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숙(노동사회학자, 사회적파업연대기금 대표)
1. 승패의 분기점
처음에는 이재명 후보의 승산이 훨씬 크다고 봤다. 큰 복병이 없는 한 이재명이 당선될 것이라고 봤는데, 선거의 기세 장악이라는 면에서 대장동보다는 김혜경이 더 큰 복병이었다. 윤석열 후보의 아내 김건희보다 이재명 후보의 아내 김혜경을 둘러싼 스캔달이 표심에 더 큰 영향을 줬다. 시점 상 이재명이 치고 올라오는 일만 남았을 때 그건 꽤 찬물이었다.
반면 대장동의 경우, 혹은 부동산 정책 실패라고 얘기되는 진단은 사실은 모호하다. 그러면 부동산 정책이 국힘과 비슷했어야한다는 건가? 서울에서 30만 표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이 말은 모호하기 그지없다. 대장동, 부동산 정책의 실패를 이재명 패배의 큰 원인으로 진단하는 것에 대해선 민주당 쪽, 위성정당 쪽, 민주당 지지자와 언론들까지 대체로 동의한다. 그런데 그들이 말하는 ‘부동산정책의 실패’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참으로 모호하다.
부동산 규제를 더 했어야한다는 말인지, 다주택 소유자 과세나 갭투자 등 부동산용 금융 규제를 하지 말았어야 한다는 말인지. 주택공급을 늘렸어야 한다는 건지 아니면 공공주택 임대주택 등을 더 늘려야했다는 말인지, 그린벨트 풀고 용적률 제한조치를 풀었어야한다는 말인지, 아니면 그린벨트나 공원부지 전용을 막고 용적률 제한도 계속 유지하면서 도시 개발을 신중히 해야 한다는 건지.
이들이 말하는, 그리고 언론이 말하는 현 정부의 ‘부동산정책 실패’는 진단과 해법이라는 면에서 모호하다. 서울에서 30만 표 이상의 차이, 이재명을 지지한 지역구들이 부동산 정책 실패에 어떻게 다르게 반응하는지, 계급적 구성이 어떻게 되는지 구체적으로 얘기하지 않는 이 모호함이라니. 다르게 말하면 민주당은 대선에서 부동산이익동맹을 해체하여 승부를 내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부동산이익동맹에 붙어서 혹은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승부를 내겠다는 것인지 결정하지 못하고 기회주의적으로 양다리를 걸쳤을 뿐이다.
결론적으로 부동산 정책의 실패가 아니라 부동산 정책의 모호함이 민주당의 패착이라고 생각한다(이재명은 결국 국힘의 부동산 정책 따라 하기로 나섰지만 뒤늦었고, 그건 승부수가 될 수 없었다).
2. 후보 단일화 문제
윤석열의 우위가 거의 굳혀진 것처럼 혹은 가끔 비등한 것처럼 나올 때, 3위 후보 안철수를 잡는 것이 둘 사이의 레이스였다.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본 윤석열과 단일화 논의에서 안철수가 끝까지 딴청을 부리는 것을 보고, 이재명이 꽤 큰 정치적 교환과 약속을 한 게 아닌가 했는데, 왜 그건 성사되지 못했을까?
일부는 안철수가 윤에게 넘어간 것이 ‘약점’을 잡혀서가 아니냐고 하는데, 그건 편의적인 생각이다. 현 정부가 민주당 정권이다. 안철수가 약점이 있다면 양쪽 다 잡을 수 있었다는 말이다. 어쩌면 민주당 쪽은 ‘감투’와 ‘자리’다툼이 워낙 심한 당이라서 안철수에게 무엇도 약속하지 못한 것은 아닐까? 그리고 김동연 후보가 이재명 후보와 나란히 TV 후보 토론회에 나올 때부터 그가 이재명 캠프로 갈 것이라고 봤다.
고로 이재명 후보는 김혜경과 안철수 변수가 없었다면 이래저래 흔들리는 표를 긁어모았을 것이다.
3. 두 개의 상수- 민주당 쪽에서
그리고 두 개의 상수가 있지 않은가 말이다. 하나는 호남의 몰표. 80~90%의 몰표를 줄만큼 ‘당적인 충성도’가 높은 지역. 영남은 차라리 몰표 주기 측면에서 많이 무너졌고, 이미 그런 선거의 예가 많다. 하지만 호남은 여전히 민주당의 아성으로 굳건하다. 문제는 호남의 몰표는 결국 호남 보수 ‘토호’들의 이해집단이 민주당의 기득권 세력으로 계속 인정받는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과연 이게 꼭 긍정적일까? 그래도 좋다는 건가? (호남에서 진보정당은 거의 0표에 가깝다).
그리고 두 번째는 비판적 지지다. 이는 대선 캠페인 마지막에 ‘샤이(shy) 이재명’이 아닌 ‘적극적지지’로 쏟아졌다. 이번 대선에서는 비판적 지지론자들 사이에 ‘샤이 이재명’은 없었다(샤이 shy : 부끄러운, 수줍은, 내성적인). 대놓고 적극적 지지 선언이 속출했으니 말이다, 문재인 정권의 실정 앞에 침묵하던 소위 비판적 지지자들이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노골적으로 이재명 후보에 대한 정치적 지지를 공개적으로 표명하고 나섰다. 이번에도 ‘미워도 다시 한 번’을 외쳤다. 또 이번엔 무엇이 그리 다르다는 건지, 자신이 이번엔 다르다고 여기는 긴급성과 정당성을 강변했다. 선거 직전에 교수연구자, 민주화운동 인사, 명망가, 페미니스트 등부터 다양한 직업, 이력과 다양한 과거 이념에서 지금에 이른 이들이 마치 커밍아웃하듯 이구동성으로 나섰다. 대체로 혼자 조용히 표 던졌을 이들이 이런 지지선언 퍼레이드를 하는 이유는, 자신이 이재명 후보를 찍겠다는 정치적 커밍아웃을 위해서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당신도 찍으라는 설득과 압박을 위해서다. 적극적인 선거운동에 나선 것이다. 그건 다분히 중도층이나 주변 지인들, 자신이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으로부터 더 많은 표를 끌어모으기 위해 나선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것을 ‘비판적 지지’라고 부르긴 더 이상 어렵다.
그러니 이 두 개의 상수-즉 첫째 호남의 지역주의, 둘째 민주화이행 이후 참 오래도 지속되는 ‘비판적 지지’가 아닌 ‘민주대연합’의 논리가 이재명을 살릴 수도 있다고 봤는데. 간발의 20만 표 차이로 졌다. 민주대연합, 다 긁어모아도 졌다. 여하튼 그러면 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다 긁어모았는데도 졌다는 것.
*수족을 자르는 심정으로, 다른 후보를 찍고 싶었으나 이재명을 찍었다는 2030 여성들이 있다고 하는데, 그것까지 몰아줬어도 이재명은 졌다. 이들에게 ‘다음에도’를 기대하지 말라. 2030 여성들의 ‘비판적 지지’는 87년 민주화이행 이후 지속돼온 소위 비판적 지지와는 좀 다르길 바란다. 과연 그럴 수 있을지. 그들의 투표가 자유주의 정당을 향한, ’민주 대 반민주 구도‘의 정치를 벗어난 투표행위일지 아닐지. 이들의 투표가 선거 막판에 “여성에 대해서 덜 혐오하는 후보를 뽑자’고 했던 페미니스트 칼럼니스트의 선동적인 글의 의미와 얼마나 다를지. 이들의 투표에 대해선 여기까지만 얘기하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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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민주당이 대선 패배를 보는 방식
하지만 민주당과 충성스런 지지자들은 ”졌다“는 말의 의미에 대해 무게를 제대로 두지 않는다. 선방했다고 하고, 역대 최소 득표 차이라고 말하면서, 민주당이나 그 지지자들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계속 물타기 하고 있다, 남의 당을 탓하고 있다. 언론 탓을 하다가 대중을 탓한다. 정작 자기 눈에 들보에 대해선 티끌인양 한다. 그게 바로 민주당 자유주의 정권의 한계다. 제도정당으로서의 한계다.
즉 87년 6월항쟁과 민주화이행이 부활시킨 보수양당 체제 안에서, 보수 우파의 맹공 앞에 자기 입지조차 잘 유지하지 못하면서 줄곧 무능을 보이다가, 어부지리로 혹은 구조적인 맹점 속에서 계속 생존을 도모하는 앙상한 민주대연합의 이분법 정치, 유권자(시민)들을 인질로 잡아서 하는 인질 정치, 극우를 피하려면 최악을 피하려면 우리를 찍으라는 공포정치. 좌파의 진입을 막는데 우파보다 더 의도적인 봉쇄정치.
이런 정치가 앞으로도 과연 얼마나 유지될까. 이미 균열은 가고 있다.
5. ‘또 다른 패배’의 의미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하는 것은 민주당의 패배가 아니다. 민주당의 패배 말고 ‘또 다른 패배’에 주목해야한다. 민주당을 넘어서려면 이 패배를 더 눈여겨 봐야한다. 말하자면 이번 투표에서 윤석열을 찍은 것이 단지 ‘강남’의 계급투표만일까. 대중의 수준을 탓하려고 하면 탓하고 말면 그만이다. 하지만 좀 더 지형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본다.
윤석열과 이재명 사이에 있는 ‘부동층’. 그들은 중도층일 수도 있고, 대안부재 속에서 부동층들도 있다. 윤석열을 찍은 많은 이들 역시 마찬가지다. 어쩔 수 없어서 민주당을 찍은 ‘비판적지지’도 마찬가지다(비판적 지지 운운하며 적극적 지지를 조직하려 든 이들은 자신의 투표와 선거 캠페인 결과를 고스란히 받길 바란다. 다른 이들에게 윤석열 정권하에서 벌어질 참상을 겪어보라며 저주문을 쓰고 악담을 늘어놓는 것은 참 꼴불견이다. 이미 마음이 떠나는 이들을 향해서 할 말은 아니다. 근데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 다음 5년 뒤를 언제나 기약할 수 있는 계층과 집단은 다르다. 그런 이들이 지금 한번의 선거에 세상이 다 무너진 듯이 말한다. 단지 이 한마디는 하고자 한다. 이제야 선거결과를 보며 희망 없음에 절망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노동자 투쟁하는 이들, 그들과 연대 운동하는 이들은 문재인 정부 내내 그 마음이었다. 앞으로 그 쓰린 마음으로 기억해보길. 누군가는 계속 고통 받고 쓰린 마음 부여잡고 살았다는 것을).
이들에겐 이제야말로 다른 선택지가 필요하다. 더 미룰 수 없는 선택지. 그러나 이번에 동시에 고스란히 그 위기의 징후적인 모습을 드러낸 선택지.
내가 지난 2월 9일 ‘2022년 대선・지선 권력재편기에 대응한 민교협 대토론회’에서 발표한 논문에서 ‘부재’의 위기, ‘불가능성’의 위기로 규정했던 선택지.
그 선택지에 대해서 ‘왜’에 이어서, 이제야말로 ‘어떻게’를 고민해야할 때다.
이후 ‘위기’라는 주제에 대해서 쓸 기회가 있길 바라며, 다음 덧말을 추가하는 것으로 맺으려한다.
6. 덧말: ‘9176명’에 대하여
사회주의 후보 7번을 찍은 이가 9176명. 1만 명을 넘지 못해서, 너무 희소해서, 사람들은 궁금해 하기 시작했다. 이 사회에서, 이 정치지형에서 누가 나 같은 사람일까. 궁금하다는 것이다. 3억 이상 들여서 후보 전술하면서 ‘사회주의’를 표방했는데, 나는 합당과정도 선거과정도 공약도 모두 비판적이었다. 좀 더 잘해야 하고, 미리 준비했어야하고, 그리고 공약은 수정되어야한다고 본다. 솔직히 말해서 결과에 대해서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물론 6월 지선을 앞두고 정신 차린 민주당이 정치공학적으로 지방선거 선거구 개혁에 나서고 소수 정당들을 끌어들이고, 그리하여 그 결과가 조금 나아지면 결과론적으로 대선결과를 다르게 해석할 여지는 열려 있다. 하지만 이는 민주연합의 구도 안에서 어부지리를 얻는 방식이다. 즉 민주연합의 구도도 해체되기는커녕 그만큼 강화된다. 이것이 바로 정의당의 문제였다)
하지만 ‘사회주의후보’라는 그 벽보만으로, 그리고 다른 것들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의구심에도 불구하고, ‘사지선다형’에서 4지로서 사회주의 후보를 과감히 떠올리고, 그를 찍은 9176명은 중요하다. 4지후에 3지선다형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대선 직후 그들이 스스로 나서서, 우리 구역에서 사회주의 후보 찍은 우리 한번 만나요! 라는 이 자연스러운 정동이 이번 7번 후보가 얻은 최대의 소박한 수확일 것이다. 사회주의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이 모임을 조직하는 것.
어디서든 만나길 바란다. 만나서 서로 인사하고 다음이 가능한지 머리 맞대고 소근 소근 속삭여주길 바란다.
* <사파시평>은 홈페이지와 민중언론 참세상에 동시 게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