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민주당 대통령경선에 나선 무소속후보 버니 샌더스가 4월9일 결국 경선 중단을 선언했다. 코로나19의 최대의 방역책으로 ‘사회적 거리두기(social distancing)’를 말하는데 이에 빗대 말하자면, “사회주의에 거리두기”라고 할 만하다.

이 말은 미국 민주당 전국위원회에서 내놓은 공식 논평에 있는 말이다. 미국 유권자들은 “사회주의에 거리두기”라는 전국적인 행동을 보였다고 톰 페레즈 민주당 전국위원회 대변인은 말했다. 그리고 (사회주의라는) “거친 생각(a wild idea)을 더이상 퍼뜨리지 않는 것이 미국에게 가장 좋은 길이라고 미국인들은 결정했다”고 말했다.눈을 의심케 하는 표현이었고 몇 번을 읽었다.

이 얼마나 역설적인 발언인가. 미국은 지금이야말로 시장의 혼돈과 무책임,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와 빈부 격차가 빚어낸 참극 속에서 사회주의가 필요한 상황인데 말이다. 공공의료의 부재, 사적 의료보험체계, 국민 수명이 70년대 이후로 계속 낮아지고 유아 사망률이 갈수록 높아가는, 그래서 기이하게도 제3세계 빈곤국가들과 사회 지표가 유사해져가는 나라. 그 정점에서 지금 코로나19 전염병이 퍼지고 있다.

코로나19가 미국의 불행이 아니라, 미국의 자본주의 체제가 코로나19앞에서 인민의 불행이다. 그리고 지금이야말로 미국은 사회주의가 필요한 국면이다. 체제로서의 사회주의는 아니더라도 사회주의적 조치가 필요한 상황이다.그래서 자본주의의 선진국들, 유럽국가들뿐 아니라 미국 역시 지금 자본주의 경제를 살리기 위해 다급하게 사회주의적 조처를 졸속 모방하고, 시장의 원칙을 말하면서도 국가의 힘과 권력을 마구 휘두르고 있다.

대표적으로 다음의 예들이다.
미국은 지금 1950년 한국전쟁때 제정했지만 사문화됐다시피했던 ‘군수물자생산법(Defense Production Act)’ 을 발동해서, 민간기업에게 코로나19 관련 인공호흡기와 마스크등 의료물품을 제조하게 하고, 국가가 강제로 징발하는 조처를 취했다. 심지어 이 법에 따라서 해외 다른 국가애서 수출하는 마스크까지 자국으로 빼돌리고 있다. 명백히 국제법 위반이다.

또 미국은 유동성 통화에 대해서 시장원칙과 상관없이 무제한의 양적 완화를 선언했다. 헬리콥터 머니를 뿌린다고 하고 국민들에게 긴급한 재난기본수당을 준다고 말하지만, 대부분의 돈은 자본주의와 기업 살리기에 사용하고 있다.

그 와중에 코로나19로 인한 재난은 이 사회의 가장 밑바닥부터 거세게 덮치고 있다. 미국의 경우 4월10일 현재 16000명이 사망했는데 시카고, 뉴욕등에서 흑인 빈민지역의 코로나19 사망율이 치솟고 있다. 가난한 이들은 코로나19에 걸렸는지도 모르고 사망하고, 코로나19 사망자로 분류되지도 않은채 스러질 것이다. 이는 남미, 아프리카, 아시아의 빈국등 전세계가 마찬가지일 것이다. 선진국이나 후진국이나, 제1세계나 3세계나 공통적으로 벌어지는 일이다. 가난한 무산자계급, 소수자, 무국적자들이야말로 코로나19앞에서 가장 위험한 상황에 놓여있다.

코로나19의 전지구적 판데믹 속에서 선진자본주의국가들은 사회주의체제로부터 모방한 중앙집권적 자원 동원과 배분체계를 통해서 자본주의 경제의 부양에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사회주의는 중앙집권적 자원배분이 다가 아니다. 그냥 헬리콥터 머니 찍어내서 뿌리면 여하튼 경기가 좋아지니 전국민이 다 좋은 것 아닌가 하는 것, 혹은 그중 얼마나 떡고물이라도 가난한 자들에게까지 미치겠지 하는게 아니라, 지금이 정말 전시경제에 준하는 재난경제 상황이라면 사회적 자원과 재원과 물자를 ‘사회주의적으로’, 사회전체의 평등의 방향에서 약자 우선으로 배당하고 배분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미국등 자본주의국가들은 자본주의를 위기에서 구출하기 위해서 사회주의로부터 배운 조처는 재빨리 실행에 옮기면서, 사회주의자들의 뜻은 “거친 생각(wild idea)”라면서 기각한다.

결국 사회주의자는 아니지만, 사회주의적 이상을 온건하게라도 주장하고 실현하자고 했던 ‘민주사회주의자(Democratic Socialist)’라는 버니 샌더스는 미국의 ‘사회주의에 거리두기’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경선포기 선언을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더많은 미국의 청년들이 이 급진적인 정치적 사고에 “감염”되어서 다음 선거는 공화당과 민주당 체제를 일소하길 바란다.”

미국과 자본주의에게 더 무서운 바이러스는 코로나19가 아니라 사회주의, 맞다.

2020. 4. 10

권영숙 (사회적파업연대기금 대표)

코로나19가 한국을 덮친지 3달째다. 긴급재난으로 인해 실물경제가 얼어붙고, 일터는 가동율이 곤두박질치고, 노동자들은 해고당하고 무급 휴가를 강요당하고 임금이 자연삭감되고 있다. 소득이 줄고 있는 가운데 저축한 돈도 얼마 없는 사람들은 코로나19보다 생계난이 더 두렵다. 이들을 위한 ‘긴급 생활비’ 지원이 필요하다. 역병이 재난이라면 말이다.
근데 대통령이 취한다는 조치가 자기 임금 30% 줄이기다. 4개월동안 대통령과 장관들이 임금을 30% 삭감하고서 받겠다는 것이다.

일단 참으로 구태스럽다.
누구는 깎을 임금이라도 있어 좋겠다만 누구는 최저임금선 아래 받는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에게 당신들의 임금 삭감분이 무슨 의미가 있나.

그리고 누가 적선해달랬나? 가난한 이들의 시민적 권리로서 주장하는 것이다. 이를 흔히 ‘사회권’이라고도 한다. 아직도 국민을 나랏님이 궁휼히 여기사 시혜받는 백성처럼 대하련가.

그리고 행여 이 조처가 이후 노동자들에게 고통 분담 운운하며 임금 동결하고 삭감하고 장시간 노동시간을 유지하기위해 미리 하는 이른바 사전 정지 작업이 아니길 바란다. (하지만)… 경총이 오늘 3일 ‘경제활력 제고와 고용․노동시장 선진화를 위한 경영계 건의’를 발표했다. 그 내용은 △기업 활력 제고를 위한 법·제도 개선 △기업 경영 안정성 확보를 위한 법·제도 개선 △노동시장 유연성 제고를 위한 법·제도 개선 △고비용·저생산성 구조 개선 △합리적인 노사관계 구축 △지속가능 사회보장체계 확립 △선진 안전시스템 구축 △경영책임의 적정성 확보와 형벌 개선 등이다.

여하튼 그러니 당장 대통령과 행정부는 제대로 행정권력을 동원하여 행정적인 일을 하라. 행정적으로 실효성 있는 사회경제적 조처를 취하라. 그게 정치권력이 해야할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착한 사마리아인 흉내내는 쇼같은 일은 그만두고 말이다.

하지만 나는 ‘재난기본소득’이라는 이름의 모든 국민에게 정액 얼마를 지급하는 식의 ‘보편적 기본소득(universal basic income)’에 대해선 반대한다. 지금 재난기본소득을 청원하는 교수연구자들 연서명이 돌고 있다. 난 그 청원에 서명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문장 첫머리가 “모든 국민에게 재난기본소득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왜 모든 국민이 기본소득으로 동일 액수의 긴급소득을 받아야할까? 지금 필요한 것은 재난 앞에서 가장 확연하게 드러난 재난 불평등이 인간 참극으로 일어나지 않도록 국가가 비상 개입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정확히 재난의 계급성을 이해하는데서 출발해야한다. 모든 국민이 아니라, 최저임금선 이하의 노동자들, 자영업자중 하위 20% 소득을 대상으로 하여야한다.

그리고 이 지점 역시 중요한데 모든 “국민”이 아니라, 이 땅에 사는 모든 “인간”에게 생존기금을 지급하여야한다. 기본소득은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매우 배제적이고 선별적인 복지이다. 사람들은 보편적 기본소득이야말로 보편적이고 탈배제적이라고 하지만, 전지구적 전염병 앞에서 “국민”됨이라는 자격조건은 역설적으로 얼마나 배제적인가.

그러므로 지금 지급되어야하는 것은 재난기본소득이 아니라,

첫째, 생존유지가 버거운 하층 소득민에게 긴급한 구호기금으로서,

둘째, 헌법상 행복추구권과 건강할 권리를 가진 이들의 당연한 사회권으로서,

그리고 셋째 “국민”이라는 배제적인 보편기본소득이 아니라 이 땅에 코로나19로 인해 생존권이 위협에 처한 사회 구성원 모두를 대상으로 한

긴급재난생활비로서 주어져야한다.

그리고 이는 정확히 기본소득과는 구분되는 지점이다.

2020. 3.23

권영숙(사회적파업연대기금 대표)

경자년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올해 새해는 편하게 덕담을 하기엔 주변의 정세가 참으로 복잡다단합니다만, 비관속에서 낙관을 꿈꾸는 태도가 가장 필요한 한 해가 될 것이라고 봅니다.

연대자 여러분 부디 새해에 강건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사회적 연대운동에 더 많은 이들이 함께 해주시길 바랍니다.

때로 생면부지의 사람관계보다 못한 것이 바로 기금을 조성하고 전하는 연대자와 투쟁 당사자의 관계일 수 있습니다. 돈을 주고 받는 관계가 사회적 연대란 이름으로 불리는 것은 생각보다 위험한 활동입니다. 연대운동으로 하기에는 더 깊은 숙려와 신중함이 필요합니다. 그리하여 이런 방식의 사회적 연대를 가볍게 보거나 불편하게 보기도 합니다. 더구나 투쟁과 연대에 대해서 당사자주의와 주관적이고 개별적인 연대를 넘어서 하나의 동맹으로 모이자라고 제안한다면 그 지향은 더 예민하게 받아들여지기도 합니다.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의 이름은 그래서 처음부터 쉽지 않은 과제를 스스로 세운 셈입니다.

운동에 돈은 필요합니다. 당연합니다. 투쟁이 돈 없어서 죽기도 하고, 돈 없어서 무릎을 꿇기도 하고, 돈 없어 투쟁을 억울하게 포기합니다. 그러니 돈은 투쟁이기도 합니다. “노동이 돈앞에 스러지지 않는 사회적 연대”라는 표어는 그렇게 나왔습니다.

처음에 사회적 파업기금을 사회적 연대로 모으자는 제안을 8년여전에 할 때의 소박한 생각은 이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운동은 돈만으로 안됩니다. 아니 돈은 운동에서 최소한의 조건입니다. 돈으로 돈을 이길 수 있을까요? 아니요. 돈으로 돈을, 자본을, 자본주의를 이길 수 없습니다. 또 돈이 없어서 운동이 투쟁이 승리를 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런듯 보이지만 그것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이 결정적이지 않습니다. 돈은 그 결과일 뿐입니다.

자본과 국가가 ‘돈으로 하는 통제’를 통해서 노동의 손발을 묶을 때, 그들이 박살내는 것은 단지 파업기금 없이 투쟁하는 노동자들뿐만이 아니라 하나의 단일한 목소리를 내는 노동계급운동입니다. 자본이 돈으로 가하는 탄압을 금지하자는 운동이 지지부진한 것도 바로 노동의 목소리와 투쟁이 제각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노동이 각자의 목소리를 내고 각자의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단일한 대오와 구호를 통해서 사회적 총파업으로 노동세상을 앞당겨야합니다. 그 뜻이 바로 “사회적 파업에 사회적 연대”입니다.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은 지난 8년간 노동이 돈앞에 스러지지 않는 사회적 연대, 노동의 사회적 파업에 사회적 연대를 구축하려고 했습니다. 그 과정은 말이 씨가 되어 행동이 되고 실천이 된 과정이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한계를 느끼고 깨닫기도 했습니다. 돈으로 돈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파업으로 돈을 무너뜨려야한다는 사실. 사회적 파업에 사회적 연대를 모아서, 하나의 사회적 ‘동맹’을 구축해야한다는 사실은 더욱 명확해보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턱도 없이 부족합니다. 어쩌면 구멍난 독에 물붓기같은 것이 노동자들의 개별적인 투쟁입니다. 연대자들은 주관적으로 자신들이 마음을 내고 싶을 때 연대하고, 노동자들은 투쟁후에 연대운동으로 다시 모이지 않습니다. 아마도 사파기금이 발족한 지난 8년간 연대자들과 투쟁하는 노동자들이 개별적인 투쟁이후 온전히 결집하고 하나의 대오로 결집할 수 있었다면 이미 큰 대군이 되었을 것입니다.

결과에 많이 지쳤습니다. 지치고 실망하지만 포기할 수 없습니다. 사파기금이 힘을 내고자 합니다. 힘을 내서 나아가고자 합니다. 요청합니다. 함께 해왔던 이들은 더욱 가까이 다가와주십시오. 옆에서 가만히 지켜만보던 이들은 한발 안으로 다가와주십시오. 기금을 지원받았던 노동자들은 파업기금을 환원해주십시오. 사파기금을 함께 키우고 조성해주십시오. 같이 가는 길이 지금 당장은 새로운 길은 아니지만, 함께 모색하는 길이 되길 바랍니다.

이제 지속성을 고민합니다. 기금 지원후의 투쟁은 과연 어떻게 함께 할 수 있을까? 여러 고민들을 품고자 합니다. 그 뜻으로 올해에는 원점에서 고민하고 실천하려고 합니다.

노동이 돈앞에 스러지지 않는 사회적 연대와 사회적 파업을 향하여.

노동해방을 향하여.

그 길에서 하나가 되길 바랍니다.

새해 건투하시고 건강하십시오!

연대로 만나겠습니다.

2020. 01. 28

사회적파업연대기금 대표 권영숙

온통 맘이 돌처럼 딱딱해진다. 죽음이 너무 아프고, 죽어야하는 현실이 너무 자명해서, 죽음의 반복이 너무 필연적이어서, 부고를 듣는 마음들은 더 딱딱해지고 더 불편해진다. 사실 ‘사회’란 그 성원들이 매일 매일 만들어 내고 있는, 매일 매일 재구성하는 형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매일 만들어지는 사회를 거대한 벽처럼 암담하게 느꼈을 사람들을 아프게 떠올린다. 그래서 이 사회를 구성하는데 매일 가담하는 ‘우리’는 마음이 또 불편해진다.

걸그룹 가수 설리에 이어 구하라의 죽음. 남자친구의 데이트 폭력과 악질 댓글로 힘들었던 구하라의 죽음. 그리고 구하라의 전 남자친구가 저지른 죄들 중에서 다 인정하는데 성범죄만 무죄로 판결했다는 법원 기사. 구하라의 죽음으로 새삼 세간의 입질에 오른 이 판결은. 근데 지난 8월의 판결이다. 아 그랬구나. 이게 어떤 의미인지 확 다가온다. 8월의 이 판결이후 그는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을까. 구하라의 진짜 피해는 법으로 그리고 실체적으로 인정되지 않았던 것이다. 피해자가 있는데 피해는 없었던 것이다. 법원은 가해자에게 면죄부를 준 것이다. 건설업자 윤중천의 별장에서 소위 ‘성접대’를 받았다는 혐의를 받았던 법무차관 지명자인 검사 김학의처럼 말이다.

매일 매일 구성되어 우리 앞에 버티고 있는 이 난공불락의 사회에 대해서, 그리고 이 사회에 절망하여 일어났을 수다한 비슷한 죽음들 앞에서, 이 사회를 구성하는 ‘우리’라는 공허한 주체는 할 말을 잃게 된다. 아니 누군가를 향해 주먹질을 해야할텐데, 과연 누구를 무엇을 향해야할까? 이 죽음의 경우는 또 어떤가. 애초의 가해자 때문에 구하라가 죽었을까? 판사의 판결 때문에 구하라가 죽었을까? 과연 누가 그를 죽였을까? 이 죽음들은 왜 반복되고, 그 죽음의 원인은 왜 방치되고 있을까?

또 작년부터 올해까지 ‘1672명’의 노동자들이 일터에서 사라진 죽음이 있다. 그 죽음들은 한날 한시의 죽음이 아니라, 일상적으로 방치된 죽음들이고, 구조적으로 발생한 죽음들이다. 가해자의 인정도 가해사실의 인정도 없이, 무참한 목숨들이 일터에서 사라지고 있다(최근 <경향신문> 지상에 올려진 산업재해 사망자 명단은 1200명이다. 하지만 실제 한국의 산업재해 사고와 죽음은 이보다 훨씬 더 많다. 산업재해의 20%만이 산업재해 보험 처리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산업재해 사망사고도 그만큼 은폐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노동부 통계에 따르더라도 직업병을 포함한 산업재해로 일터에서 해마다 2천명, 하루 3명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대체로 매일 5-6명 사망이라고 본다).

이들 노동자들은 또 누가 죽였을까? 무엇이 죽였을까? 살기 위해서 노동력을 팔고 일터에서 일하던 사람들을 다시는 집에 돌아올 수 없게 만든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리고 이 질문 역시 마찬가지로 우리는 과연 하나의 답에 이를 수 있을까? 이 죽음들의 가해자들이 과연 누구인가에 대해서 과연 우리 사회 성원들은 같은 답을 내릴 수 있을까? 죽음에 대해 애통해하고 마음의 가책을 느낀다고 해서 반드시 같은 답을 염두에 두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구하라의 죽음도 그렇고 김용균의 죽음도 그렇고, 수많은 구하라들, 그리고 김용균들의 죽음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답을 찾지 못한 채 죽음들은 늘어만 가고, 제어되지 않은 채 사회적 타살은 반복된다.

그러므로 죽음들 앞에서 슬프고 애통하다는 것은 때로 악어의 눈물같이 느껴진다. 슬프고 애통하고 가책을 느끼는 것은, 가장 손쉽고 어쩌면 가장 값싼 연대의 표현방법이다. 이렇게 일상화된 죽음들을 막기 위해서는 연민과 가책에 연유하는 연대의 감정과 의식으로는 한참 부족하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애도와 가책은 나를 편하게 하는 나 중심의 연대일 뿐이다. 왜냐하면 문제는 바로 그 ‘일상’이라는 괴물, 내가 영위하는 현실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매일 매일 우리 구성원들이 만들고 있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저 죽음들을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죽음의 소식을 들을 때 그 순간뿐인 미안함과 눈물이 아니라, 세상의 구조에 대항할 때에만 이 죽음들의 반복을 막을 수 있다. 이 죽음들은 일상적이고 구조적인 죽음이기 때문이다. 구하라와 설리의 죽음은 걸그룹 아이돌의 사생활 보호는 관심없이 자본의 이익을 추구하거나, 대중의 찰나적인 호기심과 여성에 대한 ‘마녀사냥’에 영합하는 사회가 공모하여 일어난 죽음들이다. 그것은 단지 여성혐오만도 자본주의의 이윤추구만도 아닌, 병합된 문제들이 얽혀서, 반대쪽에 손가락질만 하면서 계속 반복된다.

일터에서 사라지는 노동자들을 죽이는 것도 바로 그 돈, 자본이다. 돈 때문에 안전수칙을 어기고, 돈 아끼려고 안전장비를 갖추지 않고, 그리고 자본으로 맺어진 원하청 사슬, 비정규직화와 죽음의 외주화가 노동자들을 죽이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그 악마의 자본주의 앞에서 침묵하고,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사회, 그 자본 앞에 굴복하고 법도 행정집행도 팽개치는 국가가 공범이다.

그러니 어떻게 이것을 한 순간의 눈물과 한숨으로 닦아주고 원상회복하고, 혹은 다시 이런 일을 일어나지 않게 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이제 우리에겐 연민과 속죄, 그것으로 빚어내는 순간적이고 휘발적이고 철저히 나로부터 시작하는 연대가 아니라, 그 죽음들 자체에 대한 인식에 기반한 사회적 의지와 사회적 힘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자본의 구조에 맞서는 힘이 필요하다. 노동을 짓밟고 일어서는 국가와 노동을 배제하는 정치적 민주주의에 대해 일어서는 힘이 필요하다. 속죄와 가책에 의한 동정과 연민의 의식이 아니라 종국에는 함께 그 길로 합쳐지는, 그래서 세상을 바꾸는 길을 만들어가는 사회적 동맹이 필요하다. 그런 굳건한 사회적 동맹, 정치적 동맹의 구축이야말로, 그래서 그 동맹세력이 더이상 물러나지 않는 힘으로 자본주의 세상을 제압하고, 자본과 교묘히 결합된 비인간적인 일상의 구조를 바꾸고, 자본과 결탁한 정치를 뿌리로부터 전복시키는 것, 그것이 바로 일상적이고 구조적인 죽음들과 사회적 타살을 막는 길이다.

구하라 설리의 죽음이든. 노동자 1672명의 죽음이든,
어쩌면 그 죽음들의 원인이 하나의 뿌리라는 각성이 연대의 시작이다.

2019. 12. 06
권영숙 (사회적파업연대기금 대표)

톨게이트 투쟁에 있어서 대법원은 노동자 투쟁의 정당성을 확정해주는 판결을 한 것도, 그 판결을 해주는 주체도 아닙니다.

오히려 법원은 4년이란 긴 시간동안 노동자들을 고통스러운 시간 싸움에 들게 하면서 자본의 편에 섰습니다. 그리고 이제서야 대법원의 직접고용 판결이 나왔지만, 그 판결조차 언제나 판례가 되지 못하고 ‘케이스’, 즉 개별 소송 사건으로 취급되는 한국 법현실에서, 법원의 판결은 노동자에 대한 사법적 통제기법이 되기도 합니다.

즉 노동의제는 희석시키고, 노동자들의 요구는 소송 사례로 제한하면서, 노동자들을 갈수록 법원의 판결에 묶어 두려는, 노동자에 대한 ‘사법적 통제’의 수단이 됩니다. 노동자 투쟁은 이런 사법적 통제 자체를 분쇄해야합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 톨게이트 노동자들이 감행하는 투쟁이 그런 투쟁입니다. 그래서 이 투쟁은 옳다, 우리가 옳다라고 크게 외치고 외쳐야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 지점을 번번이 놓친 것이 지난 몇년간 비정규투쟁의 한계였습니다. 지금까지 비정규투쟁은 투쟁마다 종국에는 법률투쟁이 됐습니다. 똑같은 처지의 노동이고 같은 요구로 투쟁하는 노동자임에도 불구하고, 불법파견 소송을 하고 근로자지위 소송을 하는 노동자 개개인들의 판결 사례로 한정됐습니다. 같은 사업장내에서도 노동자들은 이 판결로 일희일비하고, 판결에 따라 서로 다른 처지가 되었습니다. 결국엔 종이쪽 판결문을 투쟁보다 더 의지하고, 금과옥조처럼 읖조리다, 그 판결이 지명하는 순서대로 정규직으로 전환되기도 했습니다.

정리해고 투쟁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게 하여 판결이 지정하는 순서대로 원직 복직도 하고 정규직 전환을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투쟁의 과정은 정리해고 자체의 철폐, 비정규직 자체의 완전 철폐와는 갈수록 멀어졌습니다. 왜냐하면 노동자들이 법률 소송에 기대는 순간 그것은 실정법, 즉 현존하는 법에 호소하는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노동자들은 파견근로를 늘리기 위해 만든, 허울만 좋은 ‘파견근로자보호에 관한 법률’에 근거해서 불법파견임을 입증하는 소송을 해야 했습닌다. 비정규직 철폐투쟁은 실제상 정규직 공정임을 이유로 한, ‘진짜 사장’ 찾아내기 투쟁이 되고 정규직 전환투쟁이 됐습니다.

한마디로 노동자들이 정리해고 분쇄를 외칠수록, 법과 판결이 끼어들면, 그 순간 그것은 ‘원직복직’ 투쟁이 되어버렸습니다.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철폐를 외칠수록, 법과 소송에 의존하면, 어느 순간 그것은 ‘정규직 전환’ 혹은 ‘불법파견’ 유무죄의 문제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런 가운데 비정규직은 다양한 변종으로 더욱 공고화됐습니다. 정리해고조항은 철폐되지 않았습니다.

지금 톨게이트 수납소 노동자들 1500명이 자회사 고용을 거부하면서 투쟁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305명이 이번 대법원 판결에서 승소한 해당자라고 합니다. 그러자 고용주인 한국도로공사는 소송 당사자 만을 직접고용하겠다는 뻔한 술책을 내놨고, 노동자들은 지금 그를 거부하는 투쟁을 계속 하고 있습니다.

같은 처지의 노동자들이고 대법원 판결이 판례로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왜 모든 노동자들에게 적용하지 않는지를 문제삼으며, 법과 판결의 한계를 계급적 단결투쟁으로 넘어서고 돌파하려고 합니다. 소송당사자만이 아닌 모든 ‘같은 처지’의 노동자들이 함께 쟁취하는 결과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톨게이트 노동자들의 투쟁이 의미있는 이유, 그 투쟁이 옳은 이유입니다.

그렇습니다. 투쟁하는 노동자들은 결코 법과 판결이 손을 들어주었기 때문에 우리가 옳았다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옳았고, 우리가 투쟁했기 때문에 법원이 판결할 수 밖에 없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톨게이트 노동자들의 요구는 대법원 판결때문에 옳은 것이 아니라, 이미 옳았습니다.

그리고 노동자들은 “법대로! 해라”라고 외쳐서는 안됩니다. ‘법대로’는 합법주의의 덫에 걸려들기 십상입니다. 종국에는 언젠가 노동자의 투쟁에 무서운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것입니다. 너희가 법대로 하라고 요구하지 않았는가라며 자본과 국가, 법원은 함께 법으로 노동자들을 억압하고 통제할 것입니다.

이제 다르게 외쳐야 합니다. 노동자들은 자본과 권력에게, “너희들이 만든 법 너희들이 지켜라”라고 말해야합니다. 노동자가 “법대로”를 말할때, 그것은 바로 너희 자본과 국가에게 하는 말임을 분명히 해야합니다. “너희가 만든 법 너희가 지켜라. 그리고 우리의 법은 우리가 만들겠다”, 이렇게 말입니다.

노동자투쟁이 법에 의지한 투쟁이 아니라, 법을 향한 투쟁으로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정리해고 철폐, 비정규직 완전 철폐를 향하여!

– 권영숙 (사회적파업연대기금 대표)

[2018년 신년인사]

무술년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올해 새해 인사들은 어느 해보다 더 밝고, 활기차고, 덕담이 넘칩니다. 새로운 365일이 또 한번 시작된다는 사실이야말로 새로운 희망을 품게 하는 큰 계기인가 봅니다. 새해에도 연대자 여러분 복 많이 지으시고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하지만 정치정세와 노동을 둘러싼 환경을 생각하면 올해는 그리 만만한 해가 아닐 것 같습니다. 노동 배제적인 민주주의는 ‘노동존중’이라는 화려한 수사만 남긴채 그대로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87년 민주화 이행이후 한국의 정치적 민주주의가 미완이었고, 불철저했고, 우파의 집권과 헤게모니를 허용했던 첫번째 이유는 그것이 민생 부재, 노동 부재의 민주주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회적 소수자들에 대한 사회적 진보에서 한발짝도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민주주의의 환멸이 민주주의에 대한 반동과 우파 정권의 집권을 가져왔다고 저는 강조해왔습니다.

절대권력은 스스로 붕괴한다는 말처럼, 이명박근혜 정권은 스스로 붕괴의 씨를 뿌렸고, 촛불은 그것을 끝내 태워버렸습니다. 그 결과 한국의 민주주의는 다시 ‘회복’되었고, 이른바 ‘민주정부’가 다시 들어섰습니다. 하지만 과연 그 정부가 87년이후의 허약했고 편협했던 민주주의를 극복했는지는 의문입니다. 촛불과 그 촛불의 운동 지도부 역시 그 한계를 벗어나서,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사회혁명’이 가능하도록 계기점을 만들었는지 회의스럽습니다.

모든 것은 다시 시작입니다. 아니 모든 것은 원점에서 시작됩니다. 아니 모든 것은 같아졌지만 같지 않은 위치에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영화로도 만들어진 ‘1987년’은 과연 영광일지, ‘미완의 혁명’일지,’ 아니면 또하나의 ‘수동혁명’일지라는 질문은, 곧바로 2017년 촛불을 향한 비수같은 질문이기도 합니다.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은 이 땅 민주주의의 ‘노동배제’에 대해서 문제제기하고, 노동의 사회적 고립을 연대로 뚫고 나아가면서, 노동의 ‘희망’을 모으겠다는 제안으로 지난 2011년 시작되었습니다. 그동안 숨차게 달려왔고, 이제 7년을 바라보면서 조금 지치기도 합니다. 연대는 사라지지는 않지만 고만고만하게 이뤄지고 있고, 조직노동의 계급적인 단결은 갈수록 자본의 갈라치기 앞에서 분열과 각자도생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연대와 투쟁의 이중주로 노동이 스스로 해방되는 길을 만들어가는 것, 그것이 사실은 유일한 ‘희망’ 임이 다시 분명해집니다. 나만을 위한 투쟁이 아니라 만인을 위한 투쟁, 나의 투쟁이 모두의 투쟁임을 깨달을 때 연대와 투쟁이 함께 하는 승리의 기틀을 잡는다는 사실도 명확히 깨달았을 뿐입니다. 그 깨달음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빈손입니다. 희망보다는 절망을, 단결보다는 분열을, 진정성보다는 동요를, 방향성보다는 혼돈을 더 많이 지켜보게 될 것같습니다.

하지만 ‘희망’이라는 단어에 왠지 거부감을 가졌던, 그리고 한국의 노동현실은 우리에게 이보다 더한 절망을 요구한다고, 절망속에서 차라리 버텨나갈 힘을 찾아야한다고 봤던 저같은 사람이 ‘희망’이라는 단어를 입에 글에 올리기 시작했듯이, 그것에 대해서 다시 고민하는 중요한 한해가 될 것이라고 봅니다.

다시 한번 생각합니다,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이 과연 무엇이고 어떤 존재가 되어야하는지. 누구 말대로 사파기금의 확산 정도가 이 사회 노동연대의 바로미터가 될수도 있겠지요. 사회적 파업이 무엇인지, 노동의 사회적 연대가 어떠해야하는지, 그 내용을 채우고 그 실천이 목표치에 이를 때, 아마 이 사회는 한발자국 성큼 나아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혼돈과 동요속에서 뚜렷해지는 발자국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실패속에서 포기를 멈출 수 있는 동력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모든 과정에서, 경험 한조각이라도 여러분과 함께 할 수 있어서 고마웠습니다.

그리고 올한해 사회적파업연대기금과 함께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시대가 불투명할수록 더욱 투명해지는 정신,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그런 건강한 정신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새해, 무조건 강건하시길 바랍니다.
서로 힘을 북돋우는 한 해가 되길 바랍니다.

2018. 1. 3
사회적파업연대기금 대표
권영숙 드림

다사다산했던 壬辰年이 끝나고 丙申年 새해가 내일 시작됩니다.

희망버스의 성과를 이어받아 노동의 파업권이 돈의 압박에 무력해지고 노동자들이 목숨을 끊어야하는 비참한 노동현실을 조금이라도 바꿔보자는 제안으로 시작한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이 벌써 5년째 접어들었습니다.

사파기금은 특히 돈이 모이는대로, 쌓아두지 않고, 전액을 현장 지원하는 기금입니다.
주로 장기투쟁사업장과 돈의 압박에 시달리는 비정규 노동자들의 파업 및 생계기금으로 지원하면서 어느덧 지원 횟수는 50회를 넘어섰습니다. 더불어 노동에 대한 문제의식을 키우기 위한 사파포럼을 꾸준히 열어왔고, 현장 연대의 기회를 늘리기 위해 ‘사파동행’과 ‘작은 희망버스’를 작년부터 시작했습니다.

이제 사파기금은 노동자들에게 자본의 금전적 탄압속에서 단비같은 존재, 그리고 투쟁의 소방수같은 존재라고 불립니다. 이 모두가 사파기금과 함께 노동을 외면하지 않고 연대해온 여러분의 관심으로 인해 가능했습니다. 함께 해주신 연대자 여러분! 고맙습니다.

올해도 노동법 개악으로 노동의 현실은 더욱 벼랑끝이고 선거바람에 노동자들의 외로운 목소리는 더욱 묻힐 듯합니다. 사파기금의 존재는 노동자들에게 중요한 버팀목이 될 것입니다. 노동의 희망을 밝히고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들어가는데 계속 함께 해주시길 바랍니다.

여러분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사회적파업연대기금
대표 권영숙 드림

2016.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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