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을 맞으며
연대에서 동맹으로 향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사회적 연대로 열어젖힌 2011년에서 2024년 남태령의 연대까지
– 사파기금의 ‘사회적연대‘운동과 희망버스를 기억하며
“운동은 주체를 넓혀가는 흐름이다. 그리고 그 주체는 연대운동을 통해서도 넓혀진다. 그런 점에서 노동에 대한 사회적 연대는 바로 함께할 세력, 즉‘동맹’을 구축하는 과정이다”. (권영숙, <황해문화>2014 여름)
한국 사회는 희망에 목말라있는 사회입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노동의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려는 시도에 목말라 있습니다. 그만큼 민주화이행후 노동배제적 민주주주의 속에서 노동의 사회적 고립은 심각했습니다. 2011년 ‘노동의 절망’ 상태를 뚫고 부산 영도 한진중공업을 향하는 희망버스로부터 시작된 노동에 대한 사회적 연대의 의미는 컸습니다. 전태일이 죽어가면서 절실히 찾았던 노동자 친구가 바로 사회적 연대라고 봅니다. 2011년은 1970년대 이후 산업화를 질주해온 대한민국에서 최초의 유의미한 노동에 대한 사회적 연대운동의 등장이라고 할 만했습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어떻게 희망버스로 시작된 노동의 사회적 연대를 지속적인 문제의식으로 발전시키고 장기적인 전망으로 추동할 동력을 확보하는가였습니다. 2011년 2차희망버스 직후인 7월 17일 시작된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은 희망버스로 시작된 노동의 사회적 연대를 장기적인 문제의식으로 결집하고, 나아가 파업기금이 부재한 채 파업을 시작하면서 돈의 압박에 스러져가는 한국노동자들의 파업을 지원하기위한 하나의 제도적 장치를 지향하는 연대운동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한국의 노동은 파업권이란 헌법적인 권리를 가졌으나, 돈 앞에서 속수무책이었고 스러져갔습니다. 파업기금의 부재는 곧 노동자의 파업권의 유명무실화로 이어졌습니다. ‘단지 용역깡패와 공권력의 침탈 뿐 아니라’ 돈이 이들의 피를 말렸습니다.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은 가장 일찌기 손해배상가압류를 통한 자본의 새로운 노동통제에 주목하며 이를 ‘사회적 연대’로 뚫고 나가자고 제안한 연대운동이었습니다. 나의 노동의 댓가인 “피같은” 돈을, 정리해고, 비정규직화, 노동파괴의 현실에 맞서 싸우는 정당한 파업에 대한 파업기금으로 조성하자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희망버스 이후의 움직임들은 희망버스를 반복 재현하려는 시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 어렵게 시작한 노동에 대한 사회적 연대의 문제의식을 한 단계 넘어서는 연대적 사회운동의 조직화와 노동중심사회를 향한 문제의식과 정치로 모아가지 못하였습니다. 한편 노동자투쟁의 당사자주의, 노조운동의 관료화, 노동운동의 전망 부재는 사회적 연대자들을 낙심하게 만들었고, 떠나게 만들었습니다. 다른 한편 노동자투쟁에 대한 사회적 연대는 개인들의 주관성과 자발성에 기초한 연대를 넘어서지 못하면서 범위를 확대하지 못하고 소진하게 됩니다.
2024년 12월3일 대통령 윤석열의 무모한 계엄 선포가 사회적 연대운동에 예기치 못한 새로운 신호탄이 되었습니다. 윤석열퇴진/탄핵 캠페인 자체로서 가능했던 일은 아닙니다. 12월 21일 밤 서울 접경 남태령에서 경찰에 막혀 고립된 농민시위를 SNS에서 본 수만명의 이름없는 연대자들의 발걸음이 다가왔습니다. 마치 2011년 7월 2차 희망버스부터 영도로 가는 연대의 발걸음처럼. 그리고 남태령의 연대자들은 윤석열 ‘탄핵’을 넘어서, 이 땅의 억압받는 이들에 대한 연대에 나섰습니다. 성소수자들은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손을 잡았습니다. 2011년 7월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이 노동의 파업권을 인정하는 운동으로서 사회적 파업기금을 사회적 연대로 모으자는 제안을 했을 때, 매일 수십만 수백만원의 연대기금이 쏟아졌을 때처럼.
너무 반가웠습니다. 눈물나도록 고마운 일입니다. 하지만 당연한 일입니다. 노동하는 사람이고 노동자가 될 사람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면서 사회적 연대에 나서는 것, 사회적 연대는 그 지점에서 출발합니다. “왜 내가 이렇게 노동을 몰랐지?”라는 가책과 각성은 2011년에도 휩쓸었던 사회적 정서였습니다. 하지만 가책과 속죄의식, 분노는 시작일뿐입니다. 노동의 사회적 고립을 뚫고 노동과 접속했다면 이제 중요한 것은 우리는 과연 ‘이번에는’ 과거를 뛰어넘을 수 있을까, 우리는 정말 분노와 절망을 넘어서 새로운 사회적 연대의 서사를 써낼 수 있을까. 그래서 이 사회를 재구성하는 한 걸음을 내디딜 수 있을까 입니다.
왜 희망버스는 2012년 노동자의 죽음을 멈추지 못했을까를 생각해봤으면 합니다. 저는 노동의 고립의 반대어는 ‘사회적 연대’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을 제안했습니다. 하지만 사회적 연대를 더욱 넓게 확장하면 노동의 죽음을 멈추고 노동의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이는 노동자 주체와 노동의 사회적 연대세력 모두를 향해 참으로 곤혹스런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2011년의 사회적연대가 시작은 창대하였으나 갈수록 미미해지고 그 빛을 잃어가던 과정이었다면, 이번 사회적 연대의 움직임은 다르길 기대합니다. 노동에 대한 사회적 연대가 아니라 노동하는 이들의 상호연대가 되길 바랍니다. 사회적 연대가 더욱 사회적으로 확장되길 바랍니다. 사회적 연대가 더욱 정치적으로 선명해지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사회적 연대로부터 사회적 동맹으로, 방향을 가진 정치적 힘으로 스스로 진화 진보하길 바랍니다.
한걸음씩 함께 웃으면서, 시작은 미미하지만 끝은 창대하길 다시 바랍니다.
2025.1.14
사회적파업연대기금 대표 권영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