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게이트 노동자 투쟁 160일.
김천 도로공사 농성 89일.
서울 세종로 농성장 청와대 면담투쟁 30일
민주당 의원 사무실등 포함해서 농성장 총15곳.

2019년 12월 6일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은 세종로 톨게이트수납 노동자들의 농성장앞에서 [8차 사파동행_톨게이트 노동자 세종로 농성장편]을 열었습니다. 이 날은 또한 연대 대책위의 가입 단체들이 금요일마다 문화제를 주관하기로 하고 사파기금이 맡은 날이기도 합니다.

또한 이 날은 김천 법원에서 톨게이트 노동자들 3천여명에 대한 직접고용 판결이 나온 날이기도 합니다. 해서 현장 분위기는 어수선하고 들뜨고 묘한 날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사파기금 동행을 시작했어요. 그 덕분에 도명화 민주일반노조 톨게이트 지부장등이 서울에 도착하지 못하여 발언을 하지 못했고, 톨게이트 노동자들의 수도 좀 줄어보였습니다.

여하튼 대표인 저는 ‘여는말’에서. 바로 몇시간전에 내린 판결에 대해 말하기는 좀 조심스러웠지만 이렇게 말했습니다.
” 이 판결은 당연히 올 것이 온 것이다. 이 판결을 바라면서 투쟁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1심 판결을 넘어서 대법원 판결까지 받아 복직한 이들이 현재 어떤 처지인지 보면 이 판결은 그리 기쁘지만은 않은 판결이다. 여러분께선 지치고 힘든 가운데 반가운 마음이겠지만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도로공사는 지난번 대법원 최종판결을 받은 노동자들에게 다시 자회사와 정규직 전환 둘중 택일하게 하고, 정규직 전환을 택한 노동자들에겐 ‘수납업무’를 맡기지 않고 주거지에서 먼 지역으로 징벌적인 배치를 하는등 노조 탄압까지 하고 있다. 그리고 이번 판결도 소송당사자만 정규직 전환 대상자라고 할 것이다. 또한 이 문제는 단지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문제뿐 아니라, 청와대의 발언에서 나타났듯이, 소위 ‘4차기술혁명’이라고 읖조리면서 IT 기반의 기술혁신으로 일자리를 없애고 빼앗는 과정중에서 벌어진 일이다. 청와대에서 ‘톨게이트 수납 일’ 그런 것은 없어지는 일자리 아니에요. 라고 한 말은 허술하게 들을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계속 이런 정책을 시도할 것이고 쉽게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톨게이트 노동자들은 따라서 공공부문 비정규직 철폐 투쟁과 기술혁신을 빙자한 일자리 빼앗기에 맞서는 투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문제들이 있어 그리 간단치 않고 앞으로도 험난할 것이다. 톨게이트 노동자들은 갈라치기에 대해서 흔들리지 말고,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모두의 제대로 된 정규직화를 요구하면서 투쟁하여야한다. 함께 투쟁하고 함께 승리”

사실 요지는 이랬지만, 이렇게 조리 있게 말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그 날 컨디션은 좋지 않고, 현장 사정은 예상처럼 정리가 잘 돼있지 않아 준비에 정신 팔다가, 발언 준비가 전혀 안된채 바로 ‘여는 말’을 해야했습니다. ㅎ 여하튼 마이크 잡자 이런 취지의 발언을 하긴 했습니다. 동영상 찍은 이의 말로는 추워서 목소리가 떨리고 얼어 있더라 하더군요. 저도 그걸 느꼈습니다.

그리고 이 날 준비해온 방한품연대를 얘기해야겠습니다. 겨울마다 ‘방한품 연대’를 해왔습니다. 농성장마다 곧잘 보이는 군청색 거위털 침낭을 직접 주문제작한 ‘사파침낭’ 200개를 두 해에 걸쳐 노동자 농성장에 직접 혹은 간접 전달했습니다. 그리고 워머와 목도리 세트를 150개 보낸 적도 있고, 핫팩과 미세먼지용 마스크를 보낸 적도 있습니다. 이번에는 야심적으로(!) 무릎담요를 2겹 제작하여 이쁘게 “희망을 모읍시다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을 자수로 새겨 만들었습니다. 회색, 곤색, 그리고 적색 3가지 색입니다. 그것을 이날 처음으로 톨게이트 노동자들에게 120개 전달했습니다. 핫팩 300개와 함께요.
그리고 톨게이트 문화제 하기 전에 고 김용균 분향소를 사파기금 위원들과 연대자들과 함께 분향했습니다.이날이 고 김용균이 살아있었다면 25세 생일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아들의 음식 준비한다고 어머니 김미숙님은 계시지 않았습니;다. 여기에도 무릎담요 30개와 핫팩등 연대 물품을 전했습니다.

톨게이트 노동자들과 고 김용균 분향소에서 모두 요긴하게 사용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무릎담요 쓴 소감이나 느낌도 좀 올려주면 좋겠구요. 그리고 ‘연대와 나눔’의 시간을 마련했는데, 제주 2공항 반대 농성단이었던 분들이 노동자 투쟁에 연대기금을 조성하였다고 해서, 톨게이트 노동자들에게 직접 전달하는 시간을 가졌고, 홍삼포등 물품도 전달했습니다.

이후는 사파동행스럽게 진행했습니다. 예술가연대 사무처장이기도 한 윤선희 성악가수가 <더 임파서블 드림>, <마중>으로 아주 큰 환호를 받았고, 연영석 민중가수는 새 앨범의 <윤식이가 간다>등을 연주했는데 참으로 좋았습니다.

그리고 한국노총 소속 톨게이트 노조가 지난 대법원 판결후 재빨히 캐노피에서 내려와 투쟁을 접은 후 “노동자는 하나”라는 정신으로 투쟁을 계속하기 위해 한국 노총에서 민주노조로 소속을 바꾼 김영옥 조합원이 담담하고 다부지게 이 투쟁의 의미를 발언했습니다.

연대자발언으로 민교협 상임의장 김진석 교수, 일진다이어몬드 권오연 조합원, 그리고 공공운수노조 서진숙 부위원장이 발언을 했습니다. 김진석의장은 오랜만에 노동자 투쟁에 나선 소회가 묻어나는 목소리로, 문재인정부가 더이상 기대할 것이 없는 정부로 보인다면서 노동과 연대를 다짐했습니다. 공공운수 서진숙 부위원장은 부산 마사회 기수의 자살이 결국 지금 노동자들의 죽음과 연장선에 있음을, 그리고 이 문제를 놓치지 말고 계속 투쟁해야할 일임을 강조하였고, 일진다이아몬드 투쟁은 마포 본사앞에서 여전히 힘들게 진행되고 있으며 연대가 절실한 노동자 투쟁임을 발언으로 확인했습니다.

이날이 올해 들어 하필 가장 추운 날이었는데 모두 한파와 싸우느라 힘들었습니다. 음료팀에서 계속 모과차 생강차등 따뜻한 차와 뱅쇼등을 끓여서 집회사이 돌리면서 함께 나눴습니다. 음료 직접 가져오시고 자원봉사도 해주신 연대자들에게도 고맙습니다.

톨게이트 노동자들과 사파기금의 연대가 여러번 있었습니다. 처음 노동자들이 청와대 앞으로 들이친 날 사파기금은 여름맞이 청와대앞 농성장 순례중에 마주쳐서 인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사파기금 73회째 기금지원으로 1천만원 보냈습니다. 김천 도로공사 농성장에 포도, 사과, 생강청을 직접 전했습니다. 10월 3일 [9차 사파작은희망버스]으로 서울요금소 캐노피 농성장 방문과 김천 도로공사 연대 집회를 하면서 라면 100만원어치 전달했습니다. 이 모두가 연대자들이 매달 상시적으로 ‘사회적 파업에 사회적 연대’를 위해 보내오는 사회적파업기금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물론 기금을 조성하는 일, 그리고 기금을 배분하고 쓰는 일이 만만치 않습니다.
꾸준히 사파기금과 함께 노동연대에 함께 해주세요. 그리고 사파기금에 애정을 더욱 많이 표현해주시길 바랍니다.

2019. 12. 11
사회적파업연대기금 대표 권영숙

사회적파업을 위한 연대기금 CMS 신청하기:
https://www.ihappynanum.com/Nanum/B/6M2FZQRY5J (바로 클릭)
“한발씩, 웃으며, 끝까지, 함께!”

2019.12.05

고 김용균 1주기인데.
그가 처참하고 억울하고 외롭게 죽은지 고작 이제야 1년인데.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은 내일 오후 5시 30분 광화문광장의 고 김용균 분향소에 분향하고 톨게이트 문화제를 주관하러 세종로공원으로 갑니다. 혹 시간되면 이 때부터 같이 하시길 권합니다.
이틀전 추모집회가 3,40명, 썰렁한 모습에 충격받았습니다. 1년전 추모 열기와 관심을 생각하며 이럴순 없다 싶습니다.
1년이 지나도 노동현장은 달라진 것이 없다라고 국가와 자본에 대해 비난하지만, 정작 노동은 어떤지요? 또 그의 죽음에 분노하고 애도했던 이 ‘사회’는요? 비정규노동에게 모든 위험과 중노동을 떠넘기는데 모르는척 방관하고 공범이 되는건 아닐까요? 세상 인심이란 그런 것이라고 해야하나요.

날이 참 춥습니다.
처음 한여름 거리로 나섰던 톨게이트 노동자들이 한겨울 서울 광화문 거리에서 한달을 싸우고 있습니다.
내일 12월6일은 최고 한파라네요. 영하 10도. 낮기온도 0도 인근.
내일 하루 딱 2시간동안 한겨울 한파를 온몸으로 맞으며 거리에서 톨게이트 노동자들과 함께 하며 연대의 마음을 나누는 것 어떨까요?
한해가 또 이렇게 저물어갑니다.

2019.12.06
오늘은 작년 12월 10일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처참하게 숨진 비정규직 청년 노동자 김용균의 25세 생일이다. 광화문 분향소에서 본 “오늘도 살아줘서 고맙습니다”라는 문구에 마음이 쓰리다. 더 이상 죽이지 마라.

온통 맘이 돌처럼 딱딱해진다. 죽음이 너무 아프고, 죽어야하는 현실이 너무 자명해서, 죽음의 반복이 너무 필연적이어서, 부고를 듣는 마음들은 더 딱딱해지고 더 불편해진다. 사실 ‘사회’란 그 성원들이 매일 매일 만들어 내고 있는, 매일 매일 재구성하는 형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매일 만들어지는 사회를 거대한 벽처럼 암담하게 느꼈을 사람들을 아프게 떠올린다. 그래서 이 사회를 구성하는데 매일 가담하는 ‘우리’는 마음이 또 불편해진다.

걸그룹 가수 설리에 이어 구하라의 죽음. 남자친구의 데이트 폭력과 악질 댓글로 힘들었던 구하라의 죽음. 그리고 구하라의 전 남자친구가 저지른 죄들 중에서 다 인정하는데 성범죄만 무죄로 판결했다는 법원 기사. 구하라의 죽음으로 새삼 세간의 입질에 오른 이 판결은. 근데 지난 8월의 판결이다. 아 그랬구나. 이게 어떤 의미인지 확 다가온다. 8월의 이 판결이후 그는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을까. 구하라의 진짜 피해는 법으로 그리고 실체적으로 인정되지 않았던 것이다. 피해자가 있는데 피해는 없었던 것이다. 법원은 가해자에게 면죄부를 준 것이다. 건설업자 윤중천의 별장에서 소위 ‘성접대’를 받았다는 혐의를 받았던 법무차관 지명자인 검사 김학의처럼 말이다.

매일 매일 구성되어 우리 앞에 버티고 있는 이 난공불락의 사회에 대해서, 그리고 이 사회에 절망하여 일어났을 수다한 비슷한 죽음들 앞에서, 이 사회를 구성하는 ‘우리’라는 공허한 주체는 할 말을 잃게 된다. 아니 누군가를 향해 주먹질을 해야할텐데, 과연 누구를 무엇을 향해야할까? 이 죽음의 경우는 또 어떤가. 애초의 가해자 때문에 구하라가 죽었을까? 판사의 판결 때문에 구하라가 죽었을까? 과연 누가 그를 죽였을까? 이 죽음들은 왜 반복되고, 그 죽음의 원인은 왜 방치되고 있을까?

또 작년부터 올해까지 ‘1672명’의 노동자들이 일터에서 사라진 죽음이 있다. 그 죽음들은 한날 한시의 죽음이 아니라, 일상적으로 방치된 죽음들이고, 구조적으로 발생한 죽음들이다. 가해자의 인정도 가해사실의 인정도 없이, 무참한 목숨들이 일터에서 사라지고 있다(최근 <경향신문> 지상에 올려진 산업재해 사망자 명단은 1200명이다. 하지만 실제 한국의 산업재해 사고와 죽음은 이보다 훨씬 더 많다. 산업재해의 20%만이 산업재해 보험 처리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산업재해 사망사고도 그만큼 은폐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노동부 통계에 따르더라도 직업병을 포함한 산업재해로 일터에서 해마다 2천명, 하루 3명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대체로 매일 5-6명 사망이라고 본다).

이들 노동자들은 또 누가 죽였을까? 무엇이 죽였을까? 살기 위해서 노동력을 팔고 일터에서 일하던 사람들을 다시는 집에 돌아올 수 없게 만든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리고 이 질문 역시 마찬가지로 우리는 과연 하나의 답에 이를 수 있을까? 이 죽음들의 가해자들이 과연 누구인가에 대해서 과연 우리 사회 성원들은 같은 답을 내릴 수 있을까? 죽음에 대해 애통해하고 마음의 가책을 느낀다고 해서 반드시 같은 답을 염두에 두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구하라의 죽음도 그렇고 김용균의 죽음도 그렇고, 수많은 구하라들, 그리고 김용균들의 죽음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답을 찾지 못한 채 죽음들은 늘어만 가고, 제어되지 않은 채 사회적 타살은 반복된다.

그러므로 죽음들 앞에서 슬프고 애통하다는 것은 때로 악어의 눈물같이 느껴진다. 슬프고 애통하고 가책을 느끼는 것은, 가장 손쉽고 어쩌면 가장 값싼 연대의 표현방법이다. 이렇게 일상화된 죽음들을 막기 위해서는 연민과 가책에 연유하는 연대의 감정과 의식으로는 한참 부족하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애도와 가책은 나를 편하게 하는 나 중심의 연대일 뿐이다. 왜냐하면 문제는 바로 그 ‘일상’이라는 괴물, 내가 영위하는 현실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매일 매일 우리 구성원들이 만들고 있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저 죽음들을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죽음의 소식을 들을 때 그 순간뿐인 미안함과 눈물이 아니라, 세상의 구조에 대항할 때에만 이 죽음들의 반복을 막을 수 있다. 이 죽음들은 일상적이고 구조적인 죽음이기 때문이다. 구하라와 설리의 죽음은 걸그룹 아이돌의 사생활 보호는 관심없이 자본의 이익을 추구하거나, 대중의 찰나적인 호기심과 여성에 대한 ‘마녀사냥’에 영합하는 사회가 공모하여 일어난 죽음들이다. 그것은 단지 여성혐오만도 자본주의의 이윤추구만도 아닌, 병합된 문제들이 얽혀서, 반대쪽에 손가락질만 하면서 계속 반복된다.

일터에서 사라지는 노동자들을 죽이는 것도 바로 그 돈, 자본이다. 돈 때문에 안전수칙을 어기고, 돈 아끼려고 안전장비를 갖추지 않고, 그리고 자본으로 맺어진 원하청 사슬, 비정규직화와 죽음의 외주화가 노동자들을 죽이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그 악마의 자본주의 앞에서 침묵하고,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사회, 그 자본 앞에 굴복하고 법도 행정집행도 팽개치는 국가가 공범이다.

그러니 어떻게 이것을 한 순간의 눈물과 한숨으로 닦아주고 원상회복하고, 혹은 다시 이런 일을 일어나지 않게 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이제 우리에겐 연민과 속죄, 그것으로 빚어내는 순간적이고 휘발적이고 철저히 나로부터 시작하는 연대가 아니라, 그 죽음들 자체에 대한 인식에 기반한 사회적 의지와 사회적 힘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자본의 구조에 맞서는 힘이 필요하다. 노동을 짓밟고 일어서는 국가와 노동을 배제하는 정치적 민주주의에 대해 일어서는 힘이 필요하다. 속죄와 가책에 의한 동정과 연민의 의식이 아니라 종국에는 함께 그 길로 합쳐지는, 그래서 세상을 바꾸는 길을 만들어가는 사회적 동맹이 필요하다. 그런 굳건한 사회적 동맹, 정치적 동맹의 구축이야말로, 그래서 그 동맹세력이 더이상 물러나지 않는 힘으로 자본주의 세상을 제압하고, 자본과 교묘히 결합된 비인간적인 일상의 구조를 바꾸고, 자본과 결탁한 정치를 뿌리로부터 전복시키는 것, 그것이 바로 일상적이고 구조적인 죽음들과 사회적 타살을 막는 길이다.

구하라 설리의 죽음이든. 노동자 1672명의 죽음이든,
어쩌면 그 죽음들의 원인이 하나의 뿌리라는 각성이 연대의 시작이다.

2019. 12. 06
권영숙 (사회적파업연대기금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