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연대기금’으로 연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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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러스는 평등하지만 재난은 평등하지 않다. 코로나19의 경제적 타격은 ‘노동재난’이 되고 있다. 일방적인 해고, 무급휴직, 실업 대란이 노동의 가장 약한 고리인 비정규, 영세사업장 노동자를 거세게 덮쳤다. 하지만 한국의 취업 노동자 2736만 명 중 고용보험 가입자는 1380만 명으로 전체의 절반에 그친다. 또 680만 명은 고용유지지원금을 받을 수 없고, 특수고용노동자 220만 명 대부분은 아예 4대 보험 대상이 아니다. 근로기준법상 노동권이 유보된 영세사업장(5명 미만) 노동자, 근로기준법상 노동자성을 부인당하는 비정규직 노동자, 그리고 아예 권리 바깥에 있는 이주노동자가 지금 헌법상의 노동권과 최소한의 노동복지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이런 가운데 몰아치는 해고 광풍은 코로나19보다 더 무서운 사회적 죽음일 것이다. 권리와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에게 코로나19는 감염되지 않아도 이미 생존 위기가 되고 있다. 그리고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할 수 없는 위험노동을 해야 하는 노동자는 감염병에 가장 심각하게 노출돼왔다. 그래서 코로나19는 불평등한 사회적 재난인 동시에 ‘노동재난’이다.

1월20일 첫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온 뒤 5개월 동안 경기는 얼어붙고 정리해고와 무급휴직, 실업이 매달 기록을 경신한다. 지금, 긴급재난지원금이 당연히 긴급하다. 하지만 코로나19는 누구나 걸릴 수 있는 전염병이지만, 누구에게나 똑같이 긴급한 재난인가는 의문이다. 정부는 전 국민 긴급재난지원금을 지급하기로 결정했고, 한 달 만에 지급을 마쳤다. 미국·프랑스·캐나다 등 여러 국가가 긴급 재난력을 따져서 선별지급을 택했는데, 한국은 소득을 불문하고 전 국민에게 긴급재난지원금을 지급했다. 긴급재난지원금인데, 정작 긴급성의 문제는 지원 기준에서 배제됐다. 긴급재난지원금은 정말 긴급한 코로나19 재난민, 즉 ‘재난 난민’에게 주어져야 하고 재난 약자에게 더 많은 지원을 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다. 또 이주노동자, 노숙인 등이 배제됐다.

그래서 긴급재난지원금을 사회적 재난연대기금으로 환원, 조성하는 운동이 필요하다고 본다. 소비에만 머물지 말고 코로나19 재난에서 가장 변방의 약자를 위한 재난연대기금으로 환원, 조성하는 캠페인을 제안한다. ‘코로나19 노동재난연대기금’은 코로나19 노동재난을 가장 심각하게 겪는 영세사업장 노동자, 비정규노동자, 이주노동자, 코로나19 국제연대 활동가 재난기금으로 쓰일 예정이다.

권영숙 사회적파업연대기금 대표

*코로나19노동재난연대기금 참여 방법
1. 링크 신청: vo.la/0TZ0
2. 직접 이체: 국민은행 012501-04-230247 사회적파업연대기금
주관: 사회적파업연대기금(sapafund.org)

[코로나19노동재난연대기금 이어쓰기] ‘노동’의 이름으로 연대해야 한다

안지연 울산 노동운동단체 활동

사회적파업연대기금에서 코로나19의 사회적 재난속에서 더욱 변방에 몰린 노동 약자들을 지원 연대하는 ‘코로나19노동재난연대기금’ 조성에 나섰다. 코로나19노동재난연대기금의 제안 취지를 소개하고, 이어 기금 제안에 동참하고 나선 각계 각층 다양한 참가자들이 각자의 위치와 시선으로 코로나19 팬데믹과 노동재난연대기금에 대한 생각들을 연대의 글이어쓰기로 연속 게재하기로 한다.
(연대의 글 이어쓰기는 프레시안에 연속 게재되었습니다. 프레시안 기사 보러가기)

많은 이들의 지적처럼, 코로나19로 불평등은 더욱 깊어지고 일상에서 존재하던 차별과 배제, 사회적 모순들은 그 민낯을 드러내고 있다. 대규모 감염병사태에 맞닥뜨리며 작동된 혐오와 배제의 정치, 폐쇄병동 집단감염으로부터 드러난 시설장애인의 처참한 실상, 노숙인과 결식아동 무료급식 중단과 마스크를 못 구해 외출조차 힘든 쪽방촌 주민 등 생존위협으로 이어진 빈곤문제, 언택트 시대에 콜센터, 택배 등 ‘커넥트’ 노동자들이 감염병에 가장 취약한 아이러니, 코로나 예방은 사치일 만큼 여전히 먹고살기 위해 물류센터 앞에 줄 서야하는 투잡, 쓰리잡, 초단기 알바로 내몰린 사람들.

한편에선 ‘사회적 거리두기’가 강력히 강제됐지만, 다른 한편에선 공장과 기업들은 평소처럼 팽팽 돌아갔다. 그나마 사무직 중 일부 정규직은 다행히 재택근무를 할 수 있었지만, 다수 노동자들은 거리두기를 선택할 수 없었다. 서비스직 노동자들은 잘리거나 감염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현실에 처했고, 전 세계 자동차공장 중 예방을 위한 셧다운을 하지 않은 나라는 한국이 유일했듯이, 생산직은 ‘사회적 거리두기’와 관계없는 존재인 듯했다.

무엇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임금삭감, 무급휴직, 집단해고를 걷잡을 수 없이 맞고 있다. 불안정한 고용형태의 노동자일수록, 영세/이주/여성 노동자 등 구조적 차별에 놓인 노동자일수록 ‘노동재난 종합세트’를 직격타로 맞았다. 가장 민주적으로 방역을 잘한 나라라는 자부심 속에 노동자와 가난한 이에게 닥친 재난은 안타까운 개인의 불운으로 여겨지는 듯하다. 감염의 두려움보다 더 무서운 현실이다.

한편, ‘민주적인’ 방역조치 속에서 일상적인 감시와 통제를 당연시하고, 불가피한 긴급함을 이유로 개인정보가 아웃팅되어 모범 확진자인지 나쁜 전파자인지 평가대상이 되고, 순식간에 국가가 나의 행적을 알아낼 정도의 시스템임을 새삼 깨달으면서 또 다른 공포를 느끼기도 했다.

그런데 가장 무서운 점은, (코로나 확산 초기) 운동진영조차도 당장의 불안과 공포로 인해 나의 안전을 우선시하는 분위기, 개인위생만 철저히 강조하며 사회적 약자를 위한 시스템이 얼마나 부실한지 말하지 않는 상황 그 자체였다. 각자도생, 내가 이런 사회에서 살고 있구나, 를 새삼 깨달으며 무거운 씁쓸함을 느꼈다.

그래서일까. 사회적 문제에 ‘집단적’ 저항과 비판이 줄어든 만큼, 위기로 인한 고통은 어쩔 수 없다는 패배감도 커지는 듯하다. 현장에선, 코로나 경제위기 겁박까지 더해져 어차피 구조조정은 막을 수 없고 내 살길은 내가 알아서 찾아야 한다는 개인주의, 노동자가 먼저 양보하고 생산성·품질향상에 협조해야 그나마 자신의 임금과 고용을 지킬 수 있다는 실리주의가 더욱 팽배해졌다.

재난에 처하지 않은 이들에게 긴급하지 않게 지원된 돈

전국민 긴급재난지원금이 지급됐다. 주변에 어디에 쓸 거냐 물어봤다. 당장 생계위협이 없는 대공장 노동자들이지만, 대다수는 여전히 팍팍한 살림살이 형편이라 늘 쓰던 생활비로 나간다고 답한다. 간혹 젊은 사람들이나 어린 자녀가 있는 사람들은 평소 사지 못했던 옷 등을 사겠다고 한다. 그러면서 한 마디씩 말한다. “주는 건 좋지만 사실 이거 없다고 굶어 죽는 것도 아닌데, 차라리 당장 어렵고 절박한 사람들에게 더 많이 지원하는 게 낫지 않냐?”

재난에 처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정부가 주는 지원금은 사실상 ‘공돈’으로 여겨졌다. 무엇보다 진짜 재난에 처한 사람들을 위한 정책이라면, 왜 이주민, 노숙인은 배제될까? 최소한의 생계를 해결하기에 왜 이리도 턱없이 부족할까? 사실은, 재난당한 이들과 관계없이 ‘경기부양책’으로 지출하는 돈임을 다들 알고 있다. 이미 기업에 우선적으로 200조라는 천문학적 금액을 투여한 바 있듯이, 기업과 자본을 위한 정책이 바탕에 깔려있다.

그래서 코로나 이전부터 이미 세계적 경제위기 지표가 확인되던 상태에서 일시적 소비 진작을 위해 돈을 푸는 게 과연 경기회복에 도움이 될는지 의문과 별개로, 노동자를 위한 정책 없이, 특히 대규모 해고를 방관하며 기업지원에 힘 쏟고 있는 사실은, 코로나 이후 국면 또한 노동자와 가난한 이들에게 어떠한 재앙이 닥칠지 살 떨리게 예감케 한다.

코로나 전부터 고통받던 노동자, 코로나를 이유로 더 양보하란다

포스트코로나 시대를 말한다. 그런데 지금 제기된 노동정책을 보며 놀랐다. 박근혜정부 시절 회자되던 노동개악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한창 코로나 비상이던 지난 3월, 경총은 위기극복을 위해 △ 법인세·상속세 인하, △ 탄력적·선택적 근로시간제 확대, △ 정리해고요건 완화, △ 쟁의행위(사업장점거) 금지, △ 대체근로허용, △ 사용자 처벌금지 등 40개의 반노동법안 입법을 요구했다. 5월 들어선, 탄력근로제 등 노동시간 유연화관련 뉴스가 나왔다. 여기에 발맞춰 5월 21일 문재인 대통령은 “정부와 기업이 한 배를 탔다, 지금의 위기는 고통분담을 통한 사회적 대타협을 이룰 중요한 기회”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나아가 6월 고용노동부는 △ 임금인상 자제, △ 파업 자제, △ 임금체계 개편(개악)을 요구하며 나섰다.

자본은 코로나국면에선 코로나 때문에 임금을 깎고 해고할 수밖에 없다더니, 코로나가 진정된 후에도 코로나로 인한 경제위기 때문에 구조조정과 노동유연화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하다하다 자동차회사는 ‘보복소비’를 대비해 △ 주52시간 규제 면제, △ 파견⋅대체근로 허용, △ 부당노동행위 적용 제외, △ 특별연장근로 대폭 허용 등 온갖 규제를 풀자고 말한다. 물론 이 과정에서 노동조합이 생산성 협조에 나서라며 고통분담, 노사상생도 어김없이 요구한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노총은 ‘모든 해고 금지’를 요구하며 원포인트 노사정교섭에 나서고 있다. 그런데 전면적인 투쟁을 조직하는데 우선하지 않고 대화의 틀 안에서 과연 모든 해고가 금지되도록 자본가들을 설득하거나 압박할 수 있을까? 고용보험 확대 대신 노동시간 유연화를 요구하는 저들의 의도에 맞서, 대화를 통해 쟁취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노동’의 이름으로 대응 흐름을 만들어야 한다

의료노동자, 돌봄노동자, 택배·물류노동자 등 노동력을 “갈아서” 방역했다. 집단감염이 발생하고 나서야, 감염에 취약한 열악한 노동조건에 처한 노동자들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코로나 확산국면에도 생산을 전혀 멈추지 않았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길 만큼, 노동자의 안전보다 생산을 중시하는 사회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심지어 투쟁현장, 문중원열사 빈소 침탈, 아시아나 비정규직 농성장 침탈, 소성리 사드배치 공권력 대규모 투입을 보며, 코로나19 방역대상에 투쟁하는 사람들은 존재하지 않음도 느꼈다.

노동의 존재, 저항하며 목소리를 내는 이들의 존재, 가난한 이들의 존재를 집단적으로 드러내지 않으면, 향후 닥칠 경제위기를 빌미로 한 더 큰 공격 앞에 스러질 수밖에 없다. 코로나 팬데믹 앞에 이 사회의 대응을 보며 “이건 아닌데”라고 느꼈던 사람들부터 문제를 제기하고 대응하는 흐름을 만들어야 한다. 곳곳에서 목소리를 내며 싸우는 이들이 각기 고립되지 않도록 함께하는 사회적 연대흐름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이런 대응 중 하나로, ‘노동재난연대기금’ 조성에 크게 공감했다. 단지 얼마간의 돈을 기부하자는 의미가 아니다. 감춰진 노동의 존재를 드러내고 노동의 입장으로, 계급적 관점에서 사회적 연대를 조직하는 것, 요즘 소위 진영논리가 판을 치는데, 진짜 ‘진영’이 되어야 할 노동자집단의 목소리를 조직해 내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투쟁과 저항없는 연대기금은 연대가 아니다

빠듯한 형편에 노동재난연대기금에 동참하며 자신의 생계비를 보태시는 분들을 보며, 많은 걸 느낀다. 쉽지 않을 결정일 것이다. 다들 넉넉하지 못한 형편이다. 그래서 금액이 얼마가 되냐 문제보다 어느 정도가 됐든 사회적 연대를 만들어내는 일에 함께 했으면 한다.

그래서 코로나19노동재난연대기금 조성에 대공장 노동자들이 꼭 함께 했으면 한다. 상대적으로 고연봉을 받으니 어렵고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줘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투쟁을 양보한 대가로 지원하자는 의미는 더더욱 아니다. 공장 밖에서 벌어지는 사회적 재난과 불평등 문제에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실천을 보탰으면 좋겠다는 취지다. 나아가 사회적 연대흐름을 만드는데 민주노조운동이 조직적인 역할을 가져야 한다는 바람에서다. 투쟁과 실천, 비판과 저항 없는 연대기금은 사회적 연대가 아니다.

* 코로나19 재난의 불평등에 맞서는 사회적연대! 코로나19노동재난연대기금 참여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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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0일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은 코로나19 비정규직 긴급행동의 ‘죽음과 해고를 멈추는 40리길 걷기’에 함께 했습니다. 5월1일 메이데이때 유일한 노동자 전국집회였던 코로나19 긴급대응에 이어 두번째입니다.

사파기금은 코로나19를 ‘노동재난’이라고 규정하고 #코로나19노동재난연대기금을 조성중입니다. 코로나19노동재난속에서 최소한의 안전판도 없이 스러져가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투쟁을 다짐하며 6월 20일 서울 도심에서 행진을 했습니다. 낮 최고기온이 35도를 기록한 폭염 속에 노동자 연대자등 300여 명이 잠실 쿠팡 본사에서 아시아나KO 해고노동자들의 종각역 농성장까지 13Km를 걸었습니다.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은 깃발을 높이 들고 행진 대오에 함께했습니다. 지난 메이데이 집회때 깃발을 든 이후 행진중에 사파 깃발을 들고 행진한 것은 처음이기도 합니다. 전날 세상을 떠난 사회적파업연대기금 연대자인 소설가 조해일 선생의 빈소를 지키러 가느라 행진 첫 구간인 잠실역에서 건대입구 역까지 걷는데 그쳤지만,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지하는 마음은 충분히 전달됐을 것입니다. 이날 사파기금은 행진을 조직한 비정규직이제그만(코로나19비정규직긴급행동)에 5백만원 기금 지원을 긴급결정하였습니다. 이에 대해선 별도로 <기금지원공지>를 냅니다.

오후 3시 잠실역 쿠팡 본사 앞에서 집회를 열고, 오후4시부터 행진에 나선 대오는 오후 7시 종각역에 도착해 마무리 집회를 갖고 해산했습니다. 직원의 98%가 비정규직인 쿠팡의 물류센터 집단감염과 쿠팡 식당 노동자의 청소 중 사망에서 드러나듯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코로나19의 첫번째 희생양이 되고 있습니다. 고용유지지원금 신청조차 하지 않고 희망퇴직과 무기한 휴직 중 택일하라는 사측의 강요를 거부했다고 해고당한 아시아나KO 비정규노동자들 또한 코로나19가 폭로하는 우리 사회 불평등과 차별의 민낯입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고통과 눈물은 그들만의 것이 아닙니다. 코로나19는 우리 사회 어느 곳도 안전하지 않음을, 누군가의 희생 위에 지속할 수 있는 안녕은 없음을 깨닫게 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투쟁은 곧 우리 모두의 투쟁입니다.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은 사회적 파업에 사회적 연대로 함께 할 것입니다.

2020. 6. 22
사회적파업연대기금

[코로나19노동재난연대기금 이어쓰기]

민중가수 임정득

사회적파업연대기금에서 코로나19의 사회적 재난속에서 더욱 변방에 몰린 노동 약자들을 지원 연대하는 ‘코로나19노동재난연대기금’ 조성에 나섰다. 코로나19노동재난연대기금의 제안 취지를 소개하고, 이어 기금 제안에 동참하고 나선 각계 각층 다양한 참가자들이 각자의 위치와 시선으로 코로나19 팬데믹과 노동재난연대기금에 대한 생각들을 연대의 글이어쓰기로 연속 게재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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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활동으로 밥벌이를 하는 문화노동자로서, ‘코로나19노동재난연대기금’ 모금에 함께 연대하는 것은 마음에 많은 부담이 있었다. 코로나19의 확산으로 공연 활동을 몇 달 동안 할 수 없어 경제적으로, 심리적으로 여유를 가지기 어려운 나날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늘 불안정한 일이었지만, 코로나19라는 재난 앞에서 더욱더 많은 고민과 질문을 하게 된다.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비슷한 생각을 하는 이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아니 훨씬 어려운 현실에 직면해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뉴스에서는 대한민국의 코로나19 대처능력이 얼마나 훌륭한지 연일 다루고 있다. 전국민이 긴급재난지원금 얼마를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해, 그 재난지원금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그러나 코로나19의 최전선에서 일한 의료계 노동자의 임금은 체불되고, 계약직 택배노동자가 화장실에서 쓰러져 목숨을 잃었으며, 아시아나항공 비정규직 노동자가 대량 해고를 당하고, 항의 농성장은 폭력으로 철거당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이 순간에도 노동 현장에서 임금 삭감, 해고가 일어나고 있다. 실업대란이 현실화될 것임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노동재난’에 대해서는 어떤 정책도 없어 보인다. 앞으로 코로나19는 더 불평등한 방식으로 사람들을 벼랑 끝으로 내몰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본다. 사람의 몸을 갈아 넣는 노동이 당연시 여겨지고 해고는 어쩔 수 없는 일이며, 감염자를 적대시하는 것, 재난의 불평등에 비명 지르는 사람들에게 재갈을 물리는 일이 과연 누구를 위한 일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코로나19 재난 앞에서 대한민국이 유지되는 것은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본에 엄청난 공적 자금이 투여되고 있지만, 노동자들은 임금이 삭감되고 일자리에서 쫒겨난다. 재난지원금이 절실히 필요한 사람에게 정작 재난지원금은 역할을 하지 못한다. 실업대란이 현실화되고 있음에도 노동 재난에 대해서는 어떠한 정책도 없어 보인다.

사회적 거리 두기’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미 사회에서 격리되어 감금되어 코로나로 죽어간 장애인들이 있다. 하루 벌어 하루를 살아가야 하는 노동자들, 해고를 당하여 거리에서 투쟁할 수밖에 없는 노동자들이 있다. 코로나보다 지금 당장 생계와 삶이 박탈된 두려움이 더 큰 사람들이 있다.
‘국가의 지침을 넘어서는 사회 안의 연대’의 목소리를 만들어내고 모아내야 할 시기가 바로 지금이라고 생각한다.

“코로나19 재난이 사회의 불평등을 드러낸 사회적 재난이고 노동재난이라는데 동의하는 이들은 함께 해 주시길 바랍니다. 연대는 부유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것을 내놓는 연대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소비와 기부가 아닌 연대행동으로 모아주세요.”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의 제안 속에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 코로나19 재난의 불평등에 맞서는 사회적연대! 코로나19노동재난연대기금 참여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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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파업연대기금에서 코로나19의 사회적 재난속에서 더욱 변방에 몰린 노동 약자들을 지원 연대하는 ‘코로나19노동재난연대기금’ 조성에 나섰다. 코로나19노동재난연대기금의 제안 취지를 소개하고, 이어 기금 제안에 동참하고 나선 각계 각층 다양한 참가자들이 각자의 위치와 시선으로 코로나19 팬데믹과 노동재난연대기금에 대한 생각들을 연대의 글이어쓰기로 연속 게재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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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저주하노라

소설가 최웅식

혁명가는 자본주의의 패잔병이 되어버렸다
체 게바라가 찍힌 티셔츠만 입고 혁명을 소비해버리고
나에게 동지라고 부르는 사람을 외면해버리고
누가 죽으면 이름도 모른 채 고인의 명복만 빈다
나를 저주하노라

코로나 지원금이 카드사에 충전되었다
여파가 없는 우리들은 고기 파티를 열고
마스크를 쓰고 코로나의 동선만 파악한다
나만 걸리지 않으면 된다는 생각을 하는
나를 저주하노라

마네킹의 옷을 털다가 콜록거리는 영세 사업자의 월세는
손님이 없어도 똑같고
방과 후 선생님의 수입은 비정규직이라서 0원
로켓처럼 집으로 날아가는 쿠팡맨은
집처럼 큰 배달에 박혀 짐칸에서 쓰러져 죽고
이주 노동자들의 국적은 한국이 아니라서
마스크도, 재난기금도 산소처럼 공급받지 못하고

무너지는 자들을 받쳐보겠다는 사회적파업연대기금
에 국가에서 받은 돈의 일부를 보냈지만
재난 상황에 가장 먼저 그들을 패대기치는
자본주의와의 싸움에 패배한 나,를
저주하노라

손가락에 그 첫 번째 꽃이
피어난다, 그때

2020.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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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노동재난연대기금 이어쓰기] 재난 약자를 위한 기본소득이 필요하다

배성윤 직장인

사회적파업연대기금에서 코로나19의 사회적 재난속에서 더욱 변방에 몰린 노동 약자들을 지원 연대하는 ‘코로나19노동재난연대기금’ 조성에 나섰다. 코로나19노동재난연대기금의 제안 취지를 소개하고, 이어 기금 제안에 동참하고 나선 각계 각층 다양한 참가자들이 각자의 위치와 시선으로 코로나19 팬데믹과 노동재난연대기금에 대한 생각들을 연대의 글이어쓰기로 연속 게재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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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난 두달 동안 코로나19와 관련해서 “바이러스는 평등하지만, 고통은 평등하지 않다”는, 화두를 안고 살아왔다.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의 ‘코로나19노동재난연대기금’ 제안서의 기본 출발점이다. 한마디로 ‘노동없는 민주주의’는 ‘노동의 불평등’으로 심화되었고, 우리 사회는 민주화이행이후 갈수록 더욱 불평등한 사회가 되었다. 그 결과, 코로나19 바이러스 앞에서 노동자 민중이 받는 고통 또한 매우 불평등한 현실이다.
사실 몇 년전에 ‘기본소득’ 개념을 알았고 그 매력에 푹 빠졌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 페이스북 ‘기본소득네트워크’ 그룹에도 가입하고 그랬었는데, 2년 전에 탈퇴했다. 일부 좌파 진영에서 한국 사회의 비효율적인 선별복지를 비판하며 보편복지를 주장했었지만, 정부는 굳이 선별복지를 고집해 왔다.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재난 속에 고통은 평등하지 않은 현실이다. 현 정부와 일부 지자체는 오히려 ‘보편기본소득’으로 여겨지기도 하는 ‘전국민긴급재난지원금’을 들고 나와서는 이를 통해서 ‘소비’진작을 통한 경제활성화를 의도하고 있다.
2년 전에 기본소득에서 보았던 것이, 바로 지금 정부가 자본을 위해서 기본소득이라는 이름으로 추진하는 모습이었다. 긴급재난 앞에서도, 긴급재난지원금이라고 이름을 붙이면서도, 경기 부양책의 일환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는 것. 자본주의 경제를 살리는 것이 바로 기본소득이기도 하다는 것. 하지만 이렇게 되면 운동에서 계급적 관점은 내다 버리고, 자본주의의 모순을 가려주고, 자본순환에 기여하는 기본소득이 되는 것이다. 한국 사회 불평등의 구조를 건드리지 못하고 오히려 희석시켜버리는 기본소득론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

전세계적으로 이미 가난한 자들은 속수무책으로 스러져 가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한 노동재난에 취약계층은 또 얼마나 죽어나갈지 짐작하기 두려울 정도다. 이런 불평등 앞에서 우리는 ‘기본소득’ 배급을 이야기하며 재난의 현실에 ‘눈가리고아웅’하며, 자본의 순환에 기여할 소비의 기대감에 젖어있다. 기본소득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어떤 소비를 할 것인지 고민하는 게 전부다.
지금은 오히려 재난을 직접적으로 겪고 있는 이들에 대해 선별적이고 직접적인 생존 지원이 필요한 시기이다. 국가가 이렇게 하지 않겠다면, 우리가 해야 한다. 그 수단이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이라고 생각한다. 노동에 대한 사회적 연대를 해왔던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이기에, 불평등한 노동현실로 인한 취약계층의 사람들에게 밀어닥친 노동재난 앞에서 ‘노동재난연대기금’으로 직접 연대하고 함께 다른 세상을 꿈꾸고 만들어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많이들 이야기한다. 코로나19 이후 세상은 달라질 것이라고. 코로나19 이후 세상은 거지같이 기본소득 몇 십만 원을 구걸하는 세상일지도 모른다. 지금 노령연금으로 살아가는 노인들처럼, 최저임금으로 살아가는 n포세대처럼.
기본소득이 혁명적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일인당 월 최소 50만 원 이상은 되어야 할 것이다. 이도 사실은 자본주의 틀을 유지하면서는 생활소득이 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이런 혁명적 의미를 가지는 기본소득을 얻기 위해서는 혁명적 상황을 이루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이런 혁명적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연대하고 투쟁해서 급진적인 변화가 가능한 상황을 쟁취해내야 할 것이다. 즉 기본소득은 정책 또는 방법이 아니라, 투쟁의 결과로 얻어내는 성과일 것이다. 하지만 낭만주의자들은 성과가 방법이 될 수 있다고, 길이 될 수 있다고, 달콤하게 호도하고 있다.

지금 기본소득을 소비하는 것에 만족하며 ‘거지’근성에 젖어들면 노동계급과 이 사회의 민중은 결국 ‘거지’꼴이 될 것이다. 지금 달콤한 기본소득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 피땀 흘려 번 돈을 나누어서 직접 연대하겠다는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의 연대 정신을 수평적으로 확대해야 한다. 기본소득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받은 돈이 실은 노동의 불평등으로 착취당해왔던 취약계층에게 선별적이고 직접적으로 지원되어야 할 돈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래서 기본소득으로 받은 돈을 직접 연대에 사용할 것을 제안하는 흐름에 동참한다. 전국민재난지원금이라는 이름으로 받은 기본소득, 그 돈은 우리 모두가 동시에, 직업유무, 직업의 사다리, 소득과 재산에 상관없이 받아야 할 돈이 아니다. ‘연대기금으로 내놓아 달라’고 외치고 싶다. 그 돈을 모아, 그 힘을 모아, 직접 연대하고 직접 투쟁하고, 그리하여 코로나19 이후 다른 세상을 꿈꾸어 보고 만들어 보자고 말이다.

* 코로나19 재난의 불평등에 맞서는 사회적연대! 코로나19노동재난연대기금 참여방법
1. 링크 신청: https://vo.la/0TZ0
2. 직접 이체: 국민은행 012501-04-230247 사회적파업연대기금
주관: 사회적파업연대기금 (sapafund@gmail.com)

[코로나19노동재난연대기금 이어쓰기] 한국 방역모델에 실종된 사회적 연대 살리는 길

권영숙 사회적파업연대기금 대표

사회적파업연대기금에서 코로나19의 사회적 재난속에서 더욱 변방에 몰린 노동 약자들을 지원 연대하는 ‘코로나19노동재난연대기금’ 조성에 나섰다. 코로나19노동재난연대기금의 제안 취지를 소개하고, 이어 기금 제안에 동참하고 나선 각계 각층 다양한 참가자들이 각자의 위치와 시선으로 코로나19 팬데믹과 노동재난연대기금에 대한 생각들을 연대의 글이어쓰기로 연속 게재하기로 한다.
(연대의 글 이어쓰기는 프레시안에 연속 게재되었습니다. 프레시안 기사 바로가기)

전염병은 모든 사람들을 연결하지만 동시에 고립시킵니다. 전염병은 시공간을 넘어서 전파되면서 동시에 격리와 감금, 수용시설을 만듭니다. 전염병 앞에서 우리 모두는 감염의 가능성을 안고 있지만 그 재난의 파급력은 집단, 인종, 계급, 국가에 따라 다릅니다. 반면 코로나19가 전지구 전염병(팬데믹)으로 돌고 있지만 그 어느 나라 방역의 성공도 안심하거나 확신할 수 없습니다. 이렇듯 전염병 앞에서 우리는 상호의존적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재난의 사회적 성격과 불평등한 위력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전염병 방지의 전략이 되는 순간, 우리는 사회적 고립과 연대의 갈림길을 경험합니다. 각자도생의 신자유주의는 전염병의 퇴치 전략일 수 없음이 판명되었습니다. 해외 사례가 증명하듯이 적자생존과 자연도태의 신자유주의적 처방인 ‘집단면역’ 전략은 전염병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정확한 확진과 검사와 예방은 사회적 거리두기에 의해 완성되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인 한국은 코로나19에 맞서는 강력한 모델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모델에 가장 결여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사회적 연대입니다.

K-방역모델에서 결여된 사회적 연대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 저녁 8시만 되면 터져나오던 연대의 박수 소리, 한국에선 터져나오지 않았습니다. 한국은 각자의 집에서 감염되지 않기 위한 최선의 조건을 유지하는데 집중하였습니다. 이탈리아와 스페인에서 코로나19에 맞서는 노동자들의 피와 땀, 한숨은 고스란히 방송 전파를 타고 알려졌습니다. 또 감염자들은 사회에 나쁜 바이러스를 전염시키는 죄인이 아니라 누구나 감염될 수 있는 전염병의 불운한 피해자이자 재난의 당사자로서 당당히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발언을 했습니다. 사회는 연대로 그들을 안았습니다. 과연 한국은 연대의 행동이 얼마나 가시화되었던가요?

이 사회는 철저히 건강한 사람의 입장에서, 비 감염자의 입장에서 어떻게 하면 전염병이 걸리지 않을 것인가에 시종일관 집중하였습니다. 안타깝게도 이 사회에서 감염자들은 숨고 그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감염자들은 죄인 취급을 받았고 직장에서 해고당하기도 했으며, 감염 환자로서의 고통과 경험을 사회적으로 나누고 공감과 위로를 받지 못했습니다. 코로나19 최전선에서 싸우던 의료진들과 평소 한국 병원들에서 ‘태움 문화’로 불리는 고강도 노동시간을 견뎌야했던 간호사들은 그렇게 체화된 기율과 노동으로 코로나19의 한국 모델을 유지하는 전사가 되었습니다. 강한 노동규율과 장시간 노동이 K-모델에 핵심이었던 속성 대량 확진검사를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노동은 당연시되었습니다. 또 유럽 등에서 만연했던 사재기가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스스로 전염병에 노출되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노동을 했던 택배 노동자들이 있었기 때문이지만 그들은 과로로 죽기도 하고 감염돼 죽기도 했습니다. 또 봉쇄(락다운)없이 사회가 작동하도록 만든 수많은 서비스 노동자들, 돌봄 노동자들, 제조업 노동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 모두의 ‘그림자노동’ 이 있었기에 한국 사회의 방역모델은 성공적으로 효과를 발휘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사회는 이들에게 어떤 감사를 표하고 연대했던가요?

코로나19는 사회적 재난이자 노동재난이다

코로나19의 경제적 타격이 거세게 몰아치는 지금, 코로나19는 ‘노동재난’이 되고 있습니다. 일방적인 해고, 무급휴직, 실업 대란이 노동의 가장 약한 고리인 비정규, 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을 거세게 덮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의 취업 노동자 2736만 명 가운데 고용보험 가입 노동자는 1380만 명으로 전체의 54.8%에 불과합니다. 또 680만 명은 고용유지 지원금을 받을 수 없고, 특수고용 노동자 220만 명은 아예 4대 보험 대상이 아닙니다. 근로기준법상 노동권이 유보된 영세사업장 노동자들, 근로기준법상 노동자성을 부인당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 그리고 아예 권리 외부에 있는 이주 노동자들이 지금 헌법상의 노동권과 최소한의 노동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여있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몰아치고 있는 해고 광풍은 코로나19보다 더 무서운 사회적 학살일 것입니다. 권리와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에게 코로나19는 전염병에 걸리지 않아도 이미 생존의 위기입니다. 그리고 사회적 거리두기가 허용되지 않은 채 위험노동을 해야 했던 노동자들은 전염병에 가장 심각하게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코로나19는 불평등한 사회적 재난인 동시에 ‘노동재난’입니다.

기부나 소비가 아닌 노동재난연대기금 조성을

코로나19 앞에서 긴급재난기금이 긴급히 필요합니다! 코로나19는 누구나 걸릴 수 있는 전염병이라는 점에서 평등하지만, 과연 누구에게나 똑같이 재난이며 또 긴급한 재난인가는 의문입니다. 하지만 정부는 모든 국민에게 긴급재난지원금을 지급하기로 했습니다. 즉 긴급성의 문제는 지원 기준에서 배제되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재난 앞에서 가장 긴급한 지원이 필요한 재난 난민들에게 불평등한 것입니다. 긴급재난지원금은 긴급한 재난난민들에게 주어져야 하고 재난의 약자들에게 더 많은 지원이 이뤄져야 하는데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이주노동자들, 노숙인들 등은 아예 재난지원금 대상에서 배제되었습니다. 이제 전국민 긴급재난지원금을 ‘공돈’처럼 소비하지 말고 코로나19 재난의 가장 변방의 약자를 위한 재난연대기금으로 환원, 조성하는 캠페인을 제안합니다. 국가로부터 전국민이 받게 되는 전국민 긴급재난지원금을 일회적인 가처분소득으로 사용하지 말고, 사회적 노동 약자와 민중을 위한 노동재난연대기금으로 조성하자고 제안합니다.

하지만 이 운동은 자선이나 시혜, 혹은 기부가 아니라 노동재난에 대한 사회적 연대이길 바랍니다. 전염병 속에서도 한국 사회가 봉쇄없이 작동한 것은 고용불안과 차별에 시달리면서도 정규직 등 비교적 안전한 이들이 외면한 영역에서 헌신한 노동 약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코로나19 이후 가장 먼저 사라지고 스러지고 치워지고 있습니다. 그들이 쓰러지지 않게 하기 위한 사회적 연대가 필요합니다. 연대는 원조나 시혜가 아니라 그들이 받아야할 정당한 몫을 돌려주는 것입니다.사회적파업연대기금이 새로운 연대의 기회를 만들고자 합니다. 사회적파업연대기금(사파기금)은 2011년 희망버스 가운데, 노동이 돈앞에 스러지지 않는 사회적 연대운동으로 출발하여, 노동자의 파업기금을 사회적 연대로 조성하며 꾸준히 연대운동을 해왔습니다. 투쟁사업장 노동자들, 이주노동자, 장애인운동등 47개 단체에 75차례 기금 지원과 물품 지원 및 다양한 연대활동을 펼쳐왔습니다.

9년 전 희망버스 도상에서 불평등한 노동현실에 맞서 노동의 시민권을 사회적 연대로 지지하기 위해 사파기금을 만들었듯이, 이제 코로나19의 사회적 재난 앞에서 더욱 불평등한 위치에 놓인 노동 약자들을 지원하기 위한 ‘코로나19 노동재난연대기금’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이 기금은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의 목적성 기금으로 설치하여, 3개월 기한으로 조성하는 모금운동입니다. 3개월간의 기금 조성기간에 많은 이들이 함께 하길 바랍니다. 조성한 기금은 코로나19 노동재난을 가장 심각하게 겪고 있는 영세사업장 노동자, 비정규노동자, 이주노동자 및 코로나19 국제연대, 활동가 재난기금을 위해 사용합니다.기금 조성액의 규모에 따라 기금 목적과 대상을 더욱 넓힐 수 있습니다. 희망을 모으는 ‘코로나19 노동재난연대기금’ 조성에 적극 동참해주세요.

사회적 거리두기에서 사회적 연대로

코로나19 전염병의 긴 터널을 지나는 지금이말로 K-모델을 주도했던 ‘국가의 지침을 넘어서는 사회 안의 연대’의 목소리와 공동행동이 필요합니다. 지금이야말로 개인들의 각자도생의 신자유주의가 아닌, 그리고 재난을 빙자하여 자본주의 이윤만을 추구하는 재난자본주의가 아닌 사회적 재난연대가 필요합니다. 신자유주의를 넘어서는 길은 전염병 앞에서 각자도생이 아니라 재난의 불평등에 맞서는 사회적 연대입니다. 그것이 바로 코로나19노동재난연대기금입니다.

* 코로나19 재난의 불평등에 맞서는 사회적연대! 코로나19노동재난연대기금 참여방법
1. 링크 신청: vo.la/0TZ0
2. 직접 이체: 국민은행 012501-04-230247 사회적파업연대기금
주관: 사회적파업연대기금 (sapafund@gmail.com)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은 4월28일 ‘코로나19 노동재난연대기금’ 조성 제안서를 올리고, 5월1일부터 기금을 조성해왔습니다. 사파기금과 동일 원칙에 따라 코로나19노동재난연대기금 조성성과를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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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첫달에 총 177건, 액수로는 2733만원이 모였습니다. 참여방법으로는 해피나눔 (vo.la/0TZ0) 66건, 통장 직접이체 111건입니다. 결제방법으로 일시납과 3개월 시한 CMS 중 CMS 건은 입금된 액수만 포함했으므로, 실약정 총액은 더 많습니다.

돈은 꾸준히 모였습니다. 5월1일 가장 많은 액수가 모였고, 이후 기복이 있었지만 꾸준히 참여자들이 늘고 있으며, 최근에는 액수는 줄었지만 참여자 수는 더욱 늘어나고있습니다. 기존의 사파기금 연대자들도 참여하지만, 새로운 이들의 참여가 많습니다. 고무적입니다. 그동안 기금조성위원회의 헌신적인 노력, 연대자들의 권유, 언론보도로 알려진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참여자들에게 확인 겸 인사 문자를 개별 발송하고있습니다만. 다시 한번 함께 해주신 이들께 반갑고 환영한다는 인사 드립니다.

사실 상황은 녹록치 않았습니다 기금 조성 시작 직후 터진 서울 이태원 발 지역감염사태는 큰 타격이었습니다. 코로나19의 공포와 위험에서 어느정도 벗어나야 연대에 대한 마음을 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정의연의 후원금 논란은 더 고약했습니다. 많은 사회단체들을 힘들게 하고 있고, 코로나19 노동재난연대기금 조성에 빨간 불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코로나19가 재난의 불평등을 낱낱이 드러내는 사회적 재난이며, 무엇보다 노동재난이라는 현실은, 눈으로 계속 확인되었습니다. #코로나19노동재난연대기금을 조성해야할 확실한 이유입니다. 또 한국은 코로나19에 맞서는 강력한 모델이 되었지만 그 모델에 가장 결여된 것은 바로 사회적 연대”임도 분명해보입니다. 대표적으로 첫 사망자를 낸 1월20일이후 4개월반이 지나서야 택배노동자들과 물류센터등의 노동조건에 언론과 사회가 주목합니다. 근데 그 이유가 바로 물류센터 노동자가 확진자로 판명되어 사망했기 때문입니다. 이 자체가 한국 방역모델의 그림자이자, 사회적 연대의 결핍, 그리고 노동재난의 성격을 다 드러내고 있다고 봅니다.

코로나19 긴급재난지원금 신청율이 거의 100%에 육박했고 내일이면 카드신청은 종료합니다. 지금이야말로 이 돈에 대해서 생각해볼 기회입니다. 과연 이 돈은 누구를 위하여 사용되어야할지, 어떻게 사용하면 좋을지. #코로나재난연대기금 조성은 5월 한달로 끝나지 않습니다. 6월, 7월 두달동안 꾸준히 조성하겠습니다. 잊지 마세요.

조성된 기금은 코로나19 재난 속에서 존재가 지워진 자들이 스스로 자신의 안전과 생명을 지키고,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몫을 찾도록 연대하는데 먼저 쓰일 것입니다. 그들이 스스로 자신을 유지하고 힘을 갖추도록 사회적 지지와 엄호가 필요합니다. 재난 속에서 권리와 복지의 사각지대에 있는 영세사업장 비정규직, 이주노동자와 국제연대, 활동가 재난기금으로 만들겠습니다. 조성액이 더 늘어나야 더 많은 연대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일 먼저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듣는 자리를 가지려고 합니다. 코로나19를 어떻게 겪고 경험했는지 이들의 목소리로 직접 청취하고, 어떻게 대처하고 연대하고 함께 해나갈 것인가를 토론하도록 하겠습니다. 제안서에 썼듯이 재난속에서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모습은 보이지 않았던” 이들의 목소리를 듣겠습니다. 감염자, 돌봄노동자, 의료노동자들, 그리고 락다운없이 이 사회를 작동하도록 만든 택배노동자들, 물류노동자들, 제조 노동자들. 그리고 재난속에서 차별과 혐오의 대상이 되었던 이주노동자들, 활동가들과의 공개 집담회를 6월말부터 순차적으로 열 계획입니다.

기금조성에 함께 한 연대자 여러분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합니다. 기금에 돈만 내는게 아니라 함께 연대행동을 구상하고 함께 만들어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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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림장
1. 직접 통장이체하신 연대자들의 전화번호 연락처가 없습니다. 사파기금(sapafund@gmail.com)으로 전화번호 보내주세요. 집담회등 기금 연대 소식을 전하겠습니다.
2. CMS 6월 신청자들은 2달간 분납 이체해주십시오.혹 그 이상 하고 싶은 이는 따로 알려주십시오. 개별 맞춤 가능합니다.
3. 기부금 연말정산에 대한 문의에 대하여: 사파기금은 연대자들의 정보 보호와 기금 운영의 ‘독립성’을 유지하기 위해 기획재정부에 제출해야하는 정치활동금지 서약서를 내지 않기로 결정한 원칙을 준수해왔습니다. 연말 기부금 공제 절차를 열어두면 더 많은 기금을 조성할 수 있지만, 아직 이 원칙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양해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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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로나19 재난의 불평등에 맞서는 사회적연대!
참여방법, 어렵지 않아요!
1. 링크 신청: vo.la/0TZ0
2. 직접 이체: 국민은행 012501-04-230247 사회적파업연대기금

주관: 사회적파업연대기금 (sapafund@gmail.com)

미국 경찰 흑인살해 항의시위와 코로나19 계급투쟁
– ‘제국’(The Empire)은 무너졌다. 그리고 미국(The State)의 재발견

[사파논평] 권영숙 (사회적파업연대기금 대표, 사회학자)

미국에서 퍼져가는 저항시위를 ‘폭동’이라고 보거나 ‘인종’갈등의 폭발로 바라보는 것은 일면적이다. 이것은 코비드 저항시위라고 봐야한다. 그리고 코로나19 팬데믹의 국면에서 인종의 문제와 계급의 문제가 교차하고 중첩해서 벌어지는 시위라고 봐야한다.

1. “다시 백인이 위대해질 나라”라는 문구가 적힌 모자를 쓰고 다닌 미국 미네아폴리스 백인경찰이 5월25일 대낮에 비무장 흑인 시민을 죽였다. 흑인들 중심으로 5월26일 시작된 시위는 사흘만에 미국 전역으로 불꽃처럼 번져 5월 31일 현재 11개 주와 25개 시에서 야간통행금지령이 내려졌고 8개 주와 워싱턴에서 주방위군이 동원됐다. 이 일이 벌어진 미네소타주는 흑인 비율이 높다. 미네아폴리스의 ‘쌍둥이 시’이자 미네소타 주도인 세인트 폴의 시장은 흑인이다. 그리고 검찰총장도 흑인이다. 5월 30일 내가 시청하던 CNN TV에는 이들이 라이브 기자회견을 번갈아 하면서 메시지를 던졌다. 정작 미네아폴리스의 민주당 소속 백인 시장은 보이지 않았다. 흑인인 세인트폴 시장, 흑인인 검찰총장이 나와서 흑인을 타겟으로 한 경찰의 폭력에 ‘유감’을 표하면서 ‘법질서 회복’을 강조하였다. 그들은 “일부가 정당한 문제제기를 ‘폭력’과 무질서’로 몰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것은 어떻게 봐도 적절하지 않았다. 경찰이 무참하게 민간인을 살해한 행위가 도화선인 상황에서, 이런 발언은 하지 말았어야했다. 하지만 언제나 미국의 ‘흑인 폭동’이 그렇듯이 권력의 근처에 있는 흑인들이 나와서 ‘진화’에 나섰다. 참으로 흔한 모습이다.미국의 ‘인종’시위의 양상은 대부분 이렇다. 백인 경찰이 흑인을 ‘프로파일링'(표적삼기)하여 길거리나 가게등에서 체포하려 하고, 그 과정에서 죽여버린다. 그 옆에는 대부분 흑인 경찰이 있다. 그리고 흑인들을 중심으로 분위기가 들끓고 자생적인 시위가 벌어지다가 밤이 되면 약탈 방화가 일어난다. 하루 이틀후에 ‘지역의 명망가‘ 흑인들(대체로 목사들과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나와서 옳은 말을 하면서 분위기를 진정시키고, 폭력시위와 선량한 ’흑인 코뮤니티‘를 갈라치기 한다. 시위대는 더욱 폭도화하고 이것들은 결국 사회운동론적으로 말하면 비이성적인 ‘군중(mob)’의 ‘폭동'(riot)으로 분류된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렇게 끝나는 것이 ’흔하디 흔한‘ 미국의 흑인시위의 결말이다.

2.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하고 또한 흑인들의 인종폭동의 경과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미국의 인종갈등은 단지 인종갈등이 아니라 계급갈등이라는 점이다. 즉 소외된 하층민의 분노의 폭발이고, 그 소외된 하층민들중에는 대체로 흑인들이 많다. 하지만 흑인들 일부는 지배질서안에 엘리트로도 편입돼있고, 지역의 ‘유지’ 명망가들이기도 하다. 특히 미국 전역의 경찰중에 흑인들은 어디나 있다. 그리고 경찰의 흑인 살해 시점에도 그 현장에도 흑인 경찰은 있다.흑인 경찰이 옆에서 방조하거나 거들 때도 있다. 우리는 그런 장면들을 수도 없이 미국 언론 영상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흑인이 죽고, 흑인들이 백인 경찰폭력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며 분위기가 험악해지면 또 흑인들이 나와서 말한다. 흑인시장, 흑인 경찰서장, 흑인 교수, 흑인 언론인등등. 백인경찰에 의한 흑인 살해사건만큼, 전국적으로 흑인들이 언론에 주목받는 자리에 나오는 일도 없을 것이다. 온통 어디선가 흑인들이 나와서 발언대에 선다.
그렇다면 이건 과연 ‘인종 갈등’인건가? 흑백 갈등인건가? 백인에 의한 흑인의 살해인건가? 저 흑인들은 무엇이고, 또 이 흑인들은 무엇인가? 미국에서 흑인은 더 이상 하나가 아니다. 그리고 지배질서 안에 기득권층으로 편입된 흑인들은 ‘백인우월주의체제’를 지탱하는 중요한 인적 자원이기도 하다(또한 흑인 자체가 한 ’인종(race)‘이 아니다. 복합적인 다인종군이 미국에선 ’흑인(the black)’이라는 통칭으로 불린다. 미국에서 흑인의 정의는 백인 피가 100%가 아닌, 그리고 흑인 1%의 피라도 섞인 사람들을 의미한다. 그러다보니 미국 인구조사(General Social Survey)의 인종 분류에서 라틴계는 줄곧 흑인으로 분류됐었다. 라틴계가 흑인으로부터 ‘인종/에스니스티 분류’에서 떨어져나온지 얼마 되지 않았으며, 그 결과 미국 인종 분포에서 흑인 인구는 10% 중후반대로 추락하였다. 이것 역시 정치사회적인 배경과 이해 정치의 결과물이다).

3. 그리고 다른 한 가지는, 이것이 인종폭동이라면 과연 이것은 지금까지 벌어진 폭동과 아무 차별성이 없는 것일까? 크게 보면 차별성이 없다. 미국의 지배질서와 사회적 불평등이 인종을 경유하면서 구조화된 단면이 이렇게 폭발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아무리 ‘잘난’ 흑인들이 아이비 리그를 나오고, 언론인이 되고 전문직이 되고 대통령이 되어도, 그들은 미국의 지배적인 질서를 해체하거나 그 일각이라도 허물어뜨리는데 도움이 된 적이 없다. 오히려 그들은 이 지배체제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버락 오바마다. 오바마가 대통령 재임 시절에 퍼거슨 시에서 흑인 ‘폭동’ 이 일어났다. 똑같이 백인경찰에 의한 흑인 살해였다. 하지만 오바마는 결국 “우리 모두 오버컴”(극복하리)”를 부르고, “amazing grace”를 흑인 교회 추도식에서 나타나 멋드러지게 한 곡 부르는 것으로, 그의 죽음을 추도하며 보내버렸다. 무엇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는 여성이나 계급문제도 마찬가지다. 여성 일부가 아무리 잘나서 엘리트가 되어도 그것이 과연 젠더적 질서를 붕괴시킬까 아니면 그 질서의 정당화를 구축해줄까. 노동계급의 일부 인사가 국회의원이 되고, 원내 정당이 되고 심지어 ‘노동자출신’ 대통령이, 예컨대 노동자 출신이라는 이재명 경기도 지사가 대통령이 된다면 그것이 과연 계급정치일까. 미국의 인종주의 정치 역시 마찬가지다.

4. 그럼에도 이번 미니아폴리스 발 시위 사태가 단지 흔하디흔한 ‘흑인/인종 폭동’일 것이라고 단정하기 어려운 이유는, 이것이 코로나29 사태에 대한 항의 시위의 성격을 점차 가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미국의 코로나19 사망자중에 80%가 흑인등 유색인종이다. 흑인등은 보편의료보험 없는 미국 공공의료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다. 흑인들은 보험을 들지 못한 인구중 절대다수를 차지하며 미국의 메디케이드등 서민용 의료시스템의 혜택은 코로나19에 대응하기엔 턱없이 빈약하다. 코로나19 팬데믹속에서 흑인들이 죽어나가고 있고, 그들의 주검은 웅덩이에서 화장이나 매장을 기다리고 있다. 흑인들은 가장 낮은 서비스업종 바닥의 노동시장을 점하고 있으며, 코로나19로 인한 근 5천만명의 해고 사태 가운데 정중앙의 직격탄을 맞고 있다. 코로나19 과정에서 미국의 불평등이 흑인등을 중심으로 타격을 가하고 있다. <가디안>지 5월31일자 기사에 따르면 미국 인구중 5400만명이 식량보조가 없다면 당장 ‘기아’ 선상에 놓이게 된다고 한다. 전국의 도시마다 푸드뱅크 앞에 길게 줄 지어선 행렬은 전대미문의 양상을 보이고있다. 또 미국 아동 네 명중 한 명, 즉 1800만명의 아동이 당장 식량보조가 필요하다는 집계도 있다. 미국은 다른 3세계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코로나19 팬데믹 앞에서 한마디로 ‘식량 안전’의 위기에 처해있는 것이다.코로나19는 단지 전염병이 아니다. 그 전염병의 확산 속에서 불평등이 더욱 극심하게 나타나고 불평등에 대한 불만이 응축되고 쌓인다. 이번 미니아폴리스 시위는 인종폭동이면서 계급투쟁일 가능성이 있다. 그러므로 이번 시위는 한번으로 끝나지 않을 시위다. 앞으로 닥칠 ‘사회적인 위기’와 ‘대격변’의 전조일 가능성도 있다.

5. 미국 11월 대선을 앞두고 보수양당인 붉은 색 공화당과 푸른 색 민주당은 모두 ‘집권능력’과 ‘정당성’면에서 한계를 노출하고 있다. 공화당의 트럼프 현 대통령은 코로나19 대응에 있어서 심각한 한계를 노출하였다. 그는 전염병을 통제할 능력도 문제이지만, 전염병을 대하는 오도된 자세와 메시지로 미국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 이대로라면 연임이 힘들다. 하지만 그 경쟁자인 민주당의 유일 후보 조 바이든은 코로나19가 겁이 나서 자신의 자택 지하 벙크에서 두달째 박혀서 자취조차 보기 어려웠다. 미국인들은 조 바이든을 조롱하는 SNS 메시지들을 올리고 있다. 다음 정권 대통령 자리에 앉을 두명의 후보가 다 이 모양이다. 그리고 버니 샌더스나 엘리자베스 워렌 같은 후보들을 제치고 이런 후보들을 추대한 것이 바로 미국의 선거민주주의다. 이만하면 미국의 위기는 확연하다. 체제의 위기와 민주주의 정치의 위기, 그리고 그것이 이제 미국의 헤게모니를 놓치지 않으려는 미국 지배 엘리트의 막가파식의 행동 가능성때문에 전지구 리더쉽의 위기와 불안정성을 증폭시키고 있다. 이것이 미국이라는 국가의 모습이다. 제국(the Empire)은 간데 없고, 미국이라는 나라(the State)의 재발견 혹은 재탄생이다.

사파논평은 민중언론 <참세상>에도 동시 게재됩니다.
미국 경찰 흑인살해 항의시위와 코로나19 계급투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