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파업연대기금이 여는 ‘민주주의와 노동’학교
– 학교개설의 취지 및 강의내용 소개

1. 취지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은 노동자들의 파업권등 노동자의 권리를 시민권으로 긍정하며 노동을 위한 파업 및 생계기금을 모을 뿐 아니라 노동문제를 사회적인 의제로 만들어가는 토론의 장이 되기 위해 여러 모로 노력해왔습니다.

분명히 노동문제는 2012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가장 ‘뜨거운 감자’입니다. 과연 노동은 선거민주주의와 어떤 관계인지, 노동과 관련해 한국의 민주주의, 민주화를 어떻게 평가해야하는지라는 질문은 끊임없이 제기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어떤 시각에서 노동을 민주주의의 담론속에서 바라봐야 할지 모호합니다.

또한 지난해 희망버스운동으로 촉발된, 노동에 대한 사회적 연대의 확장은 1998년 구제금융 사태이후 14년동안 우리 사회의 최대현안이 된 정리해고 문제와 9백만에 달하는 비정규직 문제를 전사회적인 힘을 모아 해결할 수 있는 기회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후의 과정과 4.11 총선 결과는 노동하는 자들의 희망을 말하기에 아직 멀었다는 것을 절감하게 했습니다.

이제 12월 19일 대통령선거가 딱 6개월 남았습니다. 그러나 코앞에 닥친 대선을 앞두고서도 다시 사회적 의제의 실종, 특히 진보적 의제의 실종이라는 말들을 많이 듣습니다. 심지어 ‘2013년 체제’라고까지 명명된 중요한 대선정국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거시적인 문제의식을 곧추세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노동의 문제의식, 희망버스가 남긴 성과도 바래져 갑니다.

이제 지난 총선의 씁쓸한 결과와 공안 광풍, 그리고 진보적 의제의 실종과 주체의 부재속에서 지쳐가는 우리의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길을 나서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기운내어 질문해봅니다. 이번에는 제대로 된 질문을 하고 제대로 된 답을 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과연 이 땅의 민주주의는 노동배제적인 민주주의로 계속 갈 수 있을까요? 이 땅의 민주주의에서 결여된 것은 무엇이며, 우리 사회 노동현실은 과연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인가요? 과연 선결해야할 노동문제는 무엇인가요?

이 땅의 노동정치는 어떻게 나아가야할지,그리고 한국 민주주의는 어떻게 재구성해야 하는지, 그리고 노동문제를 어떻게 사회화하고 대안을 모색해나가야 할지에 대해 머리 맞대고 허심탄회하게 얘기하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2. 강의 요강

*이 강의를 이런 분들께 권합니다:
노동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으나, 어떤 시각으로 봐야할지 그리고 문제가 무엇인지를 궁금해하는 시민들
– 노조활동을 하면서 노동문제에 대한 이론과 실천을 연결하는 좀더 심도깊은 정리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노동운동 활동가들과 노동자들
– 88만원세대이고 우리 사회 불안정노동의 문제를 개인적으로 느끼는 미래의 노동자들, 그리고 현재 학생으로서 어떻게 노동문제에 대한 문제의식을 확장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학생들.

*강사소개: 권영숙 박사는 컬럼비아대학에서 민주주의와 노동의 관계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현재 노동사회학, 정치사회학, 비교사회학, 인권/시민권 이론을 대학강단에서 강의하고 있습니다.

– 강사의 말: “이 코스는 완전히 학술적이지도 않고 완전히 대중적이지도 않습니다. 노동문제에 대해 어느 정도 문제의식을 이미 가졌으나, 심도깊은 총정리가 필요한 이들에게 노동문제에 대해 3강에 걸쳐 일목요연하게, 그러나 세부적인 현실에 대한 조명을 통해서 진행하되, 이론과 개념 역사를 한국의 현실에 접목시키는 강의로 진행할 것입니다. 난이도는 초-중급입니다. ”

3. 프로그램 

– 일정: 6월25일 첫 강의를 시작으로 7월9일까지 3차례에 걸쳐, 매주 월요일 오후 7시30분 시작합니다.
– 장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13층 교육실
– 강의는 1시간20분의 강의와 질의응답 및 토론으로 총 2시간여동안 진행합니다.
– 강의후 뒷풀이 모임을 가집니다. 함께 했던 소감 나누기 및 요즈음 느끼는 생활고민, 시사문제,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나누어요.

1) 1강(6/25) 한국의 노동문제, 무엇이 무엇인가
– ‘장투사업장’ 문제의 본질
– 노동의 ‘시민적 권리’란
– 노동문제를 바라보는 기본틀과 개념들
– 민주화이행이후 민주주의의 기본 궤적
– 이행이후 민주노조운동에 대한 평가

2) 2강(7/2) 한국의 노동시장과 노동법체제
– 노동파괴와 노동계급의 해체
– 한국의 노동시장, 어떻게 변해왔고 무엇이 문제인가
– 민주화 이행이후 노동법체제의 변천사
– 새로운 제도적 장치를 위하여

3) 3강(7/9) 한국의 민주주의와 노동 – 비교사적 관점에서 본 역사와 교훈
– 노동과 민주주의 : 비교역사적인 고찰과 교훈
– 한국의 노동과 민주주의, 그 25년의 관계와 역학
– 노동없는 민주주의의 한계와 노동통합적인 민주주의의 가능성

3. 참가신청 

1) 참가비 ; 3강의 2만원 (개별 강의 신청은 각 1만원)
2) 신청방식 :
– 개강전까지 60명 선착순 신청을 온라인으로 받습니다. 서둘러 주세요..^^
– 예약신청은 www.sapafund.org를 통해서 하시고, 계좌로 입금해주시면 완료됩니다. 입금계좌 : 씨티은행 131-09047-269-01 최철호(사파기금)
– 문의 sapafund@gmail.com

 

아래의 글은  (사)여성문화이론연구소가 주최한 제56회 콜로키움에서 발표한 권영숙 박사의 발표문입니다. 본 글은 계간지 문화과학 2012년 여름호에도 실렸습니다.

(사)여성문화이론연구소  http://www.gofeminist.org/

(사)여성문화이론연구소  제56회 콜로키움

희망버스이후 노동에 대한 사회적 연대의 새로운 흐름

–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의 문제의식과 의미

권영숙

1. 들어가는 말

지난 해 한진중공업노동자들의 정리해고 철회싸움과 김진숙 부양노련(민주노총 부산양산지역본부) 지도위원의 크레인농성은, 70년대이후 우리 사회에서 최초의 유의미한 노동에 대한 사회적 연대운동을 불러 일으켰다. “희망버스”로 이름붙여진, 노동에 대한 이 연대운동은 올해 1월초 장기투쟁사업장을 순례하는 “희망뚜벅이”, 2월에는 시청광장을 “희망광장”으로 되돌리자는 광장점거운동, 나아가 지금 서울 대한문앞의 쌍용차 노동자분향소의 시민상주단과 “희망지킴이”로 진화하고있다.

그만큼 우리 사회는 희망에 목말라있는 사회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노동의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려는 시도에 못말라 있다. 그만큼 그동안 민주화이행후 노동배제적 민주주주의 속에서 노동의 사회적 고립은 심각했었다. 그러므로 이를 뚫고 희망버스로부터 시작된 노동에 대한 사회적 연대의 의미는 자못 크다. 더불어 한국자본주의의 무한한 질주, 즉 국가의 통제나 시민사회의 치열한 비판적 감시 없이 무소불위로 군림했던 ‘경제권력’에 대한 문제제기가 동일한 맥락에서 시작된 것도 예사롭지 않다. 하지만 희망버스 이후의 움직임들은 여전히 희망버스를 반복하고 재현하려는 시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희망버스에서 시작된 노동에 대한 사회적 연대의 문제의식을, 다시 한 단계 넘어서는 연대적 사회운동의 조직화와 노동의 문제설정으로 모아가기에 한계가 있고 아직 힘이 부족하다.

희망버스의 연대운동이 한진중공업 해고노동자들과 김진숙의 크레인농성을 중심으로 하는, 사건적이고 일회적인 성격을 지닌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제 중요한 것은 어떻게 희망버스로 시작된 노동의 사회적 연대를 지속적인 문제의식으로 발전시키고 장기적인 전망으로 추동할 동력을 확보하는가이다. 이 점에서 지난해 2차희망버스 직후인 7월말 시작된 ‘사회적파업연대기금’ 캠페인이 주목된다.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은 희망버스로 시작된 노동의 사회적 연대를 장기적인 문제의식으로 결집하고, 나아가 파업기금이 부재한 채 파업을 시작하면서 돈의 압박에 스러져가는 한국노동자들의 파업을 지원하기위한 하나의 제도적 장치로서 시작되었다. 제목에서 시사하듯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은 노동에 대한 시민적 연대가 아니라 노동에 대한 사회적 연대라는 점과 노동자의 파업은 ‘사회적 파업’이라는 이중의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노동자들의 파업권을 노동자의 ‘시민적 권리’로 우리사회가 공공연히 긍정하자는 운동이기도 하다. 한국사회의 노동현실에 대한 맥락적 이해 위에서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이 내장하고 있는 문제의식을 풀어보고 그 의미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2. 왜 파업기금인가, 왜 사회적 파업연대기금인가

한국에는 노동자들에게 고유하게 주어지는 헌법상의 권리인 파업권이 과연 존재하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1987년 시작된 민주노조운동의 거센 저항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서 지속된 노동배제와 외환위기 및 금융위기가 몰고온 신자유주의의 쓰나미 속에서 노동자들의 파업권은 사실상 거세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단지 기업이 고용한 용역깡패들과 이를 비호하는 공권력 때문만이 아니다. 바로 돈때문이기도 하다.

서구 노동운동사를 보면, 노조운동이 전국화 산별화되면 이른바 파업기금을 조합원으로부터 월단위로 받아 기금으로 조성한다, 그리고 파업기금을 가지고 파업한다. 왜냐하면 파업을 하고, 기계를 멈춰더라도,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이 굶을 순 없으니까, 자식들을 키우고 학교를 보내야하니까. 산업자본주의가 본격화된 이후인 19세기 중엽무렵 유럽의 노동운동은 국가간 편차가 있을지라도, 파업기금의 조성을 조직과제로 삼고, 노조 조합비(fee)와 별도로 그리고 조합비와 동률로 파업기금을 노조원으로부터 거둔다. 그리고 이 파업기금은 노조의 경상적인 활동비로 전용할 수 없고, 단지 파업만을 위해 사용된다. 노조운동은 파업기금을 조성함으로써 파업과정에서 노동자들 및 그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면서 파업의 안정성을 확보한다. 하지만 이보다 더 큰 의미는 노조, 그리고 노동자들 스스로가 파업기금을 조성함으로써, 노동계급이 자신들이 언제든지 자본에 대타적인 투쟁에 나설 수 있음을, 노동계급을 자본에 대항한 행위자로 스스로 자각한다는 데 있다. 즉 노동자 스스로가 ‘파업권’을 자신의 권리로, 조직적인 무기로 인정하고 자본에 대해서 대타적인 노동의 정체성을 갖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이 파업기금이 낯설다. 민주노조운동이 시작된 1987년이래, 노조들은 노태우정부가 내세운 파업중 ‘무노동무임금’정책에 맞서 싸우는데 초점을 둘 수 밖에 없었고, 그 과정에서 파업중인 개인들의 생계는 개인 노동자들의 몫이 돼버렸다. 그리고 형성기 민주노조운동의 시기에 파업기금에 대한 문제의식을 채 성숙시키지 못한 가운데 노조운동은 조직노동으로 정립되었다. 이리하여 파업기금의 조성은 각 노조단위의 문제로 개별화되었고, 각 노조들은 쟁의기금을 별도로 거두지않은 채 임기응변으로 특별예산으로 편성된 쟁의기금을 사용하는 식이었다. 따라서 이는 안정적이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노조마다 빈익빈 부익부를 초래하기도 했다. 나아가 파업기금을 조성하면서 노동자들이 스스로 자신의 파업권을 인정하고 자본에 대자적으로 정리하는 과정은 생각지도 못한다. 모든 것이 도구적이고 임기응변이다. 하지만 파업기금의 부재는 특히 갈수록 비타협적이고 적대적인 자본의 교섭불참, 국가의 냉대와 친자본적 태도속에서 한국적인 노동현상이 돼버린 소위 장투장(장기투쟁 사업장)들에게는 더욱 치명적인 문제가 되엇다. 100여개가 넘는 한국의 장투사업장들이 파업기금없는 싸움을, 심하게는 코오롱합섬처럼 최장기 8년간 진행하면서 돈의 압박에 끊임없이 시달린다. 파업기금과 생계비 뿐만 아니라 자본이 제기하는 온갖 민사소송과 손해배상 가압류등등으로 인한 돈의 압박도 무시못한다.

결국 한국의 노동은 파업권이란 헌법적인 권리를 가졌으나, 돈 앞에서 속수무책이었고 스러져갔다. 파업기금의 부재는 곧 노동자의 파업권의 유명무실화로 이어진다. 노동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파업은 칼날이 되어 노동자들의 심장을 뚫고 들어왔다. 부당한 근로조건과 정리해고에 맞서 파업을 선언하는 순간, 그들은 자신의 인생을, 자신의 가족들의 생계를 이 파업의 제단 위에 올려놓아야 했다. 그리하여 ‘단지 용역깡패와 공권력의 침탈 뿐 아니라’ 돈이 이들의 피를 말렸다. 그들을 힘없이 스러지게 했다. 사람을 파괴했다.

2009년 77일 파업을 했던 쌍용자동차의 사례가 그랬다. 그리고 희망버스를 부른 한진중공업 역시 마찬가지다. 2010년 12월 정리해고후 2011년 11월까지 장기간의 파업을 거치면서 이들의 인생은 절단났다. 4백여명의 노동자들중 다수가 떠나고 끝까지 남은 이들, 즉 ‘한진중공업정리해고투쟁위원회(한진중정투위)에 남아 파업에 동참한 노동자들은 기껏 100여명이다. 그리고 그런 어려움 속에서 한진중 노조지회장 채길용의 ‘직권합의’도 벌어졌다. 바로 그런 것이다. 파업한다고 그들이 인간이 아닌가, 그들 역시 평범한 이 사회의 필부들, 가장들, 범인들이다. 파업을 해도 생계를 유지해야하고, 자식을 키우고 학교도 보내야한다.

결국 여기서 분명한 것은 노동자들이 자신의 싸움을 진행하려면, 그리고 노동자들의 파업권을 온전히 행사하려면, 파업기금의 조성이 필요불가결이라는 점이다. 구조조정과 정리해고에 맞선, 더구나 갈수록 장기화되는 한국 노사분규의 특징을 고려할 때, 노동자들이 파업을 선언하고 감행하려면 노조 조합원들과 그 가족들이 ‘악마의 금전’, 즉 돈의 압박으로부터 벗어나야한다. 그것이 곧 파업기금이다.

그리고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은 말 그대로 노동자의 파업기금을 사회적인 연대로 모아주자는 운동이다. 그래서 전면에 내세운 구호도, “노동자들이 돈앞에 스러지지 않게 하는 사회적 연대”이다. 2011년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싸움에 연대한 ‘희망버스’는 노동자에 대한 우리 사회의 연대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국가권력의 비정상적인 자본편들기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은 노동자들과 맞잡은 각계각층의 사회적 연대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노동자의 사회적 고립을 사회적 연대로 해소함으로써 노동의 희망을 만들 수 있음을 시사하였다.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은 희망버스를 이어, 단지 한진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노동현실, 이 사회와 이행후 민주주의가 배제해왔던 노동에 대해 지속적인 사회적 연대를 만들어가기 위해 시작되었다. 단지 일회적인 혹은 사건적인 것이 아니라 노동에 대한 사회적 연대를 노동과 사회가 함께 하는 파업연대기금의 조성을 통해서 일궈나가자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당장 파업하는 노동자들뿐 아니라, 이 신자유주의의 반노동적 현실속에서, ‘노동파괴’가 일상화된 노동시장의 조건속에서, 모든 노동자들, 우리들, 노동하는 우리들에게 항상적 잠재적인 공포인 정리해고와 비정규직화에 대항해서 함께 연대할, 나를 지지해줄 사회적 안전망을 만들자는 것이기도 하다. 결국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은 ‘사회적 파업’에 대한 ‘사회적 연대’다.

3, “사회적파업연대기금’에서 ‘사회적인 것’의 의미 : ‘사회적 파업’에 대한 ‘사회적 연대’

희망버스가 부산 영도를 달려갈 때 많은 사람들은 소위 ‘노동의 시민권 회복’이라고 그 의미를 부여했다. 혹은 노동에 대한 ‘시민적’ 연대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표현들은 한국사회에서 뿌리깊은 ‘노동 대 시민’의 대당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논쟁의 소지가 있다. 노동 대 시민의 대당은 기본적으로 노동을 시민(권) 밖에, 나아가 사회의 밖에 두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대당, 즉 노동 대 시민의 구도 자체를 그리고 나아가 연대에 있어서도 노동에 대한 ‘시민적 연대’라는 도식을 해체할 필요가 있다. 대신에 이 사회에서 노동자들 파업이 갖는 사회성을 이해하고, 노동이 시민이 되는 것이 아니라 노동의 시민권을 긍정할 필요가 있다. 그랬을 때, 노동에 대한 연대 역시 노동에 대한 시민적 연대가 아니라 노동에 대한 ‘사회적 연대’ 혹은 노동의 사회적 연대로 불려질 수 있다.

우선 노동이 시민적 자리를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의 사회적 시민권을 긍정하고 노동을 사회의 중심에 위치지우는 게 필요하다.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은 희망버스를 통해서 비로소 시민의 지위를 획득한 것이 아니라, 이 땅의 노동자로 선 것이다. 즉 노동자 계급의 고유한 시민적 권리, 헌법으로 보장된 노동권 혹은 노동의 시민권을 확보하는 것이다. 노동의 시민권은 노동계급에게만 부여되는 특별한 ‘시민적 자유(civil liberty)이다. 이는 이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라는 인정속에서 자본에 대해 심대히 ‘비대칭적인 권력관계’에 있는 노동자들에게 부여하는 특수한 시민적 권리로서, 노조를 결성하고, 노동자와 자본의 교섭권을 인정하며, 최종적으로 노동의 파업권을 긍정하는 것을 핵심으로 한다.

하지만 한국에서 노동의 시민권은 제대로 존중되지 못했다. 민주화 이행후에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기업수준의 단체교섭권이 어느 정도 허용되는 방향으로 진전된 것을 제외하면, 노조 결성에서 자본의 비협조과 탄압, 교섭구조에서 산별 중앙 교섭구조의 제도적 미비는 여전히 문제이다. 그리고 앞서 말한대로 파업권은 친자본적인 국가와 자본의 비타협성, 그리고 공권력과 자본의 사적 폭력에 의해 억압되었을 뿐 아니라, 자본이 가하는 돈의 압박에 의해 무력했다. 물론 서구 민주주의라고 해서 처음부터 노동의 시민권이 확보된 것은 아니다. ‘시민’이라는 말이 구체제인 봉건사회에서 출현한 신흥 부르조아지만을 의미했다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결국 서구에서도 노동자들이 시민이 되는 과정이 필요했다. 역사적으로 보면, 봉건사회의 구체제(앙상레짐)가 붕괴된 이후인 산업자본주의하에서 ‘시민'(부르조아지)만이 전유했던 ‘시민적’ 권리를 노동자에게로 확장하는 과정이 바로 민주주의투쟁이었고 사회주의와의 결합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의 민주주의는, 민주화 이행과정에서부터 이행후의 민주주의까지, 사회적, 실체적 민주주의를 제기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민주주의는 철저히 정치적 민주주의로 한정되고,자유주의적 민주주의로 제약되어있다. 그래서 한국의 경우, 민주화이행이후 노동과 시민의 간극은 서구에서처럼 점차 좁혀지고 해소되기는 커녕 벌어지고 심지어 대립되는 것으로 돼버렸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서 필요한 것은 노동과 시민을 연대시키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의 시민된 권리를, 즉 파업권등의 노동권을 긍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실 이는 파업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와 관련된다, 즉 파업의 사회적 의미를 어떻게 긍정하는가의 정도에 달린 문제이기도 하다. 일부에서는 이와 관련, ‘파업의 사회화’를 주장한다. 하지만 파업의 사회화는 노동자들이 공장뿐 아니라 공장밖의 세계와 걸쳐있으므로 생활세계의 이슈들로, 공장밖으로 손을 뻗어 연대하라는 의미로 곧잘 사용되는 말이다. 사실은 ‘사회적’ 파업, 즉 파업이 갖는 사회적 성격을 긍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노동자의 시민적 권리를 그 고유한 성격 자체로서 긍정하는 것이 아니다.

일단 파업은 각 공장에서 터져나온다. 하지만 그 파업들은 사회적이다. 그 공장의 노동자들은 단지 자신만을 위해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모든 노동을 위한 싸움, 노동자들의 이해를 위한 싸움을 하는, 사회적 파업을 하는 것이다. 결국 파업의 사회성을 긍정하는 것은 각각 터져나오는 파업이, 그 작은 공장들의 파업이, 개별적이고 고립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 의미를 가짐을 인정하고 이해한다는 것이다.

더불어, 노동에 대한 ‘사회적 연대’ 역시, 시민적인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행하는, 아래로 향하는 연대가 아니라 노동하는 자들의 상호연대로, 사회적 연대로 이해하는 것이다. 예컨대 희망버스를 노동에 대한 ‘시민적 연대’라 한다면 여기서 노동은 누구이고 시민은 또 누구인가? 시민의 연대를 얻기 위해서, 노동은 또다시 시민 밖으로 외재화되어야 하는가? 아니 희망버스를 탔던 우리들은 노동을 외재화하기 위해 희망버스를 탔던가? 아니 희망버스를 탔던 사람들은 노동자인가, 시민인가? 희망버스를 탔던 사람들은 스스로 노동하는 사람으로서 ‘노동파괴’의 현실에 대해서 공분했고, 언제든 비정규직 정리해고의 대상일 수 있는 노동하는 모든 사람들을 대신해서 싸우는 그들에게 연대한 것이다. 즉 노동에 대한 시민적 연대가 아니라 노동하는 이들간의 고립적이지 않은, 즉 사회적인 연대의 방식이었다. 상호연대였고 수평적인 연대였다. 그것이 희망버스르 추동하는 힘이었다.

애초에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을 제안할 때 필자의 문제의식은 사회적파업연대기금에 담긴 ‘사회적’인 것의 이중성에 중점이 있었다. 즉 한편으로는 노동 및 파업의 사회적인 성격을 긍정한다는 의미를 안고(사회적 파업), 또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자의 파업에 대한 모든 노동하는 자들의 사회적 연대(사회적 연대)라는 바로 이런 이중의 의미에서 ‘사회적’이라는 말을 붙였다. 그래서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이라는 개념에서 파업연대라는 말만큼 ‘사회적’ 연대 혹은 ‘사회적 파업’이라는 의미도 중첩되어 있다.

4. 노동의 최소한의 사회안전망으로서 사회적파업연대기금

간단히 말하면,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은 희망버스로 시작된 노동의 사회적 연대를 장기적인 문제의식으로 결집하고, 나아가 파업기금이 부재한 채 파업을 시작하면서 돈의 압박에 스러져가는 한국노동자들의 파업을 지원하기위한 하나의 제도적 장치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헌법상에 보장된 노동자의 파업권을 노동의 시민권으로 우리 사회가 공공연히 긍정하자는 운동이기도 하다. 그런 차원에서 나의 노동의 댓가인 “피같은” 돈을,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문제등 노동파괴의 현실에 맞서 싸우는 정당한 파업에 대한 기금으로 조성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사파기금은 무엇보다도 ‘돈으로 하는 연대’다. 즉 파업기금도 없이 싸우는 노동자들이, “돈의 압박에 스러지지 않도록 만드는 사회적 연대”이다. 이 과정을 통해서 사파기금은 노동하는 사람들의 최소한의 사회적 안전망이 될 것이다. 이 기금을 믿고 노동자들이 나서서 맘 편히 파업에 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파업이 그들의 목숨을 걸고 가족들의 생계와 자식의 교육을 모두 중단시킨 채 진행되지 않아도 되는 조건을 확보하는 것이다. 노동자들이 파업의 제단에 자신의 인생과 가족의 생계를 온전히 바치지 않고도 파업하는 세상이 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파기금은 그 누구도 사용할 가능성이 있는, 노동자들의 예비금고이기도 하다. 이 땅의 노동하는 사람들은 그 누구나 정리해고나 희망퇴직, 혹은 비정규직으로의 전환 등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그러니 사파기금은 바로 모든 노동하는 이들의 미래를 위한 저축이기도 한 것이다. 내가 노동하는 동안에 사파기금 조성에 나섬으로써, 이후 나의 파업권을 지킬 수 있는 보루를 미리 확보하는 것이다. 혹은 조금의 돈을 내고 이후 필요시에 큰돈으로 도움을 받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파기금은 우리 사회가 그간 무관심과 냉소속에서 배제했던 노동의 존재를 긍정하는, 노동자의 파업권을 시민권으로 긍정하는 새로운 민주주의의 시금석이 될 것이다. 노동배제적 민주주의, 노동의 사회적 고립에 대해 우리 사회가 ‘강한 부정’을 하면 할수록, 그만큼 노동자의 파업권을 긍정하는 사파기금은 성장할 것이다. 곧 사파기금의 성장사가 한국에서 노동문제의 사회적 의제화 정도를 반영하고, 이 사회의 노동연대의 바로미터가 될 것이다.

실제 기금의 조성에 있어서 사파기금은 큰 몫돈이 아니라 유명인사가 내놓는 금일봉이 아니라 노동하는 자들의 푼돈, 우리가 노동하고 받는, 피같은 노동의 댓가를 십시일반, 혹은 자신의 것 좀 덜 먹고 함께 출연하는 기금을 지향하고 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온라인에서 제안되어 풀뿌리운동으로 진행되어왔다. 지난 7월17일 ‘사회적파업기금’에 대한 최초의 제안도 페이스북을 통해서 던져졌으며, 이후 사파기금은 페이스북을 기반으로 한 켐페인 및 사회운동으로 발전해왔다. 이는 온라인 캠페인이 주로 일반민주주의 의제들을 중심으로, 즉 자유주의적 어젠다 중심으로 구성되고, 노동자들보다 자유주의적 중산층, 대학생들에 의해 주도되어왔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사실 ‘노동’문제에 대한 온라인 캠페인은 드물다. 여기에 대해 새로운 전형을 만든 것이 한진중공업 연대운동이다. 비정규직없는 세상만들기가 주축이 되어 만들었던 희망버스에 김진숙위원과 트위트리안들간의 소통이 매개체가 되었다. 희망버스가 결국 트윗을 중심으로 한 SNS 운동과 결합했다면, 사파기금은 페이스북을 기반으로 노동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하고 노동에 대한 사회적 연대를 파업연대기금으로 결집해왔다.

현재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은, 아직은 일반명사라 할 수 없고, 그자체로 앞서 말한 의미를 포함하는 자기고유성을 갖는 하나의 운동이며 운동체이다. 페북그룹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을 그 첫 근거지로 삼아 이후 트윗 및 자신의 도메인(sapa.org)를 가지며 진화해온 온라인 운동이며, 이제 차차 온-오프를 병행하기 시작한 운동이다. 하지만 사파기금은 온라인을 넘어서, SNS를 하지 않으면서도 기금을 내주는 많은 사람들까지 포괄하는, 말그대로 ‘사회적’인 운동이 되어가고 있다. 지난 7얼22일 첫 입금을 시작으로 현재 연인원 1천여명이 참가했다. 그리고 한진중공업부터 시작해 쌍용자동자, 재능교육노조, 그리고 최장기 장투(장기투쟁)사업장인 코오롱 노동자들에게 기금을 배분하였고, 1월의 장투사업장 순례에 나선 ‘희망뚜벅이’를 위한 방한물품을 제공하였다. 또한 사파기금은 노동의제를 모아서 사회적으로 알리는 역할, 그리고 노동문제를 토론하는 토론의 마당으로서의 기능도 활발하게 하고 있다. 나아가 기금조성외에도 다양한 오프라인 노동연대활동을 하기도 한다. 예컨대 지난 겨울에는 거리노숙 텐트를 하는 수많은 장투사업장 노동자들을 위해 토시를 짜주는 이른바 ‘희망토시’ 캠페인을 벌여, 많은 사람들이 직접 토시를 짜거나, 토시를 위한 실값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연대를 조직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제 사파기금은 ‘시즌 2’를 선언한 상태이다.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이 처음의 시험기를 거쳐 그 필요성을 입증한 마당에 새로이 출발할 때가 됐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최초의 제안서에 있던 표현대로, “희망버스의 문제의식을 이어 노동의 사회적 연대를 장기적으로 펼쳐가기” 위한 두번째 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 표현이 지난 2월말 제안된 일명 1만인 계좌운동, 즉 “1만명, 1만원, 월1억” 기금 조성 캠페인이다. 이 캠페인은 말그대로 1만명이 1만원(이상)의 정기계좌를 열어 월1억의 기금을 조성하자는 것이다. 노동자에 대한 사회적 연대에 1만인이 매달 동참한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 노동연대가 자리잡아간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또한 정기계좌 만들기’ 캠페인을 통해서 부정기적 기금 모금을 상시화함으로써 사파기금의 기금조성을 안정화한다는 의미도 있다. 결국 이런 과정은 쟁의기금없이 싸우면서 노동의 파업권이 형해화되어가는 노동현실에 대한 사회적 치유과정이 될 것이며, 노동과 사회가 함께 조성하는 사회적 파업기금을 제도적 장치로 만드는데 한발 더 나아가는 것이다.

-끝-

사회적파업연대기금 제안문 –> 클릭

1만명 1만원 월1억 계좌만들기 –> 클릭

작성: Young-sook Kweon 2012년 5월 7일 월요일 오전 5:38 ·

1991년 5월 6일 오늘은 한진중공업 박창수 노조위원장이 의문사한 날이다.

1991년 5월6일 새벽 4시 45분, 경기도 안양병원 뒷마당에서 한진중공업 박창수 노조위원장(1960년생)이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검찰은 노조활동에 회의를 느낀 박창수위원장이 치료받던 병원에서 투신자살했다고 발표하였다.

하지만, 당시 정황과 그의 구속경위를 보면, 그의 ‘의문사’는 안기부와 연루된 것이라는 의심을 자아내기 충분했다. 이미 우리는 바로 얼마전인 4년전인 87년 1월 박종철의 고문치사 및 그 은폐사건을 겪지 않았는가 말이다. 모두들 박종철의 의문사를 떠올렸다. 우선, 의문점은 왜 안기부 조사를 받던 그가 안양병원에 있는가 말이다. 검찰은 그가 조사도중 다쳐서 치료를 받던 중이라고 했다. 하지만 더욱 묘한 것은, 시신을 보았던 부모님의 증언에 따르면, 투신했다는 그에겐 상처도 없었고 피도 흘리고 있지 않았다. 노동자, 학생들은 이 죽음을 ‘의문사’로 규정하고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안양병원앞으로 몰려들었고 안양병원과 부산 영도 한진중공업앞에선 매일같이 치열한 시위가 벌어졌다.

더구나 그가 구속된 경위는 더욱 이 죽음을 의문사 혹은 살인으로 생각하게 만들었다. 당시 한진중공업은 ‘민주노조’로 전환하였다, 그리고 그를 이끌던 초대 위원장이 박창수이다. 박창수는 부산기계공고를 졸업하고 스물 두 살이던 1981년 8월 한진중공업의 전신인 대한조선공사(전 한진중공업)에 배관공으로 입사하였다. 그리고 1986년 도시락거부투쟁을 주도했다. 50여년 식당도 없이 탈의실과 공장 모퉁이에서 머리카락과 휴지가 섞여 나오는 도시락을 먹어온 노동자들이 “우리는 개밥을 먹을 수 없다”며 사흘 동안 도시락을 던져버렸다. 회사 쪽은 결국 나흘 만에 식당을 세워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한진중공업은 민주노조를 만들었다. 작년 85크레인에 오른 김진숙위원 역시, 당시에 한진중공업 노동자였고, 그리고 해고된 1세대 민주노조 노동자이기도 하다. 박창수와 함께 한 많은 노동조합 베테랑이 아직도 한진중공업 노조의 중심이기도 하다.

그렇게 ‘민주노조’가 결성된 한진중공업은 87년이후 역시 어용노조에서 탈피한 서울지하철과 함께 90년 12월 결성된 ‘대기업연대회의’의 핵심이기도 했다. 당시 전노협(전국노동조합협의회)에도 가입돼있던 이들 두 노조들은 다른 대기업노조들, 즉 대우노조협의회와 현대노조협의회등등으로 전노협에서 멀찍이 떨어져 자기들만의 재벌노조협의회를 구성했던 노조들을 끌어들여 ‘대기업연대회의’를 꾸린 뒤, 이어 전노협을 확대한 명실상부한 ‘제조업 민주노총’을 만들려고 했었다. 만약, 이것이 성사가 된다면, 이는 민주화이행이후 터져나온 ‘노동자대투쟁’의 성과를 가장 명확하게 조직적 결과로 만드는 것이었다. 급진적인 제조업 중앙노총의 건설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전노협을 확대한 제조업 민주노총의 결성은, 당시 노태우정권과 전경련등 자본의 입장에서는 가장 골치아픈 노동 상대자를 대면하게 되는, 최악의 시나리오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안기부가 전면에 나섰다. 안기부는 이미 대기업연대회의의 결성이전에, 끊임없이 한진중공업 노동조합을 파괴하려는 공작을 해 왔다. 그리고 구치소에 있을 때도 전노협과 대기업연대회의를 탈퇴하라며 온갖 회유, 협박을 자행하였다. 사망 전날에도 병원으로 안기부 직원이 면회와서 탈퇴공작은 계속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박창수 열사는 “전노협이 나이고, 내가 곧 전노협인데 어떻게 전노협을 탈퇴할 수 있다는 말이냐”하며 끝까지 저항했다.

결국, 1991년 2월, 경찰의 대대적인 대기업연대회의 침탈이 이뤄졌다. 그즈음 파업에 돌입한 대우조선노조에 대한 지원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수련회를 열고있던 대기업연대회의의 모임에 경찰이 덮쳐 참가 노조간부 전원을 ‘제3자개입금지’ 위반혐의로 연행하였다. 그리고 핵심인물로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어 가장 강도높은 조사를 안기부로부터 받던 중, 박창수 열사는 5월 4일 이마에 상처를 입고 안양병원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그리고 하루전에 안기부 직원과 면담하고, 이틀 뒤에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하지만 그의 죽음이후, 진상규명을 위한 싸움은 험악했다. 노태우 정권은 박창수의 부모를 협박하기도 하고, 회유하기도하였다. 그ㅡ리고 급기야 경찰은 시신을 탈취하려고 안양병원에 백골단과 전경 22개 중대를 투입, 무차별적으로 최루탄을 퍼부으며 영안실 벽을 부수고 시신을 탈취해 갔다. 그리고 일방적으로 부검을 해 버렸다.

박창수의 죽음은 바로 4월말 시위도중 경찰에 숨진 명지대생 강경대의 죽음과 맞물려, 바로 비극적인 1991년 5월투쟁의 시발이 되었다. 의문사한 박창수 위원장 죽음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투쟁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그리고 ‘폭력경찰, 살인정권’ 규탄하는, 한국의 민주화 이행의 ‘제2막’을 열겠다는 5월투쟁이 가열차게 진행되었다..

그리고 그 싸움은 강경대 박창수이후 분신 자살의 행렬을 이루며 13인의 죽음이후에 멈췄다. 당시 국무총리였던 정원식에 대한 달걀투척행위가 몰고온 사회적 반동의 기류 때문이었다..매스컴과 정권의 홍보, 그리고 중산층등 이른바 화이트칼러들의 이반 및 민주화시위에 대한 염증…

6월 29일, 그의 죽음이후 근 60일 만에 박창수위원장의 장례가 치뤄졌다. 그의 부모는 그를 양산 솥발산 공원묘지에 묻었다. 지금도 박창수 열사의 아버님은 전국의 노동시위와 집회 현장을 방문한다. 세월은 가고, 그의 이름과 그가 이루고자 한 ‘노동해방’은 갈수록 요원하지만,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오늘 무엇을 생각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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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박창수 열사의 모습

관련 글 – “20년전, ‘벽 뚫고 들어온 남자들’ 잊을 수가 없다  (오마이뉴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589494

1991년, 박창수 열사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던 안양병원 영안실을 백골단이 벽을 뚫고 들어왔다.

(이 사진을 기억하고 있는 분들, 그때의 역사를 기억하고 있는 분들이 계셨습니다)

: 박창수 열사 시신 사수 투쟁을 하던 그날 밤, 그리고 불타던 바리케이트를 한 번에 꺼버린 소방차, 벽을 부수고 시신을 탈취해가는 백골단의 모습을 보도했던 한겨레 신문 사진이 기억나는 군요…

그 사진을 기억하는 분들이 꽤 많을 겁니다. 저도 기억나는데요.

: 그날!

저는 이석행씨와 기아자동차노조에
밤늦게 있다가, 박위원장 죽었다는 연락을 받고 안양병원으로 급히 달려갔습니다,

병실엔 어머님이 거의 혼절한상태로 중얼거리며 욕을 퍼붓고 있었고 박위원장은 하얀 가운속에 누워 있었습니다,

급히 가운을 들어 보니 박위원장 이었습니다, 여기 저기 혹시나 해서 살펴보니 발 뒤굽치쪽에 퍼렇게 멍같은것이 보였습니다,

응급실에 수상한 사람들이있어 몰아내고
즉시 바리케이터를 치고 병원에 있는 소화기를 모두 모았습니다, 무기가 될만한것이 그것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3일간 대치하다가 결국은 옆방 벽면에 구멍을 내고 시신을 탈취해갔습니다, 그날이 오늘이군요
밤이 서늘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몇 번 만나지 않았지만
늘 말이 없고 과묵했었다는 기억이 납니다,
이토록 목숨바치며 이루고자했던 길이
오늘 만신창이로 환부를 드러내니
정말 아프고 또 아픔니다,

부디 영면하십시요! 박창수동지!

: 백골들이 공중부양하는 그 사진 저도 눈에 선합니다.

: 어이쿠! 벽뚫고 들어와 시신탈취해간 그 사진을 다시보게 되다니. 이거야 원 가슴이 떨려서.

: 그해 봄..최루탄으로 하늘을 뒤덮던…숨이라도 제대로 쉬어보려고 대로 옆골목으로 허우적 허우적 뛰어가는 우리 대오 저 앞쪽에 툭툭 떨어져 앞서가던 지랄탄….ㅋㅋㅋ 그 답답하던 20여년 전 봄 말이지요. ㅠ.ㅠ

: 기억이 생생합니다, 역사의 현장에 함께 있었군요….그 때, 병원에 뚫린 구멍은 메워지긴 커녕 더 커져가는 건 아닌지, 그리고 지금 노동을 탈취해간 세력은 누구일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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