을 사회주의체제로 간주하고 반북=반공을 등치해 사회주의를 때려잡는 법이다. 정치적 양심수를 만들어내는 법이다.
하지만 그 법의 폐지론자였던 노무현도, 문재인도 모두 유지론으로 돌아섰다. 집권정당이 되자 민주당은 국가보안법 존속으로 당론을 바꾸었다. 정용진의 ‘멸공’ 발언과, 국가보안법 존치를 당론으로 정한 민주당세력. 그들 간의 차이가 도대체 얼마나 된다고 이 난리인가. 과연 비판의 초점이 멸공에 있기라도 한 것인가.
정용진의 공공연한 ‘멸공’,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발언을 제대로 비판하려면 국가보안법 폐지를 외치는 것만이 스스로 논리적인 정합성, 아니 정치사회적인 정당성도 가지는 것이다. 아니라면, 단지 정적에 대한 공격 수단으로 정용진의 ‘멸공’ 발언을 비난질하기에 급급한 것이다. 그렇게 이 체제안의 제도적 멸공의 수단인 국가보안법에 침묵한다면, 민주당 세력과 지지자들 역시 마찬가지라고 할 수 밖에 없다. 결국 남의 눈에 재 뿌리기이고, 제 눈에 든 큰 들보는 보지 못하는 것이다.
5. 결론
멸공의 반대말은 멸공 반대가 아니다. 멸공의 반대는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지공’ 혹은 공산주의에 친화적인 ‘친공’이다. 그런데 최근 멸공을 공공연히 말하는 자본가 정용진을 비판하는 이들의 입장은 참으로 모호하다. 멸공 주장에 대한 반대가 진짜 ‘멸공 반대’인지 모호하다. 멸공 주장에는 반대하는데, 멸공 반대는 아니라는 건가. 그러면 국가보안법은 무엇이란 말인가. 까대기 하다가 자가당착에 빠져드는 형국이다.
어쩌면 자본가 따위가 ‘멸공’을 떠드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건 하등 상관도 없다(단지 자본가는 당연히 멸공하자는 입장일 텐데, 그것을 시장에서 비지니스 한다는 자가 ‘대놓고’ 말하니, 주가도 폭락하고 불매운동도 불러일으키고, 정치적으로 한쪽으로만 ‘올인’하는 듯하니, 이야말로 아마추어 아니냐는 조롱거리가 됐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제일 큰 문제는 자본가는 대놓고 ‘멸공’을 외치는데, 자본주의의 수레바퀴에 깔려있는 이들이 왜 자본을 혐오하지 않는가이다. 재벌 2세의 이념적 전투 앞에서 노동계급은 더욱 분발할지어다.
* <사파시평>은 홈페이지와 민중언론 참세상에 동시 게재됩니다. 참세상 기사게시판 :: 기사 :: 멸공(滅共)에 대하여 – <font color=”red”>[사파시평]</font> ‘멸공’을 조롱하는 이들, 그리고 국가보안법 (newscham.net)[새해 인사]
2022년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새로운 365일이 다시 시작된다는 사실이야말로 어쩔 수 없이 새로운 희망을 품게 하는 계기가 되나 봅니다.
연대자 여러분, 새해에 복 많이 지으시고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2021년은 사회적파업연대기금 10주년이었습니다. 10주년을 지나면서 또 한번 새겨봅니다.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이 과연 무엇이고 어떤 존재가 되어야하는지. 파업기금을 사회적으로 공공연히 조성하고 노동의 파업권을 거침없이 요구하는 사파기금의 확산 정도가 이 사회 노동연대의 바로미터가 될 수도 있겠지요. 사회적 파업이 무엇인지, 노동의 사회적 연대가 어떠해야하는지, 그 내용을 채우고 그 실천이 목표치에 이를 때, 아마 이 사회는 어느덧 한 발자국 성큼 나아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10년동안 쉼없이 달려오면서 사파기금의 모든 동력과 시간과 열정을 투쟁하는 노동자와 민중과 함께 하기 위한 기금 조성과 연대활동에 집중했습니다. 사파기금을 제안하면서 알려드린대로, “돈이 모이는대로 쌓아두지 않고 연대”하고, 사회적 연대가 절실한 곳 어디든 전국 방방곡곡의 투쟁하는 현장에 손을 내밀고 전국을 다니면서 연대하였습니다.
그렇게 모든 힘을 연대활동에 쏟느라고 정작 단체 소식지 하나 10년동안 발간하지 않았습니다. 10년 활동을 결산한 결과, 2011년이후 총 218회 연대활동을 했고, 월평균으로 하면 월 18회 기금지원 및 연대활동을 한 셈입니다. 하지만 단체 활동을 홍보하는 일은 항상 후순위로 밀렸습니다. 2011년 희망버스이후 사회적 연대가 갈수록 약해지는 가운데 사파기금의 노력이 필요한 현장은 더욱 늘어났고, 미약하나마 가진 모든 힘을 퍼붓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습니다. 하지만 사파기금의 연대자들에게 사파기금의 활동을 체계적으로 알리기 위한 소식지 발간을 계속 미룰 수 없습니다.
10주년을 마무리한 올해부터 사파기금의 소식지를 내기로 했습니다.
2022년부터 사회적파업연대기금 소식지 <사파동행>을 발간합니다.
읽어주시고, 많이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노동이 돈앞에 스러지지 않는 사회적 연대를 위하여’
올 한해 사회적파업연대기금과 함께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시대가 불투명할수록 더욱 투명해지는 정신,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그런 건강한 정신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다시 한번 여러분의 건강과 평화를 빕니다.
서로 힘을 북돋우는 한 해가 되길 바랍니다.
2022. 1.3
사회적파업연대기금 대표 권영숙
국힘(국민의 힘)의 대선 후보로 윤석열이 뽑혔다. 당심이 민심을 이겼다고 했다. 여하튼 이번에도 보수우익정치는 자신의 성격을 정확히 드러냈다. 입당한지 3개월도 안된 ‘외부자’를 끌어다 대통령 후보를 만들 정도의 ‘당심’을 표출하는 정당이다. 이렇듯 그들은 권력욕이 강하고, 개방적이다(개방적이라는 말은, 그만큼 이 사회 권력력 인사들이 대동소이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는 어떤 면에서 보수 우익정당에게 배울 점이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자기 내부를 흔들고 재편하는, 권력욕이라는 목적의식. 그리고 외부자를 받아들여서 내부를 정리할 정도의 개방성. 그들은 오래된 당원이자 베테랑 정치인이자 내부의 ‘재야’ 같은 존재인 홍준표가 대선후보로 나오자 이를 극구 막아섰다. 홍준표가 그들이 그렇게 오매불망했던 청년의 지지를, 민주당 후보보다 더한 지지를 받으면서 일어서는데도 그를 선택하지 않은 당심이라는 면에서, 그들은 확실히 조직의 보존이라는 면에서 당파적이기도 하다. 국힘의 중요한 뒷배인 개신교 단체 한교연이 경선 하루 전날 윤석열 지지를 선언한 것을 보면 말이다. 그것은 국힘과 보수세력 내부를 향한 정확한 메시지였다.
하지만 사실은 이것은 국힘, 보수우익만이 아니라 정치의 일반성에 해당할 얘기다. 그리고 사회운동과 진보/좌파정치에도 해당된다. 내부의 적이 색깔 없는 외부자보다 더 두렵고 불편하고, 그래서 더 경계하는 것, 하나의 ‘진영’ 혹은 판에서 자신들의 편이 절대 될 수 없다고 판단하는 자에 대해선, 유력하든 필요하든간에, 정치에서 일단 배제하고 쳐버리는 것 말이다.
칼 슈미트 표현으로 정치는 ‘피아’의 구분이고, 이러한 정치의 ‘피아’ 구분 의식은, 한국의 진보정치, 좌파정치/운동까지 다 포함해서 사실은 ‘정치’가 있는 곳 어디서나 흔한 풍경이다. 진보, 좌파정치에 사람이 없네, 인물이 없네, 입장이 없네 하지만, 그들 역시 그냥 자신들의 사람, 인물, 입장을 부여잡고 가고 있을 뿐이다. 그 사람, 인물, 입장을 한 번도 내놓을 생각은 하지 않고 말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가끔 보수우익의 권력욕은 이마저도 넘어서서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고 정치의 신선한 모습을 보여준다, 예컨대 보수우익 정당이 윤여준, 남재희, 김종인 등을 중용한 것이 그렇다. 이번에도 윤석열이라는 외부의 대체재가 있었다. 그리고 이들 모두의 공통점은 모두 자유주의 정당과 보수우익에서 귀 기울이고, 양 쪽 문지방을 넘나들기 좋은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결국 보수우익과 자유주의는, 진보 아닌 보수라는 점에서 오십보백보다. 그러나 과연 진보정치, 노동정치, 좌파정치는 어떠한가. 어쩌다 진보, 노동, 좌파로 분화되었고, 또 이 분화가 당연시될 정도로 ‘피아’ 구분이 생겼는가. 원칙적이라기보다는 폐쇄적이면서 개방성은 없는 진보/노동/좌파정치의 현주소가 아닌가 말이다.
2. 양당 대결
윤석열이 국힘 대선 후보로 당선되는 순간, 두 가지 아니 결국 한 가지 반응 혹은 예상이 나왔었다. 이재명이 졌다는 예상(혹은 희망사항) 말이다. 이 예측이 도처에서 나왔다. 조국사태이후 그 미움이 이재명까지 연장된, 허약한 자유주의자들은 윤석열을 지지하겠다고 기염을 토하고, 윤석열이 대선 후보가 되는 날 “축배”를 들었다고 했다. 그리고 진보나 좌파라고 스스로를 칭하는 이들도 윤석열이 이재명을 이길 것으로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과연? 민주당이 아닌 국힘의 후보가 된 윤석열이 과연 홍준표보다 당선 가능성이 높을까? 그리고 윤석열이 국힘 후보가 된다고 해서 이재명이 과연 불리하거나 심지어 패배할까? 과연 그럴까? 나는 그렇게 예상하지 않는 편이다.
일단 대통령선거 본선에서 맞붙는다면, 이재명으로선 윤석열이 좀 더 겨루기 좋은 상대라고 본다. 홍준표는 사실 이재명과 비슷한 과이고, 정치 감각이 출중한 인물이며, 심지어 서민적이다. 이 모든 것이 이재명이 후보가 되면서 스스로 장점이라고 내세운 점이다. 겹친다. 그리고 홍준표는 이재명과 비슷한 과인데, 이재명보다 더 노회하고 말장난을 더 잘한다. 이재명이 지금 대통령 되기 위해 기를 쓰고 조심하고 있는 기질(temper)과 성질을 홍준표 같은 누군가가 계속 건드리면 이재명은 흔들릴 가능성 높다.
반면 윤석열은 입만 열면 설화를 일으킬 것이고, 미래 지향적인 입장보다 문재인 정권에 대한 복수혈전을 하듯이, 마치 검찰이 보복수사 하듯이 나오는 모습이 대통령감이라는 인상을 계속 갉아먹고 불식시킬 것이고, 결국에는 스스로 자충수를 두게 될 것이다. 윤석열을 통제할 이가 국힘에 없다는 것도 문제다. 해서 또 권력욕으로 가득 찬 국힘은 드디어 나이와 양당을 넘어서는 이력서로 윤석열을 제어 가능한 김종인 원톱 선거체제를 준비하겠다고 나섰다. 옳지! 이러면 얘기가 좀 달라진다. 하지만 얼마나 달라질지.
3. ‘검찰이 칼자루 쥔 선거’
나는 여전히 2022년 3월 9일 대선에서 당선이 가장 유력한 후보로 민주당 대선 후보 이재명을 국힘의 윤석열과 동일한 수준으로, 그리고 이재명의 당선 가능성을 좀 더 높게 보고 있다 (이 글 초고를 국힘후보로 윤석열이 확정되고 난 후에 썼다는 점을 밝혀둔다. 그 때 윤석열은 오차범위 밖 15%로 앞선 여론조사 결과가 발표됐다).
이유는 앞서 말한 후보들 사이의 강약점 때문이다. 두 번째는 이번 선거는 철저히 ‘검찰 선거’ 이기 때문이다. 당락보다 기가 막힌 것은, 바로 이 점이다. 대선이 온통 법조인들 천지라니. 대선 후보 하나는 변호사 출신, 또 하나는 검사 출신, 그리고 양자 다 검찰이 줄줄이 기소하고 있는 터이다. 그리고 그에 연루된 자들도 모두 변호사, 검사들이다. 아니 이게 뭔 나라냐? 이 질문을 하고 싶으면 지금이 질문할 때다. 이게 무슨 나라니? 검사가 변호사가 대선 후보이고, 검사가 대통령 후보를 선택하는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이런 선거가 무슨 민주주의이니? 이게 무슨 민주공화국이니? 단지 윤석열만이 아니라 이재명도 마찬가지로 다양한 죄목의 혐의로 인해 검찰의 자장에서 벗어난 인물이 아니다.
정치의 사법화의 정점: 촛불시위
퇴진촛불이 한창일 때 나는 특별검사와, 검찰과, 헌법재판소와, 법원의 힘을 빌려 박근혜를 퇴진시키는 집합행위가 박근혜 퇴진 이후 정치의 사법화와 법복귀족의 강화를 더욱 공고화할 것이라고 예상했었다. 그 결과가 19대 대통령은 문재인이라는 변호사 출신이고, 20대 대통령 후보도 윤석열이라는 검사이거나 이재명이라는 변호사 출신이다. 그리고 이제 대선후보의 당선여부를 좌우할 칼자루를 검찰이 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도대체 촛불은 누구 좋으라고 들었던 것인가?
사람들이 윤석열이 국힘 후보가 되는 순간 이재명 낙선이라고 예상하는데 그 근거는 매우 감정적이고 즉자적이다. 지금 문제가 되는 대장동 스캔들이 과연 이재명을 넘어뜨릴 수 있을까? 나는 한국의 주택정책, 아니 ‘부동산’이란 재테크 정책이 그렇게 단순하다고 보지 않는다. 이것 자체가 철저히 이해관계 동맹이다. 이로써 이재명 낙선을 확정지으려면, 사람들이 대장동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 시시비비를 가리고, 잘못된 일로 여겨야하고, 이재명의 이중성에 대해서 분노해야한다. 과연 그럴까?
부동산개혁과 검찰 개혁 둘 다 불가능한 이유
먼저 대장동은 한국에서 수십 년간 부동산-아파트개발 정책의 산물이다. 주택공사라는 이름의 간판을 내걸고 집장사하는 국가, 개발만 하면 큰 이익을 보장받는 부동산개발에 나선 건설 회사들과 은행 금융 등 민간 자본이 조성해온 거대한 부동산 경제. 국가와 자본(시장)은 부동산 경기의 불을 끌 생각이 애초에 없다. 부동산 경제를 해체시킬 생각이 없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토지이익을 일부 누리는 원주민(토지 소유주)들, 개발되는 아파트에 입주하고자하는 열망으로 가득 찬, 잠재적 주택 구매자 혹은 분양 대기자들인 도시의 중산층들. 과연 그들이 지금까지 임대주택 100%의 공영 개발을 찬성했던 적이 있었던가? 그들이 과연 국가가 수용한 택지를 전면 공공개발만 하겠다면 지지할 것인가? 혹은 국가가 공공개발한 아파트들을 모두 국유화하고 시장 가격과 무관하게 개인들에게 임대아파트로 내놓는 정책을 편다면 과연 동의할까? 그리고 이미 주택을 보유한 이들은 또 어떻겠는가? 부동산 투기를 뿌리 뽑는 정책을 시행해 부동산 과열이 완화되고 해소되면, 자신의 아파트가격이 떨어지는 현 시세를 용납할까? 심지어 소규모 서민 아파트에 사는 이들 역시 지금도 20억짜리 아파트를 부러워하며 자신의 5억짜리, 3억짜리 아파트를 재개발하여 그런 ‘자산상승’을 원할 것이다.
이재명은 대장동 스캔들을 통해서 확실히 보여줬다. 그는 후보로서 지금 내놓는 공약과 다르게 실천할 사람이라는 것을 말이다. 대통령이 된 이재명의 부동산 정책은 지금의 대장동 사태와 판박일 것이다. 이재명이 자본을 시장을 넘어설 진보적 후보가 아니기 때문이다. 흔한 현실론과 경제라는 핑계거리로 말이다. 검찰은 이에 맞춰 적당히 끝낼 것이다.
다른 한편 윤석열의 경우 고발장 사주라는 혐의에 대한 검찰 선거는 어떻게 될까? 손 모라는 검사와 김웅이라는 검사출신 의원으로 입막음이 될지, 그것이 성공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검찰에게 유명한 ‘직업윤리’가 있다. ‘검사 카르텔’이라고. 아무리 미워도, 입장이 갈라지고 이해까지 달라진 적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제야말로 ‘검사출신’ 대통령이 나올법한 상황인데, 검찰이 과연 제대로 칼을 뽑고 제대로 수사할까? 설사 그게 문재인 정부 편에서 충성하고 있는 수뇌부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윤석열은 문재인 대통령이 뽑아 올린 검사 아닌가 말이다. 이는 허약하고 정체불명의 공수처를 만들고 ‘검찰개혁’입네 하는 이 정부와 추미애 장관의 탓도 없지 않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이번 대선은 검찰이 칼자루를 쥐고 흔드는 최초의 대선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군부독재 때 ‘권력의 주구’였던 검찰이, 보수 양당 세력이 너나없이 ‘부려보겠다’고 개혁하지 않고 두더니, 스스로 잡아먹힐 선거가 되고 말았다.
4. 진보 후보 단일화냐 좌파 후보 정립이냐
: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결국 한국 정당정치는 다당제이지만 언제나 선거는, 그리고 특히 대선은 보수 양당이 겨루는 형상으로 전개된다. 이것이 바로 87년 6월항쟁과 한국의 민주화이행이 부활시킨 ‘48년체제’라고 불리는 모습이다. 하지만 만약 1987년에 독자후보 백기완이 완주했다면, 그리고 이후 권영길, 심상정까지 완주했다면 한국의 소위 진보/좌파정당정치는 어땠을까? 그리고 그다음으로 진보정당을 이끌었던 노회찬 심상정의 연정 정치 구상이 좌파연합의 구상을 계속 펼쳤다면 어땠을까? 그들의 연정 구상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들이 민주당 일부를 끌어들여 진보정당을 만든 것도 그렇고, 대통령 출마를 하면서 중도에 그만 둔 것도 그렇고, 모두 진보, 나아가 좌파정당정치에 치명상을 입혔다.
그런데 그 과정을 통해서 살아남아서 유일 진보정당으로, 제3지대 정당의 ‘프리미엄’을 누린다는 정의당은 여전히 그 연합의 미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물론 심상정 후보는 얼마 전에 “이제 단일화의 역사적 시효가 다 됐다”고 말했다. 역사적 시효? 정말 웃기는 표현이다. 단일화가 이전에는 역사적 시효성이라도 있었다는 말인가? 그리고 “이제”라니. 탄력근로제 연기기한 연장 등 노동법을 개악할 때도 가만히 있으면서 그렇게 만능의 비책인양 움켜쥐었던 비례대표제 선거개혁이 민주당의 배신적인 위성정당 놀이로 물 건너가면서, 더 이상 불가능해진 것 덕분이 아니고? 근데도 제대로 된 비판 없이 그냥 넘어간다. 마치 언제나 그랬듯이.
그러다가 이번 대선을 앞두고 정의당 대선 후보인 심상정 의원의 선거복안이 나왔다. 하나는 안철수, 김동연까지 포함하는 ‘제3지대’ 연정 제안이다. 물론 대통령이 돼야 연정을 하지. 근데 그보다는 이런 의구심이 든다. 어쩌다 소위 진보정치는 여기까지 이를 수 있었을까? 이건 후보 단일화가 ‘연정 구상’이라는 이름으로 탈바꿈해서 버전만 바꾸고 나오는 것인가. 그런데 애초에 ‘제3지대’라는 탈 이념적이고 중립적인 개념이란 무엇인가? 진보정치를 제대로 정립하자고 해도 자기 색이 분명할까 말까한 상황에서 다시 물타기의 ‘3지대론’이 가당키나 할까.
모 학생 좌파단체가 포플리스트 이재명보다 자유민주주의 윤석열을 지지하는 전략이 좌파의 현재 전략이라고 말하는 것에는 이구동성으로 비판을 퍼부으면서, 심상정의 몰 이념적인 ‘제3지대’ 제안은 왜 그냥 넘어갈까? 왜 여전히 대체로 침묵일까?
맞다. 이미 그런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정의당은 ‘민중경선 단일화’ 테이블에 참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정의당 내 ‘좌파’는 더욱 모호한 태도다. 그들은 사사건건 당내 비판은 하는데, 결론은 언제나 우리 모두 버킹검일세이다. 정의당이라는 프리미엄을 포기하지 못하는 건가, 아니면 정말 정의당 안에서 좌우는 모두 용광로에서 녹임을 당하는 건가.
정의당의 대선후보처럼 이런 말을 공개적으로 하는 한, 진보정치의 앞날은 요원하다. 즉 진보정치가 제도권 정당정치에서 ‘대안’으로 보일 리 없다. 무엇보다 진보정치를 ‘볼모’처럼 두고 있는 자유주의 정치로부터의 독자화도 이룰 수가 없다.
하지만 정의당은 여전히 이런 후보와 함께 민주노총의 ‘민중경선후보’ 단일화 논의에 참가하고 있다. 즉 두 손에 떡 들고 있는 형국이다. 왼손은 녹색당부터 진보당, 변혁당까지 함께 하고, 오른손으로는 안철수와 김동연의 손을 잡고 있다. 아, 그리고 중간에 또 하나의 떡이 있더라. 기본소득당 등과 함께 하는 중도좌파의 테이블이 있다. 맨 앞은 좌파 테이블이라고 보는지, ‘불평등’을 화두로 잡고, 그 다음은 우파 테이블이라고 보는지 ‘제3지대’라는 모호한 화두를 두고, 그리고 맨 마지막의 중도파들과는 ‘기후위기’를 얘기한다.
참으로 현란한 ‘연대연합정치’ 기술인데 의문이다. 왜 정의당의 연합정치는 매번 죽 쑤고, 나무에서 고기 찾기이며, 닭 쫒던 개 지붕 쳐다보기가 될까? 그 당 지지자들은 이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볼 일이다.하지만 최종적으로는 말이다. 좌파가 문제다. 저 당이 이렇게 3가지 카드를 쥐고 이쪽저쪽에 다 머리 내밀고 있는데도 저 넓은 스펙트럼을 보면서도, 이 당은 여전히 ‘민중경선’에 함께 할 세력이라고 말하는 이들은 또 무슨 생각일까? 이 문제가 벌어지는 이유는 그 지향과 이념이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민중경선’은 왜 정확히 이념을 밝히지 않을까? 민중경선이든 노동자민중후보든, 그것 자체는 대선의 플랫폼이거나 강령이거나 심지어 이념일 수는 없다. 노동자가 민중이 정치 이념인가? 민중후보라는 말은, 이념을 밝히지 못했을 때, 국가보안법으로 누구나 잡혀갔을 때, 좌파가 힘도 조직도 없었을 때 회피적으로 썼던 말이다. 하지만 그 말들은 이미 효용을 다했다. 한국 사회에서 노동자 후보가 없어서, 민중후보가 없어서, 지금 진보정치가 갈지자이고, 자유주의 정치에서 탈출하거나 독립을 못하고 있는 것인가?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투표하면 좌파 후보가 바로되는건가?
지금 제도정치와 대선에서 부재한 것은 무엇인가? 질문은 정확히. 그렇게 할 때 답도 정확히 나온다. 하지만 먼저 어정쩡한 진보정치가 진보의 미래, 아니 계급정치와 좌파정치의 미래를 좀먹는다. 그 말도 기억했으면 좋겠다.
참세상 기사게시판 :: 기사 :: 진보정치가 좌파정치의 미래를 가로막지 말길 – <font color=”red”>[사파시평]</font> 2022년 대선을 앞둔 정치비평① (newscham.net)[기고]돌아앉은 대통령, 쫓겨난 세종호텔 노동자의 투쟁
필자는 서울 명동 세종호텔에 여러 번 가봤다. 투숙객으로서가 아니라 그 호텔 노동자들을 만나기 위해서다. 이 방문은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11년 말 세종호텔 노동자들은 엄동설한에 파업에 돌입했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지금 세종호텔 노조는 다시 엄동설한에 파업에 돌입했다.
10년 전에는 단체교섭이 결렬되면서 했던, 말 그대로 파업이었다. 지금은 정리해고를 당하면서 하는 파업이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이미 파업이 아니게 되었다. 정규직으로서 정리해고 후 하는 투쟁은 법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파업이 아니다. 이렇듯 한국 사회에서 투쟁하는 노동자들은 파업을 하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은 파업권마저 빼앗긴 상황에서 최후의 수단으로 집단적 투쟁에 돌입한다.
그래서 요즘 많이 궁금하다. ‘노동존중’을, 노동자에게 저녁이 있는 삶을, 그리고 공공부문에서라도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만들어주겠다고 했던 현 대통령은 지금 임기 말에 이르러 자신이 내세웠던 노동공약에 대해 어떠한 소회를 가지고 있을까. 그리고 그가 취임 일성으로 밝혔던, 노동존중과 좋은 일자리와 비정규직 없는 세상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그것도 궁금하다.
언제부터인가 노동에 대해 입 꾹 다물고, 돌부처처럼 돌아앉은 대통령에게 이제 임기 말에 이르러, 이 사회의 노동현실이 어떤지 똑똑히 보라고 일갈하고 싶다.
그중에 세종호텔 노동자들의 현실이 있다. 세종호텔 노동자들은 2012년 1월 파업으로 승리했다. 비정규직 노동자도 정규직화시켰다. 그 쾌거는 그들과 함께한 사회적 연대의 힘, 2011년 ‘희망버스’ 운동에서 진화한 ‘희망뚜벅이’ 행진과 함께 호텔 로비로 들이치면서 가능했다. 물리적인 힘이라기보다 사회적인 힘이었다. 그 이후 10년 동안 세종호텔 노동자들은 잘 살고 있었을까? 그들은 무사히 자신의 일터에서 안전한 노동을 하고 있었을까?
한국 자본주의와 자본가 계급은 헌법에 보장된 노동자의 파업권을 인정한 적이 없다. 그 점에서 그들은 위헌세력이고, 헌법 파괴세력이다. 그런데 국가도 공권력도 법원도, 그리고 제도 정당들도 그 위헌적인 파업 파괴행위와 부당노동행위를 제대로 징치하지 않는다. 세종호텔 역시 무사할 리가 없었다. 2011년 7월 복수노조가 허용되자 바로 세종연합노조가 만들어졌고, 민주노조 조합원 206명 중 60%가 새 노조로 이탈했고 그들이 교섭권을 가져갔다. 어용노조가 교섭권을 가진 가운데 성과연봉제, 포괄적 임금제, 탄력근로제, 부당한 전환배치 등 임금과 노동시간, 고용의 유연성 실험이 시작되었다. 노동 유연화의 백화점, 혹은 구조조정의 실험실 같은 세종호텔 노사관계 속에서 노동조건은 후퇴했으며 임금은 계속 삭감되었고, 노조는 위축되었다. 노조위원장은 징계해고를 당했다.
2020년 코로나19라는 전염병이 지구를 덮쳤다. 하지만 이는 자본가들에게 마냥 나쁜 게 아니다. 코로나19 팬데믹은 자본에게 또 다른 기회이자 기왕 해왔던 노무관리를 최종적으로 완성하는 핑계일 수 있다. 노동 구조조정과 민주노조 말살이란 두 가지 목표를 최종적으로 이룰 절호의 기회이다. 한때 280여명이던 노동자들은 몇차례의 희망퇴직으로 수십명으로 줄었다. 그 과정에서 민주노조 조합원들이 늘었고, 교섭권을 가지면서 파업을 준비하자, 12월9일 직장폐쇄를 하고, 12월10일 민주노조 조합원 12명을 전원 해고했다.
코로나19가 노동자를 차별하는 것이 아니다. 노동을 배제하는 민주주의, 헌법에 명시된 노동권을 존중하지 않는 자본주의가 코로나19를 빙자해 노동자를 해고하고, 노동을 구조조정하고, 노동 차별을 공고히 하고, 노조를 파괴한다. 한국처럼 자본이 예사로 위헌적인 노동 파괴세력으로 군림하고, 양당 보수정치가 이를 결사 옹호하는 나라에서 노동이 처한 조건은 더욱 꼬이게 된다. 자본은 국가로부터 받은 ‘공적자금’을 공돈처럼 사용한다. 국가는 고용유지지원금이라는 이름으로 회사 대신 임금을 내준다. 호텔업종이 바로 대표적인 수혜 업종이다. 근데 문재인 정부는 고용주들에게 꼭 받아내야 했던 약속, 즉 노동자 고용보장 선조건을 아주 쉽게 철회했다.
노동자의 목숨줄을 이렇게 쉽게 자본의 자비에 맡겨놓은 이 정부가 과연 ‘민주정부’일까. 만약 문재인 정부가 그 조항을 철회하지 않았다면 세종호텔 노동자들이 하루아침에 정리해고되는 사태는 막을 수 있었다. 그것은 문재인 정부의 책임이다. 돌아앉은 대통령은 과연 노동을 볼 면목이나 있을까. 이제야 조금이라도 부끄럽지 않은가!
권영숙 | 노동사회학자 사회적파업연대기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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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돌아앉은 대통령, 쫓겨난 세종호텔 노동자의 투쟁 | 다음뉴스 (daum.net)
사회적파업연대기금 10주년 행사 “사파 10주년 연대와 후원의 날”을 2021년 12월11일 전국공무원노조 대회의실에서 열었습니다.
두차례 연기, 회의 참석자 밀접접촉자 판명으로 이틀전까지 개최가 불투명해진 상황후에 열었습니다. 10주년 준비단에 함께 해준 이들과 준비는 하고 있었지만 마지막까지 손에 땀을 쥐게 하더군요. 참가자 수가 많아도 걱정 많지 않아도 걱정이었는데, 알맞은 규모였고 잘 치렀습니다.
처음으로 해본 ‘사파와 함께 연대자 인증샷” 촬영시간을 은근 기대했는데, 분위기 내는 것으로 좋았습니다. 사파기금 CMS처럼 현장에서 단체 후원 약정서 받는게 내심 목표였는데, 그건 불참한 이들에게 두고 두고 받고 싶습니다.^^
행사는 4파트로 진행됐습니다. 공연이 압도적으로 많았는데, 연대자들과 민중가수들이 함께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보기 드물게 강기훈 이한솔의 기타-오보에 협연이 있었고, 오랜 연대자인 조부덕의 바이얼린, 박준성의 아코디언 연주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는 공연 박준, 끝 공연으로 임정득 가수의 노래 공연이 있었습니다. 공연을 위해서 트루오디오의 조현민님등이 세심하게 음향을 살펴서 음향은 이때껏 사파 행사중에 가장 훌륭했습니다. 공연’실황’은 당일 생방도 했지만, 유튜브로 올릴테니 들어보세요. 박준가수의 고 황현가수에 대한 코멘트와 훌륭하게 듀엣 사회를 소화한 사회자 김수미 남선진의 백댄스(^^), 임정득 가수의 뭉클한 눈시울과 대표를 무대에 기어코 불러세워 춤추게 한 것도 웃음이었습니다.
“사파의 행로” 시간에는 2011년 7월17일 “사회적 파업기금을 모읍시다”제안서를 고진수 운영위원이 담담하고 힘있는 목소리로 다시 낭독했고, 권영숙 대표가 사파기금 제안 이유와 사파기금의 의미, 10년 결산을 기금조성과 기금지원으로 나눠서 보고했습니다. 기금지원처 81곳의 명단이 스크린에 올라가면서요. 현장 모든 영상을 제작해주신 이는 은석 감독입니다.
권대표는 “사파기금은 그 취지와 약속을 10년동안 잘 지키고 이뤘지만, 그러나 충분치는 않다”고 말하고 “노동자투쟁뿐 아니라 더 넓게 사회적 파업을 해석하고 실천”하고 “사회적 연대가 노동을 중심으로 한 사회적 동맹”으로 이르는 길을 고민하고 전망을 가지는 연대의 방향을 모색하겠다고 ‘앞으로’의 계획을 밝혔습니다.
기금 지원연대 노조/ 단체의 “다시한마디”는 30초 축하동영상과 발언, 그리고 현장 발언으로 채워졌습니다. 사파기금이 5백만원 이상을 지원했던 81곳에 10년만에 요청하여 ‘다시한마디’ 받는말을 받아서 그 의미가 큽니다. 화답한 곳들의 건재함을, 그리고 사파에 대한 연대를 확인하는 의미가 깊었습니다.
이어 조부덕, 박수규 두 연대자가 “연대자로서 발언”을 했습니다. 두 분 모두 오랜 사파의 연대자입니다. 사파기금 연대를 10년씩, 7년씩 하는 여러분이 사파기금이 10년 지속할 수 있었던 힘입니다.
마지막으로 좀 어색하지만 모여서 축하 케이크 촛불 불고 커팅도 했습니다.
사파기금 10주년 이렇게 보냅니다.
기금 지원 및 연대 총218회였습니다. 10년으로 나누면 매월 18회 정도였습니다. 뜨겁게 사회적 연대로 사회적 파업기금 조성해왔고, 치열하게 연대를 해왔습니다.
앞으로 사파기금이 어떻게 나아갈지 많이 지켜봐주시고, 또 가까이에서 함께 해주시길 바랍니다.
2021. 12. 20.
사회적파업연대기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