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Archives: 4. 노동운동의 쟁점과 역사

노동학교 후속집담회, “1987년과 2013년, 노동의 미래는 있는가”

제2회 민주주의와 노동학교

9월24일 저녁 7시 민주노총 13층 대회의실에서 87년 민주화이후 노동운동사에 대한 강의의 후속 집담회,”1987년과 2013년, 노동의 미래는 있는가” 를 엽니다.

87년민주화이행이후 노동과 정치의 역사 4강에서 제기된 여러 논점들에 대한 수강생 여러분의 의견과 소감을 듣는 자리입니다. 나아가 노동의 현주소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노동의 미래를 진단하고 절망을 절감하되 희망을 꿈꿔보는 자리로 마련했습니다. 단순히 노동학교 수강 소감을 밝히는 자리가 아니라, 1987년과 2013년을 이어서 노동의 문제설정으로 이 사회를 바라보는 여러 시각들을 공유하고 고민을 나누는 뜻깊은 토론장이 되길 바랍니다.

노동학교 전체 강의에 개근하여 목에 힘 잔뜩 주셨던 분들,
그리고 한번 혹은 두번 간헐적으로 참석하신 분들,
그리고 노동학교 수강할 맘은 강렬했으나 여차저차 그동안 한번도 들어오지 못했던 분들까지,
노동의 역사속에서 노동의 미래를 진단하는 마지막 토론장에 함께 하고픈 분들은 스스럼없이 와주세요.
모두 그날 뵙기를 바랍니다.
9월24일 오후 7시 민주노총 13층 대회의실입니다.

2시간동안 종강 집담회를 개최한 후,
진하디 진하고, 종강 뒤풀이를 하겠습니다
기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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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민주주의와 노동학교 소개 웹자보

 

제2회 민주주의와 노동학교

제2회 민주주의와 노동학교 “87년 민주화 이후 한국 노동운동의 형성에서 전환까지”

제2회 ‘민주주의와 노동’학교 4강 “노동운동의 제도화 (1998- ), 그리고 노동의 미래”

제2회 민주주의와 노동학교 4강 "노동운동의 제도화 (1998- ), 그리고 노동의 미래"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이 여는 제2회 ‘민주주의와 노동’학교

전체주제 “87년 민주화이후 한국 노동운동의 역사-형성에서 전환까지” 4강중에서 대망의 마지막 강의 시간입니다. 네번째 강의가 9월 10일 오후 7시부터 서울 정동 민주노총 대회의실(경향신문 빌딩 13층)에서 열립니다.
이번 제 4강의 강의제목은 “노동운동의 제도화 (1998- ), 그리고 노동의 미래”입니다.

1강에서 민주화이후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노동운동을 바라보는 전체적인 문제의식과 총론적인 논지를 이야기했고, 2강에서 이행이후 ‘형성기 노동운동’에 대해서, 그리고 3강에서 형성기 조건을 바탕으로 해서 이뤄진 노동운동의 ‘전환’에 대해서 살펴봤습니다.

이제 그런 전환이후, 한국 노동운동, 노조운동, 조직노동.. 그리고 무엇보다 한국 노동계급의 현실에 대해서 살펴보겟습니다. 처음 강의 취지에서 제기한대로, 과연 한국의 노동운동은 노동계급에게 무엇을 제시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한국의 정치적 민주주의는 노동과의 끝없는 평행선에 종지부를 찍고 어떤 화해를 혹은 질적 전환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요?

질문이 무겁습니다. 하지만 노동자라면, 노조운동을 하는 사람이라면, 노동의 문제의식을 가슴에 품고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고민하고 있는 문제이고 당연히 답을 찾아 나서야할 질문들이라고 봅니다.

3강까지 들은 분들, 그리고 3강중 들쑥날쑥 들은 분들은 꼭 참석하시고,
그리고 이제라도 듣겠다는 분들도 모두 환영합니다.
내일 저녁 7시 민주노총 13층 대회의실에서 만나요!

강사: 권영숙 (사회적파업연대기금 대표/ 민교협 노동위원장)

- 참가비 : 전체 강좌 2만원 (1회 강좌 수강시 1만원)
- 입금계좌: 국민은행 012501-04-230247 사회적파업연대기금
참가신청 : 클릭! http://goo.gl/AINfx 혹은 http://sapafund.org/

 

제2회 민주주의와 노동학교 4강  "노동운동의 제도화 (1998- ), 그리고 노동의 미래"

제2회 민주주의와 노동학교 4강 “노동운동의 제도화 (1998- ), 그리고 노동의 미래”

제2회 ‘민주주의와 노동’학교 3강 “노동운동의 전환 (1993- 1998) 포위와 조직노동의 제도화”

제2회 3강 "노동운동의 전화 1993-1998"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이 여는 제2회 ‘민주주의와 노동’학교  ”87년 민주화이후 한국 노동운동의 역사-형성에서 전환까지” 4강중에서 그 세번째 강의가 9월 3일 오후 7시부터 서울 정동 민주노총 대회의실(경향신문 빌딩 13층)에서 열립니다.

이번 제 3강의 강의제목은 “노동운동의 전환 (1993- 1998) 포위와 조직노동의 제도화”입니다.

다음은 강의를 해 주실 권영숙 교수의 3강 소개글입니다

——–

3강 강의안 소개
- 93년 ‘전환점’의 의미와 노동운동의 변화

제2회 민주주의와 노동학교- 87년 민주화 이후 한국 노동운동의 형성에서 전환까지”. 그 3번째 강의가 9월3일 내일 저녁 7시부터 민주노총 13층 대회의실에서 열립니다.

4강중 벌써 3강입니다. 제목은 “노동운동의 전환, 1993-1998: 포위와 조직노동의 제도화”입니다. 강의 전체 제목이 “형성에서 전환까지”입니다. 그 큰 제목에서 ‘전환’의 의미를 다루는 시간입니다.

이제껏 1강은 기본적 시각, 총론적 논지, 그리고 87년 노동자대투쟁의 역사적 의미와 성격을 다뤘고, 2강에서 ‘형성기 민주노조운동’에 대해서 얘기했습니다. 저의 논지중 핵심은 한국 노동운동의 전환점은 97년이 아니라 93년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민주화라는 것이 장기적 경로속에서 정치적 민주주의를 구체화하기때문입니다. 흔히 ‘공고화’라는 표현은 일면적이지요. 어떤 민주주의 하위체제로 귀착되는가는 이행이후의 긴 과정을 겪으면서 분명해집니다. 불행히도 한국은 노동없는 자유민주주의의 공고화입니다. 그리고 이는 노동체제, 노동의 시민권, 노동의 선택과 긴밀히 연결됩니다. 그래서 이행이후 ‘형성’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1987년부터 1992년까지 ‘형성기’의 특징을 치열한 계급투쟁과 전투적 조합주의의 명암으로 요약했습니다. 이제 제 3강에서 그런 경로가 만들어낸, 민주주의사회의 새로운 조건속에서, 노동운동이 어떻게 대응하고 자기전화했는가를 보겠습니다. 1993년부터 1998년, 바로 이 시기의 전환이 이후의 노동운동, 노조운동, 나아가 한국의 노동계급의 현주소에 그대로 연동됩니다. 97년 외환위기는 그 정점 혹은 그것의 본격적인 확인과정에 돌입하는 셈이었지요.

이상 강의 요약이구요.
그날 강의에서 뵙겠습니다.
아 참. 최근 국정원의 통진당 이석기 의원 수사가 사회적 정치적 파장을 그리고 있습니다. 해묵은 80년대부터의 이념적 지형이 다시 논의되고있기도 합니다. 이른바 PD와 NL, 혹은 민족주의와 좌파가 노동에 어떻게 연관을 맺기 시작했고 어떤 노동내 지형을 만들었는지, 이른바 정파의 문제와 이념의 문제도 다루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물론! 그 가운데 자리잡은 민주연합과 자유주의의 문제까지도…

그러니 결석하지 마시고,
1강이후 빠졌거나, 2강에만 들어왔거나 한 분들과
새로 오는 분들….
모두 함께 보길 바랍니다.
날이면 날마다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제2회 3강 “노동운동의 전화 1993-1998″

내일 저녁 7시 민주노총 13층 대회의실에서 만나요!

강사: 권영숙 (사회적파업연대기금 대표/ 민교협 노동위원장)

- 참가비 : 전체 강좌 2만원 (1회 강좌 수강시 1만원)
- 입금계좌: 국민은행 012501-04-230247 사회적파업연대기금
참가신청 : 클릭! http://goo.gl/AINfx 혹은 http://sapafund.org/

제2회 ‘민주주의와 노동’학교 2강 “억압과 전투적 조합주의의 명암”

2회 민주주의와 노동학교 2강 "민주노조운동의 형성기( 1987- 1992): 억압과 전투적 조합주의의 명암"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이 여는 제2회 ‘민주주의와 노동’학교

전체주제 “87년 민주화이후 한국 노동운동의 역사-형성에서 전환까지” 4강중에서 그 두번째 강의가 8월27일 오후 7시부터 서울 정동 민주노총 대회의실(경향신문 빌딩 13층)에서 열립니다.

이번 제 2강의 강의제목은 “민주노조운동의 형성기( 1987- 1992): 억압과 전투적 조합주의의 명암”입니다.

제 1강에서 87년이후 한국노동운동사를 바라보는 기본시각과 시대구분에 대한 문제제기와 87년 노동자대투쟁의 의미를 통해서 87년이후 노동운동의 초기조건에 대해서 토론했습니다. 2강에서는 87년 이행이후 태동한 민주노조운동의 초기적 흐름과 치열한 계급투쟁의 5년의 명암을 살펴볼 예정입니다.

1강을 들었던 수강생 여러분들, 2강부터 듣기로 한 분들,
그리고 이제라도 듣겠다는 분들.
모두 환영합니다.
내일 저녁 7시 민주노총 13층 대회의실에서 만나요!

강사: 권영숙 (사회적파업연대기금 대표/ 민교협 노동위원장)

- 참가비 : 전체 강좌 2만원 (1회 강좌 수강시 1만원)
- 입금계좌: 국민은행 012501-04-230247 사회적파업연대기금
참가신청 : 클릭! http://goo.gl/AINfx 혹은 http://sapafund.org/

 

2회 민주주의와 노동학교 2강 “민주노조운동의 형성기( 1987- 1992): 억압과 전투적 조합주의의 명암”

 

— 아래의 글은 2013년 8월 26일 페이스북에 실린 권영숙 교수님의 초대글입니다. —-

 

노동문제의 근본을 캐기

- 민주주의와 노동학교 2강 주제

문제의 소재지를 관련지점을 정확히 말해야지요. 그동안 한국사회의 민주화의 방식, 그 속에서 노동의 대응전략, 주체의 내부적 해체가 함께 결합된 문제가 지금 노동의 최종적인 모습을 야기했지요….

근데 결국 어디에서 시작할 것인가… 다들 ‘주체의 혁신’이나 재구성’을 말하긴 하는데,, 주체는 주체인데 어떤 주체인가- 핵심 대상도 그렇고 핵심적인 생각도 무엇이어야하는지가 문제이지요…. 일부에서 비슷한 말을 하는 듯하는데, 품은 뜻도 말의 정의도 알고보면 같은 게 아니더라는…..

그러니 발설을 해야지요, 정확히 자신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모두의 생각이 다 광장으로 나와서 부딪히고, 길라설 것들은 갈라서고, 서로 검증되길 바랍니다.. 뭉기적거리며 물타기 하며, 같이 가자/함께 살자는 식으론 그런 혁신이 나오지 않지요.

이번 민주주의와 노동학교에서 87년이후 노동운동사를 보기로 선택한 데는 바로 이런 문제의식이 깔려있습니다. 뭉기적거리지 말고, 뭉개지 말고, 함께 살자, 하나다 따위의 공허한 얘기말고… 다 드러내자, 제대로 나누자, 분석하자, 그리고 문제의 소재지를 분명히 하자. 어찌 여기까지 흘러왔는지 제대로 보자입니다.

그러기위해서 내일 2강의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 즉 ‘형성기’ 민주노조운동의 흐름을 봅니다. 여기서 모든 것은 시작되었습니다. ‘초기조건’이 어떻게 ‘형성기 노조운동’의 특징을 만들어냈고, 그것은 어떻게 그 다음의 단계를 경로의존적으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선택적으로 만들어갔는가!

제가 내일 할 얘기는 이것입니다.

1강에서 전체적으로 한국 노동운동사를 바라보는 기본시각과 총론적인 논지와 시대구분에 대한 문제제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87년 6월항쟁 뒷이어 시작된 87년 노동자대투쟁의 의미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어떻게 민주주의 동원과 노동자 동원이 이 87년을 기점으로 하여 26년간의 ‘장기적 민주화’의 경로속에서 평행선을 달렸는지, 그것을 지금껏 반복했는지,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인지. 그리고 87년의 이 상황이 어떻게 이후 민주주의와 노동의 자기 전화과정에서 ‘초기조건’으로 작동했는지에 대해서 강의했습니다.

이제 2강에선 형성기 민주노조운동에 대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왜 ‘형성기’라고 표현하는지부터 강의에서 시작하겠습니다. 87년이후에도 계속된 노동탄압- 하지만 전적으로 다른 정치지형에서 그 억압이 만들어낸 다중적인 효과와, 그에 대한 민주노조운동의 대응이었던 전투적 조합주의가 어떤 긍정적인 결과와 함께 또한 ‘의도치 않은 결과’를 낳았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그리고 1991년의 5월투쟁의 의미와 지금 ‘조직노동’의 씨가 어떻게 뿌려졌는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겠습니다.

내일 오후 7시 민주노총 13층 회의실에서 뵙지요.

제2회 민주주의와 노동학교 “87년 민주화 이후 한국 노동운동의 형성에서 전환까지”

제2회 민주주의와 노동학교

제2회 민주주의와 노동학교

      “87년 민주화 이후 한국 노동운동의 형성에서 전환까지”

 제 2회 민주주의와 노동학교 참가 신청하기 –> 링크 클릭하기  http://goo.gl/AINfx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이 제2회 ‘민주주의와 노동’학교를 87년이후 한국 노동운동사 기획강좌로 엽니다.

지난 26년의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에서 노동은 무엇을 요구하였고 노동운동은 어떻게 변화했을까요? 노동운동은 정리해고, 비정규직, 노조탄압에 내몰리고 있는 한국의 노동자계급에게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요? 한국의 민주화이후 민주주의하에서 노동의 희망은 정녕 찾을 수 없는 걸까요? 이번 ‘민주주의와 노동’학교 강좌는 이 질문들에 대해 치열하게 답을 구하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역사적 사실들의 나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87년이후 노동의 역사를 재구성하고자 시도할 것입니다. 그리고 전세계 각국의 노동운동들과의 비교정치사적인 고찰속에서 한국 노동운동에 대해 더넓고 깊은 이해를 도모할 것입니다.
역사와 노동현실에 관심있는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 강사: 권영숙 (사회적파업연대기금 대표, 민교협 노동위원장)

- 강좌 구성 (매주 화요일 19시)
제1강 (8/20) – 민주노조운동의 형성기 (1987-1992) 억압과 전투적 노조주의의 명암
제2강 (8/27) – 노동운동의 전환 (1993- 1998) 포위와 조직노동의 제도화 모색
제3강 (9/03) – 노동운동의 제도화 (1998-) 사회적 대화와 내부적 배제
제 4강 (9/10) – 2008년이후 지금까지 노동 – 노동없는 민주주의, 노동없는 노동운동, 노동없는 노동정치 어떻게 타개할까

- 참가신청 : 클릭! http://goo.gl/AINfx 
- 참가비 : 전체 강좌 2만원 (1회 강좌 수강시 1만원)
- 입금계좌: 국민은행 012501-04-230247 사회적파업연대기금 
- 장소 : 민주노총 13층 대회의실 (서울 중구 정동 소재 경향신문사 사옥 내)

- 문의 : 이메일 sapafund@gmail.com, 페이스북 계정 사파기금(sapafund)

 

 

제2회 민주주의와 노동학교

제2회 민주주의와 노동학교 “87년 민주화 이후 한국 노동운동의 형성에서 전환까지”

‘민주주의와 노동’ 학교 강좌 참여신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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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버스 이후 노동에 대한 사회적 연대의 새로운 흐름 (발표자료)

아래의 글은  (사)여성문화이론연구소가 주최한 제56회 콜로키움에서 발표한 권영숙 박사의 발표문입니다. 본 글은 계간지 문화과학 2012년 여름호에도 실렸습니다.

(사)여성문화이론연구소  http://www.gofeminist.org/

(사)여성문화이론연구소  제56회 콜로키움

희망버스이후 노동에 대한 사회적 연대의 새로운 흐름

-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의 문제의식과 의미

권영숙

1. 들어가는 말

지난 해 한진중공업노동자들의 정리해고 철회싸움과 김진숙 부양노련(민주노총 부산양산지역본부) 지도위원의 크레인농성은, 70년대이후 우리 사회에서 최초의 유의미한 노동에 대한 사회적 연대운동을 불러 일으켰다. “희망버스”로 이름붙여진, 노동에 대한 이 연대운동은 올해 1월초 장기투쟁사업장을 순례하는 “희망뚜벅이”, 2월에는 시청광장을 “희망광장”으로 되돌리자는 광장점거운동, 나아가 지금 서울 대한문앞의 쌍용차 노동자분향소의 시민상주단과 “희망지킴이”로 진화하고있다.

그만큼 우리 사회는 희망에 목말라있는 사회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노동의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려는 시도에 못말라 있다. 그만큼 그동안 민주화이행후 노동배제적 민주주주의 속에서 노동의 사회적 고립은 심각했었다. 그러므로 이를 뚫고 희망버스로부터 시작된 노동에 대한 사회적 연대의 의미는 자못 크다. 더불어 한국자본주의의 무한한 질주, 즉 국가의 통제나 시민사회의 치열한 비판적 감시 없이 무소불위로 군림했던 ‘경제권력’에 대한 문제제기가 동일한 맥락에서 시작된 것도 예사롭지 않다. 하지만 희망버스 이후의 움직임들은 여전히 희망버스를 반복하고 재현하려는 시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희망버스에서 시작된 노동에 대한 사회적 연대의 문제의식을, 다시 한 단계 넘어서는 연대적 사회운동의 조직화와 노동의 문제설정으로 모아가기에 한계가 있고 아직 힘이 부족하다.

희망버스의 연대운동이 한진중공업 해고노동자들과 김진숙의 크레인농성을 중심으로 하는, 사건적이고 일회적인 성격을 지닌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제 중요한 것은 어떻게 희망버스로 시작된 노동의 사회적 연대를 지속적인 문제의식으로 발전시키고 장기적인 전망으로 추동할 동력을 확보하는가이다. 이 점에서 지난해 2차희망버스 직후인 7월말 시작된 ‘사회적파업연대기금’ 캠페인이 주목된다.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은 희망버스로 시작된 노동의 사회적 연대를 장기적인 문제의식으로 결집하고, 나아가 파업기금이 부재한 채 파업을 시작하면서 돈의 압박에 스러져가는 한국노동자들의 파업을 지원하기위한 하나의 제도적 장치로서 시작되었다. 제목에서 시사하듯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은 노동에 대한 시민적 연대가 아니라 노동에 대한 사회적 연대라는 점과 노동자의 파업은 ‘사회적 파업’이라는 이중의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노동자들의 파업권을 노동자의 ‘시민적 권리’로 우리사회가 공공연히 긍정하자는 운동이기도 하다. 한국사회의 노동현실에 대한 맥락적 이해 위에서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이 내장하고 있는 문제의식을 풀어보고 그 의미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2. 왜 파업기금인가, 왜 사회적 파업연대기금인가

한국에는 노동자들에게 고유하게 주어지는 헌법상의 권리인 파업권이 과연 존재하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1987년 시작된 민주노조운동의 거센 저항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서 지속된 노동배제와 외환위기 및 금융위기가 몰고온 신자유주의의 쓰나미 속에서 노동자들의 파업권은 사실상 거세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단지 기업이 고용한 용역깡패들과 이를 비호하는 공권력 때문만이 아니다. 바로 돈때문이기도 하다.

서구 노동운동사를 보면, 노조운동이 전국화 산별화되면 이른바 파업기금을 조합원으로부터 월단위로 받아 기금으로 조성한다, 그리고 파업기금을 가지고 파업한다. 왜냐하면 파업을 하고, 기계를 멈춰더라도,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이 굶을 순 없으니까, 자식들을 키우고 학교를 보내야하니까. 산업자본주의가 본격화된 이후인 19세기 중엽무렵 유럽의 노동운동은 국가간 편차가 있을지라도, 파업기금의 조성을 조직과제로 삼고, 노조 조합비(fee)와 별도로 그리고 조합비와 동률로 파업기금을 노조원으로부터 거둔다. 그리고 이 파업기금은 노조의 경상적인 활동비로 전용할 수 없고, 단지 파업만을 위해 사용된다. 노조운동은 파업기금을 조성함으로써 파업과정에서 노동자들 및 그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면서 파업의 안정성을 확보한다. 하지만 이보다 더 큰 의미는 노조, 그리고 노동자들 스스로가 파업기금을 조성함으로써, 노동계급이 자신들이 언제든지 자본에 대타적인 투쟁에 나설 수 있음을, 노동계급을 자본에 대항한 행위자로 스스로 자각한다는 데 있다. 즉 노동자 스스로가 ‘파업권’을 자신의 권리로, 조직적인 무기로 인정하고 자본에 대해서 대타적인 노동의 정체성을 갖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이 파업기금이 낯설다. 민주노조운동이 시작된 1987년이래, 노조들은 노태우정부가 내세운 파업중 ‘무노동무임금’정책에 맞서 싸우는데 초점을 둘 수 밖에 없었고, 그 과정에서 파업중인 개인들의 생계는 개인 노동자들의 몫이 돼버렸다. 그리고 형성기 민주노조운동의 시기에 파업기금에 대한 문제의식을 채 성숙시키지 못한 가운데 노조운동은 조직노동으로 정립되었다. 이리하여 파업기금의 조성은 각 노조단위의 문제로 개별화되었고, 각 노조들은 쟁의기금을 별도로 거두지않은 채 임기응변으로 특별예산으로 편성된 쟁의기금을 사용하는 식이었다. 따라서 이는 안정적이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노조마다 빈익빈 부익부를 초래하기도 했다. 나아가 파업기금을 조성하면서 노동자들이 스스로 자신의 파업권을 인정하고 자본에 대자적으로 정리하는 과정은 생각지도 못한다. 모든 것이 도구적이고 임기응변이다. 하지만 파업기금의 부재는 특히 갈수록 비타협적이고 적대적인 자본의 교섭불참, 국가의 냉대와 친자본적 태도속에서 한국적인 노동현상이 돼버린 소위 장투장(장기투쟁 사업장)들에게는 더욱 치명적인 문제가 되엇다. 100여개가 넘는 한국의 장투사업장들이 파업기금없는 싸움을, 심하게는 코오롱합섬처럼 최장기 8년간 진행하면서 돈의 압박에 끊임없이 시달린다. 파업기금과 생계비 뿐만 아니라 자본이 제기하는 온갖 민사소송과 손해배상 가압류등등으로 인한 돈의 압박도 무시못한다.

결국 한국의 노동은 파업권이란 헌법적인 권리를 가졌으나, 돈 앞에서 속수무책이었고 스러져갔다. 파업기금의 부재는 곧 노동자의 파업권의 유명무실화로 이어진다. 노동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파업은 칼날이 되어 노동자들의 심장을 뚫고 들어왔다. 부당한 근로조건과 정리해고에 맞서 파업을 선언하는 순간, 그들은 자신의 인생을, 자신의 가족들의 생계를 이 파업의 제단 위에 올려놓아야 했다. 그리하여 ‘단지 용역깡패와 공권력의 침탈 뿐 아니라’ 돈이 이들의 피를 말렸다. 그들을 힘없이 스러지게 했다. 사람을 파괴했다.

2009년 77일 파업을 했던 쌍용자동차의 사례가 그랬다. 그리고 희망버스를 부른 한진중공업 역시 마찬가지다. 2010년 12월 정리해고후 2011년 11월까지 장기간의 파업을 거치면서 이들의 인생은 절단났다. 4백여명의 노동자들중 다수가 떠나고 끝까지 남은 이들, 즉 ‘한진중공업정리해고투쟁위원회(한진중정투위)에 남아 파업에 동참한 노동자들은 기껏 100여명이다. 그리고 그런 어려움 속에서 한진중 노조지회장 채길용의 ‘직권합의’도 벌어졌다. 바로 그런 것이다. 파업한다고 그들이 인간이 아닌가, 그들 역시 평범한 이 사회의 필부들, 가장들, 범인들이다. 파업을 해도 생계를 유지해야하고, 자식을 키우고 학교도 보내야한다.

결국 여기서 분명한 것은 노동자들이 자신의 싸움을 진행하려면, 그리고 노동자들의 파업권을 온전히 행사하려면, 파업기금의 조성이 필요불가결이라는 점이다. 구조조정과 정리해고에 맞선, 더구나 갈수록 장기화되는 한국 노사분규의 특징을 고려할 때, 노동자들이 파업을 선언하고 감행하려면 노조 조합원들과 그 가족들이 ‘악마의 금전’, 즉 돈의 압박으로부터 벗어나야한다. 그것이 곧 파업기금이다.

그리고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은 말 그대로 노동자의 파업기금을 사회적인 연대로 모아주자는 운동이다. 그래서 전면에 내세운 구호도, “노동자들이 돈앞에 스러지지 않게 하는 사회적 연대”이다. 2011년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싸움에 연대한 ‘희망버스’는 노동자에 대한 우리 사회의 연대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국가권력의 비정상적인 자본편들기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은 노동자들과 맞잡은 각계각층의 사회적 연대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노동자의 사회적 고립을 사회적 연대로 해소함으로써 노동의 희망을 만들 수 있음을 시사하였다.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은 희망버스를 이어, 단지 한진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노동현실, 이 사회와 이행후 민주주의가 배제해왔던 노동에 대해 지속적인 사회적 연대를 만들어가기 위해 시작되었다. 단지 일회적인 혹은 사건적인 것이 아니라 노동에 대한 사회적 연대를 노동과 사회가 함께 하는 파업연대기금의 조성을 통해서 일궈나가자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당장 파업하는 노동자들뿐 아니라, 이 신자유주의의 반노동적 현실속에서, ‘노동파괴’가 일상화된 노동시장의 조건속에서, 모든 노동자들, 우리들, 노동하는 우리들에게 항상적 잠재적인 공포인 정리해고와 비정규직화에 대항해서 함께 연대할, 나를 지지해줄 사회적 안전망을 만들자는 것이기도 하다. 결국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은 ‘사회적 파업’에 대한 ‘사회적 연대’다.

3, “사회적파업연대기금’에서 ‘사회적인 것’의 의미 : ‘사회적 파업’에 대한 ‘사회적 연대’

희망버스가 부산 영도를 달려갈 때 많은 사람들은 소위 ‘노동의 시민권 회복’이라고 그 의미를 부여했다. 혹은 노동에 대한 ‘시민적’ 연대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표현들은 한국사회에서 뿌리깊은 ‘노동 대 시민’의 대당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논쟁의 소지가 있다. 노동 대 시민의 대당은 기본적으로 노동을 시민(권) 밖에, 나아가 사회의 밖에 두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대당, 즉 노동 대 시민의 구도 자체를 그리고 나아가 연대에 있어서도 노동에 대한 ‘시민적 연대’라는 도식을 해체할 필요가 있다. 대신에 이 사회에서 노동자들 파업이 갖는 사회성을 이해하고, 노동이 시민이 되는 것이 아니라 노동의 시민권을 긍정할 필요가 있다. 그랬을 때, 노동에 대한 연대 역시 노동에 대한 시민적 연대가 아니라 노동에 대한 ‘사회적 연대’ 혹은 노동의 사회적 연대로 불려질 수 있다.

우선 노동이 시민적 자리를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의 사회적 시민권을 긍정하고 노동을 사회의 중심에 위치지우는 게 필요하다.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은 희망버스를 통해서 비로소 시민의 지위를 획득한 것이 아니라, 이 땅의 노동자로 선 것이다. 즉 노동자 계급의 고유한 시민적 권리, 헌법으로 보장된 노동권 혹은 노동의 시민권을 확보하는 것이다. 노동의 시민권은 노동계급에게만 부여되는 특별한 ‘시민적 자유(civil liberty)이다. 이는 이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라는 인정속에서 자본에 대해 심대히 ‘비대칭적인 권력관계’에 있는 노동자들에게 부여하는 특수한 시민적 권리로서, 노조를 결성하고, 노동자와 자본의 교섭권을 인정하며, 최종적으로 노동의 파업권을 긍정하는 것을 핵심으로 한다.

하지만 한국에서 노동의 시민권은 제대로 존중되지 못했다. 민주화 이행후에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기업수준의 단체교섭권이 어느 정도 허용되는 방향으로 진전된 것을 제외하면, 노조 결성에서 자본의 비협조과 탄압, 교섭구조에서 산별 중앙 교섭구조의 제도적 미비는 여전히 문제이다. 그리고 앞서 말한대로 파업권은 친자본적인 국가와 자본의 비타협성, 그리고 공권력과 자본의 사적 폭력에 의해 억압되었을 뿐 아니라, 자본이 가하는 돈의 압박에 의해 무력했다. 물론 서구 민주주의라고 해서 처음부터 노동의 시민권이 확보된 것은 아니다. ‘시민’이라는 말이 구체제인 봉건사회에서 출현한 신흥 부르조아지만을 의미했다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결국 서구에서도 노동자들이 시민이 되는 과정이 필요했다. 역사적으로 보면, 봉건사회의 구체제(앙상레짐)가 붕괴된 이후인 산업자본주의하에서 ‘시민’(부르조아지)만이 전유했던 ‘시민적’ 권리를 노동자에게로 확장하는 과정이 바로 민주주의투쟁이었고 사회주의와의 결합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의 민주주의는, 민주화 이행과정에서부터 이행후의 민주주의까지, 사회적, 실체적 민주주의를 제기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민주주의는 철저히 정치적 민주주의로 한정되고,자유주의적 민주주의로 제약되어있다. 그래서 한국의 경우, 민주화이행이후 노동과 시민의 간극은 서구에서처럼 점차 좁혀지고 해소되기는 커녕 벌어지고 심지어 대립되는 것으로 돼버렸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서 필요한 것은 노동과 시민을 연대시키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의 시민된 권리를, 즉 파업권등의 노동권을 긍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실 이는 파업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와 관련된다, 즉 파업의 사회적 의미를 어떻게 긍정하는가의 정도에 달린 문제이기도 하다. 일부에서는 이와 관련, ‘파업의 사회화’를 주장한다. 하지만 파업의 사회화는 노동자들이 공장뿐 아니라 공장밖의 세계와 걸쳐있으므로 생활세계의 이슈들로, 공장밖으로 손을 뻗어 연대하라는 의미로 곧잘 사용되는 말이다. 사실은 ‘사회적’ 파업, 즉 파업이 갖는 사회적 성격을 긍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노동자의 시민적 권리를 그 고유한 성격 자체로서 긍정하는 것이 아니다.

일단 파업은 각 공장에서 터져나온다. 하지만 그 파업들은 사회적이다. 그 공장의 노동자들은 단지 자신만을 위해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모든 노동을 위한 싸움, 노동자들의 이해를 위한 싸움을 하는, 사회적 파업을 하는 것이다. 결국 파업의 사회성을 긍정하는 것은 각각 터져나오는 파업이, 그 작은 공장들의 파업이, 개별적이고 고립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 의미를 가짐을 인정하고 이해한다는 것이다.

더불어, 노동에 대한 ‘사회적 연대’ 역시, 시민적인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행하는, 아래로 향하는 연대가 아니라 노동하는 자들의 상호연대로, 사회적 연대로 이해하는 것이다. 예컨대 희망버스를 노동에 대한 ‘시민적 연대’라 한다면 여기서 노동은 누구이고 시민은 또 누구인가? 시민의 연대를 얻기 위해서, 노동은 또다시 시민 밖으로 외재화되어야 하는가? 아니 희망버스를 탔던 우리들은 노동을 외재화하기 위해 희망버스를 탔던가? 아니 희망버스를 탔던 사람들은 노동자인가, 시민인가? 희망버스를 탔던 사람들은 스스로 노동하는 사람으로서 ‘노동파괴’의 현실에 대해서 공분했고, 언제든 비정규직 정리해고의 대상일 수 있는 노동하는 모든 사람들을 대신해서 싸우는 그들에게 연대한 것이다. 즉 노동에 대한 시민적 연대가 아니라 노동하는 이들간의 고립적이지 않은, 즉 사회적인 연대의 방식이었다. 상호연대였고 수평적인 연대였다. 그것이 희망버스르 추동하는 힘이었다.

애초에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을 제안할 때 필자의 문제의식은 사회적파업연대기금에 담긴 ‘사회적’인 것의 이중성에 중점이 있었다. 즉 한편으로는 노동 및 파업의 사회적인 성격을 긍정한다는 의미를 안고(사회적 파업), 또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자의 파업에 대한 모든 노동하는 자들의 사회적 연대(사회적 연대)라는 바로 이런 이중의 의미에서 ‘사회적’이라는 말을 붙였다. 그래서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이라는 개념에서 파업연대라는 말만큼 ‘사회적’ 연대 혹은 ‘사회적 파업’이라는 의미도 중첩되어 있다.

4. 노동의 최소한의 사회안전망으로서 사회적파업연대기금

간단히 말하면,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은 희망버스로 시작된 노동의 사회적 연대를 장기적인 문제의식으로 결집하고, 나아가 파업기금이 부재한 채 파업을 시작하면서 돈의 압박에 스러져가는 한국노동자들의 파업을 지원하기위한 하나의 제도적 장치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헌법상에 보장된 노동자의 파업권을 노동의 시민권으로 우리 사회가 공공연히 긍정하자는 운동이기도 하다. 그런 차원에서 나의 노동의 댓가인 “피같은” 돈을,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문제등 노동파괴의 현실에 맞서 싸우는 정당한 파업에 대한 기금으로 조성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사파기금은 무엇보다도 ‘돈으로 하는 연대’다. 즉 파업기금도 없이 싸우는 노동자들이, “돈의 압박에 스러지지 않도록 만드는 사회적 연대”이다. 이 과정을 통해서 사파기금은 노동하는 사람들의 최소한의 사회적 안전망이 될 것이다. 이 기금을 믿고 노동자들이 나서서 맘 편히 파업에 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파업이 그들의 목숨을 걸고 가족들의 생계와 자식의 교육을 모두 중단시킨 채 진행되지 않아도 되는 조건을 확보하는 것이다. 노동자들이 파업의 제단에 자신의 인생과 가족의 생계를 온전히 바치지 않고도 파업하는 세상이 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파기금은 그 누구도 사용할 가능성이 있는, 노동자들의 예비금고이기도 하다. 이 땅의 노동하는 사람들은 그 누구나 정리해고나 희망퇴직, 혹은 비정규직으로의 전환 등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그러니 사파기금은 바로 모든 노동하는 이들의 미래를 위한 저축이기도 한 것이다. 내가 노동하는 동안에 사파기금 조성에 나섬으로써, 이후 나의 파업권을 지킬 수 있는 보루를 미리 확보하는 것이다. 혹은 조금의 돈을 내고 이후 필요시에 큰돈으로 도움을 받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파기금은 우리 사회가 그간 무관심과 냉소속에서 배제했던 노동의 존재를 긍정하는, 노동자의 파업권을 시민권으로 긍정하는 새로운 민주주의의 시금석이 될 것이다. 노동배제적 민주주의, 노동의 사회적 고립에 대해 우리 사회가 ‘강한 부정’을 하면 할수록, 그만큼 노동자의 파업권을 긍정하는 사파기금은 성장할 것이다. 곧 사파기금의 성장사가 한국에서 노동문제의 사회적 의제화 정도를 반영하고, 이 사회의 노동연대의 바로미터가 될 것이다.

실제 기금의 조성에 있어서 사파기금은 큰 몫돈이 아니라 유명인사가 내놓는 금일봉이 아니라 노동하는 자들의 푼돈, 우리가 노동하고 받는, 피같은 노동의 댓가를 십시일반, 혹은 자신의 것 좀 덜 먹고 함께 출연하는 기금을 지향하고 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온라인에서 제안되어 풀뿌리운동으로 진행되어왔다. 지난 7월17일 ‘사회적파업기금’에 대한 최초의 제안도 페이스북을 통해서 던져졌으며, 이후 사파기금은 페이스북을 기반으로 한 켐페인 및 사회운동으로 발전해왔다. 이는 온라인 캠페인이 주로 일반민주주의 의제들을 중심으로, 즉 자유주의적 어젠다 중심으로 구성되고, 노동자들보다 자유주의적 중산층, 대학생들에 의해 주도되어왔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사실 ‘노동’문제에 대한 온라인 캠페인은 드물다. 여기에 대해 새로운 전형을 만든 것이 한진중공업 연대운동이다. 비정규직없는 세상만들기가 주축이 되어 만들었던 희망버스에 김진숙위원과 트위트리안들간의 소통이 매개체가 되었다. 희망버스가 결국 트윗을 중심으로 한 SNS 운동과 결합했다면, 사파기금은 페이스북을 기반으로 노동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하고 노동에 대한 사회적 연대를 파업연대기금으로 결집해왔다.

현재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은, 아직은 일반명사라 할 수 없고, 그자체로 앞서 말한 의미를 포함하는 자기고유성을 갖는 하나의 운동이며 운동체이다. 페북그룹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을 그 첫 근거지로 삼아 이후 트윗 및 자신의 도메인(sapa.org)를 가지며 진화해온 온라인 운동이며, 이제 차차 온-오프를 병행하기 시작한 운동이다. 하지만 사파기금은 온라인을 넘어서, SNS를 하지 않으면서도 기금을 내주는 많은 사람들까지 포괄하는, 말그대로 ‘사회적’인 운동이 되어가고 있다. 지난 7얼22일 첫 입금을 시작으로 현재 연인원 1천여명이 참가했다. 그리고 한진중공업부터 시작해 쌍용자동자, 재능교육노조, 그리고 최장기 장투(장기투쟁)사업장인 코오롱 노동자들에게 기금을 배분하였고, 1월의 장투사업장 순례에 나선 ‘희망뚜벅이’를 위한 방한물품을 제공하였다. 또한 사파기금은 노동의제를 모아서 사회적으로 알리는 역할, 그리고 노동문제를 토론하는 토론의 마당으로서의 기능도 활발하게 하고 있다. 나아가 기금조성외에도 다양한 오프라인 노동연대활동을 하기도 한다. 예컨대 지난 겨울에는 거리노숙 텐트를 하는 수많은 장투사업장 노동자들을 위해 토시를 짜주는 이른바 ‘희망토시’ 캠페인을 벌여, 많은 사람들이 직접 토시를 짜거나, 토시를 위한 실값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연대를 조직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제 사파기금은 ‘시즌 2′를 선언한 상태이다.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이 처음의 시험기를 거쳐 그 필요성을 입증한 마당에 새로이 출발할 때가 됐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최초의 제안서에 있던 표현대로, “희망버스의 문제의식을 이어 노동의 사회적 연대를 장기적으로 펼쳐가기” 위한 두번째 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 표현이 지난 2월말 제안된 일명 1만인 계좌운동, 즉 “1만명, 1만원, 월1억” 기금 조성 캠페인이다. 이 캠페인은 말그대로 1만명이 1만원(이상)의 정기계좌를 열어 월1억의 기금을 조성하자는 것이다. 노동자에 대한 사회적 연대에 1만인이 매달 동참한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 노동연대가 자리잡아간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또한 정기계좌 만들기’ 캠페인을 통해서 부정기적 기금 모금을 상시화함으로써 사파기금의 기금조성을 안정화한다는 의미도 있다. 결국 이런 과정은 쟁의기금없이 싸우면서 노동의 파업권이 형해화되어가는 노동현실에 대한 사회적 치유과정이 될 것이며, 노동과 사회가 함께 조성하는 사회적 파업기금을 제도적 장치로 만드는데 한발 더 나아가는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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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박창수의 죽음과 노동의 좌절

작성: Young-sook Kweon 2012년 5월 7일 월요일 오전 5:38 ·

1991년 5월 6일 오늘은 한진중공업 박창수 노조위원장이 의문사한 날이다.

1991년 5월6일 새벽 4시 45분, 경기도 안양병원 뒷마당에서 한진중공업 박창수 노조위원장(1960년생)이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검찰은 노조활동에 회의를 느낀 박창수위원장이 치료받던 병원에서 투신자살했다고 발표하였다.

하지만, 당시 정황과 그의 구속경위를 보면, 그의 ‘의문사’는 안기부와 연루된 것이라는 의심을 자아내기 충분했다. 이미 우리는 바로 얼마전인 4년전인 87년 1월 박종철의 고문치사 및 그 은폐사건을 겪지 않았는가 말이다. 모두들 박종철의 의문사를 떠올렸다. 우선, 의문점은 왜 안기부 조사를 받던 그가 안양병원에 있는가 말이다. 검찰은 그가 조사도중 다쳐서 치료를 받던 중이라고 했다. 하지만 더욱 묘한 것은, 시신을 보았던 부모님의 증언에 따르면, 투신했다는 그에겐 상처도 없었고 피도 흘리고 있지 않았다. 노동자, 학생들은 이 죽음을 ‘의문사’로 규정하고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안양병원앞으로 몰려들었고 안양병원과 부산 영도 한진중공업앞에선 매일같이 치열한 시위가 벌어졌다.

더구나 그가 구속된 경위는 더욱 이 죽음을 의문사 혹은 살인으로 생각하게 만들었다. 당시 한진중공업은 ‘민주노조’로 전환하였다, 그리고 그를 이끌던 초대 위원장이 박창수이다. 박창수는 부산기계공고를 졸업하고 스물 두 살이던 1981년 8월 한진중공업의 전신인 대한조선공사(전 한진중공업)에 배관공으로 입사하였다. 그리고 1986년 도시락거부투쟁을 주도했다. 50여년 식당도 없이 탈의실과 공장 모퉁이에서 머리카락과 휴지가 섞여 나오는 도시락을 먹어온 노동자들이 “우리는 개밥을 먹을 수 없다”며 사흘 동안 도시락을 던져버렸다. 회사 쪽은 결국 나흘 만에 식당을 세워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한진중공업은 민주노조를 만들었다. 작년 85크레인에 오른 김진숙위원 역시, 당시에 한진중공업 노동자였고, 그리고 해고된 1세대 민주노조 노동자이기도 하다. 박창수와 함께 한 많은 노동조합 베테랑이 아직도 한진중공업 노조의 중심이기도 하다.

그렇게 ‘민주노조’가 결성된 한진중공업은 87년이후 역시 어용노조에서 탈피한 서울지하철과 함께 90년 12월 결성된 ‘대기업연대회의’의 핵심이기도 했다. 당시 전노협(전국노동조합협의회)에도 가입돼있던 이들 두 노조들은 다른 대기업노조들, 즉 대우노조협의회와 현대노조협의회등등으로 전노협에서 멀찍이 떨어져 자기들만의 재벌노조협의회를 구성했던 노조들을 끌어들여 ‘대기업연대회의’를 꾸린 뒤, 이어 전노협을 확대한 명실상부한 ‘제조업 민주노총’을 만들려고 했었다. 만약, 이것이 성사가 된다면, 이는 민주화이행이후 터져나온 ‘노동자대투쟁’의 성과를 가장 명확하게 조직적 결과로 만드는 것이었다. 급진적인 제조업 중앙노총의 건설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전노협을 확대한 제조업 민주노총의 결성은, 당시 노태우정권과 전경련등 자본의 입장에서는 가장 골치아픈 노동 상대자를 대면하게 되는, 최악의 시나리오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안기부가 전면에 나섰다. 안기부는 이미 대기업연대회의의 결성이전에, 끊임없이 한진중공업 노동조합을 파괴하려는 공작을 해 왔다. 그리고 구치소에 있을 때도 전노협과 대기업연대회의를 탈퇴하라며 온갖 회유, 협박을 자행하였다. 사망 전날에도 병원으로 안기부 직원이 면회와서 탈퇴공작은 계속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박창수 열사는 “전노협이 나이고, 내가 곧 전노협인데 어떻게 전노협을 탈퇴할 수 있다는 말이냐”하며 끝까지 저항했다.

결국, 1991년 2월, 경찰의 대대적인 대기업연대회의 침탈이 이뤄졌다. 그즈음 파업에 돌입한 대우조선노조에 대한 지원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수련회를 열고있던 대기업연대회의의 모임에 경찰이 덮쳐 참가 노조간부 전원을 ‘제3자개입금지’ 위반혐의로 연행하였다. 그리고 핵심인물로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어 가장 강도높은 조사를 안기부로부터 받던 중, 박창수 열사는 5월 4일 이마에 상처를 입고 안양병원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그리고 하루전에 안기부 직원과 면담하고, 이틀 뒤에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하지만 그의 죽음이후, 진상규명을 위한 싸움은 험악했다. 노태우 정권은 박창수의 부모를 협박하기도 하고, 회유하기도하였다. 그ㅡ리고 급기야 경찰은 시신을 탈취하려고 안양병원에 백골단과 전경 22개 중대를 투입, 무차별적으로 최루탄을 퍼부으며 영안실 벽을 부수고 시신을 탈취해 갔다. 그리고 일방적으로 부검을 해 버렸다.

박창수의 죽음은 바로 4월말 시위도중 경찰에 숨진 명지대생 강경대의 죽음과 맞물려, 바로 비극적인 1991년 5월투쟁의 시발이 되었다. 의문사한 박창수 위원장 죽음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투쟁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그리고 ‘폭력경찰, 살인정권’ 규탄하는, 한국의 민주화 이행의 ‘제2막’을 열겠다는 5월투쟁이 가열차게 진행되었다..

그리고 그 싸움은 강경대 박창수이후 분신 자살의 행렬을 이루며 13인의 죽음이후에 멈췄다. 당시 국무총리였던 정원식에 대한 달걀투척행위가 몰고온 사회적 반동의 기류 때문이었다..매스컴과 정권의 홍보, 그리고 중산층등 이른바 화이트칼러들의 이반 및 민주화시위에 대한 염증…

6월 29일, 그의 죽음이후 근 60일 만에 박창수위원장의 장례가 치뤄졌다. 그의 부모는 그를 양산 솥발산 공원묘지에 묻었다. 지금도 박창수 열사의 아버님은 전국의 노동시위와 집회 현장을 방문한다. 세월은 가고, 그의 이름과 그가 이루고자 한 ‘노동해방’은 갈수록 요원하지만,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오늘 무엇을 생각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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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박창수 열사의 모습

관련 글 – “20년전, ‘벽 뚫고 들어온 남자들’ 잊을 수가 없다  (오마이뉴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589494

1991년, 박창수 열사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던 안양병원 영안실을 백골단이 벽을 뚫고 들어왔다.

(이 사진을 기억하고 있는 분들, 그때의 역사를 기억하고 있는 분들이 계셨습니다)

: 박창수 열사 시신 사수 투쟁을 하던 그날 밤, 그리고 불타던 바리케이트를 한 번에 꺼버린 소방차, 벽을 부수고 시신을 탈취해가는 백골단의 모습을 보도했던 한겨레 신문 사진이 기억나는 군요…

그 사진을 기억하는 분들이 꽤 많을 겁니다. 저도 기억나는데요.

: 그날!

저는 이석행씨와 기아자동차노조에
밤늦게 있다가, 박위원장 죽었다는 연락을 받고 안양병원으로 급히 달려갔습니다,

병실엔 어머님이 거의 혼절한상태로 중얼거리며 욕을 퍼붓고 있었고 박위원장은 하얀 가운속에 누워 있었습니다,

급히 가운을 들어 보니 박위원장 이었습니다, 여기 저기 혹시나 해서 살펴보니 발 뒤굽치쪽에 퍼렇게 멍같은것이 보였습니다,

응급실에 수상한 사람들이있어 몰아내고
즉시 바리케이터를 치고 병원에 있는 소화기를 모두 모았습니다, 무기가 될만한것이 그것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3일간 대치하다가 결국은 옆방 벽면에 구멍을 내고 시신을 탈취해갔습니다, 그날이 오늘이군요
밤이 서늘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몇 번 만나지 않았지만
늘 말이 없고 과묵했었다는 기억이 납니다,
이토록 목숨바치며 이루고자했던 길이
오늘 만신창이로 환부를 드러내니
정말 아프고 또 아픔니다,

부디 영면하십시요! 박창수동지!

: 백골들이 공중부양하는 그 사진 저도 눈에 선합니다.

: 어이쿠! 벽뚫고 들어와 시신탈취해간 그 사진을 다시보게 되다니. 이거야 원 가슴이 떨려서.

: 그해 봄..최루탄으로 하늘을 뒤덮던…숨이라도 제대로 쉬어보려고 대로 옆골목으로 허우적 허우적 뛰어가는 우리 대오 저 앞쪽에 툭툭 떨어져 앞서가던 지랄탄….ㅋㅋㅋ 그 답답하던 20여년 전 봄 말이지요. ㅠ.ㅠ

: 기억이 생생합니다, 역사의 현장에 함께 있었군요….그 때, 병원에 뚫린 구멍은 메워지긴 커녕 더 커져가는 건 아닌지, 그리고 지금 노동을 탈취해간 세력은 누구일까요. …