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조합의 의미도, 사회적 연대의 의미도, 파업기금의 의미도 깨달았던 소중한 기회, 하지만 “우리의 투쟁은 오늘부터 1일”
2022년 6월2일 대우조선내 8군데 거점을 점거하면서 조선하청지회의 파업이 시작되었다. 대우조선에서 사내하청노조의 첫 전면파업이었다.
파업권을 획득한 하청업체의 조합원들을 중심으로 1~20명씩 조를 짜 8곳의 거점을 마련하고 24시간 거점을 사수하며 파업을 시작했다. 정규직, 비정규직 할 것없이 현장 파업을 응원하거나 암묵적인 동참까지 이어지면서 대우조선 노동자들의 단결은 확대되었다. 하지만 그런 모습에 위기감을 느낀 대우조선 원청자본은 사내하청노조의 파업 일주일만에 구사대를 동원하는 등 노골적인 파업파괴 행동을 감행했다.
조합원들중에서는 수년간 투쟁의 경험을 통해 경험한대로 또다시 정규직들이 원청 관리자와 함께 우리 투쟁을 막아서는구나라는 실망감과 함께 갈수록 심각해지는 구사대의 폭력을 감당하기 힘들어하면서 포기하는 조합원도 생겨났다. 그 과정 속에서 조합원들의 부상이 속출하였고 우리의 파업이 노노갈등으로 변질되는 것을 막기 위해 8곳 거점투쟁을 정리하고 1도크 블록을 점거하는 투쟁으로 전술을 변경하는 결정을 하게 되었다. 대우지회 집행부 또한, 파업기간 동안 일부 어용세력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나름의 역할을 해주었지만 1도크를 점거하는 투쟁으로 파업 거점이 옮겨지자 더 이상의 역할을 하지 않고 우리의 파업 중단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 때를 기점으로 거제도 옥포만 대우조선에서 외롭게 진행되었던 거통고의 파업과 조선소 하청노동자들의 현실이 전국에 알려졌고 각계 각층의 연대가 시작되었다. 각계각층의 연대는 이제 갓 조합원이 되어 파업에 동참하고 있는 조합원들에게 큰 힘이 되었고, 거통고조선하청지회 파업의 사회적 의미에 대해서 더 깊게 깨닫게 만들었다. 구사대들의 폭력과 언제 끝날지 모르는 파업으로 개개인이 느꼈을 불안감은 감당하기 어려웠지만, 수많은 연대의 모습과 소식은 동지들에게 희망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하며 파업대오를 더욱 강고히 지킬 수 있는 힘으로 바뀌었다.
거통고 조선하청지회는 그동안 현장 안에서 여러차례 투쟁을 해왔지만 이같은 연대의 힘을 받아보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파업 참가자 각자가 느끼는 바가 남달랐고 우리만이 아닌 많은 이들이 이 투쟁을 함께 하고 있다는 생각에 노동조합이 갖는 의미 또한 내부적으로 변하기 시작였다. 하청노동자도 노동조합을 굳건하게 하고 싶다는 갈망이 커졌다. 조선소 안에서 하청노동자로 살면서 노동조합을 하겠다는 것은 많은 것을 포기하고 희생하겠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기에 지금까지 참아왔지만, 이제 너무나도 당연한 권리조차 외면당해온 하청노동자의 삶을 바꾸고 싶어했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외쳤다. “이대로 살 수 없다”, “하청노동자도 인간이다. 노조할 권리 보장하라!”
시간이 흐를수록 대우조선 원청과 구사대들은 더욱더 거침없이 폭력을 자행했고, 대우조선지회는 대의원들의 요구로 조직변경 총회까지 열게 되었다. 그 소식을 들은 하청지회 조합원들은 대우지회가 민주금속의 길을 지켜주길 바랬고, 동시에 우리의 투쟁으로 대우지회가 위기에 직면하는것에 대한 미안함도 함께 느끼고 있었다. 이 마음 때문에, 우리의 최종 거점인 도크게이트에서 대우지회 상집들이 파업 철회를 요구하는 피켓팅 시위를 보면서도 파업 참가자 단 한 명도 문제제기하지 않고 대우지회가 힘을 잃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지켜보고만 있기도 했었다. 강고한 파업이 이어지자 정부가 개입하기 시작했고 윤석열 대통령이 공권력 투입 의지를 공개적으로 밝혔다. 도크게이트에서 농성하던 7명의 결사대 동지는 물론 지키고 있던 동지들도 공권력이 투입되면 바로 바다에 뛰어들겠다는 결심으로 보이면서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가 더욱 강해졌고 파업 지도부는 불상사가 일어날 것이 분명한 상황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합의를 하는 과정에 큰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2022년 7월 22일 조합원 총회를 통해 우리는 사측과 합의를 했다. 1도크 거점을 풀며 파업을 일단락지었다. 전술을 바꿨을 뿐 “우리의 투쟁은 오늘부터 1일”이라 외치며 다음 날 희망버스를 타고 찾아온 동지들과 즐거운 시간을 함께 했다. 하지만 그 후 부족한 합의 내용으로 인한 문제점들은 나타나기 시작했다. 거통고 조선하청지회는 합의를 하고도 또 다시 힘든 투쟁들을 이어갈 수 밖에 없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 연장선에서 투쟁 중이다.
51일 파업기간 거통고조선하청지회의 부지회장으로서 현장을 책임지는 위치에서 현장 밖으로 나가지 못했던 나는 파업이 끝나고 난 후에야 연대해 주었던 많은 분들을 만나보기 시작했고 사회적파업연대기금도 만나게 되었다.
10000 x 10000 기금 모금으로 투쟁하는 동지들이 파업으로 인한 생활의 어려움이 해소되는 걸 직접 보고 느낀 나로서는, 사파기금이 갖는 의미가 크게 다가왔다. 그래서 나는 주저없이 사파기금 정기이체를 신청하여 사파기금의 연대자가 되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파기금과 같이 연대자들이 아닌 금속노조가 조합비 외에 파업기금을 공개적으로 모은다면 우리의 투쟁 양상에 어떤 변화가 나타날까? 그 모습을 보는 자본은 어떤 생각을 할까? 생계를 이유로 투쟁을 포기해야만 하는 상황이 줄어들면 어떨까? 이런 고민도 자연스레 하게 되었는데, 그 계기 또한 사회적 파업에 사회적 연대를 표방한 사파기금이었다. 파업기금이 파업에 중요하다는 것을 사파기금이 알려주었다.
현실적으로 아직 충분히 조직되지 못한 비정규직 사업장에서 노동조합을 한다는 건 해고를 예상해야 하고 저임금의 굴레안에 있는 노동자가 투쟁을 한다는건 생활고를 예상해야 한다. 그 때문에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저항보다는 적당한 타협으로 현실을 받아들이고 차별의 굴레속에서 사는 것을 마치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전국의 수많은 동지들이 열악한 현실을 감당해 나가며 투쟁하는 곳이 셀 수 없이 많다.
사파기금은 이런 현실을 뚫고 나가는데에 있어 그 역할이 분명하다고 생각하고 더욱 더 많은 연대자들이 함께 했으면 하는 바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