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가 한국을 덮친지 3달째다. 긴급재난으로 인해 실물경제가 얼어붙고, 일터는 가동율이 곤두박질치고, 노동자들은 해고당하고 무급 휴가를 강요당하고 임금이 자연삭감되고 있다. 소득이 줄고 있는 가운데 저축한 돈도 얼마 없는 사람들은 코로나19보다 생계난이 더 두렵다. 이들을 위한 ‘긴급 생활비’ 지원이 필요하다. 역병이 재난이라면 말이다.
근데 대통령이 취한다는 조치가 자기 임금 30% 줄이기다. 4개월동안 대통령과 장관들이 임금을 30% 삭감하고서 받겠다는 것이다.

일단 참으로 구태스럽다.
누구는 깎을 임금이라도 있어 좋겠다만 누구는 최저임금선 아래 받는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에게 당신들의 임금 삭감분이 무슨 의미가 있나.

그리고 누가 적선해달랬나? 가난한 이들의 시민적 권리로서 주장하는 것이다. 이를 흔히 ‘사회권’이라고도 한다. 아직도 국민을 나랏님이 궁휼히 여기사 시혜받는 백성처럼 대하련가.

그리고 행여 이 조처가 이후 노동자들에게 고통 분담 운운하며 임금 동결하고 삭감하고 장시간 노동시간을 유지하기위해 미리 하는 이른바 사전 정지 작업이 아니길 바란다. (하지만)… 경총이 오늘 3일 ‘경제활력 제고와 고용․노동시장 선진화를 위한 경영계 건의’를 발표했다. 그 내용은 △기업 활력 제고를 위한 법·제도 개선 △기업 경영 안정성 확보를 위한 법·제도 개선 △노동시장 유연성 제고를 위한 법·제도 개선 △고비용·저생산성 구조 개선 △합리적인 노사관계 구축 △지속가능 사회보장체계 확립 △선진 안전시스템 구축 △경영책임의 적정성 확보와 형벌 개선 등이다.

여하튼 그러니 당장 대통령과 행정부는 제대로 행정권력을 동원하여 행정적인 일을 하라. 행정적으로 실효성 있는 사회경제적 조처를 취하라. 그게 정치권력이 해야할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착한 사마리아인 흉내내는 쇼같은 일은 그만두고 말이다.

하지만 나는 ‘재난기본소득’이라는 이름의 모든 국민에게 정액 얼마를 지급하는 식의 ‘보편적 기본소득(universal basic income)’에 대해선 반대한다. 지금 재난기본소득을 청원하는 교수연구자들 연서명이 돌고 있다. 난 그 청원에 서명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문장 첫머리가 “모든 국민에게 재난기본소득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왜 모든 국민이 기본소득으로 동일 액수의 긴급소득을 받아야할까? 지금 필요한 것은 재난 앞에서 가장 확연하게 드러난 재난 불평등이 인간 참극으로 일어나지 않도록 국가가 비상 개입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정확히 재난의 계급성을 이해하는데서 출발해야한다. 모든 국민이 아니라, 최저임금선 이하의 노동자들, 자영업자중 하위 20% 소득을 대상으로 하여야한다.

그리고 이 지점 역시 중요한데 모든 “국민”이 아니라, 이 땅에 사는 모든 “인간”에게 생존기금을 지급하여야한다. 기본소득은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매우 배제적이고 선별적인 복지이다. 사람들은 보편적 기본소득이야말로 보편적이고 탈배제적이라고 하지만, 전지구적 전염병 앞에서 “국민”됨이라는 자격조건은 역설적으로 얼마나 배제적인가.

그러므로 지금 지급되어야하는 것은 재난기본소득이 아니라,

첫째, 생존유지가 버거운 하층 소득민에게 긴급한 구호기금으로서,

둘째, 헌법상 행복추구권과 건강할 권리를 가진 이들의 당연한 사회권으로서,

그리고 셋째 “국민”이라는 배제적인 보편기본소득이 아니라 이 땅에 코로나19로 인해 생존권이 위협에 처한 사회 구성원 모두를 대상으로 한

긴급재난생활비로서 주어져야한다.

그리고 이는 정확히 기본소득과는 구분되는 지점이다.

2020. 3.23

권영숙(사회적파업연대기금 대표)

온통 맘이 돌처럼 딱딱해진다. 죽음이 너무 아프고, 죽어야하는 현실이 너무 자명해서, 죽음의 반복이 너무 필연적이어서, 부고를 듣는 마음들은 더 딱딱해지고 더 불편해진다. 사실 ‘사회’란 그 성원들이 매일 매일 만들어 내고 있는, 매일 매일 재구성하는 형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매일 만들어지는 사회를 거대한 벽처럼 암담하게 느꼈을 사람들을 아프게 떠올린다. 그래서 이 사회를 구성하는데 매일 가담하는 ‘우리’는 마음이 또 불편해진다.

걸그룹 가수 설리에 이어 구하라의 죽음. 남자친구의 데이트 폭력과 악질 댓글로 힘들었던 구하라의 죽음. 그리고 구하라의 전 남자친구가 저지른 죄들 중에서 다 인정하는데 성범죄만 무죄로 판결했다는 법원 기사. 구하라의 죽음으로 새삼 세간의 입질에 오른 이 판결은. 근데 지난 8월의 판결이다. 아 그랬구나. 이게 어떤 의미인지 확 다가온다. 8월의 이 판결이후 그는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을까. 구하라의 진짜 피해는 법으로 그리고 실체적으로 인정되지 않았던 것이다. 피해자가 있는데 피해는 없었던 것이다. 법원은 가해자에게 면죄부를 준 것이다. 건설업자 윤중천의 별장에서 소위 ‘성접대’를 받았다는 혐의를 받았던 법무차관 지명자인 검사 김학의처럼 말이다.

매일 매일 구성되어 우리 앞에 버티고 있는 이 난공불락의 사회에 대해서, 그리고 이 사회에 절망하여 일어났을 수다한 비슷한 죽음들 앞에서, 이 사회를 구성하는 ‘우리’라는 공허한 주체는 할 말을 잃게 된다. 아니 누군가를 향해 주먹질을 해야할텐데, 과연 누구를 무엇을 향해야할까? 이 죽음의 경우는 또 어떤가. 애초의 가해자 때문에 구하라가 죽었을까? 판사의 판결 때문에 구하라가 죽었을까? 과연 누가 그를 죽였을까? 이 죽음들은 왜 반복되고, 그 죽음의 원인은 왜 방치되고 있을까?

또 작년부터 올해까지 ‘1672명’의 노동자들이 일터에서 사라진 죽음이 있다. 그 죽음들은 한날 한시의 죽음이 아니라, 일상적으로 방치된 죽음들이고, 구조적으로 발생한 죽음들이다. 가해자의 인정도 가해사실의 인정도 없이, 무참한 목숨들이 일터에서 사라지고 있다(최근 <경향신문> 지상에 올려진 산업재해 사망자 명단은 1200명이다. 하지만 실제 한국의 산업재해 사고와 죽음은 이보다 훨씬 더 많다. 산업재해의 20%만이 산업재해 보험 처리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산업재해 사망사고도 그만큼 은폐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노동부 통계에 따르더라도 직업병을 포함한 산업재해로 일터에서 해마다 2천명, 하루 3명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대체로 매일 5-6명 사망이라고 본다).

이들 노동자들은 또 누가 죽였을까? 무엇이 죽였을까? 살기 위해서 노동력을 팔고 일터에서 일하던 사람들을 다시는 집에 돌아올 수 없게 만든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리고 이 질문 역시 마찬가지로 우리는 과연 하나의 답에 이를 수 있을까? 이 죽음들의 가해자들이 과연 누구인가에 대해서 과연 우리 사회 성원들은 같은 답을 내릴 수 있을까? 죽음에 대해 애통해하고 마음의 가책을 느낀다고 해서 반드시 같은 답을 염두에 두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구하라의 죽음도 그렇고 김용균의 죽음도 그렇고, 수많은 구하라들, 그리고 김용균들의 죽음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답을 찾지 못한 채 죽음들은 늘어만 가고, 제어되지 않은 채 사회적 타살은 반복된다.

그러므로 죽음들 앞에서 슬프고 애통하다는 것은 때로 악어의 눈물같이 느껴진다. 슬프고 애통하고 가책을 느끼는 것은, 가장 손쉽고 어쩌면 가장 값싼 연대의 표현방법이다. 이렇게 일상화된 죽음들을 막기 위해서는 연민과 가책에 연유하는 연대의 감정과 의식으로는 한참 부족하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애도와 가책은 나를 편하게 하는 나 중심의 연대일 뿐이다. 왜냐하면 문제는 바로 그 ‘일상’이라는 괴물, 내가 영위하는 현실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매일 매일 우리 구성원들이 만들고 있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저 죽음들을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죽음의 소식을 들을 때 그 순간뿐인 미안함과 눈물이 아니라, 세상의 구조에 대항할 때에만 이 죽음들의 반복을 막을 수 있다. 이 죽음들은 일상적이고 구조적인 죽음이기 때문이다. 구하라와 설리의 죽음은 걸그룹 아이돌의 사생활 보호는 관심없이 자본의 이익을 추구하거나, 대중의 찰나적인 호기심과 여성에 대한 ‘마녀사냥’에 영합하는 사회가 공모하여 일어난 죽음들이다. 그것은 단지 여성혐오만도 자본주의의 이윤추구만도 아닌, 병합된 문제들이 얽혀서, 반대쪽에 손가락질만 하면서 계속 반복된다.

일터에서 사라지는 노동자들을 죽이는 것도 바로 그 돈, 자본이다. 돈 때문에 안전수칙을 어기고, 돈 아끼려고 안전장비를 갖추지 않고, 그리고 자본으로 맺어진 원하청 사슬, 비정규직화와 죽음의 외주화가 노동자들을 죽이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그 악마의 자본주의 앞에서 침묵하고,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사회, 그 자본 앞에 굴복하고 법도 행정집행도 팽개치는 국가가 공범이다.

그러니 어떻게 이것을 한 순간의 눈물과 한숨으로 닦아주고 원상회복하고, 혹은 다시 이런 일을 일어나지 않게 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이제 우리에겐 연민과 속죄, 그것으로 빚어내는 순간적이고 휘발적이고 철저히 나로부터 시작하는 연대가 아니라, 그 죽음들 자체에 대한 인식에 기반한 사회적 의지와 사회적 힘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자본의 구조에 맞서는 힘이 필요하다. 노동을 짓밟고 일어서는 국가와 노동을 배제하는 정치적 민주주의에 대해 일어서는 힘이 필요하다. 속죄와 가책에 의한 동정과 연민의 의식이 아니라 종국에는 함께 그 길로 합쳐지는, 그래서 세상을 바꾸는 길을 만들어가는 사회적 동맹이 필요하다. 그런 굳건한 사회적 동맹, 정치적 동맹의 구축이야말로, 그래서 그 동맹세력이 더이상 물러나지 않는 힘으로 자본주의 세상을 제압하고, 자본과 교묘히 결합된 비인간적인 일상의 구조를 바꾸고, 자본과 결탁한 정치를 뿌리로부터 전복시키는 것, 그것이 바로 일상적이고 구조적인 죽음들과 사회적 타살을 막는 길이다.

구하라 설리의 죽음이든. 노동자 1672명의 죽음이든,
어쩌면 그 죽음들의 원인이 하나의 뿌리라는 각성이 연대의 시작이다.

2019. 12. 06
권영숙 (사회적파업연대기금 대표)

톨게이트 투쟁에 있어서 대법원은 노동자 투쟁의 정당성을 확정해주는 판결을 한 것도, 그 판결을 해주는 주체도 아닙니다.

오히려 법원은 4년이란 긴 시간동안 노동자들을 고통스러운 시간 싸움에 들게 하면서 자본의 편에 섰습니다. 그리고 이제서야 대법원의 직접고용 판결이 나왔지만, 그 판결조차 언제나 판례가 되지 못하고 ‘케이스’, 즉 개별 소송 사건으로 취급되는 한국 법현실에서, 법원의 판결은 노동자에 대한 사법적 통제기법이 되기도 합니다.

즉 노동의제는 희석시키고, 노동자들의 요구는 소송 사례로 제한하면서, 노동자들을 갈수록 법원의 판결에 묶어 두려는, 노동자에 대한 ‘사법적 통제’의 수단이 됩니다. 노동자 투쟁은 이런 사법적 통제 자체를 분쇄해야합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 톨게이트 노동자들이 감행하는 투쟁이 그런 투쟁입니다. 그래서 이 투쟁은 옳다, 우리가 옳다라고 크게 외치고 외쳐야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 지점을 번번이 놓친 것이 지난 몇년간 비정규투쟁의 한계였습니다. 지금까지 비정규투쟁은 투쟁마다 종국에는 법률투쟁이 됐습니다. 똑같은 처지의 노동이고 같은 요구로 투쟁하는 노동자임에도 불구하고, 불법파견 소송을 하고 근로자지위 소송을 하는 노동자 개개인들의 판결 사례로 한정됐습니다. 같은 사업장내에서도 노동자들은 이 판결로 일희일비하고, 판결에 따라 서로 다른 처지가 되었습니다. 결국엔 종이쪽 판결문을 투쟁보다 더 의지하고, 금과옥조처럼 읖조리다, 그 판결이 지명하는 순서대로 정규직으로 전환되기도 했습니다.

정리해고 투쟁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게 하여 판결이 지정하는 순서대로 원직 복직도 하고 정규직 전환을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투쟁의 과정은 정리해고 자체의 철폐, 비정규직 자체의 완전 철폐와는 갈수록 멀어졌습니다. 왜냐하면 노동자들이 법률 소송에 기대는 순간 그것은 실정법, 즉 현존하는 법에 호소하는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노동자들은 파견근로를 늘리기 위해 만든, 허울만 좋은 ‘파견근로자보호에 관한 법률’에 근거해서 불법파견임을 입증하는 소송을 해야 했습닌다. 비정규직 철폐투쟁은 실제상 정규직 공정임을 이유로 한, ‘진짜 사장’ 찾아내기 투쟁이 되고 정규직 전환투쟁이 됐습니다.

한마디로 노동자들이 정리해고 분쇄를 외칠수록, 법과 판결이 끼어들면, 그 순간 그것은 ‘원직복직’ 투쟁이 되어버렸습니다.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철폐를 외칠수록, 법과 소송에 의존하면, 어느 순간 그것은 ‘정규직 전환’ 혹은 ‘불법파견’ 유무죄의 문제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런 가운데 비정규직은 다양한 변종으로 더욱 공고화됐습니다. 정리해고조항은 철폐되지 않았습니다.

지금 톨게이트 수납소 노동자들 1500명이 자회사 고용을 거부하면서 투쟁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305명이 이번 대법원 판결에서 승소한 해당자라고 합니다. 그러자 고용주인 한국도로공사는 소송 당사자 만을 직접고용하겠다는 뻔한 술책을 내놨고, 노동자들은 지금 그를 거부하는 투쟁을 계속 하고 있습니다.

같은 처지의 노동자들이고 대법원 판결이 판례로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왜 모든 노동자들에게 적용하지 않는지를 문제삼으며, 법과 판결의 한계를 계급적 단결투쟁으로 넘어서고 돌파하려고 합니다. 소송당사자만이 아닌 모든 ‘같은 처지’의 노동자들이 함께 쟁취하는 결과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톨게이트 노동자들의 투쟁이 의미있는 이유, 그 투쟁이 옳은 이유입니다.

그렇습니다. 투쟁하는 노동자들은 결코 법과 판결이 손을 들어주었기 때문에 우리가 옳았다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옳았고, 우리가 투쟁했기 때문에 법원이 판결할 수 밖에 없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톨게이트 노동자들의 요구는 대법원 판결때문에 옳은 것이 아니라, 이미 옳았습니다.

그리고 노동자들은 “법대로! 해라”라고 외쳐서는 안됩니다. ‘법대로’는 합법주의의 덫에 걸려들기 십상입니다. 종국에는 언젠가 노동자의 투쟁에 무서운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것입니다. 너희가 법대로 하라고 요구하지 않았는가라며 자본과 국가, 법원은 함께 법으로 노동자들을 억압하고 통제할 것입니다.

이제 다르게 외쳐야 합니다. 노동자들은 자본과 권력에게, “너희들이 만든 법 너희들이 지켜라”라고 말해야합니다. 노동자가 “법대로”를 말할때, 그것은 바로 너희 자본과 국가에게 하는 말임을 분명히 해야합니다. “너희가 만든 법 너희가 지켜라. 그리고 우리의 법은 우리가 만들겠다”, 이렇게 말입니다.

노동자투쟁이 법에 의지한 투쟁이 아니라, 법을 향한 투쟁으로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정리해고 철폐, 비정규직 완전 철폐를 향하여!

– 권영숙 (사회적파업연대기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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