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인사]

2022년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새로운 365일이 다시 시작된다는 사실이야말로 어쩔 수 없이 새로운 희망을 품게 하는 계기가 되나 봅니다.
연대자 여러분, 새해에 복 많이 지으시고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2021년은 사회적파업연대기금 10주년이었습니다. 10주년을 지나면서 또 한번 새겨봅니다.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이 과연 무엇이고 어떤 존재가 되어야하는지. 파업기금을 사회적으로 공공연히 조성하고 노동의 파업권을 거침없이 요구하는 사파기금의 확산 정도가 이 사회 노동연대의 바로미터가 될 수도 있겠지요. 사회적 파업이 무엇인지, 노동의 사회적 연대가 어떠해야하는지, 그 내용을 채우고 그 실천이 목표치에 이를 때, 아마 이 사회는 어느덧 한 발자국 성큼 나아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10년동안 쉼없이 달려오면서 사파기금의 모든 동력과 시간과 열정을 투쟁하는 노동자와 민중과 함께 하기 위한 기금 조성과 연대활동에 집중했습니다. 사파기금을 제안하면서 알려드린대로, “돈이 모이는대로 쌓아두지 않고 연대”하고, 사회적 연대가 절실한 곳 어디든 전국 방방곡곡의 투쟁하는 현장에 손을 내밀고 전국을 다니면서 연대하였습니다.

그렇게 모든 힘을 연대활동에 쏟느라고 정작 단체 소식지 하나 10년동안 발간하지 않았습니다. 10년 활동을 결산한 결과, 2011년이후 총 218회 연대활동을 했고, 월평균으로 하면 월 18회 기금지원 및 연대활동을 한 셈입니다. 하지만 단체 활동을 홍보하는 일은 항상 후순위로 밀렸습니다. 2011년 희망버스이후 사회적 연대가 갈수록 약해지는 가운데 사파기금의 노력이 필요한 현장은 더욱 늘어났고, 미약하나마 가진 모든 힘을 퍼붓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습니다. 하지만 사파기금의 연대자들에게 사파기금의 활동을 체계적으로 알리기 위한 소식지 발간을 계속 미룰 수 없습니다.

10주년을 마무리한 올해부터 사파기금의 소식지를 내기로 했습니다.
2022년부터 사회적파업연대기금 소식지 <사파동행>을 발간합니다.
읽어주시고, 많이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노동이 돈앞에 스러지지 않는 사회적 연대를 위하여’

올 한해 사회적파업연대기금과 함께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시대가 불투명할수록 더욱 투명해지는 정신,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그런 건강한 정신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다시 한번 여러분의 건강과 평화를 빕니다.
서로 힘을 북돋우는 한 해가 되길 바랍니다.

2022. 1.3
사회적파업연대기금 대표 권영숙

권영숙(노동사회학자, 사회적파업연대기금 대표)  
 
1. 국힘의 대선 후보

국힘(국민의 힘)의 대선 후보로 윤석열이 뽑혔다. 당심이 민심을 이겼다고 했다. 여하튼 이번에도 보수우익정치는 자신의 성격을 정확히 드러냈다. 입당한지 3개월도 안된 ‘외부자’를 끌어다 대통령 후보를 만들 정도의 ‘당심’을 표출하는 정당이다. 이렇듯 그들은 권력욕이 강하고, 개방적이다(개방적이라는 말은, 그만큼 이 사회 권력력 인사들이 대동소이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는 어떤 면에서 보수 우익정당에게 배울 점이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자기 내부를 흔들고 재편하는, 권력욕이라는 목적의식. 그리고 외부자를 받아들여서 내부를 정리할 정도의 개방성. 그들은 오래된 당원이자 베테랑 정치인이자 내부의 ‘재야’ 같은 존재인 홍준표가 대선후보로 나오자 이를 극구 막아섰다. 홍준표가 그들이 그렇게 오매불망했던 청년의 지지를, 민주당 후보보다 더한 지지를 받으면서 일어서는데도 그를 선택하지 않은 당심이라는 면에서, 그들은 확실히 조직의 보존이라는 면에서 당파적이기도 하다. 국힘의 중요한 뒷배인 개신교 단체 한교연이 경선 하루 전날 윤석열 지지를 선언한 것을 보면 말이다. 그것은 국힘과 보수세력 내부를 향한 정확한 메시지였다.

하지만 사실은 이것은 국힘, 보수우익만이 아니라 정치의 일반성에 해당할 얘기다. 그리고 사회운동과 진보/좌파정치에도 해당된다. 내부의 적이 색깔 없는 외부자보다 더 두렵고 불편하고, 그래서 더 경계하는 것, 하나의 ‘진영’ 혹은 판에서 자신들의 편이 절대 될 수 없다고 판단하는 자에 대해선, 유력하든 필요하든간에, 정치에서 일단 배제하고 쳐버리는 것 말이다.

칼 슈미트 표현으로 정치는 ‘피아’의 구분이고, 이러한 정치의 ‘피아’ 구분 의식은, 한국의 진보정치, 좌파정치/운동까지 다 포함해서 사실은 ‘정치’가 있는 곳 어디서나 흔한 풍경이다. 진보, 좌파정치에 사람이 없네, 인물이 없네, 입장이 없네 하지만, 그들 역시 그냥 자신들의 사람, 인물, 입장을 부여잡고 가고 있을 뿐이다. 그 사람, 인물, 입장을 한 번도 내놓을 생각은 하지 않고 말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가끔 보수우익의 권력욕은 이마저도 넘어서서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고 정치의 신선한 모습을 보여준다, 예컨대 보수우익 정당이 윤여준, 남재희, 김종인 등을 중용한 것이 그렇다. 이번에도 윤석열이라는 외부의 대체재가 있었다. 그리고 이들 모두의 공통점은 모두 자유주의 정당과 보수우익에서 귀 기울이고, 양 쪽 문지방을 넘나들기 좋은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결국 보수우익과 자유주의는, 진보 아닌 보수라는 점에서 오십보백보다. 그러나 과연 진보정치, 노동정치, 좌파정치는 어떠한가. 어쩌다 진보, 노동, 좌파로 분화되었고, 또 이 분화가 당연시될 정도로 ‘피아’ 구분이 생겼는가. 원칙적이라기보다는 폐쇄적이면서 개방성은 없는 진보/노동/좌파정치의 현주소가 아닌가 말이다.

2. 양당 대결

윤석열이 국힘 대선 후보로 당선되는 순간, 두 가지 아니 결국 한 가지 반응 혹은 예상이 나왔었다. 이재명이 졌다는 예상(혹은 희망사항) 말이다. 이 예측이 도처에서 나왔다. 조국사태이후 그 미움이 이재명까지 연장된, 허약한 자유주의자들은 윤석열을 지지하겠다고 기염을 토하고, 윤석열이 대선 후보가 되는 날 “축배”를 들었다고 했다. 그리고 진보나 좌파라고 스스로를 칭하는 이들도 윤석열이 이재명을 이길 것으로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과연? 민주당이 아닌 국힘의 후보가 된 윤석열이 과연 홍준표보다 당선 가능성이 높을까? 그리고 윤석열이 국힘 후보가 된다고 해서 이재명이 과연 불리하거나 심지어 패배할까? 과연 그럴까? 나는 그렇게 예상하지 않는 편이다.

일단 대통령선거 본선에서 맞붙는다면, 이재명으로선 윤석열이 좀 더 겨루기 좋은 상대라고 본다. 홍준표는 사실 이재명과 비슷한 과이고, 정치 감각이 출중한 인물이며, 심지어 서민적이다. 이 모든 것이 이재명이 후보가 되면서 스스로 장점이라고 내세운 점이다. 겹친다. 그리고 홍준표는 이재명과 비슷한 과인데, 이재명보다 더 노회하고 말장난을 더 잘한다. 이재명이 지금 대통령 되기 위해 기를 쓰고 조심하고 있는 기질(temper)과 성질을 홍준표 같은 누군가가 계속 건드리면 이재명은 흔들릴 가능성 높다.

반면 윤석열은 입만 열면 설화를 일으킬 것이고, 미래 지향적인 입장보다 문재인 정권에 대한 복수혈전을 하듯이, 마치 검찰이 보복수사 하듯이 나오는 모습이 대통령감이라는 인상을 계속 갉아먹고 불식시킬 것이고, 결국에는 스스로 자충수를 두게 될 것이다. 윤석열을 통제할 이가 국힘에 없다는 것도 문제다. 해서 또 권력욕으로 가득 찬 국힘은 드디어 나이와 양당을 넘어서는 이력서로 윤석열을 제어 가능한 김종인 원톱 선거체제를 준비하겠다고 나섰다. 옳지! 이러면 얘기가 좀 달라진다. 하지만 얼마나 달라질지.

3. ‘검찰이 칼자루 쥔 선거’

나는 여전히 2022년 3월 9일 대선에서 당선이 가장 유력한 후보로 민주당 대선 후보 이재명을 국힘의 윤석열과 동일한 수준으로, 그리고 이재명의 당선 가능성을 좀 더 높게 보고 있다 (이 글 초고를 국힘후보로 윤석열이 확정되고 난 후에 썼다는 점을 밝혀둔다. 그 때 윤석열은 오차범위 밖 15%로 앞선 여론조사 결과가 발표됐다).

이유는 앞서 말한 후보들 사이의 강약점 때문이다. 두 번째는 이번 선거는 철저히 ‘검찰 선거’ 이기 때문이다. 당락보다 기가 막힌 것은, 바로 이 점이다. 대선이 온통 법조인들 천지라니. 대선 후보 하나는 변호사 출신, 또 하나는 검사 출신, 그리고 양자 다 검찰이 줄줄이 기소하고 있는 터이다. 그리고 그에 연루된 자들도 모두 변호사, 검사들이다. 아니 이게 뭔 나라냐? 이 질문을 하고 싶으면 지금이 질문할 때다. 이게 무슨 나라니? 검사가 변호사가 대선 후보이고, 검사가 대통령 후보를 선택하는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이런 선거가 무슨 민주주의이니? 이게 무슨 민주공화국이니? 단지 윤석열만이 아니라 이재명도 마찬가지로 다양한 죄목의 혐의로 인해 검찰의 자장에서 벗어난 인물이 아니다.

정치의 사법화의 정점: 촛불시위

퇴진촛불이 한창일 때 나는 특별검사와, 검찰과, 헌법재판소와, 법원의 힘을 빌려 박근혜를 퇴진시키는 집합행위가 박근혜 퇴진 이후 정치의 사법화와 법복귀족의 강화를 더욱 공고화할 것이라고 예상했었다. 그 결과가 19대 대통령은 문재인이라는 변호사 출신이고, 20대 대통령 후보도 윤석열이라는 검사이거나 이재명이라는 변호사 출신이다. 그리고 이제 대선후보의 당선여부를 좌우할 칼자루를 검찰이 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도대체 촛불은 누구 좋으라고 들었던 것인가?

사람들이 윤석열이 국힘 후보가 되는 순간 이재명 낙선이라고 예상하는데 그 근거는 매우 감정적이고 즉자적이다. 지금 문제가 되는 대장동 스캔들이 과연 이재명을 넘어뜨릴 수 있을까? 나는 한국의 주택정책, 아니 ‘부동산’이란 재테크 정책이 그렇게 단순하다고 보지 않는다. 이것 자체가 철저히 이해관계 동맹이다. 이로써 이재명 낙선을 확정지으려면, 사람들이 대장동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 시시비비를 가리고, 잘못된 일로 여겨야하고, 이재명의 이중성에 대해서 분노해야한다. 과연 그럴까?

부동산개혁과 검찰 개혁 둘 다 불가능한 이유

먼저 대장동은 한국에서 수십 년간 부동산-아파트개발 정책의 산물이다. 주택공사라는 이름의 간판을 내걸고 집장사하는 국가, 개발만 하면 큰 이익을 보장받는 부동산개발에 나선 건설 회사들과 은행 금융 등 민간 자본이 조성해온 거대한 부동산 경제. 국가와 자본(시장)은 부동산 경기의 불을 끌 생각이 애초에 없다. 부동산 경제를 해체시킬 생각이 없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토지이익을 일부 누리는 원주민(토지 소유주)들, 개발되는 아파트에 입주하고자하는 열망으로 가득 찬, 잠재적 주택 구매자 혹은 분양 대기자들인 도시의 중산층들. 과연 그들이 지금까지 임대주택 100%의 공영 개발을 찬성했던 적이 있었던가? 그들이 과연 국가가 수용한 택지를 전면 공공개발만 하겠다면 지지할 것인가? 혹은 국가가 공공개발한 아파트들을 모두 국유화하고 시장 가격과 무관하게 개인들에게 임대아파트로 내놓는 정책을 편다면 과연 동의할까? 그리고 이미 주택을 보유한 이들은 또 어떻겠는가? 부동산 투기를 뿌리 뽑는 정책을 시행해 부동산 과열이 완화되고 해소되면, 자신의 아파트가격이 떨어지는 현 시세를 용납할까? 심지어 소규모 서민 아파트에 사는 이들 역시 지금도 20억짜리 아파트를 부러워하며 자신의 5억짜리, 3억짜리 아파트를 재개발하여 그런 ‘자산상승’을 원할 것이다.

이재명은 대장동 스캔들을 통해서 확실히 보여줬다. 그는 후보로서 지금 내놓는 공약과 다르게 실천할 사람이라는 것을 말이다. 대통령이 된 이재명의 부동산 정책은 지금의 대장동 사태와 판박일 것이다. 이재명이 자본을 시장을 넘어설 진보적 후보가 아니기 때문이다. 흔한 현실론과 경제라는 핑계거리로 말이다. 검찰은 이에 맞춰 적당히 끝낼 것이다.

다른 한편 윤석열의 경우 고발장 사주라는 혐의에 대한 검찰 선거는 어떻게 될까? 손 모라는 검사와 김웅이라는 검사출신 의원으로 입막음이 될지, 그것이 성공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검찰에게 유명한 ‘직업윤리’가 있다. ‘검사 카르텔’이라고. 아무리 미워도, 입장이 갈라지고 이해까지 달라진 적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제야말로 ‘검사출신’ 대통령이 나올법한 상황인데, 검찰이 과연 제대로 칼을 뽑고 제대로 수사할까? 설사 그게 문재인 정부 편에서 충성하고 있는 수뇌부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윤석열은 문재인 대통령이 뽑아 올린 검사 아닌가 말이다. 이는 허약하고 정체불명의 공수처를 만들고 ‘검찰개혁’입네 하는 이 정부와 추미애 장관의 탓도 없지 않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이번 대선은 검찰이 칼자루를 쥐고 흔드는 최초의 대선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군부독재 때 ‘권력의 주구’였던 검찰이, 보수 양당 세력이 너나없이 ‘부려보겠다’고 개혁하지 않고 두더니, 스스로 잡아먹힐 선거가 되고 말았다.

4. 진보 후보 단일화냐 좌파 후보 정립이냐
: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결국 한국 정당정치는 다당제이지만 언제나 선거는, 그리고 특히 대선은 보수 양당이 겨루는 형상으로 전개된다. 이것이 바로 87년 6월항쟁과 한국의 민주화이행이 부활시킨 ‘48년체제’라고 불리는 모습이다. 하지만 만약 1987년에 독자후보 백기완이 완주했다면, 그리고 이후 권영길, 심상정까지 완주했다면 한국의 소위 진보/좌파정당정치는 어땠을까? 그리고 그다음으로 진보정당을 이끌었던 노회찬 심상정의 연정 정치 구상이 좌파연합의 구상을 계속 펼쳤다면 어땠을까? 그들의 연정 구상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들이 민주당 일부를 끌어들여 진보정당을 만든 것도 그렇고, 대통령 출마를 하면서 중도에 그만 둔 것도 그렇고, 모두 진보, 나아가 좌파정당정치에 치명상을 입혔다.

그런데 그 과정을 통해서 살아남아서 유일 진보정당으로, 제3지대 정당의 ‘프리미엄’을 누린다는 정의당은 여전히 그 연합의 미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물론 심상정 후보는 얼마 전에 “이제 단일화의 역사적 시효가 다 됐다”고 말했다. 역사적 시효? 정말 웃기는 표현이다. 단일화가 이전에는 역사적 시효성이라도 있었다는 말인가? 그리고 “이제”라니. 탄력근로제 연기기한 연장 등 노동법을 개악할 때도 가만히 있으면서 그렇게 만능의 비책인양 움켜쥐었던 비례대표제 선거개혁이 민주당의 배신적인 위성정당 놀이로 물 건너가면서, 더 이상 불가능해진 것 덕분이 아니고? 근데도 제대로 된 비판 없이 그냥 넘어간다. 마치 언제나 그랬듯이.

그러다가 이번 대선을 앞두고 정의당 대선 후보인 심상정 의원의 선거복안이 나왔다. 하나는 안철수, 김동연까지 포함하는 ‘제3지대’ 연정 제안이다. 물론 대통령이 돼야 연정을 하지. 근데 그보다는 이런 의구심이 든다. 어쩌다 소위 진보정치는 여기까지 이를 수 있었을까? 이건 후보 단일화가 ‘연정 구상’이라는 이름으로 탈바꿈해서 버전만 바꾸고 나오는 것인가. 그런데 애초에 ‘제3지대’라는 탈 이념적이고 중립적인 개념이란 무엇인가? 진보정치를 제대로 정립하자고 해도 자기 색이 분명할까 말까한 상황에서 다시 물타기의 ‘3지대론’이 가당키나 할까.

모 학생 좌파단체가 포플리스트 이재명보다 자유민주주의 윤석열을 지지하는 전략이 좌파의 현재 전략이라고 말하는 것에는 이구동성으로 비판을 퍼부으면서, 심상정의 몰 이념적인 ‘제3지대’ 제안은 왜 그냥 넘어갈까? 왜 여전히 대체로 침묵일까?

맞다. 이미 그런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정의당은 ‘민중경선 단일화’ 테이블에 참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정의당 내 ‘좌파’는 더욱 모호한 태도다. 그들은 사사건건 당내 비판은 하는데, 결론은 언제나 우리 모두 버킹검일세이다. 정의당이라는 프리미엄을 포기하지 못하는 건가, 아니면 정말 정의당 안에서 좌우는 모두 용광로에서 녹임을 당하는 건가.

정의당의 대선후보처럼 이런 말을 공개적으로 하는 한, 진보정치의 앞날은 요원하다. 즉 진보정치가 제도권 정당정치에서 ‘대안’으로 보일 리 없다. 무엇보다 진보정치를 ‘볼모’처럼 두고 있는 자유주의 정치로부터의 독자화도 이룰 수가 없다.

하지만 정의당은 여전히 이런 후보와 함께 민주노총의 ‘민중경선후보’ 단일화 논의에 참가하고 있다. 즉 두 손에 떡 들고 있는 형국이다. 왼손은 녹색당부터 진보당, 변혁당까지 함께 하고, 오른손으로는 안철수와 김동연의 손을 잡고 있다. 아, 그리고 중간에 또 하나의 떡이 있더라. 기본소득당 등과 함께 하는 중도좌파의 테이블이 있다. 맨 앞은 좌파 테이블이라고 보는지, ‘불평등’을 화두로 잡고, 그 다음은 우파 테이블이라고 보는지 ‘제3지대’라는 모호한 화두를 두고, 그리고 맨 마지막의 중도파들과는 ‘기후위기’를 얘기한다.

참으로 현란한 ‘연대연합정치’ 기술인데 의문이다. 왜 정의당의 연합정치는 매번 죽 쑤고, 나무에서 고기 찾기이며, 닭 쫒던 개 지붕 쳐다보기가 될까? 그 당 지지자들은 이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볼 일이다.

하지만 최종적으로는 말이다. 좌파가 문제다. 저 당이 이렇게 3가지 카드를 쥐고 이쪽저쪽에 다 머리 내밀고 있는데도 저 넓은 스펙트럼을 보면서도, 이 당은 여전히 ‘민중경선’에 함께 할 세력이라고 말하는 이들은 또 무슨 생각일까? 이 문제가 벌어지는 이유는 그 지향과 이념이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민중경선’은 왜 정확히 이념을 밝히지 않을까? 민중경선이든 노동자민중후보든, 그것 자체는 대선의 플랫폼이거나 강령이거나 심지어 이념일 수는 없다. 노동자가 민중이 정치 이념인가? 민중후보라는 말은, 이념을 밝히지 못했을 때, 국가보안법으로 누구나 잡혀갔을 때, 좌파가 힘도 조직도 없었을 때 회피적으로 썼던 말이다. 하지만 그 말들은 이미 효용을 다했다. 한국 사회에서 노동자 후보가 없어서, 민중후보가 없어서, 지금 진보정치가 갈지자이고, 자유주의 정치에서 탈출하거나 독립을 못하고 있는 것인가?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투표하면 좌파 후보가 바로되는건가?

지금 제도정치와 대선에서 부재한 것은 무엇인가? 질문은 정확히. 그렇게 할 때 답도 정확히 나온다. 하지만 먼저 어정쩡한 진보정치가 진보의 미래, 아니 계급정치와 좌파정치의 미래를 좀먹는다. 그 말도 기억했으면 좋겠다.

 
참세상 기사게시판 :: 기사 :: 진보정치가 좌파정치의 미래를 가로막지 말길 – <font color=”red”>[사파시평]</font> 2022년 대선을 앞둔 정치비평① (newscham.net)

[기고]돌아앉은 대통령, 쫓겨난 세종호텔 노동자의 투쟁

권영숙 | 노동사회학자 사회적파업연대기금 대표입력 2021. 12. 22. 03:03
[경향신문]
필자는 서울 명동 세종호텔에 여러 번 가봤다. 투숙객으로서가 아니라 그 호텔 노동자들을 만나기 위해서다. 이 방문은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11년 말 세종호텔 노동자들은 엄동설한에 파업에 돌입했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지금 세종호텔 노조는 다시 엄동설한에 파업에 돌입했다.

권영숙 | 노동사회학자 사회적파업연대기금 대표

10년 전에는 단체교섭이 결렬되면서 했던, 말 그대로 파업이었다. 지금은 정리해고를 당하면서 하는 파업이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이미 파업이 아니게 되었다. 정규직으로서 정리해고 후 하는 투쟁은 법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파업이 아니다. 이렇듯 한국 사회에서 투쟁하는 노동자들은 파업을 하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은 파업권마저 빼앗긴 상황에서 최후의 수단으로 집단적 투쟁에 돌입한다.

그래서 요즘 많이 궁금하다. ‘노동존중’을, 노동자에게 저녁이 있는 삶을, 그리고 공공부문에서라도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만들어주겠다고 했던 현 대통령은 지금 임기 말에 이르러 자신이 내세웠던 노동공약에 대해 어떠한 소회를 가지고 있을까. 그리고 그가 취임 일성으로 밝혔던, 노동존중과 좋은 일자리와 비정규직 없는 세상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그것도 궁금하다.

언제부터인가 노동에 대해 입 꾹 다물고, 돌부처처럼 돌아앉은 대통령에게 이제 임기 말에 이르러, 이 사회의 노동현실이 어떤지 똑똑히 보라고 일갈하고 싶다.

그중에 세종호텔 노동자들의 현실이 있다. 세종호텔 노동자들은 2012년 1월 파업으로 승리했다. 비정규직 노동자도 정규직화시켰다. 그 쾌거는 그들과 함께한 사회적 연대의 힘, 2011년 ‘희망버스’ 운동에서 진화한 ‘희망뚜벅이’ 행진과 함께 호텔 로비로 들이치면서 가능했다. 물리적인 힘이라기보다 사회적인 힘이었다. 그 이후 10년 동안 세종호텔 노동자들은 잘 살고 있었을까? 그들은 무사히 자신의 일터에서 안전한 노동을 하고 있었을까?

한국 자본주의와 자본가 계급은 헌법에 보장된 노동자의 파업권을 인정한 적이 없다. 그 점에서 그들은 위헌세력이고, 헌법 파괴세력이다. 그런데 국가도 공권력도 법원도, 그리고 제도 정당들도 그 위헌적인 파업 파괴행위와 부당노동행위를 제대로 징치하지 않는다. 세종호텔 역시 무사할 리가 없었다. 2011년 7월 복수노조가 허용되자 바로 세종연합노조가 만들어졌고, 민주노조 조합원 206명 중 60%가 새 노조로 이탈했고 그들이 교섭권을 가져갔다. 어용노조가 교섭권을 가진 가운데 성과연봉제, 포괄적 임금제, 탄력근로제, 부당한 전환배치 등 임금과 노동시간, 고용의 유연성 실험이 시작되었다. 노동 유연화의 백화점, 혹은 구조조정의 실험실 같은 세종호텔 노사관계 속에서 노동조건은 후퇴했으며 임금은 계속 삭감되었고, 노조는 위축되었다. 노조위원장은 징계해고를 당했다.

2020년 코로나19라는 전염병이 지구를 덮쳤다. 하지만 이는 자본가들에게 마냥 나쁜 게 아니다. 코로나19 팬데믹은 자본에게 또 다른 기회이자 기왕 해왔던 노무관리를 최종적으로 완성하는 핑계일 수 있다. 노동 구조조정과 민주노조 말살이란 두 가지 목표를 최종적으로 이룰 절호의 기회이다. 한때 280여명이던 노동자들은 몇차례의 희망퇴직으로 수십명으로 줄었다. 그 과정에서 민주노조 조합원들이 늘었고, 교섭권을 가지면서 파업을 준비하자, 12월9일 직장폐쇄를 하고, 12월10일 민주노조 조합원 12명을 전원 해고했다.

코로나19가 노동자를 차별하는 것이 아니다. 노동을 배제하는 민주주의, 헌법에 명시된 노동권을 존중하지 않는 자본주의가 코로나19를 빙자해 노동자를 해고하고, 노동을 구조조정하고, 노동 차별을 공고히 하고, 노조를 파괴한다. 한국처럼 자본이 예사로 위헌적인 노동 파괴세력으로 군림하고, 양당 보수정치가 이를 결사 옹호하는 나라에서 노동이 처한 조건은 더욱 꼬이게 된다. 자본은 국가로부터 받은 ‘공적자금’을 공돈처럼 사용한다. 국가는 고용유지지원금이라는 이름으로 회사 대신 임금을 내준다. 호텔업종이 바로 대표적인 수혜 업종이다. 근데 문재인 정부는 고용주들에게 꼭 받아내야 했던 약속, 즉 노동자 고용보장 선조건을 아주 쉽게 철회했다.

노동자의 목숨줄을 이렇게 쉽게 자본의 자비에 맡겨놓은 이 정부가 과연 ‘민주정부’일까. 만약 문재인 정부가 그 조항을 철회하지 않았다면 세종호텔 노동자들이 하루아침에 정리해고되는 사태는 막을 수 있었다. 그것은 문재인 정부의 책임이다. 돌아앉은 대통령은 과연 노동을 볼 면목이나 있을까. 이제야 조금이라도 부끄럽지 않은가!

권영숙 | 노동사회학자 사회적파업연대기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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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돌아앉은 대통령, 쫓겨난 세종호텔 노동자의 투쟁 | 다음뉴스 (daum.net)

사회적파업연대기금 10주년 행사 “사파 10주년 연대와 후원의 날”을 2021년 12월11일 전국공무원노조 대회의실에서 열었습니다.

두차례 연기, 회의 참석자 밀접접촉자 판명으로 이틀전까지 개최가 불투명해진 상황후에 열었습니다. 10주년 준비단에 함께 해준 이들과 준비는 하고 있었지만 마지막까지 손에 땀을 쥐게 하더군요. 참가자 수가 많아도 걱정 많지 않아도 걱정이었는데, 알맞은 규모였고 잘 치렀습니다.

처음으로 해본 ‘사파와 함께 연대자 인증샷” 촬영시간을 은근 기대했는데, 분위기 내는 것으로 좋았습니다. 사파기금 CMS처럼 현장에서 단체 후원 약정서 받는게 내심 목표였는데, 그건 불참한 이들에게 두고 두고 받고 싶습니다.^^

행사는 4파트로 진행됐습니다. 공연이 압도적으로 많았는데, 연대자들과 민중가수들이 함께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보기 드물게 강기훈 이한솔의 기타-오보에 협연이 있었고, 오랜 연대자인 조부덕의 바이얼린, 박준성의 아코디언 연주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는 공연 박준, 끝 공연으로 임정득 가수의 노래 공연이 있었습니다. 공연을 위해서 트루오디오의 조현민님등이 세심하게 음향을 살펴서 음향은 이때껏 사파 행사중에 가장 훌륭했습니다. 공연’실황’은 당일 생방도 했지만, 유튜브로 올릴테니 들어보세요. 박준가수의 고 황현가수에 대한 코멘트와 훌륭하게 듀엣 사회를 소화한 사회자 김수미 남선진의 백댄스(^^), 임정득 가수의 뭉클한 눈시울과 대표를 무대에 기어코 불러세워 춤추게 한 것도 웃음이었습니다.

“사파의 행로” 시간에는 2011년 7월17일 “사회적 파업기금을 모읍시다”제안서를  고진수 운영위원이 담담하고 힘있는 목소리로 다시 낭독했고, 권영숙 대표가 사파기금 제안 이유와 사파기금의 의미, 10년 결산을 기금조성과 기금지원으로 나눠서 보고했습니다. 기금지원처 81곳의 명단이 스크린에 올라가면서요. 현장 모든 영상을 제작해주신 이는 은석 감독입니다.
권대표는 “사파기금은 그 취지와 약속을 10년동안 잘 지키고 이뤘지만, 그러나 충분치는 않다”고 말하고 “노동자투쟁뿐 아니라 더 넓게 사회적 파업을 해석하고 실천”하고 “사회적 연대가 노동을 중심으로 한 사회적 동맹”으로 이르는 길을 고민하고 전망을 가지는 연대의 방향을 모색하겠다고 ‘앞으로’의 계획을 밝혔습니다.

기금 지원연대 노조/ 단체의 “다시한마디”는 30초 축하동영상과 발언, 그리고 현장 발언으로 채워졌습니다. 사파기금이 5백만원 이상을 지원했던 81곳에 10년만에 요청하여 ‘다시한마디’ 받는말을 받아서 그 의미가 큽니다. 화답한 곳들의 건재함을, 그리고 사파에 대한 연대를 확인하는 의미가 깊었습니다.

이어 조부덕, 박수규 두 연대자가 “연대자로서 발언”을 했습니다. 두 분 모두 오랜 사파의 연대자입니다. 사파기금 연대를 10년씩, 7년씩 하는 여러분이 사파기금이 10년 지속할 수 있었던 힘입니다.
마지막으로 좀 어색하지만 모여서 축하 케이크 촛불 불고 커팅도 했습니다.

사파기금 10주년 이렇게 보냅니다.
기금 지원 및 연대 총218회였습니다. 10년으로 나누면 매월 18회 정도였습니다. 뜨겁게 사회적 연대로 사회적 파업기금 조성해왔고, 치열하게 연대를 해왔습니다.
앞으로 사파기금이 어떻게 나아갈지 많이 지켜봐주시고, 또 가까이에서 함께 해주시길 바랍니다.

2021. 12. 20.
사회적파업연대기금

2021년 12월16일 서울 명동 세종호텔 정리해고 6일차, 로비 농성장을 찾았습니다.

조합원 교육을 요청받은 권영숙 대표가 “코로나19노동재난, 호텔업종 산업 재편, 노동자투쟁의 방향과 전망”  이라는 주제로 1시간여 동안 강의를 했습니다. 한 명을 제외한 조합원 전원이 모인 가운데, 먼저 2012년 1월 희망뚜벅이와 세종호텔 파업에 대한 ‘투쟁의 기억’을 공유하면서, 투쟁의 기억을 공유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로부터 얘기를 시작했습니다.

이어 1. 노동자와 파업, 2. 호텔업종 ‘산업재편’과 세종호텔 노사관계에 대해서 얘기하고, 코로나19 국면이 문제의 시작이 아니라, 이미 10년간 진행해온 노조 말살과 구조조정의 최종판을 만드는 것일뿐이라는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2012년이후 온갖 노동 유연화의 백화점, 혹은 구조조정의 실험실같은 세종호텔 노사관계 속에서 노조는 계속 후퇴했고,지금 여기까지 이른 점에 대해서 뼈아픈 통찰이 필요하다는 것도 덧붙였습니다.  마지막으로 ‘투쟁의 전략’에 대한 다양한 얘기를 했습니다. 이 시간이 막 정리해고 철회투쟁에 들어선 세종호텔 조합원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권대표는 말했습니다.

세종호텔노조 농성장에 대한 물품연대도 준비했습니다. 가스난로, 핫팩 2박스, 크리스마스 기분을 낸듯 포장한 빨간색 무릎담요를 준비해 갔습니다. 바로 오늘 영하로 곤두박질친 날씨 전에 가져가서 다행입니다. 10주년에 연대자가 후원요리로 가져왔으나 뒤풀이 취소로 사용하지 않은 전남 특산 홍어무침에 보쌈을 준비해서 저녁을 함께 했고요.

이어 세종호텔앞 피켓팅을 함께 했습니다. 우렁찬 구호로 가끔 전철역에서 쏟아지는 이들과 세종호텔 관리자들을 놀래키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세종호텔 투쟁에서 가장 중요하게 자리잡을 ‘목요집회’에 함께 했습니다. 낮에 날씨는 포근했으나 다음날의 한파를 예고하듯 은근 냉한 날씨였습니다.

이제 겨울, 본격적인 ‘동투’의 계절입니다.
핫팩으로 중무장하고, 겨울에도 쌩쌩한 투쟁을 할 수 있길 바랍니다.
나날이 더 많은 연대자들이 집결하기를 바랍니다.

추위보다 더 서늘하게,
자본의 심장에 더 서늘한 바람이 불게 하길 바랍니다.
모두 연대로! 건투!

2021.12.17.
사회적파업연대기금

연대자 여러분께:

사회적파업연대기금 10주년 행사 “연대와 후원의 날”을 2021년 12월11일 잘 마쳤습니다.

2011년 7월17일 권영숙 제안자가 페이스북에 첫 제안을 올렸고, 단체 발족일은 첫 입금이 들어온 7월22일로 삼습니다.
올해 7월에 해야할 기념행사를 두 차례 연기하여, ’10주년’안에 기어코, 사파의 모토대로 “말이 씨가 되고 행동이 되어” 끝낼 수 있어 다행입니다.

얼마나 많은 우리들의 의미있는 시간이 코로나19 전염병과 방역통제로 ‘격리’되고 ‘저당’잡혀야할까요? 전염병을 사회적 재난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전염병이 도는 사회입니다. 코로나19 속에서 우리 사회의 민낯은 재난에 맞서는 합의와 제도의 부재, 그리고 위로부터의 통제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여하튼 끝까지 잘 마쳤다는 사실을 위안으로 삼겠습니다.
행사도 짜임새 있었고, 현장 분위기도 좋았다고들 하시니 더욱 좋습니다.
연대자와 민중가수들이 함께 펼친 공연은 감동적이었습니다.
“사파 10년의 행로”에서 제안문을 다시 낭독했고, 10년동안의 기금활동을 총결산하며 기금조성과 기금지원내역을 알렸습니다.
기금 지원으로 연대했던 노조와 단체 50여곳중 대략 15곳이 축하동영상과 편지, 그리고 현장 발언을 통해서 “다시 한마디” 메시지를 보내왔습니다.

10주년 이후 앞으로 어떻게 ‘연대’에서 ‘동맹’으로 라는 이 어려운 숙제를 풀어갈 것인가?
이도 연대자 여러분과 함께 머리 맞대고, 힘이 많든 작든 손발 맞춰가면서 더불어 할 수 있길 기대합니다.

고마웠습니다.
연대자 여러분이 없었다면 쉽지 않았을 일이에요.
앞으로도 계속 애정으로 함께 해주시고, 어디선가 사파에 무슨 일이 생기면, 달려와주세요.

그리고 단체재정 후원 캠페인은 쭉 계속 합니다.
사파기금이 필요한 시간동안 여러분의 힘을 모아주시길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2021.12.14.
사회적파업연대기금 대표 권영숙 드림

“모든 파업은 사회적…사회적 파업기금이 필요한 이유”

발족 10주년 맞은 사회적파업기금 권영숙 대표 인터뷰

“쉽지 않은 시간이었어요. 이루고자 했던 목표와 지키고자 했던 약속은 변함없었지만 10년의 결과물은 충분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이 부족함을 반성하고 어떻게 채울 것인가가 과제죠. 우리의 목표는 한 달 1만 명이 1만 원으로 1억 원의 사회적 파업기금을 모으는 것이었습니다. 사회적 파업과 연대에 동의가 되는 사람이 1만 명이 있다는 것은 노동자에게 불리한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 잡을 수 있다는 것이고, 그래서 노동을 배제하는 민주주의를 바꿀 수 있다는 것, 체제를 바꿀 수 있다는 것으로 나아가는 기초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모이는 기금의 상황을 생각하면 아직 멀었네요.(웃음)”

-2011년 2차 희망버스를 다녀온 후 사파기금 제안서를 페이스북에 올렸습니다. 당시 어떤 울림이 연구자에게 직접 행동까지 나서게 했나요?

“당시 제가 갖고 있던 문제의식과 한국의 여러 상황이 맞아 떨어졌어요. 노동자들의 고립된 투쟁은 ‘사회적 파업’ ‘사회적 연대’의 절실함을 불러일으켰고요, 또 ‘파업기금’을 선제적으로 조성하지 않는 한국의 상황에 쭉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었고요. 그래도 하나의 방아쇠가 있다면 그건 김주익일 겁니다. 그 사람이 유서를 세 번 쓰고 2003년 10월 죽었죠. 김주익이 유서에서 손배가압류 같은 돈의 문제와 노동자들이 고립됐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때 김주익이 올라간 상황에서 한진중공업은 150억 손배 소송을 걸겠다고 했었어요. 김주익은 계속 민주노동운동에 사회적 연대를 요청했는데 그게 사파기금을 만드는 힌트가 됐죠.

저 개인적으로는 김주익을 만나지 못한 게 참 안타까워요. 그때 유학하다 논문을 쓰려고 한국에 잠깐 들어와 있었거든요. 권영길 대표를 인터뷰하고 다음 날 현장 조사 차 부산 영도 크레인 위에 올라가 있다는 김주익을 보러 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그날 오전 권영길 대표한테 전화가 왔어요. 김주익을 보러 가는 길이었는데 그 사람이 목매 죽었다고요. 노동자들의 투쟁과 죽음이 연결돼 있다고 생각했죠.”

-파업기금을 따로 조성하지 않는 것을 한국의 상황이라 말했는데요, 특수한 상황입니까?

“노동운동사를 보면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든 건 결국 파업을 위해서거든요. 서유럽에서 노동조합이 근대적 발명품의 하나로 만들어졌을 때, 노동자들의 초점은 노조 결성보다 파업에 더 가 있었어요. 파업 기금을 조성해, 일정하게 돈이 모이면 파업을 시작하고 버티는 거예요. 지금도 조합비를 걷으면서 파업기금을 따로 걷고 있고요. 그런데 한국은 초기자본주의에서 노조를 만들 때와는 상황이 달라서 파업하지 않는 자본주의에 익숙해졌어요. 87년 노동자 대투쟁이 시작되고 대중적 노동조합 운동이 시작됐을 때도 파업하면서 임금을 받았거든요. 노자가 모두 파업에 대해 잘 몰랐어요. 87년 투쟁에서 노동자는 근로조건 향상에 집중했고, 자본가는 이에 대한 대응으로 사문화됐던 업무방해라든가 손배가압류를 들고나왔어요. 무노동·무임금은 그전까진 법으로 있지도 않았는데 법원이 먼저 나서 판례를 만들어줘요. 그리고 97년 노동법 개악할 때 국회에서 받아쓰죠. 노동의 사법적 통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노동법 개정이 이뤄지며 ‘무노동·무임금’이 법에 명시된 이후, 파업 중 개인의 생계는 노동자의 몫이 돼 버렸어요. ‘무노동·무임금’ 문제를 공동의 문제로 생각해야 하는데 자생적 파업 물결이 일어났고, 집단적이기보다는 개별적인 대응을 했죠. 그 과정에서 중소기업 노동자들은 개인적으로 손배가압류 당하고 이를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서 파업권이 무력화된 거죠.”

-김주익 열사의 죽음부터 사회적 연대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다고 하셨는데, 제안은 희망버스부터였어요. 희망버스는 사파기금에 어떤 영향을 끼쳤나요?

“희망버스는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현대적 흐름 중 하나입니다. 전태일의 ‘나에게도 대학생 친구가 있었더라면’이라는 소망은 연대에 대한 갈구였잖아요. 대학생 친구는 변호사 조영래로 나타났지만, 고립의 문제를 제기하고 연대를 요청한 거예요. 전태일의 요청에 한국 사회가 반응한 게 노학연대로 나타났어요. 많은 학생들이 평화시장으로 가서 싸웠고, 저 역시 그중 한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이후 노동자에 대한 사회적 연대는 없어졌고, 노동자들은 조합을 통해 스스로 자구책을 찾습니다. 스스로 조합주의를 강화한 면도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희망버스를 띄운 건 노학연대 이후 처음 이뤄진 사회적 연대 운동이에요. 희망버스의 발진을 이례적으로 둘 수 없어서 파업기금에 대한 문제의식과 연결해 사파기금을 생각했죠. 그때까지만 해도 10년 동안 운동이 이어질 거라고 생각 못 했어요. 계획적이거나 조직적이거나 목적의식적으로 시작한 건 아니었으니까요. 다만 손배가압류 때문에 파업을 접거나, 파업 기금 없이 파업하는 노동자들에 대한 연대와 사회적 안전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죠. 파업기금을 우리 손으로 조성하면 파업을 모두의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을까, 그렇다면 단지 연대가 아니라 동맹 세력이 구축될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그동안 어떤 사업장이 사파기금을 지원받았나요?

“전체적으로 세어보니 지원 횟수는 220회 정도 되더라고요. 500만 원 이상의 기금 지원을 산정하면 80여 회고요. 가장 힘든 비정규 정리해고 노동자투쟁 위주로 지원했어요. 그러나 노동자 투쟁만 지원하진 않았어요. 장애 운동 단체, 소성리 사드배치 반대투쟁, 이주노동자들에게도 지원했고요. 사회적 파업은 조직화된 노동자들을 넘어서 미조직 노동자, 권리 없는 노동자들까지 미쳐야 합니다. 가사노동을 하는 여성 노동자, 플랫폼 노동자, 교육의 대상이 되는 학생, 청년들 모두를 포괄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회적 파업기금을 설명할 때 ‘사회적’이라는 말에 더 방점을 찍기도 했어요. 하나를 위한 모두, 모두를 위한 하나라는 생각이 확산돼야 해요. 내 문제가 닥쳤을 때 연대하는 게 아니라 싸워야 하는 상황이 되기 전 사회적 연대로 다른 파업에 동참하고 연대하는 것이 필요해요. 노동자들에 대한 연대가 나를 위한 연대이기도 하는 생각들이 중요하죠.”

-연대자들은 어떤 사람들인가요?

“다양해요. 제가 노동자대회날 여의도에서 좌판 열어 정기후원 신청서를 혼자서 50장 받은 적이 있어요. 지나가는 사람 붙잡아서 파업기금 내라고 당당하게 말했고, 설득도 잘 됐죠. 비정규직 노동자들, 돈 없이 싸우는 것의 어려움을 아는 사람들은 길게 얘기를 안 해도 사파기금의 필요성에 대해 너무나 빨리 이해를 해요. 그런데 대기업 노조에 있는 사람들, 중산층들은 보다 긴 설명과 논리를 요구하죠. 그 사람들은 파업 기금이 없어서 파업 못 하는 게 아니거든요. 저는 투쟁하는 노동자들한테도 당신부터 사파기금 정기후원하라고 권하기도 했어요. 아주 짓궂은 거죠. 실제로 사정이 어려워서 못하는 사람도 많아요. 정기 후원이라는 게 부정기적으로 한 번씩 돈을 내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거더라고요. 그래서 더 사파기금이 쉬운 돈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죠.

투쟁하는 노동자들이 투쟁 속에서 연대의 중요성을 발견하잖아요. 그런데 투쟁이 끝나면 연대에 안 나서는 사람들도 많아요. 투쟁하는 노동자들이 연대에 대해 투쟁 승리로 갚겠다고 많이들 말하는데 이 말에 동의하지 않아요. 다른 문제의식을 필요로 하는 각각의 일들이거든요. 승리가 연대가 될 순 없죠. 연대는 연대예요. 지난 10년을 생각하면 뼈아픈 부분이기도 해요. 그 수많은 노동자 투쟁 이후 사람들이 남았다면, 그들이 또 다른 사회적 파업과 연대를 만들어 갔다면 하는 아쉬움이 들죠.”

-지난 활동 기간 어려운 점은 어떤 게 있었나요?

“6년 동안 사무실이 없어 힘들었어요. 연대 물품을 보관할 곳이 없어 흩어져 보관했고요. 또 상근 활동가도 없어 운영위원들이 시간을 쪼개고, 자기 돈 출현하면서 활동했죠. ‘기금은 건드리지 않는다’ 등의 우리가 세운 원칙들을 지켜가면서 활동하기 어려운 조건이었죠. 처음엔 매일 페북에 기금조성 내역과 CMS 모금 상황을 올렸어요. 많지 않은 수여서 가능했지만, 상근 활동가도 없이 매일 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죠. 그러다가 격일로, 주마다, 달마다 했죠. 지난 8년 동안 매달 정리를 하다가 요즘엔 반기별로 정산해요.

저는 사파기금 해소하고 싶어요(웃음). 민주노총이 명실상부한 내셔널센터가 돼서 모든 노동자의 노조로 서고, 파업기금을 선제적으로 조성한다면요. 단, 조건은 민주노총 안 대기업 노조가 쌓아놓은 파업기금도 환원해, 업종과 사업장 규모를 뛰어넘는 연대를 이뤄야 한다는 거예요. 이상론이지만 노조가 가는 최대치의 길 아닐까 싶습니다. 계급의 단결로 이어지는 파업기금을 조성하는 것이요. 민주노총이 그런 방식으로 전국적인 파업기금을 조성할 수 있다면 새로운 민주노총이 되는 거지요.”

-10년 만에 처음으로 단체 후원을 요청했습니다. 후원을 바탕으로 앞으로 사파기금의 활동 방향과 펼쳐나갈 사업들이 궁금합니다.

“더 이상 운영위원들에게 일방적인 희생만 강요할 수가 없었어요. 그동안은 운영위원들의 생계도 있기 때문에 사업 역시 불안정했고요. 많이 고민했지만 상근 활동가 체계가 필요하더라고요. 그래서 단체 재정을 확보해야 해요. 예쁘장한 사무실도 구했고요. 가능한 안정적으로 향후 10년의 사업을 하고 싶어요. 노동자 투쟁을 기금으로 지원하는 방식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껴요. 기금 지원이, 한 단체만의 연대로 끝나는 게 아니라 계속 반복해 얘기하듯 모두의 문제로 서야 해요. 결국 모든 투쟁은 연결돼 있어, 하나의 투쟁이 곧 내 투쟁으로, 내 투쟁이 사회의 투쟁으로 이어진다고요. 모두가 돕고 모두가 움직여야 해요.

대선 기간 양당이 벌이는 목불인견의 정치공학적 상황 속에서 대안 이야기가 많이 나와요. 그런데 노동 이야기가 쏙 빠져 있어요. 노동 쪽에선 급하게 뭔가를 시도하는 데 이게 불만이에요. 언제나 한 철인데 좀 더 일상적이고 대중적이고 조직적으로 움직일 순 없을까요? 노동 문제를 의제화하고 사회적 파업, 사회적 연대를 구체화하는 활동들이 필요하다고 느껴요. 교육과 선진, 기획 사업이 더 많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기금 조성뿐 아니라 문제의식을 확산시킬 수 있는 활동들이요. 활동가를 뽑고 있는데, 많은 관심 부탁합니다.”

 

“노동이 돈 앞에 스러지지 않게…10년을 버틴 건 연대의 힘”

2021.12.09 21:32

‘사회적파업연대기금’ 권영숙 대표가 돌아본 10년의 발자취

권영숙 사회적파업연대기금(사파기금) 대표가 지난 8일 서울 용산구 사무실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며 출범 10년을 맞은 사파기금의 활동 내용과 의미 등을 소개하고 있다. 고희진 기자

권영숙 사회적파업연대기금(사파기금) 대표가 지난 8일 서울 용산구 사무실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며 출범 10년을 맞은 사파기금의 활동 내용과 의미 등을 소개하고 있다. 고희진 기자

김진숙 2차 희망버스 때 첫발
노조조차 만들지 못하는 사업장
생계자금 바닥났을 때 생명줄

이젠 민주노총이 기금 만들고
이 땅의 모든 노동자와 나눌 때
사파기금 필요 없는 날 와야죠

사회적파업연대기금(사파기금)이 올해 출범 10년을 맞았다. 사파기금이 출범한 2011년 7월은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이 한진중공업의 정리해고 철회를 외치며 부산 영도조선소 85호 크레인에서 고공농성을 한창 진행 중이던 때다.

권영숙 사파기금 대표(56)는 당시 사회과학 공부를 하던 연구원이었다. 김 지도위원과 연대하기 위한 2차 희망버스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며 동료들에게 ‘파업과 투쟁에 힘쓰는 노동자들에게 연대할 기금을 만드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었다. 긍정적인 답변이 돌아왔다. 이후 페이스북에 “노동은 파업권이란 헌법적 권리를 가졌으나 돈 앞에서 속수무책이었고, 스러져갔다”는 글을 올리고 사파기금의 구체적 계획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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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 대표는 “매일 후원금이 들어왔다. 반향이 아주 뜨거웠다”며 “한진중 정리해고반대투쟁위원회에 2000만원을 기부한 것이 첫 시작이었다”고 말했다.

지난 8일 서울 용산구 사파기금 사무실에서 만난 권 대표가 떠올린 사파기금의 출범 당시 상황이다. ‘김진숙’으로 대표됐던 해고노동자와 열악한 투쟁 사업장에 대한 사람들의 뜨거운 관심은 10년 사이 조금씩 식었다. 사파기금에 대한 시선도 그때만큼 뜨겁지는 않다.

10년을 버틴 것은 지속적으로 관심을 보여준 후원자, 봉사활동 형식으로 함께한 연대자들 덕이다. 그간 500만원 이상 고액의 연대를 한 사업장은 81곳이다. 연대물품 등 소액 연대 사업장까지 포함하면 217개 투쟁 사업장에서 노동자들과 함께했다. 올해는 건강보험공단 고객센터 노동자들의 파업에 기금 연대를 하기도 했다. 권 대표는 “누군가는 ‘돈이 많아서 후원한다’고 하는데 아니다. 내부 운영비를 사용하지 않고 후원금은 연대기금으로만 썼기에 가능했다”고 말했다.

권 대표는 기억에 남는 연대 사례로 2014년 ‘청주 노인병원’과 ‘부산 생탁 노조’ 투쟁 사건을 꼽았다. 두 곳 모두 지역의 작은 사업장, 사람들의 관심을 얻기 힘든 사업장이었다. 그는 “노인병원엔 요양사, 영양사 등 주로 나이 든 여성 노동자들이 일했다. 노조를 만드니 회사가 직장을 폐쇄했고 노동자들은 오랜 시간 투쟁했다. 파업이 장기화되면서 노동자들의 생계자금이 거의 바닥났을 때, 사파기금이 그곳에 닿았다. 너무 고마워하고 진심으로 연대의 소중함을 깨달았다고 말해줬을 때가 기억에 많이 남는다”고 했다.

연대 활동을 통해 노동자들에게 감동받기도 한다. 권 대표는 “많은 파업 사업장이 사측과 합의할 때 완전한 승리를 하지는 못한다. 파업 주동자는 복직을 제외하는 형식의 합의를 할 때가 많다”며 “부산 생탁 노동자들은 그렇지 않았다. 사측이 주도자를 제외한 합의를 요구하자 10여명의 동지들이 모두 복직을 거부했다. 그렇게 멋있는 사람들이 아직 많다”고 말했다. 이어 “단일 사업장의 파업 ‘승리’는 사파기금의 목표가 아니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파업을 어떻게 사회적 의제로 확장시키고, 연대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함께하는 이들 역시 각양각색이다. 1991년 명지대생 강경대씨의 사망에 항의하면서 분신한 김기설씨 유서대필 조작 사건의 피해자인 강기훈씨는 오랜 연대자다. 노동자로 자랄 아이의 미래를 위해서라며 아이 돌반지를 팔아 기금을 후원한 이도 있다. 한 배우의 팬클럽이 활동비 중 일부를 기부한 사례도 있었다.

비정규직, 소규모 사업장과 주로 연대하는 이유에 대해 권 대표는 “이제 대공장 노조는 파업을 거의 하지 않는다. 비정규·소규모·신규 노조들이 주로 파업을 하는데, 돈 없이 파업을 시작하다 보니 용역깡패 등의 물리적 폭력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고통을 겪게 된다”고 했다. 이어 “노동권에서 배제된 노동자들에 대한 운동을 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했다. 한국의 노동운동이 조합주의에 머무를 게 아니라 플랫폼, 소규모, 비정규직 노동자와 함께해야 한다는 뜻이다.

권 대표는 “민주노총이 나서서 전국적으로 파업기금을 조성하고 이를 배타적인 멤버십 안에 있는 노동자뿐 아니라 이 땅의 모든 노동자와 나눠야 한다”며 “그때는 사파기금이 사라지길 바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