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사파포럼 "노동계급정치, 어떻게 할것인가"

제1회 사파포럼 “노동계급정치, 어떻게 할것인가”

제 1회 사파포럼 <노동계급정치, 어떻게 할 것인가?>

1997년 민주노총이 주도한 국민승리 21이 만들어진 지 15년, 이른바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를 추구한지 십년이 훌쩍 넘었지만, 성과는 불확실하고 나아가 여전히 무엇이 노동자 정치세력화인지 모호합니다. 특히 통진당 사태를 거치면서 노동자 정치세력화 혹은 노동계급정치에 대해 회의를 품는 이들도 많습니다. …

그렇다면 정작 노동운동의 현장 활동가들은, 노동자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요?
과연 ‘노동자 정치세력화’와 노동계급정치는 무엇인지, 같은 것인지, 그리고 97년이후 지금까지의 진보좌파 정당운동과 노조주도 정당운동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요?
통진당의 부정선거사태를 어떻게 보아야하며, 다가오는 대선을 앞두고 노동자들은 어떻게 대응해야할까요?
무엇보다도 노동운동을 살리고 노동계급정치와 결합하기 위해 지금 무엇을 해야 할 까요?
정당운동이 아닌, 노동운동과 노동현장 활동가들의 목소리가 궁금합니다.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자 합니다. 노동(계급)정치와 한국의 진보좌파 정당운동에 관심있는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일시: 2012년 8월28일(화) 오후 7시
장소: 서울시 정동배재빌딩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1층 교육장
참가비: 3천원

사회적파업연대기금 1년을 맞이하며

(2011년 7월 17일,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을 처음 제안하는 글을 써 주신 권영숙 님께서 기금 1주년을 맞이하여 그동안 참여해 주신 분들에 대한 감사와 보다 많은 분들의 기금 참여를 당부하는 글을 써 주셨습니다. 공유합니다.)

“‘사회적 파업기금’ 조성을 위하여,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면…..”
1년전.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의 씨가 됐던 글의 제목입니다.
이렇게 1년을 지나면서 사파기금이 버티고 나아가 커져나갈 줄을 누가 예상했을까요.

솔직히 말해, 쉽지 않았습니다다, 그리고 미리 생각한 일이나 역할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하나의 글이 씨가 되고, 말이 풍문이 되어 돌고, 함께 하는 사람들이 모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는 과정 내내, 스스로 그리고 우리들이 이 일을 맡기에 적절하지 않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애초 말을 꺼낸 사람의 ‘업보’는 무거웠지요. 제안자로서, 이 기금의 의미와 뜻을 계속 유지하고 키워나가야 한다는, 스스로 짐진 자의 맘으로 버텼습니다. 또한 기존의 조직과 단체에서 진행하기 힘든 아이디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사파기금은 묘하게 그 어디에도 걸치지만, 그 어디의 것도 아닌 아이디어, 모습, 활동방식을 취해왔지요. 앞으로도 쭉 그러리라 싶습니다.

회고해보면, 처음 잠시의 ‘불같이’ 일었던 기금은, 이후 소강상태였다가 10월 ‘한진중 김주익 8주기 노동토론회’를 통해서 새로운 각오를 다졌고, 12월 ‘장투사업장 후원을 위한 주점’을 성공시키기위해서 정말 죽을동 살동 매달려, 당시 악조건속에서 어마어마한(?) 매상을 올렸습니다.^^ 그러면서 1차 어려움을 탈피했지요. 그리고 이어 지난 2월 ‘정기계좌 캠페인’을 시작하면서 이른바 ‘시즌2’에 돌입했습니다. 기금을 부정기적 이체에 의존해선 도저히 안정적인 기금 확보가 힘들다는 판단과 함께 이제 기금을 정기계좌로 후원받는다는 것은 사파기금을 하나의 사회적 장치로 구축한다는 장기적 전망을 조금씩 타진하기 시작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에 얼마의 정기계좌를 확보하며, 일정한 토대는 세웠다고 봅니다.

그리고 지난 7월초 ‘민주주의와 노동’ 학교를 거치면서 사파기금은 노동의 시민권을 긍정하는 표시로 노동을 위한 파업기금을 사회적 연대로 모으는 기금일 뿐 아니라, 우리 사회 노동문제를 사회화하고 의제화하는 포럼으로서 역할을 꾸준히 해나갈 것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기금’이니, 지난 2월이후 아직도 고민하시고 있는 분들께서 다시 한번 생각하시고, 함께 해주시길 바랍니다.

노동이 돈의 압박에 스러지지 않게 하는 최소한의 사회적 연대,
그리고 특정사업장이 아니라 필요로 하는 모든 사업장을 위한 사회적 예비금고,
그리고 돈을 모아두는 것이 아니라 일정금액이 되면 바로 현장에 지원하는 기금,
그것이 사회적파업연대기금입니다.
지금이라도 함께 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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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파업연대기금 최초 제안문 

 

‎’사회적 파업기금’ 조성을 위하여,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면…..
by Young-sook Kweon on Sunday, July 17, 2011 at 7:57pm

파업기금을 아는가? 대체로 서구 노동운동사에서, 노조운동이 전국화 산별화되면서, 파업기금을 조합원으로부터 월단위로 받아 쌓아놓는다. 그리고 파업한다.. 왜냐하면 파업을 하고, 기계를 멈추더라도,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이 굶을 순 없으니까, 자식들을 키우고 학교를 보내야하니까…

… 근데 한국에선 이 파업기금이 낯설다. 민주노조운동이 시작된 1987년이래, 노조들은 파업중 ‘무노동무임금’에 맞서 싸우는데 초점을 둘 수 밖에 없었고, 그 과정에서 파업중인 개인들의 생계는 각각의 노동자들의 몫이 돼버렸다. 그리고 그 상황은 비참했다. 그리고 갈수록 비타협적이고 적대적인 자본의 교섭불참, 국가의 냉대와 친자본적 태도속에서, 한국적인 노동현상이 돼버린 소위 장투 사업장(장기투쟁 사업장)들에서 이는 특히 심각한 문제였다. 노동은 파업권이란 헌법적인 권리를 가졌으나, 돈앞에서 속수무책이었고 스러져갔다. 쌍용자동차의 사례가 그랬다.

그리고 한진중공업 역시 마찬가지… 6개월여의 파업중, 이들의 인생은 이미 절단났다. 그 과정에서 4백여명의 노동자들은 대개 떠나고 끝까지 남은 이들은 100여명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한진중 노조지회장 채길용의 야합적 ‘직권합의’도 있었다… 그런 것이다. 파업한다고 그들이 인간이 아닌가, 그들은 평범한 이 사회의 필부들, 가장들, 범인들이다. 그리고 돈은 이들의 피를 말린다. 단지 용역깡패와 공권력의 침탈뿐 아니라.

그래서 제안하고 싶다, 이제 한진중 파업과 김진숙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사회적 파업기금’의 형성에 나서길… 일부에서 이미 한진노동자들의 가족대책위 후원기금 모금을 하고 있다… 근데 그 의미를 확대해서, 노동에 대한 이 사회의 ‘연대’를 위해서, 그리고 불가피한 파업 및 노동자의 파업권에 대한 강한 긍정의 표시로, ‘사회적 파업기금’ 의 조성에 나서길…

모든 가능한 방법을 모색해본다… 희망버스를 타자고 한다, 그러나 희망버스를 타는 사람들이 김진숙에 관심갖는 그 모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를 지지하고 한진사태를 안타까워 하고, 노동자들도 이 사회의 성원이라고 생각할 사람들은 이보다 많으리라, 지난 7월초 희망버스를 탄 1만여명보다는 많으리라. 아니 그리 믿고 싶다.

이제 7월 30일 희망버스를 탈수 없는 사람들은, 다른 연대를 할 수 있다. 시간이 없는 사람들은, 그간 배제된 노동에 대한 연대의 표시로 나의 피같은, 내 노동의 결실인 금전으로 그들의 파업을 지원하자.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고, 돈보다 귀하다는 것을..
그리고 그 방법들을 실행가능하도록 만들자.

‎’민주주의와 노동’ 학교 참고문헌을 공유합니다.

<참고문헌 (References)>

강의의 이해를 돕기 위해 관련 문헌을 간단히 참고자료로 제공합니다.
강의를 들은 후에 그리고 강의를 듣기 전에 읽어오시면, 강의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1. 1강(6/25) ‘한국의 노동문제, 무엇이 문제인가’ 참고자료

임영일, 2010, “한국 노동운동의 위기와 진로”
정진상, 2006, “노동계급 형성의 구조적 조건의 변화: 1987-2003”

2. 2강(7/2) ‘한국의 노동시장과 노동법체제’ 참고자료

김유선, 2010, “2010년 비정규직 규모와 실태”
이병훈, 2010, “한국 노동조합운동의 연대성 위기”

3. 3강(7/9) 한국의 민주주의와 노동 – 비교사적 관점에서 본 역사와 교훈

최장집 – 조희연 대담, 2006.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 위기에 서다”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이 여는 ‘민주주의와 노동’학교
– 학교개설의 취지 및 강의내용 소개

1. 취지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은 노동자들의 파업권등 노동자의 권리를 시민권으로 긍정하며 노동을 위한 파업 및 생계기금을 모을 뿐 아니라 노동문제를 사회적인 의제로 만들어가는 토론의 장이 되기 위해 여러 모로 노력해왔습니다.

분명히 노동문제는 2012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가장 ‘뜨거운 감자’입니다. 과연 노동은 선거민주주의와 어떤 관계인지, 노동과 관련해 한국의 민주주의, 민주화를 어떻게 평가해야하는지라는 질문은 끊임없이 제기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어떤 시각에서 노동을 민주주의의 담론속에서 바라봐야 할지 모호합니다.

또한 지난해 희망버스운동으로 촉발된, 노동에 대한 사회적 연대의 확장은 1998년 구제금융 사태이후 14년동안 우리 사회의 최대현안이 된 정리해고 문제와 9백만에 달하는 비정규직 문제를 전사회적인 힘을 모아 해결할 수 있는 기회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후의 과정과 4.11 총선 결과는 노동하는 자들의 희망을 말하기에 아직 멀었다는 것을 절감하게 했습니다.

이제 12월 19일 대통령선거가 딱 6개월 남았습니다. 그러나 코앞에 닥친 대선을 앞두고서도 다시 사회적 의제의 실종, 특히 진보적 의제의 실종이라는 말들을 많이 듣습니다. 심지어 ‘2013년 체제’라고까지 명명된 중요한 대선정국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거시적인 문제의식을 곧추세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노동의 문제의식, 희망버스가 남긴 성과도 바래져 갑니다.

이제 지난 총선의 씁쓸한 결과와 공안 광풍, 그리고 진보적 의제의 실종과 주체의 부재속에서 지쳐가는 우리의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길을 나서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기운내어 질문해봅니다. 이번에는 제대로 된 질문을 하고 제대로 된 답을 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과연 이 땅의 민주주의는 노동배제적인 민주주의로 계속 갈 수 있을까요? 이 땅의 민주주의에서 결여된 것은 무엇이며, 우리 사회 노동현실은 과연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인가요? 과연 선결해야할 노동문제는 무엇인가요?

이 땅의 노동정치는 어떻게 나아가야할지,그리고 한국 민주주의는 어떻게 재구성해야 하는지, 그리고 노동문제를 어떻게 사회화하고 대안을 모색해나가야 할지에 대해 머리 맞대고 허심탄회하게 얘기하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2. 강의 요강

*이 강의를 이런 분들께 권합니다:
노동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으나, 어떤 시각으로 봐야할지 그리고 문제가 무엇인지를 궁금해하는 시민들
– 노조활동을 하면서 노동문제에 대한 이론과 실천을 연결하는 좀더 심도깊은 정리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노동운동 활동가들과 노동자들
– 88만원세대이고 우리 사회 불안정노동의 문제를 개인적으로 느끼는 미래의 노동자들, 그리고 현재 학생으로서 어떻게 노동문제에 대한 문제의식을 확장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학생들.

*강사소개: 권영숙 박사는 컬럼비아대학에서 민주주의와 노동의 관계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현재 노동사회학, 정치사회학, 비교사회학, 인권/시민권 이론을 대학강단에서 강의하고 있습니다.

– 강사의 말: “이 코스는 완전히 학술적이지도 않고 완전히 대중적이지도 않습니다. 노동문제에 대해 어느 정도 문제의식을 이미 가졌으나, 심도깊은 총정리가 필요한 이들에게 노동문제에 대해 3강에 걸쳐 일목요연하게, 그러나 세부적인 현실에 대한 조명을 통해서 진행하되, 이론과 개념 역사를 한국의 현실에 접목시키는 강의로 진행할 것입니다. 난이도는 초-중급입니다. ”

3. 프로그램 

– 일정: 6월25일 첫 강의를 시작으로 7월9일까지 3차례에 걸쳐, 매주 월요일 오후 7시30분 시작합니다.
– 장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13층 교육실
– 강의는 1시간20분의 강의와 질의응답 및 토론으로 총 2시간여동안 진행합니다.
– 강의후 뒷풀이 모임을 가집니다. 함께 했던 소감 나누기 및 요즈음 느끼는 생활고민, 시사문제,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나누어요.

1) 1강(6/25) 한국의 노동문제, 무엇이 무엇인가
– ‘장투사업장’ 문제의 본질
– 노동의 ‘시민적 권리’란
– 노동문제를 바라보는 기본틀과 개념들
– 민주화이행이후 민주주의의 기본 궤적
– 이행이후 민주노조운동에 대한 평가

2) 2강(7/2) 한국의 노동시장과 노동법체제
– 노동파괴와 노동계급의 해체
– 한국의 노동시장, 어떻게 변해왔고 무엇이 문제인가
– 민주화 이행이후 노동법체제의 변천사
– 새로운 제도적 장치를 위하여

3) 3강(7/9) 한국의 민주주의와 노동 – 비교사적 관점에서 본 역사와 교훈
– 노동과 민주주의 : 비교역사적인 고찰과 교훈
– 한국의 노동과 민주주의, 그 25년의 관계와 역학
– 노동없는 민주주의의 한계와 노동통합적인 민주주의의 가능성

3. 참가신청 

1) 참가비 ; 3강의 2만원 (개별 강의 신청은 각 1만원)
2) 신청방식 :
– 개강전까지 60명 선착순 신청을 온라인으로 받습니다. 서둘러 주세요..^^
– 예약신청은 www.sapafund.org를 통해서 하시고, 계좌로 입금해주시면 완료됩니다. 입금계좌 : 씨티은행 131-09047-269-01 최철호(사파기금)
– 문의 sapafund@gmail.com

 

작성: Young-sook Kweon 2012년 5월 7일 월요일 오전 5:38 ·

1991년 5월 6일 오늘은 한진중공업 박창수 노조위원장이 의문사한 날이다.

1991년 5월6일 새벽 4시 45분, 경기도 안양병원 뒷마당에서 한진중공업 박창수 노조위원장(1960년생)이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검찰은 노조활동에 회의를 느낀 박창수위원장이 치료받던 병원에서 투신자살했다고 발표하였다.

하지만, 당시 정황과 그의 구속경위를 보면, 그의 ‘의문사’는 안기부와 연루된 것이라는 의심을 자아내기 충분했다. 이미 우리는 바로 얼마전인 4년전인 87년 1월 박종철의 고문치사 및 그 은폐사건을 겪지 않았는가 말이다. 모두들 박종철의 의문사를 떠올렸다. 우선, 의문점은 왜 안기부 조사를 받던 그가 안양병원에 있는가 말이다. 검찰은 그가 조사도중 다쳐서 치료를 받던 중이라고 했다. 하지만 더욱 묘한 것은, 시신을 보았던 부모님의 증언에 따르면, 투신했다는 그에겐 상처도 없었고 피도 흘리고 있지 않았다. 노동자, 학생들은 이 죽음을 ‘의문사’로 규정하고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안양병원앞으로 몰려들었고 안양병원과 부산 영도 한진중공업앞에선 매일같이 치열한 시위가 벌어졌다.

더구나 그가 구속된 경위는 더욱 이 죽음을 의문사 혹은 살인으로 생각하게 만들었다. 당시 한진중공업은 ‘민주노조’로 전환하였다, 그리고 그를 이끌던 초대 위원장이 박창수이다. 박창수는 부산기계공고를 졸업하고 스물 두 살이던 1981년 8월 한진중공업의 전신인 대한조선공사(전 한진중공업)에 배관공으로 입사하였다. 그리고 1986년 도시락거부투쟁을 주도했다. 50여년 식당도 없이 탈의실과 공장 모퉁이에서 머리카락과 휴지가 섞여 나오는 도시락을 먹어온 노동자들이 “우리는 개밥을 먹을 수 없다”며 사흘 동안 도시락을 던져버렸다. 회사 쪽은 결국 나흘 만에 식당을 세워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한진중공업은 민주노조를 만들었다. 작년 85크레인에 오른 김진숙위원 역시, 당시에 한진중공업 노동자였고, 그리고 해고된 1세대 민주노조 노동자이기도 하다. 박창수와 함께 한 많은 노동조합 베테랑이 아직도 한진중공업 노조의 중심이기도 하다.

그렇게 ‘민주노조’가 결성된 한진중공업은 87년이후 역시 어용노조에서 탈피한 서울지하철과 함께 90년 12월 결성된 ‘대기업연대회의’의 핵심이기도 했다. 당시 전노협(전국노동조합협의회)에도 가입돼있던 이들 두 노조들은 다른 대기업노조들, 즉 대우노조협의회와 현대노조협의회등등으로 전노협에서 멀찍이 떨어져 자기들만의 재벌노조협의회를 구성했던 노조들을 끌어들여 ‘대기업연대회의’를 꾸린 뒤, 이어 전노협을 확대한 명실상부한 ‘제조업 민주노총’을 만들려고 했었다. 만약, 이것이 성사가 된다면, 이는 민주화이행이후 터져나온 ‘노동자대투쟁’의 성과를 가장 명확하게 조직적 결과로 만드는 것이었다. 급진적인 제조업 중앙노총의 건설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전노협을 확대한 제조업 민주노총의 결성은, 당시 노태우정권과 전경련등 자본의 입장에서는 가장 골치아픈 노동 상대자를 대면하게 되는, 최악의 시나리오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안기부가 전면에 나섰다. 안기부는 이미 대기업연대회의의 결성이전에, 끊임없이 한진중공업 노동조합을 파괴하려는 공작을 해 왔다. 그리고 구치소에 있을 때도 전노협과 대기업연대회의를 탈퇴하라며 온갖 회유, 협박을 자행하였다. 사망 전날에도 병원으로 안기부 직원이 면회와서 탈퇴공작은 계속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박창수 열사는 “전노협이 나이고, 내가 곧 전노협인데 어떻게 전노협을 탈퇴할 수 있다는 말이냐”하며 끝까지 저항했다.

결국, 1991년 2월, 경찰의 대대적인 대기업연대회의 침탈이 이뤄졌다. 그즈음 파업에 돌입한 대우조선노조에 대한 지원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수련회를 열고있던 대기업연대회의의 모임에 경찰이 덮쳐 참가 노조간부 전원을 ‘제3자개입금지’ 위반혐의로 연행하였다. 그리고 핵심인물로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어 가장 강도높은 조사를 안기부로부터 받던 중, 박창수 열사는 5월 4일 이마에 상처를 입고 안양병원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그리고 하루전에 안기부 직원과 면담하고, 이틀 뒤에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하지만 그의 죽음이후, 진상규명을 위한 싸움은 험악했다. 노태우 정권은 박창수의 부모를 협박하기도 하고, 회유하기도하였다. 그ㅡ리고 급기야 경찰은 시신을 탈취하려고 안양병원에 백골단과 전경 22개 중대를 투입, 무차별적으로 최루탄을 퍼부으며 영안실 벽을 부수고 시신을 탈취해 갔다. 그리고 일방적으로 부검을 해 버렸다.

박창수의 죽음은 바로 4월말 시위도중 경찰에 숨진 명지대생 강경대의 죽음과 맞물려, 바로 비극적인 1991년 5월투쟁의 시발이 되었다. 의문사한 박창수 위원장 죽음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투쟁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그리고 ‘폭력경찰, 살인정권’ 규탄하는, 한국의 민주화 이행의 ‘제2막’을 열겠다는 5월투쟁이 가열차게 진행되었다..

그리고 그 싸움은 강경대 박창수이후 분신 자살의 행렬을 이루며 13인의 죽음이후에 멈췄다. 당시 국무총리였던 정원식에 대한 달걀투척행위가 몰고온 사회적 반동의 기류 때문이었다..매스컴과 정권의 홍보, 그리고 중산층등 이른바 화이트칼러들의 이반 및 민주화시위에 대한 염증…

6월 29일, 그의 죽음이후 근 60일 만에 박창수위원장의 장례가 치뤄졌다. 그의 부모는 그를 양산 솥발산 공원묘지에 묻었다. 지금도 박창수 열사의 아버님은 전국의 노동시위와 집회 현장을 방문한다. 세월은 가고, 그의 이름과 그가 이루고자 한 ‘노동해방’은 갈수록 요원하지만,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오늘 무엇을 생각할까.
.
사진: 박창수 열사의 모습

관련 글 – “20년전, ‘벽 뚫고 들어온 남자들’ 잊을 수가 없다  (오마이뉴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589494

1991년, 박창수 열사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던 안양병원 영안실을 백골단이 벽을 뚫고 들어왔다.

(이 사진을 기억하고 있는 분들, 그때의 역사를 기억하고 있는 분들이 계셨습니다)

: 박창수 열사 시신 사수 투쟁을 하던 그날 밤, 그리고 불타던 바리케이트를 한 번에 꺼버린 소방차, 벽을 부수고 시신을 탈취해가는 백골단의 모습을 보도했던 한겨레 신문 사진이 기억나는 군요…

그 사진을 기억하는 분들이 꽤 많을 겁니다. 저도 기억나는데요.

: 그날!

저는 이석행씨와 기아자동차노조에
밤늦게 있다가, 박위원장 죽었다는 연락을 받고 안양병원으로 급히 달려갔습니다,

병실엔 어머님이 거의 혼절한상태로 중얼거리며 욕을 퍼붓고 있었고 박위원장은 하얀 가운속에 누워 있었습니다,

급히 가운을 들어 보니 박위원장 이었습니다, 여기 저기 혹시나 해서 살펴보니 발 뒤굽치쪽에 퍼렇게 멍같은것이 보였습니다,

응급실에 수상한 사람들이있어 몰아내고
즉시 바리케이터를 치고 병원에 있는 소화기를 모두 모았습니다, 무기가 될만한것이 그것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3일간 대치하다가 결국은 옆방 벽면에 구멍을 내고 시신을 탈취해갔습니다, 그날이 오늘이군요
밤이 서늘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몇 번 만나지 않았지만
늘 말이 없고 과묵했었다는 기억이 납니다,
이토록 목숨바치며 이루고자했던 길이
오늘 만신창이로 환부를 드러내니
정말 아프고 또 아픔니다,

부디 영면하십시요! 박창수동지!

: 백골들이 공중부양하는 그 사진 저도 눈에 선합니다.

: 어이쿠! 벽뚫고 들어와 시신탈취해간 그 사진을 다시보게 되다니. 이거야 원 가슴이 떨려서.

: 그해 봄..최루탄으로 하늘을 뒤덮던…숨이라도 제대로 쉬어보려고 대로 옆골목으로 허우적 허우적 뛰어가는 우리 대오 저 앞쪽에 툭툭 떨어져 앞서가던 지랄탄….ㅋㅋㅋ 그 답답하던 20여년 전 봄 말이지요. ㅠ.ㅠ

: 기억이 생생합니다, 역사의 현장에 함께 있었군요….그 때, 병원에 뚫린 구멍은 메워지긴 커녕 더 커져가는 건 아닌지, 그리고 지금 노동을 탈취해간 세력은 누구일까요. …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이 3월 ‘1만인 계좌만들기’ 집중캠페인을 위해 그 두번째 광장 좌판을 엽니다.

(1만인 캠페인 제안서 –> www.sapafund.org )

‘1만원 1만명 월 1억 만들기 정기계좌만들기’ 캠페인을 바로 광장에서, 여러분들과 함께합니다.

온라인에서 시작했지만 온라인에서 머물지 않고 서로 손 맞잡고 이야기 나누며 노동과 연대하는 우리의 마음을 함께 하는 광장좌판입니다..

많은 분들 함께 참여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오는 토요일(10일) 시청앞 광장에서 열리는 집회에서,

당일 집회시간은,

오후 3시 : 후쿠시마원전사고 1주년집회
……. 7시 : 정리해고, 비정규직없는 세상을 위하여 – 꽃들에게 희망을.

광장 좌판은 오후 4부터 시작합니다.

일찍 오셔서 좌판 준비를 함께 해 주셔도 좋습니다.

‘희망꽃밭’에서 함께 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사파좌판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이 쌍차 희망텐트에 이어 그 두번째 ‘광장좌판’을 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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