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현장을 멈추게 하기 위해 또다른 죽음을 각오한 단식투쟁으로 맞서는 노동자들이 있다. 인천공항 여객 제1터미널에서 인천공항지역지부 지도부 단식농성이 14일째(11/9일기준) 이어지고 있다.

용역하청업체의 또 다른 이름 자회사
2020년 노사전문가 협의회를 거쳐 공항공사, 정규직 노조와 직접고용 논의가 진행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최소인원의 소방대 인원만이 정규직 전환이 되고 보안업무를 맡고 있는 노동자들도 직접고용 대상이었음에도 자회사 인력으로 전환되었다. (자회사 전환후에는 4조2교대 시행하고 임금처우는 직접고용보다 낮추지 않게 한다는 합의서를 작성했었다)
자회사 전환이후 직제 개편에 대한 논의 자체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자, 노조는 2022년도에 파업에 돌입했다. 이때 노조는 3개 자회사와 ‘직원 처우에 관한 합의서’를 작성했다. 제2터미널 확장공사를 끝내고 오픈하는 시점에 교대개편을 시행한다는 내용이다. 올해초 1월 제2터미널을 오픈했음에도 불구하고 교대개편은 시행되지 않았다. 모회사 공항공사는 자회사의 운영에 직접 관여하지 않는다는 공식입장만 표명한 채 방관하고 있고 자회사는 모회사와의 계약관계에서 임의대로 교대개편하면 계약위반 사유라서 진행할 수 없다는 핑계를 대면서, 공항공사와 자회사는 서로 책임을 미루면서 벌써 3년간 합의를 이행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공항공사의 구조적 방치속에 자회사 노동자들의 죽음, 위험의 외주화
노조측 설명에 의하면 인천공항 3개 자회사 노동자는 약 1만명 정도된다(이중 인천지역지부 조합원은 3천800여명 정도)
4조2교대제 시행에 대한 합의이행을 수년간 미루고 회피한 사이, 공항은 죽음의 일터로 변했다. 올해 야간근무를 하면서 조합원을 포함해 인천공항에서만 6명의 노동자가 사망했다.
2001년 인천공항이 개장되고 25년동안 3조2교대(주주야야비비) 근무제가 유지되면서, 저녘 6시 야간 출근을 하고 다음날 아침 9시 퇴근을 하면 보통 한두시간 길어야 3시간 자고 다시 출근해아 하는 시스템이다. 이런 주야 2교대제도 못되는 최악의 근무형태가 반복되면서 뇌출혈, 고지혈증, 고혈압등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이 늘어나면서 교대제 개편이 가장 절실한 상황이다. 얼마전 추락사로 사망한 20대 조합원의 경우 그 전날에도 교대제 개편 요구를 이야기했다고 노조측은 전한다. 지금까지 사망한 6명의 노동자를 제외하고 올해에만 벌써 뇌출혈로 세 명의 노동자가 쓰러졌다.
신입사원이 들어와도 저임금과 고강도 노동에 지쳐 퇴사하기 일쑤이다. 한 명의 노동자가 퇴사하면 두 달에서 네 달 걸리는 새 채용 절차 기간동안 그 빠진 자리를 남아 있는 노동자들이 추가로 근무해야 하는 일이 반복되면서 산재는 더욱 늘어날 수 밖에 없는 조건에서 공항 자회사 노동자들은 악으로 버티고 있다.

‘더 이상 우리의 동료를 떠나 보낼수 없다!’
이렇게 누적된 야간 근무로 인해 환자가 계속 늘고 중대재해가 발생하고 있음에도 보안쪽 자회사는 인력감축하려는 계획만 내고 있는 상황이다. 결국 노조는 ‘더 이상 우리의 동료를 더 이상 떠나 보낼수 없다’고 투쟁을 선언했다.
지난 9월 19일 경고 파업을 하고 10월 1일부터 12일까지 12일간의 전면 파업을 단행했다. 그이후 10월 13일부터는 간부파업과 2주 동안 집중 교섭 기간을 가졌음에도 전혀 사측의 태도는 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결국 집행부 결의를 통해서 세 명의 지도부가 지난 10월 27일부터 몸숨을 건 단식에 들어간 상황이다. 단식기간이 길어지면서 정안석 지부장은 단식 10일차인 지난 5일 극심한 복통으로 병원 치료후 회복중이다. 현재 단식 농성장에는 여전히 두명의 노동자(박대성 보안통합지회장, 이자형 설비지회장)이 남아서 목숨건 단식투쟁을 벌이고 있다.
현재 공항노동자들은 보안의 경우 100% 필수유지업무로 묶여있는 상황이다. 공항공사는 업무방해로 고소고발과 퇴거명령서를 노동조합에 계속 보내고 있다.
산재와의 전쟁을 선포했던 이재명 정부하에서 고용노동청에 찾아가 현장 직접방문을 요청하고 정부 공기업의 책임 회피문제를 전달하기도 했지만 정작 김영훈 노동부장관은 얼굴도 내밀지 않고 있다.이렇게 필요 인력 충원없이 3조 2교대제가 계속된다면, 노동자들의 죽음의 행렬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연속 야간 노동을 없애고 지난 20년도에 합의된 4조 2교대 시행으로 죽음의 교대제를 멈추자는 것이 노동조합의 최소한의 요구조건이다.

“4조2교대 합의사항 이행하라”
“노동자들이 죽어가는 인천공항, 이재명 정부가 해결하라!”

정부와 공항공사/자회사에 압박을 가하고 공항노동자들이 투쟁에 지치지 않도록 힘을 불어 넣어줄 연대와 응원이 절실할 때다. 공항 가는 길이 멀어도 연대는 가깝게!
단식농성장의 위치는 인천공항 제1터미널 3층 7번 게이트 근처다.

<사진 설명: 2025111일 단식 6일차 단식농성장>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은 10월16일 대통령 집무실앞에서 지난 7월부터 이어지고 있는 세종호텔지부/한국옵티칼지회의 점심 선전전을 맡아 12시부터 오후1시까지 연대 피켓팅을 진행했다.

10월14일 국회 교육위는 증인으로 채택한 세종호텔과 대양학원의 실소유주인 주명건 명예이사장의 증언을 청취하기로 예정돼 있었다. 하지만 주명건은 척추 치료를 핑계로 미국으로 출국한 채 국감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에 10월 16일 대통령실 앞에서 점심선전전이 진행되는 동시간대에 세종호텔지부와 공대위는 세종대학교 앞에서 “고공 두고 도망가지 마라”는 제목으로 규탄 기자회견을 가졌다.

세종호텔 바지사장 오세인은 지난 4차 교섭(10월14일) 자리에서도 여전히 복직만은 안된다는 입장을 고수하면서 교섭은 진전되지 못하고 있다. 세종호텔앞 도로 철구조물 위에서 고진수 지부장은 248일째 홀로 고공농성을 하고 있다. 목요일은 세종호텔노조가 매주 문화제를 여는 날이다. 교섭장이 서울고용청으로 잡히면서 집회 장소도 옮겼으나, 이날 저녁 문화제는 오랜만에 고공농성장 근처 세종호텔 앞에서 열렸다. 사파기금은 이 집회에도 최정애 활동가가 참석하였다.

문화제의 장소, 방식등에 대한 고려가 더욱 필요한 시점이다. 노조가 제시한 4차교섭 일정을 사측은 무시했다. 하지만 현재 세종호텔 노사교섭의 중재자로 나섰다는 국가기관인 서울고용청이 노조의 일정 제시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것은 노골적으로 편파적이고 자본 편들기다

따라서 서울고용청의 책임을 묻는 집회도 필요하다. 서릿발같은 입장 표명도 필요하다. 결국 이는 노동부장관부터 서울고용청까지 겹겹이 대리인을 두고 숨어있는 이재명 대통령과 현 정부의 직접 책임을 묻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 복직없는 교섭은 기만이다!
– 세종호텔 자본은 즉각 복직안을 내놓아라!
– 주명건은 바지사장과 이름만 이사회 뒤에 숨어 있지 말고, 노조를 인정하라!
– 계급적 단결과 사회적 연대로 정리해고 비정규직 철폐하자!

2025. 10.19
사회적파업연대기금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은 추석연휴기간 서울 낙성대 근처 비전향장기수들이 거주하고 있는 ‘만남의집’을 10월9일 오후 방문하였다. 이 집에는 박희성선생이 작년 작고하신 이후 세 분이 거주하고 있는데, 이 날 방문때는 ‘빨치산’ 출신 김영승 선생이 계셔서 함께 할 수 있었다.

[사파연대] 비전향장기수의 ‘만남의집’ 추석방문 251009 전문읽기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은 추석연휴기간 서울 낙성대 근처 비전향장기수들이 거주하고 있는 ‘만남의집’을 10월9일 오후 방문하였다. 이 집에는 박희성선생이 작년 작고하신 이후 세 분이 거주하고 있는데, 이 날 방문때는 ‘빨치산’ 출신 김영승 선생이 계셔서 함께 할 수 있었다.

만남의집은 2022년 사파기금의 83번째 기금지원 대상(고액기준)이었다. 그때 이후로 해마다 1-2회 명절 전 혹은 후에 방문하기로 결의하였다. 한 해도 빠진 적이 없다. 하지만 그동안 박희성선생이 돌아가셨다.

여기 계신 양원진(97세), 김영식(93세), 양희철(92세), 그리고 박희성(올해 살아계셨다면 92세) 선생들은 모두 남북의 분단과 한국전쟁기간 ‘반미 조국통일전쟁’에 북한 정규군으로 참여하거나 좌익 빨치산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었다. 분단후 간첩으로 내려왔다가 생포되어 긴 감옥살이를 한 이도 있다. 남한 출신도 있다.

이들 모두를 ‘정치범’이 아닌 ‘사상범’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정치범은 민주화운동을 한 사람들에게도 쓰는 용어이다. 그러나 사상범은 주로 반공 국가보안법 관련 조직사건이나 이들처럼 남한정부에 생포되어 수형생활을 했던 ‘비전향 장기수’를 말한다. 80년대 민주화운동은 ‘이념이나 ‘사상’의 수준과 꼭 맞닿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다른 말로는, 민주화운동은 정치 이행은 목표로 했지만, 사회혁명은 아니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1987년 민주화이행이후에 박정희정권하에서 극심했던 비전향장기수들에 대한 소위 ‘사상전향공작’이 폭로되었다. 그리고 이들의 가석방이 이뤄져 어떤 이들은 수십년만에 ‘남한’ 사회를 보기도 하고, 산에서 내려와 세상에 처음 나온 이들도 있었다. 이후 이들이 ‘신념’으로 택한 체제를 선택할 자유를 주기 위해서 북한으로의 ‘송환’ 운동이 벌어졌다. 1990년대 초 일이다. 당시 한겨레신문에 있던 권영숙 대표는 이때의 일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한겨레신문사는 첫 송환대상자 이인모 선생의 첫 송환을 함께 의도했고, 처음부터 끝까지 취재 보도하였다.

1998년 만남의 집에 거주하고 있는 남한출신 양희철 선생을 마지막으로 비전향장기수들은 모두 세상 밖으로, 즉 남한사회로 나왔다. 하지만 북한 송환(북송)은 달랐다. 2000년 1차 63명이 송환되었다. 일부는 남한에서 여전히 전사로 투쟁하겠다고 남았다. 일부는 한국 정부가 북송을 승인하지 않았다. 그렇게 남은 이들이 이제 모두 90대의 고령이 되어 줄줄이 세상을 떠나고 있다. 고 박희성 선생처럼 말이다. 2024년 9월29일 사파기금의 추석방문때 만남의집 마당에서 함께 사진을 찍으셨던 박희성선생은 한달도 안된 10월 27일 돌아가셨다. 권대표가 추도식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지금 또한분의 비전향장기수 출신 안학섭 선생이 암으로 투병중이다. 생명을 붙잡고 있는 그는 남한 이재명 정부에게 죽기전 ‘북송’을 요청하고 있다. 그는 강화도 출신이다. 이재명 정부는 북한 송환을 허락할 것처럼 움직였지만 불발되었다. 한반도를 둘러싼 지정학, 미국의 몽니, 그리고 남한과 북한의 미묘한 정세가 한 인물이 자신이 선택한 곳에서 죽고 싶다는 소원마저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외국영화에서나 볼 이야기로 여기는 일이 이 사회의 일이다. 관심을 촉구한다.

다음 만날 때까지 부디,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선생님 한 분이 말씀하길, “내 몸이 무기이고, 내가 살아있는 것이 투쟁”이라고 하셨죠.
(권영숙 대표 씀)

2025. 10.14
사회적파업연대기금

비전향장기수의 ‘만남의집’ 추석방문 251009  사진앨범보기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은 긴 추석연휴가 시작되기 전인 10월1일 세종호텔노조와 사측의 3차 교섭이 열린 서울고용노동청 앞 결의대회에 권영숙 대표와 운영진이 연대 참석하였다. 긴 집회였다. 오후에 시작한 교섭이 파행에 이르고, 교섭단은 교섭장에서 농성을, 연대자들은 야간 집회를 이어가다 거리 노숙후 다음날 아침 집회를 끝냈다.

세종호텔 노조 3차교섭 결의대회 연대참석 251001 후기 전문읽기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은 긴 추석연휴가 시작되기 전인 10월1일 세종호텔노조와 사측의 3차 교섭이 열린 서울고용노동청 앞 결의대회에 권영숙 대표와 운영진이 연대 참석하였다. 긴 집회였다. 오후에 시작한 교섭이 파행에 이르고, 교섭단은 교섭장에서 농성을, 연대자들은 야간 집회를 이어가다 거리 노숙후 다음날 아침 집회를 끝냈다.

“추석전에 고진수 세종호텔 지부장을 내리자!”는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하지만 노사가 만난 1차 교섭 자리에서 오세인 대표이사는 이는 교섭이 아니라 ‘대화’라고 주장했다. 2차 교섭에서 사측은 ‘복직 아닌 다른 안’을 제시하겠다고 했다. 노조측과 공대위는 ‘복직외에 다른 안은 없다’는 기본 원칙하에 복직안을 내놔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이날 3차 교섭이 열린 것이다. 이런 가운데 추석전 고공 농성 200일 훌쩍 넘어선 고진수 지부장을 땅으로 내리자는 주장은 허공에 사라졌다.

그래서 3차 교섭이 더욱 중요했다. ‘복직외에 다른 안은 내놓지 못하게’ 철저히 봉쇄하면서, ‘복직없이 이 투쟁은 절대 정리하지 못한다’는 결의를 목소리와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것이 교섭장에 나온 사측에 전달되고, 고용노동청이라는 대리인에게 전달되어야 했다. 그것은 결국 오세인 대표이사의 뒤에 복직에 대한 결정권을 가진 자본가 주명건에게 전달되고, 고용노동청 뒤에 이재명 정권에게도 전달되어야 했다.

연대자들이 다시 모였다. 꾸준히 모이는 이들이 또 모였다. 3차교섭에 이르도록 조직노동 혹은 ‘대중조직’이라는 민주노종 전체, 세종호텔 노조의 상급 단체인 서비스연맹은 조직적인 동원지침을 내리지 않았다. 1차와 2차 교섭에서 연대자들 일부가 모인 것은 ‘교섭’에 대한 ‘압박’을 가하는 힘이었다. 이 힘에만 기대지 말고, 민주노총의 조직대오가 나서주길 바라는 세종호텔 노조와 고진수 지부장의 절박한 목소리에 대한 답은 또 없었다. 그것이 현재 3차 교섭의 결과다.

교섭단은 이날 4차 교섭을 10월10일, 즉 연휴 다음날 열자고 제안했다. 사측은 복직외의 다른 안을 내려는 움직임을 보이며 교섭 의제 전환을 시도했고, 결국 자리를 떴다. 그동안 사측이 일방적으로 1,2,3차 교섭일정을 정했고, 노조가 처음으로 제안한 4차 교섭일자였던 10월 10일은, 사측의 무시와 서울지방고용청의 방관 속에서 그냥 지나갔다.

사측의 태도는 이미 꽤 분명해 보인다. 복직은 배제하고 그동안 투쟁에 대해 다른 ‘안’으로 회유하여 끝을 내보겠다는 심산이다. 과연 이 답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혹은 이를 거부할 결의를 다잡을 수 있는가? 그리고 복직말고 어떤 안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다음은 회사에 끌려가지 않는 교섭, 힘으로 쟁취하는 교섭을 위해서라면, 무슨 준비를 해야 하겠는가?

권영숙 사파기금 대표의 글을 인용하자면, “이른바 교섭과 협상이 눈 앞에 보일수록, 눈앞에 보이는, 표면적인 상황과 구도를 넘어서 정세를 봐야할 필요성은 더 커진다. 그러니 협상은 표면일뿐이다. 협상이 다가올수록 중요한 것은 정세를 정확히 읽는(혹은 읽어온) 것이고 정세를 놓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교섭은 최종 결과일 뿐이며, 필요한 것은 교섭에서 결과를 만들어내는 힘이다”.

세종호텔 노조의 긴 투쟁 속에서 지난 4년간 투쟁, 200일 넘는 1인 고공농성을 이제야말로 투쟁답게 교섭으로 이끌어가는 힘이 갈수록 절실해지고 있다. 교섭을 투쟁으로 돌파하는 힘이 필요하다.

2025.10.12
사회적파업연대기금

세종호텔 노조 3차교섭 결의대회 연대참석 사진앨범보기

긴 추석 연휴기간 적막해 보이기까지 하는 서울 여의도 국회 정문앞, 교육공무직노조의 조합원들은 명절에도 가족과의 시간을 포기하고 산재로 사망한 동료의 분향소를 지키며 농성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바로 학교 급식노동중에 폐암으로 사망한 학교급식 노동자 열다섯분의 ‘얼굴없는 영정들’이 놓인 분향소입니다.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은 추석 연휴 마지막날인 10월9일 권영숙 대표와 운영진이 분향소를 찾아 조문하였습니다.

죽음의 행렬을 멈추기 위한 슬픔과 분노, 결의를 모으는 자리, 15번째 폐암 산재 죽음이 발생하자, 공공운수노조 교육공무직 본부는 지난 10월1일 국회 정문앞에서 급식노동자의 폐암 사망을 막기 위한 정부와 국회의 즉각적인 대책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분향소를 차리고 농성에 돌입했습니다

지난 9월 22일 충북의 한 고등학교 급식실 조리노동자가 또다시 폐암으로 사망했습니다. 고 이영미 조리노동자의 1주기 추모식을 치른지 불과 20여일만에 일어난 일입니다. 사파기금과의 간담회에서 전국공무직노조 정인용 본부장의 말에 따르면, 현재 폐암 산재로 확정된 학교 급식노동자는 175명이며, 산업재해로 인정받은 첫 사례이후 전체 확인된 사망자만 15명에 이르고 있습니다.

학교급식 노동자들을 폐암으로 쓰러지게 만드는 것은, 생소하게 들릴 단어인 ‘쿠킹 흄(cooking fume)’입니다. 부침, 튀김, 볶음의 요리 과정에서 발생하는 독성 연기인데, 2010년 WHO(세계보건기구) 산하 국제암연구소(IARC)는 이를 2A군 발암물질로 지정하였습니다. 쿠킹 흄은 학교등 대규모 급식노동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의 폐암 산재의 원인으로 지목되고, 급식실 환경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몇 년전부터 높아가고 있었지만, 학교 급식실은 여전히 ‘죽음의 급식실’이라는 오명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2021년 노동부가 급식실 환기시설개선 가이드라인을 발표하고 교육부가 2023년 학교급식실 조리환경 개선 방안을 발표했으나 무려 60%의 학교급식실의 노동환경은 전혀 달라지지 않은 채로 남아있고, 2027년 개선완료로 목표를 늦추고 있습니다. 게다가 노조의 보도자료에 따르면 교육부는 2025년 노동환경 환기시설 개선 예산을 30% 삭감하기도 했습니다.

지난 대선 당시 교육공무직본부 정인용본부장의 단식 투쟁 끝에 당시 이재명후보와 여당은 ’학교급식 종합대책 마련‘ 정책협약을 약속하고 체결했으나 관련 법안 역시 여전히 국회에 계류중입니다.

노조는 지난 기자회견을 통해서 “환기시설 개선을 2027년까지 미루고 있는 교육청, 산업안전보건법으로 급식실 폐암을 관리할 책임을 방기하고 있는 고용노동부, 그 위험을 알고도 손 놓고 있는 교육부, 그리고 전체 책임을 외면한 정부가 이 모든 죽음에 책임져야 한다”며 분노하고 있습니다.

사회적파업연대기금도 한 목소리로 말하겠습니다. 이재명 정부는 즉각 공약을 내세웠던 학교급식 종합대책을 이행하고, 국회는 학교급식법 개정안을 통과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학부모들은 자신의 아이들을 위해서 따뜻한 밥과 국, 반찬등을 만드는 급식노동자들에 대한 연대의식으로 이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합니다. 즉, 학교급식노동자 열다섯분의 분향소에 와서 함께 조문하십시오. 그리고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연대의 목소리를 내십시오!

“ 죽음의 급식실, 이번에는 바꾸어아합니다!”

*교육공무직본부는 이번 국정감사 기간동안 농성을 이어가며 정부와 국회를 압박한다는 방침이다.
*학교급식 노동자 폐암산재 추모 분향소는 10월 13일까지 운영된다.
*농성장 지지 방문: 10/01(수) ~10/13(월)까지, 매일 08~20시 국회 앞
* 차별과 배제를 멈추는 교육공무직 법제화! 아이들도 노동자도 건강한 학교급식법! 범국민 서명 운동
https://docs.google.com/forms/d/1gRywUyyu7HRauEhHd7ASMLL5vpUyDd2t48tXw-10Q2g/edit

구로동맹파업(구동파)이란 1985년 6월24일부터 6월29일까지 6일간 서울 구로동에서 5개 사업장에서 벌어졌던 동맹파업을 말한다. 올해는 40주년이다.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은 구동파의 역사적인 의의를 정확히 전유하고 당시의 노학연대의 의미를 오늘날에 함께 토론하는 24회 사파포럼을 9월27일 민주노총 15층교육장에서 열었다.

[제24회 사파포럼] 후기 전문읽기

구로동맹파업(구동파)이란 1985년 6월24일부터 6월29일까지 6일간 서울 구로동에서 5개 사업장에서 벌어졌던 동맹파업을 말한다. 올해는 40주년이다.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은 구동파의 역사적인 의의를 정확히 전유하고 당시의 노학연대의 의미를 오늘날에 함께 토론하는 24회 사파포럼을 9월27일 민주노총 15층교육장에서 열었다.

9월27일은 전국적으로 ‘기후정의행진’이 벌어진 날이다. 서울에서도 당연히 벌어졌다. 게다가 이 의제는 지금 한국 사회, 좌우 운동, 단체, ‘시민사회’ 대다수가 동의 지지하는 거대담론, 혹은 ‘보편적인’ 담론과 의제가 되고 있다. 한국노총과 민주노총도 예외가 아니다. 민주노총은 노동을 중심으로 한 민중적 계급적 이슈를 의제화하면서 사회적으로 한발 더 나아가지 못한채, 현재 시민사회의 지지를 대폭적으로 얻고 있는 기후위기, 기후정의 의제에 조직적인 지지와 동원을 하기로 작정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하필 이날 1985년 구로동맹파업을 2025년에 토론하고 되살려보자? 어쩌면 그래서 의미가 배가된 주제였고 사파포럼이었다. 왜냐하면 동맹파업이 아닌가 말이다. 구동파는 한국전쟁이후 최초의 노동자들의 지역동맹 파업이었다. 정치파업이었다. 그리고 동맹파업은 결국 ‘사회적 총파업’이 되어야 할 것이다. 기후문제 역시 사회적 총파업 속에서 의제로 구성되어야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구동파는 기후위기와 기후정의에 대해서도 시사점을 가질 것이다. 노동이 중심이 되는 사회가 아니고서는 정말 ‘기후위기’가 해소될 수 없고, ‘기후에 관한 정의’가 세워질 수 없다면, 우리는 기후만 말할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한국 자본주의 속에서 노동중심을 어떻게 세울 것인가도 토론해야 할 것이다. 아니 노동계급운동은 적어도 그렇게 접근해야 할 것이다. 그 점만으로도 이 날 사파포럼의 주제는 의미가 있었다.

사파포럼에서는 이런 문제의식으로 발제자의 발제가 이뤄졌다. 어떻게 구동파는 가능했으며, 어떻게 구동파는 동맹파업의 의미를 구체화했는지, 그리고 그 속에서 노학연대 혹은 넓혀서 노동과 노동외부의 좌파는 연대를 넘어서 하나의 투쟁을 만들어낼 수 있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에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지.

구동파에 대해서 참가 노동자들의 구술은 기록되고 책으로도 엮어나왔다. 하지만 당시 참가했던 노학연대자가 ‘당사자’로 구동파를 증언하고 의미에 대해서 발제하는 것은 이례적이다. 발제자인 권영숙 사파기금 대표는 당시 서울대 노학연대 (LT)의 일원이었다. ‘노동운동탄압’에 맞선 구동파는 대우어패럴 노조위원장과 사무장 체포등을 계기로 4일간의 파업으로 이어졌다. 위장취업 학출들과 학습모임을 통해 각성된 주변 2개 사업장이 오후에 바로 동맹파업에 들었고, 이후 2개 사업장이 더해졌다. 이른바 ‘민족민주운동’의 지지 행동도 있었고, 지역에서 구동파 연대 움직임이 산발적으로 있긴 했지만, 구동파 당시 구로동에서 가두투쟁과 매일같이 유인물을 대대적으로 뿌리는 가두 선전을 주도한 것은 서울대 중심의 노학연대투쟁(노투)와 비합법 정치서클들, 그리고 구로동 현장에 들어간 ‘위장취업 학생운동 출신(학출)들이었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과 언론의 흑색선전과 탄압, 단수 단전조처 속에서 단식파업이 된 상황의 지속, 동맹파업 사업장들이 구사대 침탈로 하나씩 격파되는 가운데, 대우어패럴만의 고립된 투쟁이 되었다. 이때 6월 28일, 29일 양일간 서울대 학생 18명이 공장 지붕을 타고 공장내 농성에 합류하였다. 그리고 학생들이 합류하며 공장내에서 환호성이 터지면서 기세를 올리자마자, 구사대와 사복경찰들 4-500명이 협공으로 공장내로 침탈하여 파업노동자들과 대학생들을 폭력적으로 연행하며 파업을 강제 종결지었다.

구로동맹파업동안 5개 사업장에서 1400명이 동맹파업을 벌였고, 5개 사업장에서 연대투쟁을 벌여 총 2500여명의 노동자가 투쟁에 참여하였다. 구동파로 노동자 43명이 구속되고 불구속 38명, 구류 47명이었고 해고노동자가 1500여명이었다. (그러나 대학생 구속자, 수배자등은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다. 권대표 역시 마찬가지다). 결국 구로동맹파업의 현장내 결과는 노조탄압을 분쇄하지 못하고 노조의 궤멸이었다.

결과론을 중시하는 이들은 또 맹동주의라 하겠지만, 서서히 살아나기 시작한 ‘민주노조운동’이 이제 70년대와 달리 80년대 전반기 변혁운동 속에서 노학연대와 위장취업 학출들과의 결합을 통해 계급적 노조운동으로 진화하는 것을 극구 막기 위한 국가와 정권, 자본의 노동운동 탄압은 결국 넘어서야 할 도전이었다. 대우어패럴 노조가 6월 24일 파업을 시작하면서 낸 입장문처럼 말이다. 즉 “노예로 살 것인가, 싸워 이길 것인가”의 기로였다.

구로동맹파업은 민주노조와 변혁운동의 결합의 단초였고 계급적 노조운동의 맹아였다. 노학연대와 위장취업 학출들이 구로공단 수십개의 공장안으로 스며들어가 만든 조직적인 성과였다. 노동자들 역시 70년대처럼 자생적인 노사분규를 일으킨 것이 아니라 조직적인 학습을 통해서 스스로 의식화되어 일으킨 동맹파업이었다.

하지만 ‘최초의 동맹파업’이란 기록은 지금까지 제대로 바꾸지 못하고 있다. 민주노총이라는 이름의 조직노동화가 이뤄졌지만, 기업별 노조에 불과했던 80년대 전반기, 후반기보다도 노동계급의 계급적 단결은 허약해졌고, 동맹파업은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총파업이 뻥파업이 되었다 한탄만 하기전에, 지역내 업종 산별, 기업규모, 정규직 비정규직을 뛰어넘는 1985년 구로공단에서 벌어졌던 ‘지역동맹파업’에서부터 교훈을 얻고 그 맹아적인 형태를 실천하는 것은 어떨까? 발제자의 마무리 결론이었다.

포럼은 오늘날의 노학연대에 대해서 제대로 토론하지 못했다. 토론자들은 1985년 구동파의 역사적인 사실과 어떻게 가능했는지 이해하는데 집중했다. 그만큼 낯설다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은 왜 가능하지 않은지에 대한 토론으로 비약했다. 그 중간을 채워야할 것이다. 발제자 말대로 잠재태를 가능태로 만들고, 이를 현실태로 만드는 것이 바로 운동이고, 그것이 운동의 역사로부터 배워야할 점이라는 점에서.

한국 노동계급의 단결을 위하여!
총파업과 사회적파업의 정신으로!

2025. 10. 09.
사회적파업연대기금

제24회 사파포럼 현장사진 앨범보기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은 9월12일 세종호텔노조가 고공농성 100일을 넘어서면서 3년 9개월만에 회사와 ‘교섭’하는 자리에 압박을 가하기 위한 서울고용지청 앞 결의대회에 참석하였다. 이에 앞서 사파기금은 세종호텔앞 점심 선전전에 함께 하고, 고진수 지부장과 인사를 나눴다.

3년 9개월만의 교섭이라고 했다. 이재명정부가 나선 것이 분명하고 당장의 사회정치적 압박을 피하기 위해서였을 수도 있다. 세종호텔 이사회는 복직을 포함한 안을 만들어 오라고 ‘대표이사’인 오세인에게 말했다. 노조는 로비에 들이쳐서 당장의 교섭자리에 나오라고 요구했고. 2주내에 1차 교섭을 하기로 했고, 서울 고용지청은 회사에 일정을 제시하여 9월12일 서울고용지청 내에 교섭장이 차려졌다 (이때 노조도 노조의 교섭일정을 제시했어야 한다. 그것이 ‘동등한 교섭’의 시작이다)

1차 교섭에 맞춰서 결의대회를 열기로 했다. 민주노총의 결의대회라고 하였다. 민주노총과 서울본부의 온갖 노조 조끼들이 꽉 채우지는 못하더라도, 투쟁에 끌려가는 행보를 지금껏 보였어도, 적어도 이날, 즉 고진수 지부장의 피눈물나는 고공농성을 축으로 하여 노조와 연대자들의 포기하지 않은 투쟁으로 만든 자리인 만큼 노조의 결의대회로 자신들의 조합원의 투쟁을 ‘엄호’하는 자리로 만들었어야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노조 깃발도 노조 조끼도 많지 않았고, 다수가 20대 청년 ‘말벌들’과 연대단체와 연대자들이었다.

고공의 고진수 지부장은 9월12일 이전에 몇번이나 참여를 독려하는 ‘호소’문을 격문처럼 올렸다. 마치 ‘난장이가 쏘아올린 공’처럼. 조직노동이 힘을 실어달라고, 이번 첫 교섭 자리에서 우리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절대 물러서지 않는다는 것을! ‘복직’은 최대한이 아니라 최소의 요구라는 것을 드러냈어야하는 자리였다.

아니나다를까. 교섭장에 나온 대표이사라는 자는 이 자리는 ‘교섭’이 아니라 ‘인사하는 자리이고 ‘대화’하는 자리라고 했다. 물론 복직에 대한 언급조차 하지 않았고, 복직절차를 위한 안도 가지고 오지 않았다. 고공농성 100일을 넘어서고, 세종호텔의 노조 대표자들과 만난 자리를 ‘교섭’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저 뻔뻔함. 아니 우습게 보려고 드는 자세. 문제 많다.

세종호텔 이사회가 말을 했다고 해서, 뒤에 이재명 정부가 있다고 해서, 이 ‘교섭’이 쉽지 않으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그러므로 이 결의대회는 달랐어야 한다. 좀더 엄호의 결의를 보였어야 하고, 절대 사수의 기개를 보였어야 하고, 세종호텔 사측에게 세를 과시했어야 한다. 또한 노동자투쟁, 특히 권영숙대표의 말을 빌자면, 고공농성을 ‘정리’하는 것으로 노동포섭의 쇼케이스(showcase)를 만들려고 한다는 이재명정부의 허튼 짓을 막기 위해서도, 투쟁으로 교섭을 돌파하는 자리로 만들었어야 한다. 그리고 자리에 나온 오세인이 주변의 기세에 눌러 교섭자리에 말 한마디 잘못하면 큰 일 날 듯이 만들었어야 한다. 하지만 과연 그랬는가?

첫 교섭자리에서 그런 기세와 기개를 더욱 선명하게 보이지 못한 것은 유감이다. 첫걸음에서 오금을 박는게 중요한데 말이다. 자본의 의도는 이미 드러나고 있다. 가능하면 시간끌기. 시간 끌어서 이 투쟁을 가능하면 지우고, 정권의 눈에서 멀어지게 만들기, 그리하여 다시 장기전으로 가기. 추석전에 내려오게 하자고? 그렇다면 결의도 연대의 엄호도 달라져야 한다.

9월 24일 다음주 수요일에 2차 ‘교섭’이 열린다. 교섭장에 들어가는 노조측 대표들 – 서울본부장, 서비스연맹 호텔본부장, 그리고 사무장-은 교섭을 명실상부한 교섭이 되도록 더욱 힘있게 발언을 하길 바란다. 2차교섭에 과연 얼마나 많은 이들이 모여서 엄호할까? 1차 교섭에서 조직으로 엄호하지 못한 민주노총, 서울본부, 그리고 특히 서비스연맹은 조직적인 엄호의 자리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저들이 ‘대화’라고 말하는 자리가 노자가 맞장뜨는 자리, 즉 단체교섭 자리라는 것을 분명히 각인시키고, 다시 매무새 고치도록 만드는 방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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