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파업연대기금은 7월5일 사파기금 연대자 고 조해일 5주기 추모모임을 가졌습니다.
다음 글은 사회적파업연대기금 권영숙 대표의 추도글입니다.

[추도사] 소설노동자 고 조해일 5주기를 기억하며…

조해일은 스스로 “소설쓰는 노동자”로 불리길 원했고, 전 경희대 국문과교수로 은퇴했고, <매일 죽는 사람>, <겨울여자>, 그리고 <아메리카>등을 쓴 소설가이다. 그는 교수직을 나와 언젠가 나와 페이스북 친구가 된 이후, 노동에 대한 관심을 더욱 크게 가지게 되고 세상을 뜰 때까지 사회적파업연대기금과 함께 노동연대에 열심히 참여해온 사파기금의 연대자이기도 하다. 말년의 조해일을 언급할 때 이 점 꼭 잊지 말았으면 하고, 그런 취지로 고 조해일 5주기 추모모임을 열었다.

그는 1941년생으로 중국 만주 하얼빈 근처 ‘우창’이란 곳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조해룡이고, 만주에서 돌아와 서울 1.4후퇴때 부산, 그리고 동두천과 서울 살이를 하였다. 한마디로 격동의 한국 사회를, 만주부터 부산, 서울, 동두천까지 공간을 바꾸면서 살아왔고, 이는 그의 소설에 고스란히 투영되고 있다.

70년대 한국 일간지에 게재된 신문연재소설’이 큰 인기를 누리며 대중소설의 시대가 열렸을 때, 그가 중앙일보에 연재한 <겨울여자>는 최인호의 <별들의 고향>, 조선작의 <영자의 전성시대>와 함께 70년대 여성을 표상하는 작품으로 말해지기도 한다. 그 스스로 이 때의 소설을 자조적으로 표현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것이 그 때 당시 사회의 ‘현주소’였기도 하다. 이 소설은 주인공 이화를 통해서 가부장제와 결혼이라는 족쇄, 자유연애, 여성의 성결정의 자유등을 다루고 있는 한편, 무허가 철거촌의 야학 활동과 국가의 철거폭력등을 그리고있다.

한국에서 ‘아메리카’의 의미를 과감하게 짚어낸, 같은 제목의 소설 <아메리카>룰 발표한 후 그가 중앙일보와 인터뷰한 내용에 이런 발언이 있다. 왜 당신은 ‘위안부’나 ‘창녀’등 그런 이들을 소설에서 많이 그리는가? 라는 물음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잘 났다고 거들먹거리는 사람들을 위해선 글 한줄도 쓰고 싶지 않다. 나는 세상에 모욕당하거나 제 값을 가지지 못하는 이들에 대해 깊은 연대감을 느낀다”.

그런 조해일이었기에, 그는 은퇴후 다른 교수 출신들과 달리 거의 모든 사회활동을 끊고 은둔자 생활을 하면서, 단지 어릴 적부터 친구였던 소설가 조세희와 교류등 매우 제한적인 사회관계 속에서도 부산 영도로 가는 1차 희망버스를 탔을 것이다. 이후 2차 희망버스 도상에서 내가 노동자들의 사회적 파업기금을 사회적 연대로 조성하자는 사파기금을 제안했을 때 그는 바로 주목했다고 했다. 그리고 어느날 페이스북 메시지로 어떻게 하면 사파기금 CMS 연대자가 될 수 있지요? 라는 질문을 던지며 스스로 사파기금의 연대자가 되었다.

조해일은 사파기금의 모든 사회적 연대 현장에 함께 하고 싶어했다. 서울 수도권에서 열었던 ‘사파동행’ 10차례, 전국 투쟁현장에 달려가 전국적 연대의 힘을 모아 열었던 ‘사파작은희망버스’ 10회 가운데 조해일은 가능하면 연대자로서 참여하고자했다. 그러나 나이와 그의 건강이 갈수록 허락하지 않았다. 사파동행이나 사파작은희망버스는 건강한 사람도 만만치 않은 연대 일정이다. 그런 일정에 평일에 노동을 하는 이들이, 주말의 빡센 사파 연대 일정을 위하여 전국적으로 모여서 함께 하고 때로는 수백명까지 늘어나면서 춘천, 청주, 부산등에 모였다. 그중에 한 사람이 조해일이다.

그런 점에서, 왜 사파기금 연대자 중의 일인일 뿐인, 그리고 활동과정에서 사파기금도 그를 한 사람의 연대자로 대했던 조해일의 5주기를, 한 사람의 이름을 건 행사로 기념하자고 우리는 나섰을까? 아니 나는 제안했을까? 연대의 의미, 사회적 연대의 의미, 그리고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기회였으면 했다.

노동자들이 투쟁승리로 연대에 보답하겠다고 말했을 때 나는 이렇게 반박하듯이 말한다. 투쟁 승리는 당신들을 위한 것이다. 투쟁한 다음에 연대에 나서길 바란다. 한달에 한번이라도 노동자투쟁에 결합하고, 사파기금 CMS라도 하길 바란다. 투쟁과 연대는 다르다. 투쟁중에 ‘연대의식’을 가지는 것은 다른 각성을 거쳐야한다. 나아가 투쟁이 운동으로 이어지길 바란다. 나의 투쟁을 넘어 모두의 투쟁, 노동계급의 승리를 바라는 계급의식. 연대의식과 계급의식이 함께 모여 하나의 의식이 될 때,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조해일은 2020년 6월19일 밤 12시18분 세상을 떠났다. 죽기전에 힘들게 투병생활을 했다. 가족도 아닌 나와 지인이 그의 임종을 함께 했다. 외롭게 죽음을 맞이했다. 하지만 그는 친구이자 <난장이가 쏘아올린 공>의 작가 조세희와 노동과 연대에 대한 수많은 얘기를 나눴다. 그리고 이름없이 한명의 연대자로 자신을 낮추며 특히 ‘노동연대자’로 살다 떠난 사람이다.
고인의 기억을 함께 나누게 되어 기쁜 마음이다.

2025. 7.7
권영숙 씀.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은 6월 18일 부산 서면시장번영회 노조의 수요 집회에 연대하였습니다. 권영숙 대표가 참석하고, 이날 현장 집회에서 사파기금 90번째 전달식을 하였습니다.

서면서장번영회의 노조는 김태경지회장과 허진희 사무장 2인이 여전히 투쟁중입니다. 이들의 수요집회는 매주 수요일 중단없이 진행됩니다. 주로 부산의 연대자들이 모여서 오후 6시 30분이면 대체로 집회를 시작합니다. 서면시장 입구에 모여 간단한 시작발언을 하고, 각자의 깃발 피켓등을 들고 서면시장 주변의 간선도로를 한바퀴 돕니다. 동네 한 바퀴처럼. 그리고 시장안 4거리(국밥거리)에서 마무리 발언으로 집회를 끝냅니다.

처음에는 이 집회 행진에 대한 시장 상인들의 반응이 좋지 않았다고 합니다. 수요일마다 오후 6시 한창 붐비는 시간에 집회하고 행진하고 운동가요 노래 소리 들리니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차차 분위기는 좋아졌습니다. 이는 이날 집회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집회 마지막 발언을 맡은 김태경지회장은 노래로 마무리를 하나봅니다. 이 날도 “잘할 때까지”를 말하면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한켠에 선 시장 상인은 노래가 끝나자 웃으면서 “노래 잘한다 싶을 때 싸움을 끝내는 건가”라며 애정이 넘치는 표정으로 말하더군요. 집회에 참석하면 이 모든 분위기를 알 수 있습니다. 수요일은 부산 서면시장노조의 수요 집회에 연대하는 날!

요즘은 윤석열탄핵국면에서 등장한 ‘말벌동지들’이 많이 보입니다. 이들이 거제도 거제통영고성조선하청지회 파업부터 세종호텔 노조 고공농성장까지 나타나더니, 전국적으로 활동무대를 넓히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여기 서면시장노조 투쟁입니다. 항상 몇 명은 깃발 들고 나타납니다. 이들이 궁금하면 또한 수요일 행진에서!

이날 권영숙 대표는 시인 이상을 좋아한다면서 이상의 초상이 포함된 깃발을 든 13세 말벌동지와 얘기를 나눴습니다. 권대표가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은 2011년 발족했다고 하니, 그 이가 “태어나기 1년전이네요”라고 말해서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하지만 놀라는 기색은 숨겼답니다). 13세 수요 집회 참가자는 이 투쟁과 연대한 기억을 어떻게 자기화할까요? 서면시장 노조투쟁은 한 사람에게 어떤 의미를 만들까요?

지금 연대자들에게 노동자 투쟁이 그렇습니다. 투쟁하는 노동자들에게도 연대자들이 그렇길 바랍니다.
함께 연대하고 함께 투쟁하면서, 연대와 환대를 넘어서, 하나의 당사자, 하나의 동맹을 만들어 갈 수 있길 바랍니다.

2025.6.23
사회적파업연대기금

 

부산 서면시장번영회노조 수요집회연대 기금전달 250618 사진자료보러가기

강풍이 불고 집중호우가 쏟아지는 날은 고공농성자들에게 더욱 마음이 많이 쓰이는 날씨입니다. 바로 그런 날씨였던 6월 20일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은 세종호텔노조 고공농성장에 저녁 도시락을 나르기로 했습니다. 한화 본사 앞 30미터 첨탑위 김형수 거제통영고성조선하청지회장에게도 도시락 연대하기로 했으나, 그는 바로 전날인 6월19일 요란하게 국회의원들이 몇명이 올라가고 내려오는 북새통 속에서 내려왔습니다. 체포연행을 막기 위해 나타난 이들이 진정한 연대자들입니다.

두 사람 다 초밥을 좋아합니다. 두 사람 다 길고 짧은 시간 사파기금과 인연이 있기도 합니다. 고공농성장에 도시락 들고 간 것은 처음입니다. 모포, 복숭아, 자두 ,방한품, 난로등 온갖 것들을 나른 적이 있네요. 날이 궂고 사람이 적은 날에 사파기금은 현장 방문을 하는 쪽을 선택하는데 날은 참 잘 잡았습니다.

갔더니 세종호텔 농성장에 물건을 둔 비닐들은 훌러덩 날아갔고, 고공농성장이기도 한 구조물에서 늘어뜨린 현수막 2개가 어디론가 날라가고 없었습니다. 참 신경쓰이고 위험한 상황이죠. 하지만 웃으면서 만났고, 도시락 올려 보냈습니다. 올려보내는데 하늘에서 폭우가 입으로 고스란히 들어오고, 사파기금 10주년 맞이로 만든 푸른색 우산은 부서지고 말았습니다. 잘 지내는가, 잘 지낸다는 무뚝뚝한 인사말로 끝내고 나왔습니다.

녹색병원은 멀었고, 전철은 붐볐고, 퇴근길의 노동자들 표정들은 무표정하니 피곤하였습니다. 갑자기 <닥터 지바고>의 마지막 장면이 생각났습니다. 1917년 혁명이 일어난 후 러시아의 노동자들은 여전히 무표정하고 지쳐있고 질린 표정. 소설가가 가진 관점이기도 했고, 혁명은 쉽게 오지 않는다는 해석도 가능하겠고. 노동자투쟁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김형수지회장에게, 사무실 근처에 잘하는 초밥집의 초밥을 배달하려고 했는데 ‘미션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대신 비오는 거리, 살짝 ‘탈주’하여 식당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정세에 관한, 거통고 고공투쟁에 관한, 거통고 이후 투쟁에 관한. 오랫만에 긴 대화 서로 도움이 됐길 바랍니다. 그리고 건투를 빕니다.

2025.6.22

사회적파업연대기금

(세종호텔농성장 방문 사진만 있음)

또 한명의 김용균이라고 했습니다.
김용균이 태안 화력발전소에서 홀로 근무하다 일터에서 기업살인을 당한후, 한국 사회는 잠시 관심을 가졌고, 당시 문재인 정권은 이런 죽음은 막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중대재해법도 공방 끝에 입법했습니다.
하지만 그 법은 김용균에겐 해당하지 않는 법이었습니다. 법은 허술했고, 법의 집행은 더욱 허술했습니다. 태안발전소에서 김용균을 더이상 만들지 않겠다며 정부와 노조, 노동단체들이 모여서 만든 후속조처들은 흐지부지됐습니다.

그리고 자본은 이 모든 허술함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 시기만 지나면 된다는 것, 이른바 촛불정권도 노동에 관해서는 ‘시늉’이상은 하지 않는다는 것 다 알고 있습니다. 아마도 노조도 별 수 없다는 것까지도 알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자본은 기업에 대한 ‘근로감독’이 미치는 범위 저 바깥에 노동을 배치하면 그 뿐입니다. 태안발전소의 1차 하청회사는 다시 재하청회사에 일을 나눴습니다. 김충현은 2차 하청회사에서 일을 했고, ‘동일 노동’을 했지만, 이는 김용균 죽음이후 ‘죽음의 외주화’를 말하면서 감시와 감독의 영역에 있던 1차 하청관계 밖이었습니다. 이는 노동단체조차도 노조조차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점입니다. 그날 6월6일 첫 서울 추모제에서는 그런 발언이 있었습니다. 몰랐다고. 그렇게 되고 있는지 몰랐다고.

박근혜 탄핵후 문재인이 대통령이 되자 기대하면서 “문재인 대통령, 만납시다” 라며 모인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대오 속에서 함께 피켓을 들고 있다 며칠 뒤 끔찍한 죽음을 맞이한 김용균은, 2025년 윤석열 탄핵을 위한 광장에 나가며 광장의 민주주의가 노동을 위한 민주주의인양 구호를 외치고 이재명의 <기본소득>을 생애 마지막 읽던 책으로 남겨둔 김충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해결을 위한 구호도 똑같습니다. “대통령이 문제 해결에 나서라”.
과연 한국의 정치적 민주주의가 자본의 이해를 넘어서 맞짱 뜬 적이 있나요? 혹은 정부의 감독을 받는 태안발전소가 정부가 권한을 가지고 있다며 책임을 미루는데, 과연 이것 자체가 가당키나 하나요? 눈가리고 아웅입니다.

결국 상황은 비슷하게, 아니 더 후퇴하며 진행되었습니다.
6월6일 첫 추모제에는 민주당 국회의원이 둘씩이나 연단에 올라서, 미안하다, 국회가 뭔가 좀 해보겠다, 기다려라는 식의 발언을 했습니다. 김용균이 문재인 정권하에서 죽었고, 문재인이 해법이라고 내놓은 것들이 전혀 김충현의 죽음을 막지 못했는데도 말입니다. 이것도 윤석열과 반민주, 내란세력의 탓인가요.

하지만 다들 참 조용했습니다. 사파기금 권영숙 대표가 뒷줄에서 소리쳤습니다. “그 입 다물라!”라고. 그리고 앞에서도 소리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줄 서서 헌화들을 하고, 대통령실로 행진했습니다. 삼각지에 이르러 갑자기 경찰이 인도와 차도 사이에 도열했습니다. 자연스럽게 행진 대오는 어느새 인도에 올라가 있었습니다. 아무도 군소리, 큰소리 내지 않았습니다. 사파기금 권대표가 다시 소리쳤습니다. “경찰 뭐하는 짓이냐”, “이게 행진이냐”라고. 그러나 옆에 행진하던 이들은, 소리내지 말고 가지 하는 표졍이었습니다.

결국 이재명 정권 들어서고 첫 노동집회는 대통령실 정문 앞이 아니라 맞은편에 대오가 앉아 집회를 열기 시작했습니다. 발언들 배치했습니다. 그리고 몇 명의 대표가 ‘항의’서한을 들고 대통령실로 갔다고 합니다. 사파기금의 대표와 위원들이 떠날 무렵 공원의 끝자락에 말쑥한 양복쟁이들이 길 건너 나타나고 경찰이 빙 둘러쳤습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공공운수노조위원장등 노동쪽에서 서한을 그에게 전달했습니다. 알고보니 바로 비서실장이었습니다. 권대표가 다시 한마디 뒤통수에 날렸습니다. “이게 무슨 항의 방문이고 서한 전달이냐”라고. 대통령실에서 나와서 서한을 받았으니 ‘예의’차린 것이라고요? 글쎄요. 이도 눈가리고 아웅 같았습니다.

여하튼 고 김충현의 장례는 치렀습니다. 유족이 합의했습니다.

그리고 투쟁은 계속 된다고 했습니다. 대통령이 아무 말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6월19일부터 농성에 돌입한다고 하더니, 대통령인지 민주당인지 “협의체”를 구성한다고 하자, 6월19일은 농성투쟁 첫날이 아니라 ‘촛불’ 집회가 되었습니다.

과연 노동은 ‘김용균’의 죽음을 막을 수 있을까요?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요?

2025. 6. 21
사회적파업연대기금

세종호텔노조의 고공농성이 100일이 됐습니다. 윤석열의 12.3 계엄이 국회에서 해제되고 광장이 응원봉의 물결로 넘실대는 때, 고진수 지부장이 바로 일터앞 철제 구조물에 올랐습니다. 그후 세상이 뒤집어진듯 윤석열은 대통령직 탄핵됐고, 조기대선을 위한 선거운동이 한창 진행중이지만 고공농성은 100일을 맞았습니다.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은 2025년 5월 23일 고공농성100일 집회에 참석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랜만에 사파기금 운영위원이기도 한 고진수 동지와 함께 사진도 찍었습니다. 어두운 곳, 비가 내리는 가운데 찍은 첫 사진입니다.

많은 이들이 모였습니다. 다음날 아침까지 1박2일 텐트를 친다고 했습니다. 깃발들도 많이 나부꼈습니다. 공연도 제법 펼쳐졌습니다. 무대 쪽은 매우 흥겨웠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사파기금은 집회 가장 맨 뒤에 자리 잡았습니다. 바로 고진수 동지가 고공농성 하는 곳과 거의 일직선이 되는 곳. 그 곳에서 붙박이처럼 3시간 내리 집회 동안 비도 가끔 맞으면서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가끔 살폈습니다, 고공을. 슬쩍 훔쳐보듯이 봤습니다. 마음이 고공을 넘어 닿았을까요.

고진수 지부장은 아직도 페이스북 자신의 담에  2월15일 고공에 오른후 광장의 사람들이 당도했을 때 했던 발언을 고정시켜두고 있습니다.
“윤석열 끌어내리고 다시 만날 세계는 “정리해고 없는 세상” “비정규직 없는 세상” “온갖 차별이 없는 세상” 이어야만 합니다. 지금의 연대가 더 넓게. 더 강고하게. 더 단단하게 이어진다면 가능합니다.”
그것은 중요한 요구이고 당위입니다. 하지만 ‘윤석열 파면’과 정리해고, 비정규직 ,차별 없는 세상 사이에는 만리장성이 있습니다. 윤석열을 파면하고 세상을 바꾸자는 구호에도 단지 연결조사 이상의 심연이 가로지릅니다. 지금 대선 과정이 그 증거입니다.

선거는 광장의 모든 다양성을 자신의 것으로 삼아버린 한 명의 후보 중심으로, 그리고 선거 유세는 광장의 많은 진보적인 외침마저 죽이고 이뤄지고 있습니다. 이미 탄핵국면에서도 예상할 수 있었던 모습이었습니다. 바꾸지 못했습니다. 해서 소위 광장의 압도적인 승리가 이뤄진다고 정리해고, 비정규직, 차별없는 세상이 쉬 오지 않을 것입니다. 어쩌면 또 죽쒀서 개 주는 꼴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싸우겠다는 결의가 있습니다. 그 결의가 연대와 힘 합쳐 좀 더 원칙과 배짱으로 뭉치면 더 큰 힘이 됩니다. 민주당에게 구걸하고 읍소하는 것이 아니라 당당히 요구하고 압박하는 투쟁을 해야할 때입니다. 민중이 두려운 존재가 될 때, 제도권 정치세력은 언제나 굴복하고 양보했습니다.

저 고공에서, 가장 열악한 곳에서 악으로 버티는 저 결의가 지금 그것을 매일 매일 우리에게 증명하고 있습니다.

2025.5.27
사회적파업연대기금

2017년 노동자 공동투쟁의 고공단식 농성: 26일간의 기록
사진 슬라이드로 정리했습니다.

그리고 2025년 5월 10일 제 23회 사파포럼 현장에 전시하고 동영상 슬라이드로 함께 봤습니다.

시간: 2017.4.14- 5.10
장소: 서울 광화문 사거리 광고탑

수많은 사진들중에 선택한 것들입니다.
2017년 4월14일 첫날부터, 2017년 5월10일 내려오는 마지막날까지, 날자순으로, 한장 한장이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보시고 궁금하길 바랍니다.
그 투쟁의 준비와, 시작과, 과정과, 결과와, 투쟁이후의 투쟁까지.

2017년 탄핵이후 대선국면에서 이 투쟁의 사진들이
2025년 탄핵이후 대선을 앞두고 있는 노동자투쟁과 노동운동에 던지는 메시지가 읽혀지길!

 

161028 노동자공투 박근혜퇴진농성 기자회견

 

170414 공투1일차 고공에 오른 6인의 노동자들

 

170415 공투 2일차 생수와  침낭 올리기 투쟁

 

(2017. 05. 04)
[고공단식농성 21일차] 그리고 (대선 D-5)
사파기금 권영숙 대표가 농성자들을 만나러 올라갔다.

 

[고공단식농성 15일차] 그리고 (대선 D-10)
6차 사파동행_광화문 노동자고공단식농성장편

6차사파동행.
처음으로 고공농성자들의 화상 통화 발언을 시도했다.
발언하는 고진수 동지

 

‘퇴진행동’ 광화문 토요일 집회에서. 경찰버스에 올라 피켓팅. “여기 노동이 있다”.
하지만 토요일 촛불집회에서 노동자공투는 발언 기회를 한번도 가지지 못했다.

 

(2017. 04. 28)
[고공단식농성 15일차] 그리고 (대선 D-10)
민주당 대선후보 문재인의 광화문 유세에서.
고공농성장 아래의 노동자들은 열심히 외쳤다.

 

2017. 05. 08)
[고공단식농성 25일차] 그리고 (대선 D-1)
대선후보 문재인의 마지막 밤 광화문유세장에서.
연단을 점거하고 피켓팅하는 공투 노동자들.

 

(2017. 05. 05)
[고공단식농성 22일차] 그리고 (대선 D-4)
농성자 6인중 콜트콜텍 이인근 지회장이 먼저 고공에서 내려왔다.
사파기금의 병원방문.

 

(2017. 05. 10)
[고공단식농성 26일차] 그리고 (대선 D day)
고공농성자 내려오는 날 오후1시.
바로 그때 대통령 당선자 문재인이 청와대로 입성하는 카퍼레이드가
광화문 고공농성자들의 광고탑 아래를 지나고 있다.
고공농성자들을 외면하며 무개차 위에 서서 손흔드는 문재인이 보이지 않는가.
사진: 권영숙

 

(2017. 05. 10)
[고공단식농성 26일차] 그리고 (대선 D day)
내려온 고공농성자.
사파기금 고진수위원과 권영숙 대표, 그리고 김영아 운영위원등.

 

다시 청와대앞 노숙농성.
문재인 대통령은 청와대 앞을 개방하면서 “시민들의 꽃길을 만들어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공투 노동자들은 이렇게 청와대 앞 100미터에서 노숙 농성을 해야했고,
경찰의 끝없는 침탈에 시달려야했다

2017년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은 4월 25일 서울 광화문 사거리에서 고공단식농성중인 노동자공투를 찾아서 ‘사파동행’을 열었습니다. 8년이 지나 그때와 닮은 꼴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2025년, 2017년 [6차 사파동행_광화문 고공단식농성장편] 후기와 앨범을 올립니다.

후기 앨범이 8년이나 늦어진 이유는, 그때의 상황이 너무도 급박하였고, 사파기금은 모든 힘을 다하여 노동자공투와 고공농성을 지지 엄호하는데 사력을 다하고 있었기때문입니다. 때를 놓치면서 후기앨범은 게시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때 탄핵, 대선, 그리고 노동자고공농성 26일간의 처절한 기록은, 2025년 12.3 계엄과 탄핵, 대선, 그리고 노동자 고공농성장이 벌어지고 있는 지금 다시 반추하고 되새겨봐야할 것들이 많습니다. 지금이라도 올려야하는 이유였습니다.

사파기금의 6차 사파동행은 단식고공농성이라는 초유의 선도적인 행동을 감행한 노동자공투를 엄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촛불시민들이 ‘민주주의을 지키자’라고 말할 때, 그리고 민주노총이 노조 조끼를 벗고 토요일 집회를 나가라고 할 때, 노동자 공투는 토요일뿐 아니라 매일 집회와 피켓팅을 하면서 노동의제를 세상에 알렸습니다. 장기투쟁사업장의 존재를 알렸고, 정리해고 철폐, 비정규직 철폐, 그리고 이를 위한 ‘노동악법’ 철폐와 노동법 전면 제개정을 외쳤습니다.

힘들고 외로운 투쟁이었습니다. 2015년 여전히 ‘박근혜 퇴진’이라는 구호가 정확히 터져나오지 않을 때, 11개 장기투쟁 사업장등 노조들은 ‘노동자 공투단’을 만들었습니다. 1년 반 전국을 순회하는 노력을 하면서 박근혜퇴진과 노동악법 철폐, 노동법 전면제개정을 위해 함께 전선을 형성하고 단일대오로 ‘공동투쟁체’를 만들자는 제안을 했습니다. 사파기금은 공투에 총 3회 기금을 지원하였습니다.

그리고 2016년 10월말 정부종합청사앞에서 농성을 시작하기로 하였고, 10월 마지막날 첫 토요촛불이 소규모로 열린 다음날인 11월1일 노동자들은 광화문 정부종합청사앞에서 농성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이후 5개월간 긴 시간 헌법재판소의 탄핵인용을 기다리는 동안에 공투와 사파기금은 정리해고 철폐, 비정규직 철폐, 노동법 전면제개정을 함께 외쳤습니다. 그리고 조기대선이 결정되었습니다. 광장의 에너지는 일시에 사라지고 ‘정권교체’론만이 요란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2017년 4월14일 노동자공투은 다시 6개사업장 6인의 노동자들을 광화문 40미터 위 광고탑에 올려보냈습니다. 첫날부터 사흘간 처절하게 싸우면서 생수와 사파가 제공한 침낭을 올렸습니다. 하지만 이후에도 이 투쟁에 대한 민주노총과 노동단체들의 엄호는 미약했습니다.

이때 4월 25일 사파기금의 6차 사파동행이 열렸습니다. 농성장 아래 광화문역 7번출구 앞에서 열린 집회에는 정말 많은 이들이 모였습니다. 하나된 마음으로 12일차 고공단식중인 노동자들을 지지하고 격려하였습니다. 사파기금은 처음으로 고공농성자들을 대형 스크린에 띄워서 화상 통화를 시도하였습니다. 기술적인 어려움을 뚫고 대성공이었습니다. 그러나 단식의 고비라는 12일차에 화면으로 만난 노동자들의 모습 앞에 할말을 잃고 숙연해졌습니다.

5월9일 대선으로 문재인이 당선되었습니다. 이른바 ‘촛불혁명’으로 성과를 다 가져간 문재인이 광화문에서 당선자 파티를 할 때도 바로 옆 고공단식 농성장은 외면했습니다. 노동자들은 그들의 연단에 올라 피케팅을 감행하였습니다. 5월10일 문재인은 여의도 국회에서 취임식을 하고 오후 1시경 청와대로 가는 카 퍼레이드로 광화문 사거리를 지났습니다. 바로 그 때 고공농성자들은 하늘에서 내려왔습니다. 그는 일별도 하지 않은채, 환호하는 지지자들에게 화답하면서 청와대에 ‘입성’하였습니다. 청와대 앞을 개방한다면서 ‘꽃길을 열어주겠다’고 해서 대대적인 방송을 했지만, 청와대 100미터앞에서 거리 노숙 농성을 시작한 노동자들은 경찰의 침탈과 괴롭힘에 시달렸습니다. 끝까지 촛불정권이라는 문재인 정권은 투쟁사업장의 목소리에 귀를 열지 않았습니다. 꽃길은 ‘시민들에게’ 열리는 것이었고, 노동자들은 청와대 앞에서 다시 싸움에 나서야 했습니다. 촛불과 탄핵은 노동자들의 세상을 만드는데 전혀 기여하지 못했습니다.

기억합시다. 2017년 4월14일부터 5월10일 26일간의 노동자고공단식농성을.
잊지맙시다. 그 투쟁을 ‘민주주의’는 어떻게 외면하였는지를.
노동자들과 민중은 스스로 자신의 힘으로만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 있다는 것을.

2025. 5.13
사회적파업연대기금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은 4월 25일 거제통영고성조선하청지회가 서울에서 연 후원주점에 연대로 함께 했습니다.
기금 대표와 운영위원들이 함께 했는데, 그 흔한 사진은 한 장도 없습니다.^^
대신 거통고조선하청지회의 서빙과 주방을 맡으며 고생한 조합원들 사진 몇 장 올립니다.
거통고조선하청지회는 현재 서울에서 한화 본사앞 지회장의 고공농성과 현장에서 해고노동자 중심으로 투쟁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오늘이 고공농성 52일차입니다.

세종호텔노조 고공농성 13일차입니다.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은 2월13일 고진수 세종호텔노조 지부장의 고공농성 첫날 오전에 고공농성장을 급히 연대 방문하였습니다. 권영숙 대표와 배성윤 운영위원이 함께 했습니다.

2월13일 고진수 노조지부장은 오전 5시 성명서를 공개하고, 세종호텔 앞 지하차도 10미터 상공에 설치된 교통신호 구조물에 홀로 올랐습니다. 폭 1미터가 되지 않고, 내부는 철빔으로 얼기설기 지지대를 만들어둔, 참으로 열악한 농성장입니다. 권영숙 대표는 사파기금을 만든 이후 지금까지 참 많은 고공농성을 경험했는데, 열악한 순위 수위에 꼽겠다 했습니다.

그러나 고진수 노조지부장이 누굽니까. 2017년 ‘박근혜퇴진 공투단’이 박근혜 퇴진 직후인 4월 ‘노동법 전면개정, 노동탄압 분쇄, 정리해고 비정규직 철폐’를 걸고 광화문 네거리 광고탑에 올랐을 때 오른 이입니다. 심지어 고공단식 26일을 감행하였던 이 입니다. 사파기금이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했던 고공단식 농성이기도 했습니다. 고진수지부장은 사파기금의 운영위원이기도 합니다. 그 저력으로 잘 버티리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첫날 농성장 상황을 확인하였습니다. 고공농성 첫날부터 남태령의 노동연대자들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시내 한복판 그것도 교통구조물 점거농성에 대한 공권력의 침탈 우려가 없지 않았습니다. 노동자들과 함께 남태령의 연대자들이 24시간 불침번을 서는 주력이 되어 오늘 13일차가 되었습니다. 첫날 연대자들의 첫 식사를 사파기금이 대접하였습니다. 잘했다고 봅니다.

2월 22일 토요일 저녁 함께 연대방문하였습니다. 12일간 계속된 한파가 뼈속까지 후벼파는 가운데, 연대자들의 24시간 보초는 계속되었습니다. 고진수 지부장은 무사하였고, 더 단단해졌습니다. 일행들은 돌아가며 핸드폰의 스피커 기능으로 위와 아래에서 안부를 묻고 대화를 나눴습니다. 그래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고공농성자를 보는 농성장이라는 이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파기금은 2월 24일 고공농성 지지 성명서를 발표했습니다. 추위속에서 버틴 투쟁, 앞으로 날이 풀리면서 더욱 단단해져야할 농성투쟁을 앞두고 성명서를 냈습니다.
세종호텔노조의 고공투쟁이 폐지되어야할 ‘정리해고’제도를 다시 이 사회에 환기하고 점화하는 불꽃이 되길 바랍니다.
2011년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투쟁이후 사회적 쟁점이 되었다가 스러져간 정리해고 철폐투쟁으로 이어지길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기필코 이 사회적 농성투쟁이 승리하길 바랍니다!

2025. 2.25
사회적파업연대기금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은 1월 17일 저녁 비정규직이제그만의 ““내 삶을 바꾸는 민주주의 1박2일 대행진” 국민의힘 앞 1박2일 자리에 참가했습니다. 백여명의 노동자 연대자들이 참여했는데요. 권영숙 대표와 배성윤 운영위원이 함께 했습니다.
관련하여 권영숙대표의 후기를 전재하겠습니다.

2025.1.19
사회적파업연대기금
*

노동자들이 바꾸는 민주주의가 되어야한다.
‘노동자의 삶을 바꾸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현재의 자유주의적 정치적 민주주의를 민중적 민주주의로, 노동자 민주주의로. 그리고 정치적 민주주의를 넘어서 사회적 민주주의로.
‘노동자들이 민주주의를 바꾸자!’라고.
내가 무대에 올라가 발언을 했다면 이 말을 했을 것같다.

1월 18일 집에 들어오니 새벽2시다. 전날밤 비정규직이제그만 “내 삶을 바꾸는 민주주의 1박2일 대행진” 집회에 갔다. 노숙하기로 한 장소인 ‘국힘’ 앞 집회가 과연 무엇일까 라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차라리 이 물리력으로 한화 본사 앞에서 밤새 진을 치고 대환장 파티를 하는게 어떨까 싶었지만, 그게 비정규직 집회답지 않을까 싶었지만. 가봐야지 하고 갔고. 전국에서 모인 많은 비정규 노동자들을 오랜만에 만나고, 주로 나는 많은 얘기를 나누고, 가끔 무대를 바라보다가 돌아왔다. 만나서 반가웠던 이들. 들어야할 이야기들.
이제그만 비정규노조 노동자들은 이전의 수에서 그닥 많이 늘지 않았고, 남태령의 20대 여성들이 많이 보였다. 오후 10시쯤 일 때문에 돌아오려 했는데, 새벽2시까지 꽤 오래 있다가 왔네. 생각보다 날씨가 춥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1박 혹은 무박2일일텐데. 함께 하는 흥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분노도 더 단단히 모아가길. 그리고 이것 역시 뻔해지는 집회가 되지 말길.
어떤 페이스북 친구가 말했는데, 많이 공감했다.
“남태령의 농민들은 ‘윤 물러가라’라는 맹목적 구호만 집어들고 트랙터 행진을 한게 아니라, ‘농4법’이라는 본인들의 삶에 직결된 이슈를 들고 싸우러 왔다. 노총이 그들 반의 반 만큼이라도 조합원의 삶에 직결된 이슈를 들고 싸우러 나왔더라면.”

2025.1.18 새벽3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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