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부고속도로에서 차가 밀렸다고 한다. 4월 9일(토)12시 30분에 인월 요업역사관 한식부페에서 봉고차와 승용차로 온 참가자들이 합류했다. 나는 이우학교 백두대간 동아리의 백두대간 산행을 하다가 중간에 먼저 내려와 만났다.
점심은 풍족하고 흡족했다. 채소로 된 반찬은 물론 고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돼지고기 수육도 양껏 먹을 수 있다. 역사기행 중에 참가자들의 만족도가 골고루 높은 음식점이다.
일정이 늦어져서 실상사 백장암은 생략할까 망설였다. 걸으면 1km 산길을 걸어 왕복 1시간은 넘게 잡아야 한다. 대형 관광버스로는 올라갈 수 없는 길이다. 백장암은 국보인 3층석탑으로 유명하다. 선종이 도입되고 불국사 석가탑을 정점으로 하는 석탑이 흔들리면서 새로운 양식의 탑이 등장하는 시기의 대표적인 탑이다.
달궁을 지나 성삼재를 넘어 구례를 거쳐 연곡사로 갔다. 지리산 북쪽으로는 벚꽃이 한창인데 남쪽은 거의 지고 있었다. 겉으로는 아쉬운 척했지만 속으로는 다행이다 싶었다. 벚꽃이 한창일 때는 연곡사를 지나 화개장터를 거쳐 의신마을로 올라가는 길이 미어터져 중간에 돌아서야 할 때도 있기 때문이다. 연곡사 동부도, 북부도, 서부도를 가리키는 팻말 이름을 동승탑, 북승탑, 서승탑으로 바꾸었다. 동승탑을 모방하려던 북승탑, 서승탑의 짝퉁의 아픔과 창조의 변화를 눈여겨 보았다.
벚꽃은 졌으나 화개장터는 차댈 곳이 마땅치 않게 만원이었다. 내가 탄 승용차는 화개장터에 들어갔다가 먼저 의신마을로 올라갔다. 나머지는 끼니거리를 마련하려고 가게에 들렸다.
의신마을에서 벽소령 산장 옆으로 난 길을 따라 대성골 민박까지는 2.5km다. 우리 팀이 민박에 도착했을 때 뒤쪽 참가자들이 길을 잘 못들어 원통암 쪽으로 올라갔다 내려와 이미 민박집에 도착할 시간인데 대성골 길로 들어섰다고 한다. 사람마다 몸 상태가 다르므로 캄캄한 어둠 속을 헤매며 걸었던 느낌과 기억도 다를 것이다.
백숙으로 저녁을 먹고 새벽까지 뒤풀이가 이어졌다. 지리산의 역사와 현실의 운동, 각자 겪고 있는 갈등과 고민들을 나누었다.
지리산 대성골은 지리산 인민유격대, 남부군 대원들이 한꺼번에 가장 큰 피해를 본 곳이다. 한 시간 쯤이라도 골짜기를 걸어볼 요량이었으나 지난 밤 뒤풀이가 과해서 생략했다. 어제 어둠 속에서 걸었던 길을 다시 돌아나와 의신마을 역사관에 들렸다. 화전민들의 생활상과 빨치산의 역사가 성글게 전시되어 있었다. 작전도로를 타고 삼정마을까지 올라갔다. 이현상 아지트와 최후 전적지에 가까운 곳이다. 입산금지구역이라 들어가지는 못하고 이현상에 얽힌 이야기로 이아쉬움을 달래고 돌아섰다.
화엄사 입구 상가에서 점심을 먹었다. 화엄사 대웅전 앞 마당의 삼층석탑, 각황전과 거대한 석등까지 보고 화엄사사사자석탑 올라가는 계단 앞에서 길이 막혔다. 화엄사에서 가장 눈여겨 보아야할 유적 유물인데 보수 공사중이라 못 보았다. 이렇다. 그곳에 있다고, 어렵사리 간다고 해서 당연히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올라오는 논산천안 고속도로가 주차장 같았다. 1박 2일 역사기행의 피와 살을 탈탈 털어내니까 이렇게 맹숭맹숭한 글이 되었다. 살을 좀 붙이고 수혈을 해서 <작은책> 역사기행에 다시 쓰려고 한다.
지금 대면할 수 있는, 20여 명이 안되는 사람들의 사연도 몇날 며칠 나눠도 끝나지 않을 만큼 무궁무진하다. 사파기금 역사기행에 참가한 사람들은 내가 안내하는 다른 역사기행 참가자들보다 삶의 아픔이나 고통이 더 크고 많은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기다림에 지쳐 지리산으로 들어갔던 사람들을 ‘빨찌산’ ‘인민유격대’ ‘남부군’이라고 호명하면서 남겨진 흔적을 꿰맞춰 살펴보아도 속 깊이 알기 힘들다. 지리산에 켜켜이 쌓여 있는 역사는 깊고 아프다. 그래서 내 아픔과 고통을 위로 받을 수 있는 산이기도 하다. 늘 그렇듯이 오자마자 다시 가고 싶은 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