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숙(사회학자, 사회적파업연대기금 대표)

 

이번 대선을 앞두고 진보 논쟁은 윤석열이냐 이재명이냐, 혹은 ‘그들 아니라면 그 누구라도 좋아’라는 3가지 선택지의 문제로 귀결되고 있다. 한마디로 87년 12월 대선 지형의 참담한 재연이다. 아니 이데올로기적 지형은 오히려 87년보다 더 악화되었다. 1987년에는 변혁운동, 사회주의운동이 국가의 공안탄압에도 불구하고 독자적으로 정립돼있었으나, 지금 2021년에는 보수정당에 대한 비판적 지지가 긴급한 좌파의 입장이라고 공공연히 공표하는 현실이 도래했으니 말이다. 필자가 최근 지금이야말로 ‘좌파의 위기’라고 규정했던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2022년 대선후보를 두고 ‘포퓰리스트’ 이재명보다 ‘자유민주주의자’ 윤석열이 낫고, 지금 좌파의 과제는 정권교체여야 한다는, 자칭 좌파단체의 논리 전개와 결론은 현재 좌파를 둘러싼 지형의 한계 속에서 길 잃은 모습 그 자체다. 그러니 이 단체의 입장문에 대해서 “이건 아니지” 라고 다들 비판과 비난을 퍼붓지만 어쩌면 사태는 오십 보 백 보인 것을.왜냐하면 그나마 진보적인 주장, 즉 윤석열도 이재명도 찍지 말고, 민주당도 국힘도 찍지 말고, 그들이 아닌 그 누구든 제 3의 후보를 찍자는 제안도 좌파의 입장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민주당과 연정을 도모하다가 이제 안철수, 김동연과 연정을 도모하겠다는 후보를 내세운 당도 좋다는 입장이 적어도 ‘좌파’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문제의 좌파 단체(전국학생행진)의 입장을 좌파의 입장이 아니라고 비판하는 이들은, 마찬가지로 윤석열과 이재명만 아니면 된다는 입장도 좌파의 입장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야할 것이다.

하지만 그 단체의 입장문으로 ‘좌파’란 단어마저 조롱거리가 된 느낌이다. 그건 ‘좌파가 아니야’라는 말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현재의 상태. 사실은 자신의 입장을 두고 좌파적인가 혹은 좌파의 주장에 동조하는가의 질문에 대해선 답하지 않으면서 다른 주장들에는 그 잣대를 들이대고 있는 현실에서, 오십 보 백 보는 더욱 일반적인 모습이 되어 가고 있다. 좌파라는 단어마저 조롱거리로 삼고 있는 현재에, 필자가 할 수 있는 말의 시작은 이것이다. 한마디로 아래 논지를 요약하면, 보수 양당 독점구도와 선거민주주의에 대해 적극적인 비판보다는 선택적인 적응을 선택한 좌파는 이미 좌파일 수가 없다. 이에 대해서 다음에서, 미국의 대선에 대한 글을 기초로 밝혀보겠다.

“덜 악마스럽다고 해도, 악마는 모두 악마일 뿐이다.”(Lesser Evilism Is Still Evil)
2020년 11월 3일 치러진 미국 대선 즈음 나온 얘기다. 결론은 미리 말하면 이렇다.
트럼프로도 바이든으로도 대변되지 않는 인민들의 베이스가 있다. 그 곳이 바로 우리의 노동계급정당을 건설해야만 하는 장소이다. (This all means that there is a base of people who are not represented by either Trump or Biden. This is where we need to build our working class party.)

2020년 미국 민주당 대선 경선 레이스 중 ‘민주사회주의자(Democratic Socialist)’ 버니 샌더스가 경선을 중도 포기했다. 그는 포기했을 뿐 아니라, 민주당 대선후보가 된 조 바이든을 “decent man(좋은 사람)”이라고 칭찬까지 얹어 확실하게 정치적인 ‘승인’을 해주었다.
아 이런, “‘좋은 사람’이라니, 적어도 그 말만은 굳이 하지 말았어야지!” 라는, 샌더스 발언에 대한 비판이 일었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decent라는 말은 아무에게나 할 말이 아니다. 샌더스에 대한 내 의심이 한 푼어치 더 늘어난 순간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바이든은 그의 정치적 성향과 지금껏 언행과 활동과 성추행 사건의 가해자로 알려진 사생활을 봐서도 도저히 “좋은 사람”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래된 경구대로, “덜 악마스럽다고 해서 악마가 아닌 것이 아니다!”

하지만 바로 이런 대통령을 가질 수 있는 것이 미국이다. 이 나라에 이런 대통령이 가능한 이유는 역시 미국이 유지하고 있는 보수 독점 양당정치 덕분이다. 즉 도토리 키 재기식의 보수 양 정당이 대통령과 의회 다수당을 적당히 번갈아 나눠 가지면서, 중간선거라는 완충장치를 두고, 제 3세력이 불가능한 선거제도를 통해서, 철저히 인위적으로 제 3의 정치세력과 목소리를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제도적으로 진입 불가능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정치적 정립 속에서 트럼프 같은 대통령도 가능한 것이다. 한국에서 자한당, 미통당, 박근혜, 황교안, 차명진 등도 가능하듯이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럼프 대통령의 ‘실정’속에서 대통령이 될 가능성에 조금 다가간 민주당 대선 후보인 조 바이든이 정작 민주당 등록 유권자 표를 얼마나 얻어서 민주당 1위 후보가 됐는지 알아보자. 아래와 같다.
미국 선거명부상 ‘등록유권자’ 중 30%가 민주당원이고, 그중에서 30%가 2020년 민주당 후보 경선에 투표를 했다. 이중 무당파 독립 유권자를 제외하면 조 바이든은 등록된 유권자중 고작 9% (등록 유권자이면서 이번 민주당 경선에 투표한 자들의 교집합)의 지지로 민주당 대선후보가 됐다. 나아가 등록되지 않은 유권자들을 포함하면, 바이든은 미국 전체 유권자중 고작 4%가 지지해 민주당 대선 후보가 되었다. 단지 4%가 지지! 결국 바이든은 민주당내에서조차 소수의 지지로 대선 후보가 된 것이다.

그런데 미국과 같은 양당 독점 구도 하에서는, 민주당이든 공화당이든 당내 경선에서 대통령 후보를 뽑는다는 것은, 일종의 ‘예비 대통령선거’를 치르는 것과 같다. 선거(election)는 이미 선택된 사람(the elected)을 뽑는 것이다. 그래서 엘리트(elite)라고 하는 것이다.
미국 유권자들은 모든 피선거권자 즉, 모든 평범한 사람들(the common people)을 대상으로 투표하지 않는다. 선거민주주의의 매개 장치인 정당정치가 있는 한, 미국 선거권자들은 항상 대부분의 선거에서 민주당과 공화당이 내놓는 후보 두 명중 하나를 뽑을 수밖에 없다. 그것이 이 나라의 선거다. 이미 선택된 사람들을 뽑는 선거. 그런데 선택받을 후보를 뽑는 과정이 고작 유권자 3~4%의 지지로 이뤄지고, 그들이 모여서 전국 ‘선거인단’을 구성하고, 그 표들을 마지막에 산출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미국식 선거민주주의의 실체다. 절대 소수가 다수결의 원칙을 제도적으로 활용하여 지배하는 민주주의 말이다. 하지만 이는 단지 ‘미국식’이 아니라 현존하는 민주주의의 성격이라고 할 수 있다. 근대 정치에서 민주주의가 자본주의의 상부구조이자 정치체제로 제도화되는 과정은 자본주의적 계급적 이해관계를 유지하는 제한 속에서만 가능했다. 그리고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에 가장 부합하는 것이 바로 선거제도와 정당정치를 양대 축으로 하는 대의제 민주주의였다. 그러나 민주주의 정치체제에는 다양성이 있다. 자본주의의 국가적 다양성만이나 외양과 운용면에서 민주주의 하위 체제의 다양성이 있다. 이 점에서 양당 독점구도와 독특한 ‘간접 선거’제도를 유지하는 이 민주주의를 ‘미국식 민주주의’라고 한 것이다.

여기서 뭔가 비슷하지 않은가? 한국의 대선 후보 경선은 다른가? 2020년 한국에서 집권 민주당이 비례대표제의 취지를 완전히 뭉개면서 위성정당 꼼수로 의석을 싹쓸이해 압승한 결과, 여대야소 거대 제1당이 되는 것은 뭐가 다른가? 한국이 1987년 6월항쟁을 거쳐 87년 개헌으로 더 이상 간접 선거가 아니라 직선제 대통령제를 실행한다고 해도, 보수 양당 독점구도, 그리고 다른 대안적 이념정당을 허용하지 않는 폐쇄적인 정당정치를 유지하는 소위 ‘48년 체제’ 하에서는 한국은 여전히 미국식 민주주의에 가깝다.

여기서 48년 체제란 국가 보안법 제정으로 사회주의를 정치시장에서 제도적으로 봉쇄하고, 한독당과 한민당의 보수 양당 체제를 유지했던 대한민국 국가 초기 정당체제를 의미한다. 이 체제는 박정희의 군사쿠데타로 18년의 권위주의 체제로 잠정 중단됐고, 80년 전두환 등 신군부세력의 군사쿠데타로 계속 중단상태였다가 1987년 6월항쟁과 12월 헌법 개정으로 직선제 개헌과 김영삼 김대중 등 양 김씨에 대한 정치적 ‘해금’조처로 다시 복원된 체제를 의미한다. 87년 체제는 직선제 개헌과 자유주의 정당의 정치적인 활동 복원으로 보수 양당 체제로 복귀했고, 민주화 이행 이후 한국 정치는 계속 48년 체제의 연속으로서 87년 체제하에서 진보정치와 사회주의 정당 활동을 봉쇄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므로 보수 양당 독점구도와 선거민주주의에 대해 적극적인 비판보다 선택적인 적응을 선택한 좌파는 이미 좌파일 수가 없다. 설사 제한적으로나마 선거제도와 제도정당정치를 활용하더라도, 만약 이 제도정치, 그리고 87년 체제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지 못한다면, 그리고 선거제도를 통한 제도정치로의 진입과 의회정당으로서의 활로를 모색하는 것이 존립의 목표로 전락한다면, 그 역시 좌파일 수가 없다. 이를 민주화 이행 이후 흔히 좌파와 구분해 ‘진보’정치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일각에서는 진보와 좌파를 구분하기도 한다. 하지만 좌파 스스로 진보와 좌파를 분리하고 구분하는 순간, 좌파는, 존재의 위기를 넘어서 부재의 시간으로 돌입하게 될 것이다. 사회주의 좌파의 정치 전략은, 첫째 자본주의 사회에서 유일한 진보는 좌파라는 자기 정체성을 가지는데서 출발하고, 그를 기초로 하여 계급 간 사회정치적 동맹을 구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보수 자유주의 정치로부터 독자적인, 좌파계급정치의 시작이 될 것이다.

 

* <사파시평>은 민중언론 참세상과 홈페이지에 전문 게재됩니다.

참세상 기사게시판 :: 기사 :: ‘87년 체제’와 ‘48년 체제’를 넘어서 – 덜 악마스러워도 악마는 악마일 뿐 (newscham.net)

– 권영숙(노동사회학자. 사회적파업연대기금 대표)  2021.10.29

1. 국가장의 최종 결정권자

국가장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누구를 국가장으로 ’예우’할지에 대한 최종 결정권자는 대통령이다. 이번 노태우 장례를 정부가 국가장으로 한 것은 문재인 대통령이 최종 결정한 것이지 김부겸 총리가 결정한 것이 아니다. 고로 1987년 민주화이행 이후 첫 직접선거로 당선된 대통령이자, 1980년 5.17 쿠데타와 5.18 광주학살을 일으킨 신군부의 핵심이며, 1980년부터 1987년까지 전두환 유사 권위주의체제에서 2인자로 민정당 대선후보였고, 1997년 내란음모와 5.18 광주학살의 주동자로 징역 17년형을 받은 노태우의 국가장을 결정한 주체는 문재인 대통령이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혀두자.

국가장법에 따르면 국가장 대상자는 전·현직 대통령, 대통령 당선인 혹은 국가 또는 사회에 현저한 공훈을 남겨 국민의 추앙을 받는 사람이다. 그리고 국가장 여부는 행안부 장관의 제청으로 국무회의 심의를 마친 후 대통령이 결정한다. 장례위원회 위원장은 국무총리가, 장례 절차를 총괄 진행하는 집행위원장은 행안부 장관이 맡는다. 또 국가장을 주관하는 비용은 국고에서 부담하며 장례 기간은 5일이다. 국가장 기간 중에는 조기(弔旗)를 게양한다.

이와 관련 유영민 대통령비서실장은 국회 운영위원회 국정감사에서 “법만 두고 보면 노 전 대통령이 17년형 선고를 받았지만 사면, 복권, 예우 박탈 등을 국가장 시행의 제한 사유로 명시하지 않아 국가장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것은 법에 대한 과잉 해석이다. 제한 사유를 명시하지 않아 국가장도 가능하다는 것은 법률이 모든 사유를 명시하지 않으니 가능하다는 확대해석이다. 하지만 국가장의 취지는 “국가 또는 사회에 현저한 공훈을 남겨 국민의 추앙을 받는 사람”이라는 포괄적 규정에서 드러나 있고, 과연 노태우가 그 기준에 부합하는지 의문이다. 또한 최종 결정권자는 대통령이기 때문에 ‘건별’로 판단할 문제다. 그렇다면 노태우는 국가장법에 따른 ‘예우’를 받을 자격이 있는가. 그리고 왜 문재인 대통령은 노태우가 국가장법에 따른 예우를 받을 수 있다고 결정했는가. 마지막으로 노태우의 국가장 논란을 통해 우리는 민주화이행 이후 민주주의에 대해 무엇을 놓쳤고, 무엇을 기억해야하는가.

2. 국가장 결정 이유- 추징금 환수

가장 작은 문제부터 생각해보자. 문재인 정부는 대법원이 노태우의 내란과 뇌물죄 등을 유죄로 판결하며 부과했던 ‘추징금’을 노태우가 냈다는 점을 결정사유 중 하나로 들었다. 그렇다. 전두환과 달리 노태우는 추징금을 거의 다 냈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낸 것이 아니다. 눈치를 보면서 전두환과 함께 시간을 끌었다. 2013년에도 여전히 노태우에게 부과된 추징금 230여억 원이 미납된 상태였다. 그리고 2013년 10월 11일이 추징금 시효가 만료되는 날이었다. 당시에는 주로 전두환이 미납한 추징금 1672억 원이 문제가 됐었다. 하지만 노태우가 미납한 230억 원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이에 대한 문제제기가 시작됐다.

나는 당시 사회적파업연대기금 대표이자 민교협 노동위원장을 하면서 적극적으로 추징금 미납문제를 공론화하는데 나섰다. 2013년 6월 당시 검찰 등 법기관은 계속 법 집행을 미루고 있었다. 추징금시효 만료를 불과 몇 달 앞둔 상황에 대해 여론을 환기할 필요가 있었고, 시간적으로 다급한 상항이었다.

나는 당장 추징금 환수를 위한 조처들로 추징금에 해당하는 시간만큼 ‘환형 유치’ 및 ‘노역형’을 부과하는 방안도 있다고 제기했다. 환형유치란 벌금 등 추징액을 내지 않는 경우 형을 금액으로 환형해 노역형을 가는 것이다. 이는 사회운동과 ‘불법’ 집회 시위 등에 참가한 활동가들에게 국가와 법원이 자주 내리는 결정이다. 또 화이트컬러 범죄나, 정말 벌금 낼 돈이 없는 무산계급이 돈 대신 징역형을 택하기도 한다. 그러나 환형유치 노역형의 경우 ‘소득’에 따라 일 4백만 원까지 일당을 차별적으로 책정하기 때문에, 형평성의 문제가 제기되기도 한다. 여하튼 나는 그때 전두환, 노태우가 내란죄 등으로 확정 판결을 받은 1997년 이후 2013년까지 15년 째 추징금을 내지 않고, 그해 말 시효가 종료되는 상황에 대해 페이스북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그리고 당시 KBS 법조기자의 기획 취재에 협조하고 KBS 뉴스를 통해 인터뷰가 나가기도 했다.

당시 채동욱 검찰총장이 적극적으로 추징금 회수를 주문하고 검찰 내 TF팀이 꾸려져 전두환의 숨겨진 재산 찾기를 국내외로 진행하면서, 곧바로 가시적인 결과들이 나왔다. 추징금 시효에 따르면, 시효 전에 단 한건이라도 추징 실적을 내고 앞으로 추징할 규모를 특정하면 시효를 연장할 수 있다. 결국 국회는 전두환 등 80년 12.12 쿠데타 및 내란죄 공모자들에 대한 추징금 환수기한을 5년 연장하는 법을 입법해 전두환 재산 추징을 위한 법적 근거를 확보했다. 그리고 2016년에는 전두환은 아니지만 전두환의 차남이 일당 400만 원의 노역형으로 수감되기도 했다.

여기서도 드러나듯이, 노태우 전두환 등의 추징금은 자발적으로 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제기와 시대적인 분위기 속에서 눈치를 보다가 더 이상 버틸 수 없어서 낸 것이다. 전두환은 좀 더 얼굴이 두꺼울 뿐이었다. 노태우 추징금 완납이 ‘국가장’ 결정의 한 요소라고 말하는 것이 어처구니없기도 해서 정확히 기록을 남겨둔다.

3. 국가장 불허는 전직대통령 예우 박탈의 최종심이다.

국가장법에 따르면 전‧현직 대통령은 분명 국가장의 일차적인 대상이다. 전‧현직 대통령 ‘예우’ 차원에서 그들이 사망한 경우 국가장을 치른다는 것이 법 취지일 것이다. 즉 국가장법에 따른 노태우 국가장 결정은 전직 대통령의 ‘예우’차원이다. 그런데 노태우는 내란죄 등 17개의 법 위반으로 대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고, 이로 인해 전직 대통령 예우에 관한 법률상 전직 대통령 예우 자격을 박탈당했다.

이 두 가지를 연결하면 답은 분명해진다. 노태우는 ‘전직 대통령’이다. 그리고 ‘국가장’은 국가가 시민에게 주는 최상의 예우이며, 노태우는 ‘전직 대통령’으로서 국가장이라는 예우를 받을 수 있는 일차적인 대상이다. 하지만 노태우는 내란죄 등으로 ‘전직대통령 예우’ 자격을 박탈당했다. 국가장이야말로 전직 대통령이 국가적으로 누리는 마지막 ‘예우’이므로, 당연히 전직 대통령 예우 박탈은 국가장에서의 제외를 포함해야 최종적인 것이다. 더구나 전직 대통령을 국가장의 대상으로 명시하고 있지만 법률에 따르면 이에 대한 최종 결정은 대통령이 한다.

결국 문재인 대통령은 전직 대통령 예우를 박탈당한 개인 노태우에게 국가장이라는 가장 큰 ‘국가적 예우’를 선사했다. 전직 대통령 예우로서 최상급인 국가장을 내란 수괴이자 5.18 민중학살로 대법원에서 징역형을 선고받고 전직 대통령 예우까지 박탈당한 이에게 선사한 셈이다. 도대체 그는 국가장을 제대로 이해한 것인가. 아니면 국가장법과 전직대통령 예우에 관한 법률간의 상호 논리적인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인가. 법 논리로 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결국 정부에 따르면 국가장 결정을 정무적으로 판단했다고 했으니, 이제 그에 대해서 ‘정치’적인 판단만이 남았다.

4. 논란의 시원: 노태우라는 이행 이후 첫 직선제 대통령

이번 사태의 시원은 1997년 당시 대통령 김영삼과 대통령 당선자 김대중이 청와대 첫 회동에서 형기도 마치지 않았고 추징금도 미납한 상태였던 전두환과 노태우를 사면 복권하기로 한데서 비롯된다. 다시 풀어서 말하면 노태우는 1987년 12월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됐지만, 그 때 그가 12.12 군부 내 쿠데타와 5.17 쿠데타에 대해 처벌을 받고 공민권을 회복한 후에 대통령선거에 나와 당선된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노태우가 1987년 헌법으로 이뤄진 ‘정초선거’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됐다고 해서, 그의 이전 죄가 면죄부를 받거나 사해지는 것이 아니다. 노태우가 대통령 선거에 나온 것 자체가 6.29 선언의 산물이다. 즉 스스로 6.29 선언을 하고, 다른 선거체제 하에서 다시 후보로 나온 신군부 출신 정치인이 대통령으로 당선됐다.문재인 정부는 그가 ‘직선제로 뽑힌 대통령’라는 점을 국가장으로 결정한 첫 번째 이유로 들었다. 이를 통해 자유주의 정치세력이 87년 6월 항쟁의 결과인 대통령 직선제를 얼마나 핵심적으로 생각하는지, 그들의 사고의 흐름을 보여준다. 그들이 왜 앙상하기만 한 소위 ‘8개 조항’에 합의하며 당시 노태우 민정당 후보의 6.29 선언을 그대로 추인했는지도 말이다.

사실 87년 6월 항쟁이 그랬다. 바로 엘리트 간의 협약에 기반 한 보수와 중도의 동거체제이다. 이것이 한국의 민주화 이행양식이었다. 6·10 항쟁으로 집권세력을 무너뜨린 정치혁명이지만, 동시에 ‘6·29 선언’이라는 권력 엘리트의 양보조처를 자유주의 정치세력이 수용하면서 이뤄진 이른바 엘리트 간의 협약에 의한 이행이었다. 그래서 6월 항쟁은 학문적으로는 대중동원이지만 이행의 양식으로는 ‘엘리트의 정치협약’(DEAL)에 의한 방식으로 분류된다. 뿐만 아니라 6.29 선언은 노태우의 일방적인 작품이나 발언이 아니었다. 1987년 대선, 즉 ‘체육관에서 대의원들이 뽑는 간선제 선거’에서 민정당의 대통령 후보이자 2인자였던 노태우가 당시 대통령 전두환과 청와대에서 만나 합의해서 내놓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실제의 모습이었다. 6.29 선언은 전두환과 노태우의 합의에 의해서 가능했다. 강온파 엘리트의 대립과 긴장이라고 하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6.10 항쟁으로 백만이 넘는 사람이 서울 시청 앞을 채우고, 지역으로 대중 투쟁의 파고가 확산되며 바리케이트 전투가 곳곳에서 벌어지는 가운데, 권력의 1인자와 2인자인 전두환과 노태우는 어떻게든 위기가 혁명으로 전화하기 전에 대통령 직선제라는 ‘거래’를 제안하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이를 김대중, 김영삼 등 자유주의 정치인들, 종로5가로 대표되는 종교-재야세력은 수용하기로 했다.

그때 군부엘리트와의 정치협약을 수용했던 이들을 계승한 현 정권이 현재 애써 전두환과 노태우를 구분하려는 옹색함이 역사까지 왜곡하고 있다. 그리고 이는 6월 항쟁의 성과가 어떻게 왜곡되고 정치엘리트간의 ‘딜’(거래)에 의한 협약으로 귀결됐는지를 축소 은폐하려는 의도에 불과하다. 하지만 분명히 6월 항쟁은 항쟁이었지만, 6.29 선언은 양 김씨와 전두환-노태우의 엘리트간 ‘딜’이었다. 그렇기에 전두환 노태우는 87년 이후에도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선언에 모두가 동의하는 것이 아니었다. 특히 1987년 12월 대선에서 신군부의 핵심이고, 전두환 정권의 2인자이자, 그들이 뽑아둔 차기 정권 대통령 후보가 곧바로 직선제 첫 선거로 뽑힌 대통령이 돼 재집권한 사실은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다. 그만큼 대통령 직선제 자체는, 그리고 한국의 이행 이후 제도정치는 허약했다. 반면 민주주의를 급진화하려는 거리 시위는 약해지기는커녕 갈수록 커져갔다. 체제의 정치적 위기는 아직 진화된 것이 아니었다. 이에 노태우는 대선에 당선되면서 역사에 없는, 대통령 ‘중간평가’를 받겠다고 했다. 그러나 결국 중간평가는 없었다. 야당과 야당의 지도자이자 정적인 김대중이 중간평가를 치르지 않는데 묵시적으로 동의해주었다.

그러므로 노태우는 대통령 자격조차 절반밖에 없는 대통령이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정치적 정당성 결여에 대해 ‘범죄와의 전쟁’ 선포와 ‘공안정국’ 조성으로 돌파했다. 노태우 정권은 대통령 취임 1년 만인 89년 초부터 가장 먼저 민주노조운동에 대한 탄압으로 공안정국의 포문을 열었다. 안기부 공작과 조작사건, 고문 등을 통해 변혁운동의 정치조직들을 차례대로 궤멸시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중적 노조운동의 첫 전국 조직인 전노협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가하면서 심지어 소속 노조들의 집행부까지 모조리 구속시켰다. 그렇게 탄압이 변혁운동과 전투적 민주노조들에 집중되는 가운데 다른 한편으로 경실련, 여성운동연합등 시민운동단체들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정부와 제도 언론은 의도적으로 이들 시민단체를 적극적으로 인정하기 시작했다. 정확히 바로 그 시기에 1991년 5월 투쟁이 있었다.

5. 1991년 투쟁: “노태우 정권 타도”를 외쳤던 이유

1991년 투쟁은 노태우 정권을 “파쇼정권”으로 규정했고, “노동운동 탄압하는 파쇼 정권 타도”, “민중생존권 짓밟는 파쇼정권 타도”, 그리고 “민주주의 파괴하는 공안 파쇼정권 타도”를 걸었다. 하지만 노동자 민중의 대중적 진출이 매일같이 거리에서 일어나고, 학생들의 투쟁이 격렬해지는 반면, 재야 세력은 이미 선거민주주의를 인정하고 있었다. 자유주의 정치세력과 민주당은 1987년에도 대중의 꽁무니에서 움직이더니, 1991년에는 아예 5월 투쟁을 외면했고 심지어 비난했다. 정치적 고립 속에서, 울분에 찬 개인들의 분신들이 이어졌다. 시위 중 명지대 강경대 학생이 시위진압 경찰에 목숨을 잃었고, 이에 학생 박승희로부터 연쇄적인 분신 자결이 일어났다, 5월 6일 대기업연대회의를 주도하며 대공장노조들을 전노협과 결합시키려던 찰나 그 주모자들의 회합장소를 급습하여 무더기 체포한 뒤, 그중 한사람인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박창수가 안기부에 끌려간 뒤 안양병원에서 주검으로 발견됐다. 이리하여 1991년 5월 13인의 죽음이 이어졌다. 그러자 그 죽음을 조롱하는 자들이 기존의 민주화운동에서도 나타났다. 한때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를 외쳤던 김지하가 대표적이었다. 서강대 총장 박홍 신부가 나서서 민주화시위에 비판을 퍼부었다. 그렇게 1991년 투쟁은 1987년을 재연하지도 못했고, 민주화를 위한 요구는 일부의 격렬 투쟁으로 매도당했다. 1987년에 함께 했던 화이트칼러 등 중산층은 돌아서서 집으로 돌아간 뒤, 이제 민주주의가 된 세상인데 웬 시위냐는 싸늘한 태도를 취했다. 중산층 전문직 시민단체들은 ‘시민사회’라는 새로운 단위를 만들어 민중이라는 말을 지우기 시작했다.

이후 과거사에 대해 처벌받지 않고 대통령으로 당선된 노태우는 정권 재창출에 성공하면서 대통령직에서 평화적으로 물러났고, 1996년 대통령선거를 앞둔 정권교체기 국면에 들어 내란음모 등으로 최종 유죄를 받았다. 하지만 이 결과 역시 민주당 등 자유주의 세력이 만든 성과가 아니었다. 3당 합당으로 우익 정당정치로 날아가 1993년 대통령이 된 김영삼 정부의 경제 실정과 부패 스캔들이 이어지면서 민심이 흉흉해졌고, 그 과정에서 탄압에 억눌려있던 목소리들이 1991년 투쟁을 이어받아 노태우 전두환 학살자 처단, 광주학살 진상규명을 요구하면서 거리로 다시 나왔다. 위기에 빠진 김영삼 정권이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되고 전두환 노태우는 법정에 세워졌다. 그리고 그들은 나란히 손잡고 푸른 수의를 입고 재판을 받았고 확정 유죄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바로 12월에 있었던 대통령 선거로 이 판결의 집행도 달라졌다. 김영삼 대통령은 김대중 당선자를 만나, 전두환 노태우 등의 사면 복권에 합의한다고 전격 결정하고 국민에게 일방적으로 알렸다.

자유주의 정치세력은 1980년 쿠데라 세력의 단죄를 끝내지 않고, 그들을 풀어줬고, 과거사를 제대로 올바르게 청산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누가? 바로 민주당이. 그리고 김대중이. 근데 이제 그 정치세력의 정통을 이어받은 문재인 정권이 노태우 국가장을 결정함으로써, 신군부 주모자의 역사적 죄과를 정확히 역사에 남기는 것마저 불가능해졌다.

결국 문재인 정부가 노태우 국가장을 결정하면서 87년 헌법 하의 최초의 직선제 대통령이라는 점을 핵심 이유로 삼는 것은, 1980년 쿠데타와 5.18 광주학살의 죄를 지우는 것일 뿐 아니라 1987년 이후 투쟁의 역사를 깡그리 부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 스스로 자신들이 지었던 죄를 스스로 면책하고 삭제하는 것이다. 노태우가 1987년 대선에서 초대 직선제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이유, 노태우가 중간평가를 하지 않는데 대해서 묵인한 행동, 노태우의 공안정국과 민주화운동 특히 변혁적 민주화운동과 민중생존권 투쟁을 공안탄압 한 것에 대한 면죄, 나아가 1991년 5월 투쟁의 13명의 목숨까지 말이다.

1991년 투쟁은 노태우 정권이 6월 항쟁의 성과로 나온 첫 번째 대통령으로서 자격 없음에 문제제기했던 것이다. 노태우는 내란의 수괴이고 광주학살의 주모자였을 뿐 아니라, 직선으로 당선된 대통령으로서도 절반의 인정만 받은 ‘반쪽짜리 대통령’이었다. 그리고 1987년 선거결과에 대한 부정으로서 91년 투쟁이 있었고, 13인의 항거죽음이 있었다. 이번에 문재인 대통령은 그 역사조차도 부정하는 셈이다. 91년의 투쟁과 죽음은 김영삼, 그리고 김대중 등 자유주의 세력의 탓도 큰데 말이다. ‘국민 통합’을 이유로 노태우 국가장을 결정했다고 하면서, 그들은 1991년 투쟁과 죽음들을 이렇게 배제해버렸다.

6. 87년 체제의 앙상한 결과: 대통령 직선제와 보수-자유 동거

이제 노태우 국가장의 유일한 근거는 결국 노태우가 87년 헌법으로 시행된 정초선거에서 당선된 최초의 직선제 대통령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역사적 아이러니는, 바로 이것이 민주당 자유주의 세력의 원죄이기도 하고 그들이 내세우는 민주주의이자, 민주화 이행의 결과라는 점이다. 그것을 자기부정 할 수 없기에, 내란이고 5.18 광주학살이고 간에 그들은 직선제 대통령제하의 첫 대통령으로서 노태우를 인정하겠다는 것이다. 그것이 국가장 결정의 배경이다. 국가장 결정으로 문재인 정권은 노태우의 ‘전직 대통령’이라는 신원을 회복시켰다.

이것이 보수와 자유주의 세력의 공통의 정치체제다, 6월 항쟁이라는 대중항쟁 뒤로 ‘밀실타협’ 해 이룬 6.29 합의를 통해서 한국사회의 더 큰 변혁을 멈추고 이 정도의 이행으로 마무리하기로 한 것. 그렇게 해서 직선제 대통령제로 다음 정치권력을 확보할 가능성만 가지는 것. 그래서 이행 이후 35년간 서로 물어뜯고 죽일 듯이 싸우지만, 사실은 한 몸 위에 쌍생아라는 점, 적대적인 듯 하나 서로의 존재를 자신의 존재의 근거로 삼는 두 정치 세력. 이념적으로 보수와 자유주의 세력이며, 그들 양자가 원하고 지금까지 정치적으로 독점해온 체제가 바로 87년 체제다.

법률상 국가장 여부에 대한 결정권자인 문재인 대통령이 노태우 국가장을 결정한 것은, 바로 한국 자유주의 세력이 1987년 이전부터, 1987년, 그리고 1987년 이후 지금까지 보였던 민주주의에 대한 모호함, 정치권력을 향한 정파적 이해관계와 선거민주주의 외의 모든 민주주의에 대한 반민주적 태도의 연장선에서 나온 것이다. 그것이 노태우 국가장의 역사적인 귀결이고, 우리가 그 자의 장례에 맞춰서 꼭 기억해야할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역사이다.

하지만 노태우 국가장이 5일장으로 끝나고 대중은 곧 이 날을 잊고 말겠지만, 이 심각한 결정이 이 나라 현대사, 특히 민주화이행 이후 민주주의의 역사에 앞으로 끼칠 악영향은 분명하다. 자유주의 정권은 국가장과 전직대통령 예우에 관한 양대 법률을 입법해두고서 법 논리와 판결을 무시하면서 법위의 정치를 구사했다. 그들은 자신을 유일 민주화세력으로 동격화하면서도 항상 민주주의에 대해 불철저했고, 배덕의 민주주의 정치를 해왔다. 나아가 그들은 민주를 넘어 ‘진보’를 자임하면서, 실제로는 이 사회의 정치‧경제‧사회‧문화적 진보를 향한 모든 움직임에서 진보를 가로막고 우익정치와 구태의연한 동거를 선택했다.

그 완벽한 귀결이 바로 오늘날 노태우 국가장이다.

이것이 87년 체제의 본질이고, 6월 항쟁의 남은 결과물이다. 그러니 민주당 문재인 정권이 노태우를 국가장으로 예우하는 것은 자유주의 정치의 당연한 논리적인 실천적인 귀결이다.

하지만 그 행위는 분명히 역사적으로는 역사 자체를 시궁창에 박아버리는 행위다.

* <사파시평>은 민중언론 참세상과 홈페이지에 전문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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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숙(노동사회학자, 사회적파업연대기금 대표)

“군인으로 살다 죽고 싶다”고 하던 변희수 하사는 떠나가고, 집행될 수 없는 재판 결과만 남았다. 대한민국 육군이 성전환후 남성 성기의 부존재를 이유로 그에 대해 내린 심신장애로 인한 ‘전역처분’은 부당하니 취소하라는 것이다. 2021년 10월 7일 법원이 판결했다. 그가 강제 전역된 지 624일만이다. 하지만 그는 이미 지난 3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사람은 죽고 없는데, 그가 삶과 죽음으로서 밝혀 달라고 이 사회에 요청했던 ‘정의’는 이렇게 뒤늦게 실현되었다고 해야 할까. 그런데 과연 이런 것이 정의인가?

“정의”라는 말과 “법”이라는 말을 하나의 단어로 통용하는 국가 언어가 꽤 있다. 대표적으로 법철학과 법이론을 거의 정초하다시피 한 독일어에서 recht는 법을 의미하지만, 정의, 그리고 나아가 권리까지 다 의미한다. 법, 정의, 권리가 모두 가족유사성 속에 어의 전화되고 있다. (반면 프랑스어에서 droit는 법이기도 하고 권리를 의미하기도 한다. 프랑스어에서 정의를 뜻하는 단어는 영어와 다름없이 justice 이다. 영어의 경우 법은 law, act등으로 표현되고, 권리는 right라고 부른다. 한자어에서 법은 法인데, 동시에 법칙, 가르침, 모범의 뜻과 중의적이다. 결국 한자어에서 법이란 단어가 훨씬 더 추상적이고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법칙부터 법률까지. 이런 이유를 유추해보자면, 근대에서야 국민 국가가 형성되고 ‘국민’ 법을 발견하고 국가적 법전을 정초한 유럽과 이미 기원전부터 법치국가였던 중국 등 한자권에서 당연히 법이 의미하는 바는 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애초에 정의는 법과 무관하다. 위의 법이란 단어의 기원에서 드러나듯이, 근대의 법이 정의를 독식하고 참칭하면서, 정의는 점차적으로 정의로움으로부터 분리되었다. 결국 정의와 법이 하나의 단어가 되었다. 정의가 법을 의미하게 되면서, 즉 법=정의가 되면서 한 단어에서 두 가지 뜻이 가능해졌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이 아니다. 근대 자본주의의 발전과 국민국가의 출현 속에서 실정법이 쓰여지고, 국민이라는 법 적용 대상이 만들어지고, 시민의 권리 개념이 조금씩 부르조아지로부터 남성 노동계급으로 확장되면서 일어난 역사적인 현상인 것이다. 그것을 법의 어원적 계보학이 드러내고 있다.

내가 다닌 대학 건물 앞에는 ‘정의의 종’이 있었다. 80년대 법대 교수들이 학내 시위 진압에 동원돼 나와 도열해 섰던, 바로 그 비루하고 수치스러운 학문의 시절. 그들 선생들이 가르쳤던 것은 정의가 아니었다. 분노한 학생들은 정의의 종에서 종의 추를 빼버렸다. 그렇게 항의한 것이다. 정의의 종은 더 이상 울릴 수 없었다. 마치 80년대 초 서울대 아크로폴리스에서 학생들의 집회를 막기 위해 가시가 많은 어여쁜 장미꽃들을 심었을 때, 분노한 학생들이 맨손으로 장미를 뽑았듯이. 그리스 아테네 민주주의에서 이름을 딴 아크로폴리스라는 광장에서 벌어진 얼마나 황당한 상황인가 (그러고 보니, 시위를 못하게 하기 위해 화단을 꾸미는 것은 80년대 초에 이 학교에서 맨 처음 시작했는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민주화 이행 이후 법대 앞에 세워진 ‘정의의 종’에 추를 달아서 복원했다고 한다. 하지만 무슨 의미일까. 이미 정의가 법에 굴복한 세상에서 정의의 종이란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어쩌면 차라리 그 때 80년대 전반기 권위주의 체제하에서는, 정의와 법의 차이를 명확히 나눌 수 있었다. 법적 정의가 현실의 정의로움과 하등 무관하다는 사실은, 아무 논쟁거리도 될 것도 없이 명명백백히 현실 그 자체로부터 지속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때였다. 사회정치적 현실은 이른바 법적 정의 따위의 현란한 법적 용어와 뿌연 법정의 모습을 거쳐서 보여 질 수조차 없었다. 이 때 소위 법조계, 법복 귀족들은 ‘권력의 주구’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명확히 보였다. 바로 그들 80년대의 검사들이 지금 이름이 다시 운위되는 곽상도나 김기춘 따위의 인물들이다.

해서 당시 법대생들은 사법고시를 보기 전에 자신의 정체성을 탈탈 털어봐야 했다. 과연 이런 체제하에서 법으로 밥을 벌어 먹어야할까 하는 문제. 과연 법이 ‘밥’에 우월할 수 있는가의 문제 등까지 고민하고 고민하면서 말이다. 물론 그런 고민을 했던 소위 ‘운동권’은 당시에도 학생들 중 일부, 소수에 불과했다. 그 대학을 나온 나경원 등은 아예 운동에 적대적이었고, 지금 정치인인 원희룡이나 조국은 그 때는 분명히 운동권이었으나 지금은 기득권 카르텔의 일부가 되었고, 아니면 여전히 지금도 민주화투쟁을 하는 양 자신을 현시하고 있다. 지금 민주당의 대선 후보인 이재명은 검정고시를 거쳐 1982년 중앙대 법학과에 들어가서 1986년에 사법고시 합격한 전력을 보니, 이 사람은 70년대 말 엄혹한 시절에 10대 노동자로 6년을 살았지만, 결국에는 그 노동자로서의 삶은 현실의 힘은 출세해야겠다는 전력 질주로 나타났구나 짐작할 뿐이다. 1982년과 1996년 그 시절이 어떤 시절이었는가를 생각하면 말이다.

하지만 시절은 바뀌었다. 이제 민주화이후의 민주주의 사회에서 법치주의와 법의 지배에 길들여진 인민들은 정의를 법을 통해서 매번 확인받고자 한다. 아니 인민들은 갈수록 법정이 법의 이름으로 정의를 정의하도록 만드는데 익숙해지고 있다. 하지만 법적 정의는 여전히, 그리고 전혀 정의롭지 않다. 특히 ‘법적 시간’은 사회적 시간이 아니다. 그러면서 법적 시간은 사회적 시간을 구속한다. 또 법을 활용하고 농단하는 자들, 소송을 지배하는 자들은 가진 자들이다. 권력을 가졌고, 거대한 사적 재산을 가진 자들이다. 그들이 최종적으로 법의 시간을 지배하고 있고 그 시간을 경유하여 소위 법적 정의가 실현된다.

근데 여기에는 뭐 대단하고 특별한 트릭이 있을 필요가 없다. 그냥 단지 재판을 위한 절차와 재판 일정만으로도 법의 시간은 이미 가진 자들의 것이 된다. 법원의 재판은 느리게 진행되고, 재판을 하는 긴 시간동안 약자들은 고통스럽게 견뎌야한다. 그런 가운데 법적 정의는 사회적 시간을 왜곡하고, 한 사람의 소중한 생의 시간을 감금하고, 급기야 때로는 그 시간으로 사람을 죽이는데 일조하기도 한다. 예컨대 부당노동행위에 대한 법적 판결은 한없이 늦게 나온다. 그조차도 판결은 판사에 따라 오락가락 춤을 춘다. 삼성전자 백혈병 환자들의 죽음에 대한 판결도 한없이 늘어졌다. 그 사이에 수없는 사람들이 죽었다. 하지만 돈과 시간이 많은 자본은 급할 것이 없다.

이 현상은 이 사회 안에 권력과 돈과 빽을 가지지 못한 모든 이들에게 동일하다. 법의 시간은 사회적 시간에 대해서 한없이 무관심하고, 잔인하며, 형식적이고 군림한다. 그런데 그것은 그 자체로서 가진 자들에 한없이 유리한 시간이다. 자본주의 국가에서 법은 가진 자들의 것이 되고 만다. 법은 멀고 주먹이 가까운 것이 아니라 법은 멀고 정의도 멀다.

흔한 법언은 ‘법은 사회의 최소한’이라고 가르치고 있지만, 아니다. 법은 단지 사회의 거울일 뿐이다. 우리가 정치적으로 정립하고 우리가 정치적으로 세워지면, 법은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며 결국에는 따라올 뿐이다. 수많은 법조문과 법을 둘러싼 해석은 과연 법을 세우는 사람들이 과연 누구인가를 질문하게 만든다. 국민인가, 인민인가, 혹은 판관과 대리인들인가. 또 흔한 법언은 “법은 정의를 세운다”라고 하지만, 아니다. 법은 정의를 뭉개고 정의를 희석시키고 정의를 왜곡시킨다.
그래서 우리는 정의를 넘어서야 한다. 사법적으로 포획된 정의담론을 넘어서서, 사회적 연대의 담론, 동맹의 담론을 구성해야한다. ‘우리’를 재구성해야한다. 배제와 포섭을 넘어선 ‘우리’의 정치학을 구성해야한다.

변희수는 죽었다. 변희수는 죽었다. 이 사회는 그를 살리지 못했다. 이 사회는 그가 살만한 사회가 못되었다. 그리고 법은 멀고, 정의도 멀다. 사회적 정의를 세우지 못하고, 법적 정의라는 이름 안에 갇힌 사회가 그가 죽음을 선택하는데 일조했다.
변희수 그가 법도 하지 못한 일을 하고 죽었다. 그는 정의는 법정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에게 감사드린다.

[사파논평]은 민중언론 참세상에도 게재됩니다.

참세상 기사게시판 :: 기사 :: 정의와 법, 혹은 법의 시간 – <font color=”red”>[사파시평]</font> (newscham.net)

[공지]  코로나19노동재난연대기금 2차 조성 참여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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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연대로 계속 나아가야겠습니다!
한국사회가 ‘대장동’과 대선을 앞둔 정쟁으로 요란합니다.
결국 몇 명의 인물들의 악마화에 사회적 분노는 집중되고, 대선 앞에서 ‘덜 나쁜 놈 고르기’ 게임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어쩌면 다가오는 대선이 아니었더라면 이런 구조의 민낯이 폭로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민중은 개돼지라고 취급하면서 가진자들의 ‘부의 놀음잔치’가 수면아래 면면히 진행될 것입니다.
누구나 감염될 수 있는 전지구적 전염병 코로나19가 덮친 2년동안, 전세계에서 부자는 더 부자가 되었고, 가난한 자는 더 가난해졌습니다. 전염병 백신은 부자 나라들이 독식하고, 가난한 나라의 민중은 속절없이 죽어나갑니다. 그 수가 450만명이 넘었습니다.
자본가계급은 더욱 강력해지고 노동계급은 자신의 방향을 상실하고 해체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국가는 경제성장을 회복했지만, 사회안의 계급불평등에 대해서는 무능하기 그지 없습니다.
우리는 불평등 앞에서 연대로 맞서야겠습니다!
누가 더 ‘나쁜 놈’인지 지목하고 분노를 터뜨리는 것으로 세상의 구조는 바뀌지 않습니다.
연대로부터 투쟁까지! 투쟁과 연대를 모아 더 강한 힘으로 함께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읍시다.
우리의 관심을 희망을 향한 연대로 모읍시다!
다시 한번 코로나19노동재난연대기금 조성에 힘을 모아주시길 바랍니다.
– 사회적파업연대기금 권영숙 대표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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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노동재난연대기금 2차 조성 참여방법>
1. 참여 기간: 2021. 9.13- 12.31
2. 결제방법은 신용카드와 통장 이체, 일시불로 가능
3. 링크에서 바로 참여하기: bit.ly/3tsCA9Y
4. 직접이체: 국민은행 012501-04-230247

이 기금은 목적성기금으로 조성하여, 코로나19노동재난을 가장 심각하게 겪고 있는 영세사업장 노동자, 비정규노동자, 이주노동자, 코로나19 국제연대, 활동가지원기금을 위해 사용합니다

주관: 사회적파업연대기금
(문의 sapafund@gmail.com)

뉴스1

“코로나 사회적 죽음 ↑..이번 국민지원금도 연대기금으로”

양새롬 기자 입력 2021. 09. 15. 05:30 

사파기금, 지난해 이어 ‘노동재난연대기금’ 모금 나서

2021.9.13/뉴스1

(서울=뉴스1) 양새롬 기자 = ‘코로나 상생 국민지원금을 소비와 기부가 아닌 연대행동으로 모아주세요.’

지난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위기 극복을 위해 전 국민에게 지급된 긴급재난지원금을 재난연대기금으로 만들자고 주장했던 노동단체에서 이번에도 재난연대기금 조성에 나섰다.

15일 노동자들의 파업기금을 조성해온 연대조직인 사회적파업연대기금(사파기금)에 따르면 해당 기금의 이름은 ‘코로나19 노동재난연대기금’으로 코로나 취약층을 대상으로 사용하게 된다.

구체적으로는 코로나19 노동 재난을 가장 심각하게 겪고 있는 영세사업장 노동자와 비정규노동자, 이주노동자, 코로나19국제연대, 활동가지원기금을 위해 사용하게 되며 연말까지 모금 예정이다.

사파기금 측은 지난해 ‘바이러스는 평등하지만 재난은 평등하지 않다’며 모은 기금 약 5700만 원으로 Δ해고노동자·비정규노동자에 대한 연대 지원 Δ활동가지원 기금 신설 Δ마스크 연대 등의 연대 활동을 진행한 바 있다.

이에 사파기금 측은 모금을 알리며 “코로나19가 장기화되면서 해고노동자들의 투쟁은 2년을 넘어서고 있고, 정부의 대책 없는 사회적 거리두기 강화로 자영업자들의 시름은 깊어가고, 사회적 죽음이 연이어 일어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사회적 거리두기 속에서 각자도생의 집단심성이 강화되고 있다. 올해 말 내년 초 코로나19로 인한 재난의 불평등은 더욱 심화될 것”이라면서 “이럴수록 ‘사회적 거리두기에 대해 사회적 연대로!’ 맞서는 공동행동이 더욱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국민지원금을 양보해 이 사회 재난 약자와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위한 ‘코로나19노동재난연대기금’ 2차 조성에 동참해달라”고 독려했다.

기금 참여 방법 등 자세한 내용은 사파기금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편 국민지원금은 올 6월 납부한 국민건강보험료를 기준으로 소득 하위 88%에 해당하는 가구에 1인당 25만 원씩 주는 재난 위로금이다.

행정안전부가 집계한 국민지원금 지급 대상자(잠정)는 4326만 명(전 국민의 약 84%)이다.

국민지원금은 10월 29일까지 신청할 수 있고 12월 31일까지 사용해야 한다. 연말까지 사용하지 않으면 국가나 지자체로 환수된다.

flyhighrom@news1.kr

“코로나 사회적 죽음 ↑..이번 국민지원금도 연대기금으로” (daum.net)

사파의 연대자 여러분께

여유롭고 풍성한 한가위 보내시길 바랍니다.
그동안 사회적파업연대기금과 함께 해주신 연대자들 여러분과 지금도 더 나은 세상을 위해 투쟁하는 민중 노동자 여러분께 추석 인사 드립니다.

‘코로나19 국면’이 2년째인데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재난앞에서 우리 사회 불평등한 민낯이 그대로 노출되고 있습니다. 사파기금은 재난에 대한 방역과 사회적 거리두기 속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사회적 연대라고 생각합니다. 방역 통제 속에서 목소리가 지워진 이들을 위해 사회적 연대의식이 더욱 필요한 상황입니다.

연대자들과 함께 하는 집단적인 연대의 자리를 만들지 못하는 어려움속에서 사파기금은  작년이후 현장 방문, 물품연대등에 더욱 노력을 집중하였습니다.  작년 ‘코로나19노동재난연대기금’을 조성하여 비정규, 이주노동, 해고노동자 투쟁지원과 활동가지원기금을 신설했고, 재난속에 배제되고 지워지는 목소리를 주제로 한 집담회와 사파포럼을 열었습니다.

코로나19이후 각자도생과 사회적 거리두기의 삶에 익숙해지지 않기 위해 앞으로도 사파기금은 사회적 연대운동을 열심히 펼치겠습니다. 연대자 여러분이 연대로 함께 해주시면 더욱 큰 힘을 낼 수 있습니다.

올해말까지 코로나19노동재난연대기금 2차 조성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코로나19 재난의 불평등 속에서 그래도 나보다 더 힘든 사회적 약자들, 비정규 해고노동자, 이주노동자, 국제연대, 활동가지원기금으로 사용하는데 마음과 힘을 모아주세요.

https://sapafund.org/?p=4360에서 사파기금의 활동과 코로나19노동재난연대기금 2차 조성방법을 확인해주세요.
링크에서 바로 참여하기: bit.ly/3tsCA9Y

그리고 2021년 7월 발족 10주년이 되었습니다. 올해말 송년회를 겸해 10주년 행사를 조촐하게 계획하고 있습니다. 10년동안 사파기금과 함께 꾸준히 연대활동을 해오신 여러분을 위해 마련하는 자리입니다.  코로나19를 넘어서 12월에 꼭 만날 수 있길 바랍니다.

2021년 한해가 몇달 남지 않았습니다.
한 해 잘 보내시고, 함께 사회적 연대로 새세상을 향한 희망을 모읍시다.

2021. 9.21
사회적파업연대기금

 

‘코로나19 노동재난연대기금’ 2차 조성 캠페인 시작

12월 말까지 진행, 코로나 재난 위기 맞은 노동자 등에 지원

  사회적파업연대기금(사파기금)이 ‘코로나19 노동재난연대기금’ 2차 조성 캠페인을 진행한다. 국민지원금으로 기금을 조성해 코로나19 재난에서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는 영세사업장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 이주노동자, 활동가 지원 및 국제연대 활동에 사용한다는 취지다.
사파기금은 9월 13일부터 12월말까지 2차 기금 조성 캠페인을 진행한다고 밝혔다. 이들은 “코로나19가 장기화되면서 해고노동자들의 투쟁은 2년을 넘어서고 있고, 정부의 대책 없는 사회적 거리두기 강화로 자영업자들의 시름은 깊어가고, 사회적 죽음이 연이어 일어나고 있다”라며 “대한민국 국가와 정부는 재난으로 인해 더욱 깊어가는 불평등을 바로잡기는커녕, 재벌과 자본을 일방적으로 지원하는 산업구조 전환과 경기 부양책을 진행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서 “이럴수록 ‘사회적 거리두기에 대해 사회적 연대로!’ 맞서는 공동행동이 더욱 필요하다. 올해 말 내년 초 코로나19로 인한 재난의 불평등은 더욱 심화될 것이고, 터져 나올 사회적 투쟁에 대한 사회적 연대를 위해 우리는 미리 준비해야 한다”라며 “국민지원금을 양보해 재난약자와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위한 ‘코로나19노동재난연대기금’ 2차 조성에 동참해 달라”고 당부했다.

사파기금은 지난해에도 노동재난을 겪고 있는 노동자와 활동가들을 위한 1차 연대기금을 조성한 바 있다. 해당 기금을 통해 아시아나케이오, 건강보험공단, LG트윈타워, 한화생명보험 등의 해고 노동자 및 비정규 노동자 연대 지원에 나섰다. 이와 함께 활동가들의 지속가능한 활동을 위한 활동가지원기금 신설과 투쟁 현장 마스크 지원, 코로나19 노동재난 문제와 관련한 ‘지워지는 목소리’ 토론회등을 진행했다.

2차 기금 모집은 9월 13일부터 12월 31일까지 약 세달 여간 진행된다. 신용카드와 통장 이체, 일시불로 결제가 가능하다. 상세 정보는 https://sapafund.org/에서 확인할 수 있다.

* 참여 방법
링크에서 바로 참여하기: bit.ly/3tsCA9Y
직접이체: 국민은행 012501-04-230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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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파업연대기금이 코로나19 재난 앞에서 가장 취약한 사회적 약자들과 노동자들을 위한 <코로나19노동재난연대기금> 2차 조성 캠페인을 9월 13일부터 12월말까지 진행합니다.
‘국민재난지원금’을 소비와 기부가 아닌 연대행동으로 모아주세요.
상생은 사회적 연대의 실천으로!

<2차 기금 참여방법>

1) 참여 기간: 2021. 9.13- 12.31
2) 결제방법은 신용카드와 통장 이체, 일시불로 가능
3) 참여 방법 :
– 링크에서 바로 참여하기: bit.ly/3tsCA9Y
– 직접이체: 국민은행 012501-04-230247
이 기금은 목적성 기금으로, 코로나19노동재난을 가장 심각하게 겪고 있는 영세사업장 노동자, 비정규노동자, 이주노동자, 코로나19 국제연대, 활동가지원기금을 위해 사용합니다.

<2020년 코로나19노동재난연대기금(1차) 연대활동 보고>

1) 해고 노동자, 비정규 노동자에 대한 연대지원
– 비정규이제그만 “코로나19비정규직 긴급행동” 5백만원 지원
– 아시아나케이오노동자들과 함께 하는 ‘9차 사파동행’ 개최, 팔토시 1백만원 구매후 투쟁현장  3곳 전달
– 건강보험공단 노동자 파업 물품연대, 1천만원 파업기금 지원
– LG트윈타워, 한화생명보험등 노동자농성장 물품연대방문
2) <활동가지원기금> 신설: 2020년-2021년 상하반기 2차례 진행 1천만원 지원
3) 마스크 1만장 구매 ‘마스크연대’ 3회 진행: 전태일3법 농성장, 택시노조등 노동자투쟁, 이주노동자단체들, 홈리스단체, 노량진수산시장 상인투쟁등 직접 전달11곳, 배송 2곳등 총 13곳 지원
4)코로나19 ‘노동재난’ 문제 쟁점화
– “코로나19속에서 지워지는 목소리” 집담회 2회 개최
– “노동자 해고” 관련 제18차 사파포럼 진행

코로나19가 장기화되면서, 해고노동자들의 투쟁은 2년을 넘어서고 있고, 정부의 대책없는 ‘사회적 거리두기’ 강화로 자영업자들의 시름은 깊어가고, 사회적 죽음이 연이어 일어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국가와 정부는 재난으로 인해 더욱 깊어가는 불평등을 바로잡기는 커녕, 재벌과 자본을 일방적으로 지원하는 산업구조 전환과 경기 부양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재난에 맞서는 사회적 제도 개혁은 요원합니다. 사회적 거리두기 속에서 각자도생의 집단심성이 강화되고 있습니다.

이럴수록 ‘사회적 거리두기에 대해 사회적 연대로!’ 맞서는 공동행동이 더욱 필요합니다. 올해 말 내년초 코로나19로 인한 재난의 불평등은 더욱 심화될 것이고, 터져나올 사회적 투쟁에 대한 사회적 연대를 위해 우리는 미리 준비해야합니다.

국민지원금을 양보하여 이 사회 재난약자와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위한 ‘코로나19노동재난연대기금’ 2차 조성에 동참해주세요.
사회적거리두기에서 사회적 연대로!
이윤보다 생명을, 고립보다 연대를!

주관 사회적파업연대기금
이메일: sapafund@gmail.com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이 올해 10주년을 맞습니다.
10주년 행사를 8월28일에 열기로 했으나 연기하고, 올해내에 개최하기로 했습니다.
착오 없으시길 바랍니다.

코로나19 확진자가 전국 2천명대에 육박하면서 정부가 사회적 거리두기 4단계를 당분간 유지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공적 집회의 자유도 거의 완전히 금지하는 조치이기도 하며, 정부는 이에 대한 조처를 바꿀 조짐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에 따라 사파기금 10주년 행사를 발족일에 맞춰서 개최하는 것은 연기하고, 올해내에 다시 좋은 날을 잡아서 공지하도록 하겠습니다.

발족이후 10년간 꾸준히 함께 해주신 연대자 여러분, 그리고 사파기금이 함께 했던 투쟁노동자 여러분이 함께 모여 친목과 연대를 다지는 날이 꼭 오길 바랍니다.

2021. 8.20.
사회적파업연대기금

권영숙 (사회학자, 사회적파업연대기금 대표) 

  ‘다 거기서 거기’라고? 아니다. 나라마다, 집단마다, 그리고 개인마다 사람의 몸을 보는 시선과 몸을 두는 방식은 의외로 다양하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바뀌기도 한다. 역사적이라고까지 말할 수도 있겠다.

어떤 사회에선 낯선 사람에게 시선을 둘 때 사람을 정면으로 뚫어지게 보는 것이 심한 실례이고, 특히 여자들을 위아래로 훑어보는 시선(gazing)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이다. 나는 이를 여러 나라 사람들이 모인 뉴욕에서 다양하게 경험하고 관찰할 기회가 있었다. 얼마나 다양한 몸에 대한 시선과 몸을 두는 방식들이 사회적으로 가능하고 실제로 수행되고 있는지, 이 글은 일종의 인류학적인 참여 관찰의 결과를 바탕으로 두고 있다.

말하자면 사회적 시선의 사회학이라고나 할까. 사람에 대한 시선 처리가 얼마나 사회적이고 문화적이며 국가-특정적(nation-specific)인가, 즉 장소성을 가지는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할 수 있는 것이다. 사회적 시선두기라는 행위는 시간이라는 변수 속에서 항시적이지 않으며, 지금의 관습이 언제까지나 지속할 것이라고 확언할 수 없다는 점에서 ‘시간성’을 가지기도 한다. 사실 지난 3-4년 사이에 한국에서도 젠더 문화와 젠더 정치와 관련해 얼마나 급격한 변화가 이뤄졌는가 말이다. 지금은 80년대와 다르고, 90년대와 다르고, 2010년대와도 다르다. 특히 지난 5년간 #미투(나도 고발한다) 캠페인 전후로 젠더관련 이슈와 태도는 큰 변화를 겪었다.

하지만 사회적 시선의 관행이 어느 사회나 쉽게 바뀌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문제화의 과정, 사회적 감수성,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3가지 축을 경유하면서 사회적 문화가 바뀐 결과다. 특히 젠더(혹은 트랜스젠더)에 관한 문화적인 감수성이나 사회적 태도, 무엇이 수용 가능한 언행인가는 매우 미시적인 사회적 관계에 기초한다. 때문에 그 변화의 범위와 속도는 점진적이기도 하고, 그러다가 걷잡을 수 없이 한꺼번에 변화의 물결이 몰려오기도 한다. 따라서 한국사회도 서서히 바뀔 것이다. 지금 아무 것도 아니라고 여겨지는, ‘다 거기서 거기’라고 치부되는, 문제로 취급되지도 않던 일들이 중요한 사회적인 쟁점이 되고, ‘문제화’되고 있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 되고 있다. 사적인 것이 사회적인 것이 되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러한 문제화는 그에 대한 기존의 사회적 감수성과 충돌하게 되고, 결국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논쟁을 거치면서 사회문화로 정착되거나 정착되지 않건 간에 바뀔 것이다.

윤석열 씨의 몸에 대해 홍혜은 씨가 8월 12일 경향신문에 쓴 기고글에서 “언론 카메라 앞에서도 쩍 벌어진 그의 다리에서는 무엇을 읽을 수 있을까? 혹자는 법조계 출신 중년 남성의 오만한 태도 문제로 보기도 하지만, 내 주변의 체육인, 의료인들은 허벅지 안쪽 내전근의 실종과 지나친 복부 비만이 근본적인 문제일 수 있다고 본다”라는 단락을 두고 나오는 예민한 반응들도 그렇다. 그 예민함이 애초에 타인을 의식하는 예민함, 그리고 그런 행동이 타인을 불쾌하고 불편하게 만들고 있는 상황에 대한 예민함으로 앞서 발현됐으면 얼마나 좋을까. 특히 여성의 몸에 대한 공공연한 평가에 놀랍도록 둔감했던 것과 대비돼 이런 예민한 반응들이 흥미로우면서 안타까웠다. 왜 이런 예민한 사회적 감수성은 유독 이런 식으로 발현될까? 만시지탄, 즉 너무 늦은 반응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이런 사회적 예민함을 진작부터 가졌어야한다. 이것이 내가 말하고 싶은 요지다.

예컨대 여성들, 특히 한국 사회에서 태어난 여자들은 얼마나 오랫동안 자신의 몸에 대한 시선들과 말들을 참고 살아야 했나. 불편하고 불쾌한 표정조차 짓지 못하고, 설령 그런 표정을 지어도 얼마나 사소하다고 무시당했는데. 나아가 표정을 짓다 못해 말 한마디 하는 걸 용기내야만 했는데…. 그렇게 사소한 것들에 목숨 거는 것처럼, 혹은 그런 비아냥을 뚫고서라도 불편함과 불쾌함을 말했어야하고, 사소함에 대한 예의를 두고 정치적인 논쟁을 해야 했는데. 바로 그 ‘몸’이라는 걸 두고 말이다. 몸에 대한 시선이나 품평을 두고 말이다.

몸이 왜 문제가 아닌가. 몸이 문제다. 사회적인 몸이 문제다.

그리고 여성의 몸은 이미 언제나 문제였다. 사회적 몸이었다. 개인적인 몸으로 보호되지 않았다. 그러니 무엇이 그리 새삼스러운지 모르겠다.

여자들의 몸이 남자들의 눈요깃거리로 마구 던져지는, 방송 카메라고 낯선 행인이고 민망할 정도로 쳐다보고 품평하는 것이 예사인 사회에서 말이다. 심지어 대통령조차 외모와 몸매를 두고 면전에서 품평을 당하는 사회가 바로 한국 사회다. 집권당 중진들이 청와대 당정 모임에서 박근혜 대통령 면전에 대고 외모를 품평하는 한국 사회다. 독신인 여자 대통령에게 ‘처녀’ 운운하는 말들이 버젓이 공적인 자리에서 회자하고, 그 평가 대상인 사람은 설령 그가 대통령이라도, 마치 사회적 규범이 잘 내면화된 인간이라면 웃으며 넘어가야만 그 인성에 특별한 문제가 없다고 간주되는 사회다. 대통령 박근혜도 그렇게 넘기고 말았다. 불쾌한 표정 하나 짓지 못하고 말이다.

바로 그런 사회문화에 대한 판박이 미러링도 아니고 말이다. 타인을 억압하는 위계적이고 군림하는 몸에 대한 비판 한마디가 뭐 그리 불편하다고 이 난리인가 싶기도 하다. 이럴 양이면 지금껏 언제나 호사가들의 품평거리가 되고 남자들의 사회적 시선에 발가벗겨지고, 면전에서 자신의 몸이 끊임없이 품평당하던 여자들의 경우 백번, 천번 난리가 났어야할 것이다.

그러니 몸이 왜 문제가 아닌가. 몸이 문제다. 사회적인 몸이 문제다. 다 같이 인정하자. 그리고 타인의 몸에 대한 품평과 평가가 얼마나 예민하고 문제적인가를 이 기회를 통해서 십분 깨달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한껏 예민해진 사회적 감수성과 정치적 올바름이 평등하게 골고루,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할 것 없이, 대상을 차별하지 말고 확산되길 바란다.

또한 이 해프닝을 통해서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이라는 개념을 다시 살려내길 바란다. 그 개념은 그렇게 목욕물과 함께 아기를 버리듯 내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정치적 올바름은 다수가 아닌 사회적 소수자를 위한 안전망이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겐 ‘공공연히 하지 말아야할 말’이 주는 안전막이 얼마나 든든한데 말이다. 속으로 할 말이 있고, 뒤에서 할 말이 있고, 페이스북 ‘따위’에서나 쓸 말이 있지 어찌 신문 칼럼에 버젓이 남자의 몸에 대해서 썼냐는 말에 대한 얘기다. 그렇게 신문지상이나 방송, 공적인 언로를 통해서 할 말들을 구분하는 것, 공적인 자리에서 할 말 안할 말 가려서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예민함, 그것을 남자 윤석열 씨에만 적용하지 말고 이 땅의 여자들, 소수자들, 남녀노소 모두에게 평등하게 적용하길 바란다. 몸이 그렇게 문제적이라면 말이다. 타인의 몸에 대해서 말할 때에는 부디 예민한 사회적 감수성과 정치적 올바름을 모두의 기준으로 삼길 바란다.

 

[사파논평]은 민중언론 참세상에도 게재됩니다.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nid=1061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