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파업연대기금은 추석연휴기간 서울 낙성대 근처 비전향장기수들이 거주하고 있는 ‘만남의집’을 10월9일 오후 방문하였다. 이 집에는 박희성선생이 작년 작고하신 이후 세 분이 거주하고 있는데, 이 날 방문때는 ‘빨치산’ 출신 김영승 선생이 계셔서 함께 할 수 있었다.
만남의집은 2022년 사파기금의 83번째 기금지원 대상(고액기준)이었다. 그때 이후로 해마다 1-2회 명절 전 혹은 후에 방문하기로 결의하였다. 한 해도 빠진 적이 없다. 하지만 그동안 박희성선생이 돌아가셨다.
여기 계신 양원진(97세), 김영식(93세), 양희철(92세), 그리고 박희성(올해 살아계셨다면 92세) 선생들은 모두 남북의 분단과 한국전쟁기간 ‘반미 조국통일전쟁’에 북한 정규군으로 참여하거나 좌익 빨치산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었다. 분단후 간첩으로 내려왔다가 생포되어 긴 감옥살이를 한 이도 있다. 남한 출신도 있다.
이들 모두를 ‘정치범’이 아닌 ‘사상범’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정치범은 민주화운동을 한 사람들에게도 쓰는 용어이다. 그러나 사상범은 주로 반공 국가보안법 관련 조직사건이나 이들처럼 남한정부에 생포되어 수형생활을 했던 ‘비전향 장기수’를 말한다. 80년대 민주화운동은 ‘이념이나 ‘사상’의 수준과 꼭 맞닿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다른 말로는, 민주화운동은 정치 이행은 목표로 했지만, 사회혁명은 아니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1987년 민주화이행이후에 박정희정권하에서 극심했던 비전향장기수들에 대한 소위 ‘사상전향공작’이 폭로되었다. 그리고 이들의 가석방이 이뤄져 어떤 이들은 수십년만에 ‘남한’ 사회를 보기도 하고, 산에서 내려와 세상에 처음 나온 이들도 있었다. 이후 이들이 ‘신념’으로 택한 체제를 선택할 자유를 주기 위해서 북한으로의 ‘송환’ 운동이 벌어졌다. 1990년대 초 일이다. 당시 한겨레신문에 있던 권영숙 대표는 이때의 일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한겨레신문사는 첫 송환대상자 이인모 선생의 첫 송환을 함께 의도했고, 처음부터 끝까지 취재 보도하였다.
1998년 만남의 집에 거주하고 있는 남한출신 양희철 선생을 마지막으로 비전향장기수들은 모두 세상 밖으로, 즉 남한사회로 나왔다. 하지만 북한 송환(북송)은 달랐다. 2000년 1차 63명이 송환되었다. 일부는 남한에서 여전히 전사로 투쟁하겠다고 남았다. 일부는 한국 정부가 북송을 승인하지 않았다. 그렇게 남은 이들이 이제 모두 90대의 고령이 되어 줄줄이 세상을 떠나고 있다. 고 박희성 선생처럼 말이다. 2024년 9월29일 사파기금의 추석방문때 만남의집 마당에서 함께 사진을 찍으셨던 박희성선생은 한달도 안된 10월 27일 돌아가셨다. 권대표가 추도식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지금 또한분의 비전향장기수 출신 안학섭 선생이 암으로 투병중이다. 생명을 붙잡고 있는 그는 남한 이재명 정부에게 죽기전 ‘북송’을 요청하고 있다. 그는 강화도 출신이다. 이재명 정부는 북한 송환을 허락할 것처럼 움직였지만 불발되었다. 한반도를 둘러싼 지정학, 미국의 몽니, 그리고 남한과 북한의 미묘한 정세가 한 인물이 자신이 선택한 곳에서 죽고 싶다는 소원마저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외국영화에서나 볼 이야기로 여기는 일이 이 사회의 일이다. 관심을 촉구한다.
다음 만날 때까지 부디,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선생님 한 분이 말씀하길, “내 몸이 무기이고, 내가 살아있는 것이 투쟁”이라고 하셨죠.
(권영숙 대표 씀)
2025. 10.14
사회적파업연대기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